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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례역사문화연구회(한국체험교육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샘물
율곡 이이
율곡의 생애(生涯)
율곡의 생애는 크게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제1기인 입지기(立志期 :1세부터 28세까지)는 선생이 시류와 도학(道學)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어머니 사임당과의 사별을 기점으로 마침내 홀로서기를 하고 금강산에서 하산한 후 삶의 큰 뜻을 세운 시기이며,
제2기인 출사기(出仕期 : 29세부터 40세까지)는 호조좌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탁월한 시사의 진단과 처방으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시기이며,
제3기인 은거(隱居)와 후진양성기(後進養成期 : 41세부터 45세까지)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의 집필활동과 사계 김장생 등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시기이며,
제4기인 재출사기(再出仕期 : 46세부터 49세까지)는 다시 정계로 돌아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주는 등 그 동안의 경륜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이다.
율곡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號)는 율곡(栗谷)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 셋째 아들로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에 외가(外家)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
세 살 때부터 말과 글을 배운 율곡은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라고 묻자, "석류 껍질 속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대답하였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청진동)로 올라온 율곡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기본적인 학문을 배우고 나머지는 독학하였다.
여덟 살 때는 본가인 파주에 들렀다가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화석정'이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으며, 열 살 때는 강릉 경포대에 들러 경포호수의 사계절을 표현한 '경포대부'라는 긴 글을 지었는데 그 문학적 재능과 학문의 깊이에 사람들이 놀랐다.
열 세 살 때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시험관들에게 불러나가자 겸손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좋은 평판을 듣게 되었다.
열 여섯 살 때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시묘가 끝난 열 아홉 살에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스무 살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이 때 자신의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스물 두 살 때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음해 봄에 당시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찾아가 궁금한 점들을 묻고 답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며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크게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별시라는 과거시험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는데, 시험답안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이 때부터 스물 아홉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 일컬어졌다.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스물 아홉 살 때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 해의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첫 관직으로 호조좌랑에 임명되고 이후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서른 세 살 때는 사신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른 네 살 때에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서른 아홉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국가적 재난에 대한 대책으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으며, 마흔 살 때에는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였다.
마흔 한 살 때에 정계를 떠나 해주 석담에 내려가 청계당(聽溪堂)을 짓고 생활하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시대에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마흔 여섯에 다시 정계로 돌아와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 대제학으로 승진되었고 또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마흔 일곱 살 때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었으며, 이 해 말에 병조판서의 중책을 맡았다.
마흔 여덟에 병조판서의 직분으로 시국에 대한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으며, 이어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힘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이므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그 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고 스스로 후회하였다고 한다.
마흔 아홉 살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율곡의 성장과정
1. 남다른 총명함
율곡은 천재형의 학자이자 경세가로서 3세에 이미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하고 묻자, 어린 율곡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石榴皮과碎紅珠)" 라고 옛 시귀절을 읊어 대답하였다.
또 일곱 살 때는 이웃에 사는 진복창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교활하고 간악해 보여 붓을 들어 글을 지었는데, 그 능숙하고 의표를 찌르는 표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덟살 때는 고향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가을 풍경의 정취를 아름다운 시로 읊었으며, 열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노장사상 등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21세에는 한성시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는 별시해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기까지 무려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급제한 분)'이라 불렸다.
2. 따뜻한 인간애
율곡은 또한 감정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대개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공부에 뛰어난 어린이는 우쭐대거나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수도 있지만 율곡은 그렇지 않았다. 동네 아이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항상 다정하게 인정을 나눴다.
율곡이 5세 되던 해, 어느 날 큰비가 와서 앞 냇물에 홍수가 졌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넘어져 위태롭게 되자 그것을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웃어대는데 율곡은 기둥을 부둥켜안고 서서 애를 태우다가 그 사람이 위태로움을 모면하게 되자 그제서야 안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3. 지극한 효성
율곡은 효심이 지극해 어릴 적부터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다섯 살 때 어느 날 어머니 사임당이 몹시 아파서 온 집안이 걱정을 하였는데, 집안 사람들 몰래 외조부님 사당 앞에 가 엎드려 어머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 열 한 살 때는 아버지 이원수 공이 병환으로 위독하자 율곡은 어린 나이로 자신의 팔을 찔러 피를 내서 아버지에게 약으로 드리기도 했다. 옛글에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는 피를 마시면 소생한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사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울면서 조상께 기도를 드렸다. 어린 율곡의 이런 정성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아버지의 병환이 곧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16세에 어머니 사임당을 여의게 되자, 무덤옆에 묘막을 짓고 3년동안을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리고 묘소를 돌보았으며, 26세에는 아버지 이원수 공마저 돌아가시자 파주 어머니 묘에 합장한 후 형제가 함께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4. 방황과 홀로서기
율곡은 나이 열 셋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이 날로 성취되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기대에 못지 않게 그의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연보에는 어린 나이에 성공의 첫 관문을 통과하고도 오히려 '학문에 전념하고 과거는 좋게 여기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과거(科擧)와 도학(道學)사이의 갈등)
자신을 알아준 문장가 송인(宋寅)에게 보낸 다음 글은 그의 이러한 갈등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또 제가 성현의 글을 읽은 뒤로 대강 향방을 알고서 성리(性理)의 근원에 마음을 가라앉혀 탐색하고자 했으나 뜻이 약하고 재주도 둔한 데다 세상일이 저해함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생활은 궁핍하여 사람의 뜻을 고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과거공부에 종사한지가 몇 해가 되었습니다.
비록 학문에 전념하더라도 오히려 짐이 무거워 감당하기 어렵고 길이 멀어서 도달하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과거공부까지 하여 두 가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또 문장의 기예에 종사하면 이것 저것 모두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 한가지 방심(放心)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까지 생각하겠습니까? <율곡전서 3, 여송이암>
학문에 뜻을 두고도 방법을 몰라 헤매는 율곡에게 세상은 과거를 목표로 문장을 닦아 세상에 영합하라는 노숙한 충고뿐이었다. 그 흐름에 떠밀려 보낸 몇 년이 그에게는 외적 기대와 내적 고뇌가 뒤섞인 우울의 세월이었다.
그러던 중 조운의 일을 맡은 아버지 이원수공을 따라 남도를 돌아오던 그에게 어머니 사임당의 부음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어머니 사임당을 임종도 못하고 떠나 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율곡의 정신에 끼친 영향은 당대의 문장으로 떨치던 동년배 최립(崔립)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서 노유선생에게 찾아가서 학문을 구하였습니다. 노숙한 선비들이 권면하는 것은 과거하는 공부에 불과하고 구차하게 세상에 부합되는 것을 힘쓸 뿐이었습니다.
어려서 지식이 없어 드디어 그 일에 향해 가서 세속 일에 골몰하고 문장 격식이나 익히기를 5∼6년 동안 하였습니다. 성리에 관한 학문은 다시 강구하는 바가 없고 과거 공부도 익숙하지도 못했습니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제의 몸으로 책을 쥐지도 못하고 다만 옛 사람들의 글로 해학에 가까운 것을 취해서 수시로 열람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고, 그 문장에도 전연 접하지 않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분발해서 가슴속을 돌이켜보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에 가만히 탄식하기를, "사람이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배우고 배우지 않은 데 달려 있고,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않은데 달려 있다.
내가 본래 거친 자질로 또 학행의 자품도 없으며 지난날의 공부는 과거에만 골몰했을 뿐이다. 과거공부에만 골몰하는 것이 어찌 학행의 부지런함만 같겠는가?
장부가 배우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배운다면 마땅히 옛날 성현들의 성덕한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지 어찌 스스로를 한정하여 물러서겠으며, 마지막 한 삼태기를 덜한 자리에서 공이 허물어지도록 그만두겠는가?"
그렇지만 참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스스로 통달하고 스스로 깨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스스을 좇아 배우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습니까? <율곡전서 3, 여최립지>
율곡은 3년(만 2년) 동안 정성을 다해 어머니의 영혼을 섬겼다. 음식 만드는 일, 그릇 씻는 일도 반드시 직접 자기 손으로 했다. 그리고 틈이 있으면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겼다. 그는 이 무렵 새삼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회의에 빠졌다.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깊은 밤 적막한 산골에서 홀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구해 보았지만 도저히 풀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열여덟살이 되던 해 가을 어느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거닐던 율곡은 뚝섬 강건너 봉은사에 들렀다. 승방에 들어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경상 위에 놓여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에 볼 때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쩌면 인생 문제를 풀어 줄 해답이 거기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듬해 열아홉 살 때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 수행을 하였다.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스님이 되었는지 아니면 선비행색으로 절방에서 불교 공부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율곡이 인생의 삶과 죽음에 관해 번민한 나머지 금강산 절로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
율곡은 불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찾지 못한 채 1년 만에 금강산을 나오게 된다.
"내 가슴속에 산수가 있으니 이곳 금강산에 더 머물 필요가 없네"(胸中有山水, 不必於此留) - 등비로봉 -
오히려 유교에 성인이 되는 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연장일 뿐 달리 터득할 기이한 이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산에서 나오는 길로 강릉 오죽헌에 들러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그리고 '자경문(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율곡의 입산수도
율곡의 금강산 입산과 하산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의 일생에 크다란 전환기였다.
한 사상가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이력, 그 중에서 특히 <전환>을 둘러싼 주변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율곡의 입산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율곡문집'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색비지설(塞悲之說)로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불교에서 인생의 고뇌를 연구하며 색비(塞悲: 슬픔을 막음)를 위해서이다.
둘째는 양기설(養氣說)로 요산요수(樂山樂水)를 통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성리학(性理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서모와의 가정불화설 등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1. 색비지설(塞悲之說)
사임당은 율곡에게 있어 어머니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다.
그런 사임당의 뜻하지 않은 돌아가심은 율곡에게 슬픔과 함께 정신적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함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여묘살이를 마친 율곡은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19세 되던 해 3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산사(山寺)를 찾게 된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하되 오로지 내실(內實)에 뜻을 두어 수심양성(收心養性)6)을 근본으로 삼았다.
모부인 상을 당했을 때는 그 망극한 효도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거의 회성(毁性: 슬픔에 잠겨 몸이 쇠약해짐)의 경지까지 이르렀었다.
우연히 석씨서(釋氏書: 불경(佛經))를 보다가 슬픔을 잊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학(禪學)에 물들어 그만 인간의 일을 끊고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마침내 금강산 놀이를 떠났는데 편지로써 모든 친구에게 작별하였다." <연보>
이처럼 사임당의 돌아가심을 계기로 율곡은 '인생이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등의 인생과 사후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불교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양기설(養氣說)
다음으로 양기설(養氣說)에 대해서는 율곡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남긴 글의 내용에 이러한 말이 있다.
"기(氣)란 사람이 다같이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르면 마음에 부림이 되고, 그것을 잘못 기르면 마음이 도리어 기의 부림이 되는 것이다.
이 기가 마음에 부림이 되면 한 몸에 주재하는 것이 있어 성현되는 것도 기약할 수 있지마는, 마음이 기에 부림이 되면 칠정(七情)을 통솔할 수가 없어서 어리석은 미치광이를 면하기 어렵다.
옛 사람 중에 기를 잘 기른 분이 있으니, 맹자(孟子)가 바로 그 분이다. 사람으로서 이치를 궁구하고 천성을 다하려는 데 뜻을 둔 이라면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 산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물이 흐르고 산이 솟은 그 겉모습만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 동정의 본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기를 기르는 데 있어 산과 물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찾겠는가?" <율곡연보>
즉 율곡의 입산동기는 불교에 귀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서 기를 기르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불교에 대한 공부 : 선(禪)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연구 부분을 살펴보면, 율곡은 어릴 적부터 학문하는 자세가 크게 열려 있어서, 불교나 도교와 같은 성리학 이외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성리학의 우주론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고, 성리학의 인성론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기 때문에, 율곡이 자기철학의 대성을 위하여 성리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입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선(禪)은 실질적 체험을 중시하므로 그는 체험을 통해 그 근본에 도달하고자 했을 것이며, 실제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이기론은 불교적 특성을 띄게 된다.
불교와 유교의 만남.
율곡 이전에 이 만남을 의미있게 구현한 사람은 오직 주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주희는 유교적 질서의 부흥이라는 사회윤리적 관심의 절박성으로 인해 불교의 초세간적 인문적 가치를 적극 부정하고 나섰지만, 율곡은 불교와의 만남을 자신의 철학적 이념과 방법 속에 흡수하고 통합하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풍악산의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
내가 풍악(금강산)에 유람할 때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몇리쯤 가니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노승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암자 가운데를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 지은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얼 하시오?”
노승이 웃으며 대답을 아니하였다. 또 묻기를,
“여기서 무엇으로 요기하고 지내시오?”
노승은 소나무를 가르키며,
“저게 내 양식이오.”
하였다. 나는 그 변명을 시험하고자 묻기를,
“공자와 석가 중 누가 더 성인이오?”
노승이 말하기를,
“그대는 노승을 놀리지 마시오.”
내가 말하기를,
“불교는 오랑캐의 교이니 중국에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승이 말하기를,
“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며 문왕은 서이(西夷) 사람이니 그들도 역시 오랑캐란 말이오?”
내가 말하기를,
“불교의 오묘한 것도 우리 유교를 벗어날 것이 없는데 왜 굳이 유교를 버리고 불법을 구하시오?”
노승이 말하기를,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소?”
내가 말하기를,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할 때에 반드시 요순을 들어 말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오? 다만 우리 유교에서는 현실에서 실제의 것을 보고 얻을 뿐이오.”
노승은 수긍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요?”
내가 말하기를,
“그것 또한 눈앞에 전개되는 경계지요.”
라고 하니 노승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또 말하기를,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 속에서 뛰노는 것이 색인가요, 공인가요?”
노승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닌 것이 진리의 본체이니, 어찌 그런 시 구절을 가지고 비길 수가 있겠는가?”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름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벌써 현상경계(現像境界)이겠는데 어떻게 본체라고 하는 것이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유교의 오묘한 곳은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진리도 문자의 경지를 넘는 것은 못되오.”
노승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속된 선비가 아니구려. 나를 위해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뛴다’는 구절을 풀어 시를 지어 주시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자 노승은 그것을 받아 읽은 뒤에 옷소매 속에 집어넣고 몸을 돌이켜 벽을 향하였다.
나 역시 그 골짜기를 나왔으나 어리둥절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 뒤 3일이 지나 다시 가보니,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노승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물고기가 뛰놀고 소리개가 나는 것은
위와 아래위가 같은 자연현상이니,
그것은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로다.
무심히 한번 웃고 이내 몸을 돌아보니,
석양의 숲 속에 홀로 서 있네.
[원시]
魚躍鳶飛上下同 這般非色亦非空
等閒一笑看身世 獨立斜陽萬木中
윗글에서 주목할 점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율곡은 맹자가 성선을 말할 적마다 요순을 들어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의 개심견성(開心見性)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지혜의 마음을 일깨워 모든 망령된 유혹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천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교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여 본성인 이즉선(理卽善)을 그대로 실천하여 깨친다는 의미와 같은데 이러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요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진리의 본체를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면 그 본체를 잃고 경계(境界: 인과응보로 각자에게 주어진 지위나 처지)에 떨어지고 현상에 사로잡혀서 그 본체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강조한다. 하지만 유교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있다고 율곡은 말한다. 새가 날고 고기가 뛰노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자연의 진리이다. 그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이며 또한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본문의 내용은 확실히 유자(儒者)인 율곡과 불자(佛者)인 노승과의 유불이론의 대화이며, 율곡이 말마다 오유(吾儒)라고 자칭하고 있으며, 또 노승은 율곡을 선비라고 호칭하고 있다. 또 율곡을 비속유(非俗儒: 속된 선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 등을 생각할 때 율곡이 외형상으로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 아니며 불교를 연구하는 한 유학자였다고 생각된다.
약 1년간 산중에 머물면서 유명한 선방(禪房)과 이름높은 대사(大師)를 찾아다니며 문답식으로 불도의 진리를 알아보았으나, 마침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의 큰 교리만 못함을 깨닫고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와 성인(聖人)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에 대하여 흔히들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의 진리가 옳지 않은 것을 알고 다시 유가로 돌아와 유가의 성현을 준칙으로 하여 출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제자 사계 김장생이 율곡에게 지난날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머리를 깎았느냐고 묻자, 율곡은 웃으며 대답하되,
"이미 산에 들어가서 외양은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불교에 빠졌다면 외양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간 뒤에도 스스로 자기의 호를 의암(義菴)이라고 지었던 것을 보면 불교에 귀의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말대로 외형은 비록 안 바뀌었을망정 한때 불교의 학설에 심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당시는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로서, 불교를 인륜에 반한 이단이라 하여 불교서적을 읽는 것조차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서 그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하는 때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학자가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출세 길을 스스로 막는 자멸행위나 다름없었으며, 실제로 이 일은 나중에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당시의 사회적 틀 속에서 상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율곡의 이러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입산 수도는 그의 인생의 크다란 전환점이자 성리학을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 그 결과 그의 철학이 독창성과 통합성을 갖게 되었다.
율곡이 당시 뭇 사람들의 의심과 비난 속에서 입산하여, 불교를 연구하고 그 좋고 나쁜 점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철학 정립에 힘을 쏟았던 그의 학문적 개방성과 참된 학문을 위한 용기 있는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깊이 본받아야할 것이라 생각된다.
( 노재웅님의 '율곡선생은 어떤 분인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출사의 길
율곡은 29세 8월에 대과에 장원급제하면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율곡은 남에게 보이는 학문인 과거(科擧)공부를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도학(道學)공부에 비하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제도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으므로, 수기(修己)뿐만 아니라 치인(治人)도 중시했던 율곡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본의 아니게 아홉 번이나 과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벼슬길에 오른 그는 정치 사회에 참여하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이상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31세 5월에 동료들과 더불어 시국의 급선무라 할 '시무삼사(時務三事)'를 임금께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마음을 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둘째 어진 이를 등용하여 조정을 맑게 할 것, 셋째 백성을 편안케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 등이었다.
그 해 겨울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좌랑은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인데 그 당시는 벼슬길이 대단히 흐려져있는 터라, 율곡은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정신으로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고 맑고 공평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임무를 다했다.
33세 가을에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까지 멀고 힘든 길을 다녀오며 견문을 넓혔다.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34세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함)의 명을 받고 '동호문답' 11조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그 요지는 왕도정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책과 포부를 명쾌하게 논술하고 있다.
36세에 율곡은 36세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그 고을의 자치능력을 길러 주고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되어 계속적인 실시는 어려웠다.
39세 정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제도 개혁을 이루어 때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일곱 가지 무실(無實)을 없애고 실사(實事)에 힘쓰자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방책을 말하고 있다.
선조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에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훌륭하다. 논술함이여... 옛 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도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 하였으니,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부임하였다. 중앙의 관직과 달리 관찰사의 지위는 한 지방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관찰사에 부임한 즉시 상소하여 황해도 민폐를 개혁할 것을 청하였다.
첫째가 서쪽 변두리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민병)의 사는 괴로움을 알리고, 둘째는 임금께 올리는 진상이 너무 번거롭고 무거워 폐해가 있음을 알렸다. 부임 후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교화하며 민폐를 개혁하고 군정을 바로잡으니 백성이 좋아하고 탐관오리가 일제히 겁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40세 9월에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선조 임금께 올렸다.
이것은 선조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문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사서육경을 기본으로 하고, 선유(先儒)의 학설과 역대의 사실을 참고로 하여 학문과 정사의 긴요한 요령을 모은 것이다.
선조는 "이 글은 부제학의 말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이니 매우 절묘한 것이라 심히 다스림에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불민한 사람은 시행하기가 어렵겠다"하여 율곡은 몹시 걱정하였다.
이후 선조의 우유부단으로 자신의 뜻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자 율곡은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율곡이 매번 벼슬을 사양하자 어떤 이가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 유쾌할 것이요마는,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붙들 것이오."
하였다. 이에 율곡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 길을 가게 될 것이라. 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오."
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맑은 뜻을 짐작하겠다.
벼슬을 사양하던 율곡은 선조의 계속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마침내 재출사하여 대사간을 맡게 된다.
이때 영의정 박순은 "율곡이 오랜만에 조정으로 돌아오니 나는 기뻐서 잠이 안 온다"라고 하였다.
46세 겨울에 '경연일기(經筵日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율곡이 벼슬길에 오른 이후 조정에 올린 개인적인 의견 중 요점만을 정리하여 후에 법이 될 만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1565년 명종 을축년부터 시작하여 1581년 선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의 일을 손수 해서(楷書)로 기록하여 3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47세 정월에 이조판서에 오르자 오래된 폐해를 개혁하였고 7월에는 '인심도심설'을 저술하고 다시 '학교모범' 16조 및 사목(事目: 공적인 일에 관한 규칙)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쓴 것이다.
9월에 '만언소'를 올려 시폐를 극진히 하였고, 10월에는 원접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명나라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12월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조정에 알렸다.
48세 2월에 '시무 6조계'를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능력있고 어진 이에게 맡길 것, 둘째 군민(軍民)을 기를 것, 셋째 재정(財政)을 풍족히 할 것, 넷째 국방을 든든히 할 것, 다섯째 전마를 준비할 것, 여섯째 교화를 선명히 할 것 등이다.
4월에 다시 상소문을 올려 사회적 폐단을 강하게 진언하고 전에 개혁할 것을 청한 적이 있던 제도 몇 가지를 다시 간청하였다.
그것은 공안(貢案: 공물의 내역을 적은 문서)과 군적(軍籍)을 개정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 관찰사)를 오래 유임시킬 것과 특히 서자손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고 노비들 중에 재주가 있은 사람은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 그 신분을 면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10만 양병설'도 바로 이 즈음에 주장했던 일이다.
율곡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이니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으면 10만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반대의견을 말하면서 아뢰기를 "무사할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혀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 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은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 식견이나 행실이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야 진실로 이것의 시의 적절함을 알지 못한다해도 공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라며,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있었다.
49세에 율곡은 별세하기 10여일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14일 북방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떠나는 서익에게 병조판서의 경험을 전하기 위해 아들과 조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생 우를 앉혀 놓고 자신의 말을 대서하게 하였다.
이것이 '육조방략'이며 율곡의 죽기 전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율곡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꿈속에서 말하듯 거듭하여 되뇌인 것은 오직 나라일 뿐이었다.
이와 같이 과로로 병이 악화되어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뜨니, 율곡의 나이 49세 선조 17년 정월 16일 새벽의 일이었다. 율곡은 손톱을 깎고 목욕을 마치고 조용히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누워 손발을 가누고 모습을 단정히 한 채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한이 그토록 많았던지 사후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몹시 어지럽고 혼란한 국가의 앞날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의 초연한 죽음
1584년 정월(선조17), 49세 되는 해에 율곡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붕의 기와장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마침 이불을 덮어쓰고 앉아 있던 선생이,
"어찌 이다지도 바람이 맹렬한고?"
하니, 옆에 있던 제자 이유경이,
"우연일 뿐이니 물으실 만한 게 못 됩니다."
고 답하였다. 이에 선생은,
"나는 죽고 사는 것에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니, 역시 그저 우연히 물었을 뿐이다."
하였다.
또 병의 증세가 위중하므로 항상 물건에 기대려고 하자 문인이 자신의 몸에 기대기를 청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바가 아니니,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인 14일에는 순무어사(巡撫御史) 서익(徐益)이 임금의 명을 받고 북쪽 변방 백성들의 삶을 둘러보고 위로하기 위해 떠나면서, 먼저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을 찾아와 변방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과 제자들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중이므로 노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만나는 것을 사양하시라"
고 당부하니 선생이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이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다."
고 하면서 일어나 앉아서 여섯 조목의 방략(六條方略)을 불러 아우 우에게 받아쓰도록 하였다.
다 불러주고 나니,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그 이튿날 작고하게 되었다.
선생은 16일 새벽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손톱과 발톱을 자르게 하고 의건(衣巾)을 단정히 한 채, 서울 대사동(현 인사동)에서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대체 무슨 한이 크토록 많았던지 선생은 운명한 후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하였다고 하며, 선생이 운명하기 전날 밤에는 부인 곡산 노씨가 꿈에 흑룡이 침방으로부터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애통해 하였으며 수라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하게 하고,
"어진 재상이 서거하니 내 마음이 극히 아프다"
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또한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되,
"나라를 위해 몸이 여위도록 정성을 다해 애쓴 경이야 무엇이 슬프리오? 큰 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야말로 애통하도다."
라고 비통함을 전했다.
또 각지의 선비들은 모두 친척상을 당한 듯 슬프게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며 애도해 마지않았다.
동향의 친구 우계 성혼은 율곡의 도학에 대하여,
"진리의 본원을 꿰뚫었으며 사물의 본체를 통달한 그 경지는 산과 물의 기상을 얻었으니, 실로 율곡은 다시없는 큰 인물이었다."
고 평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대제학을 지낸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율곡시장(栗谷諡狀)>에 '율곡이 운명한 뒤에 집에는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고, 옷을 빌어다가 염을 하였다. 서울에 집이 없어 처자들이 의지할 데가 없이 옮겨 살며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다. 친우 및 선비들이 쌀고 포목을 내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율곡이 평생을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