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양(瀋陽)은 심주(瀋州)·성경(盛京)·봉천(奉天) 으로 불리며, 만주어(滿洲語)에서는 ‘버드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는 뜻의 묵덴(Mukden)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 묵덴을 한자로 음차한 명칭이 바로 봉천(奉天)이다.
심양은 상고(上古)역사에서 고조선(古朝鮮)고구려(高句麗)의 통치강역이었고, 발해(渤海)때는 심주(瀋州)로 불리었으며 명대(明代)에는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요동 심양위(瀋陽衛)가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바로 고려와 갈등을 벌였던 철령위(鐵嶺衛)의 한 곳이다.
한(漢) 이후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로 이어지는 시기 모두 요동 심양(瀋陽)에 대한 통치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후금(後金)의 임시수도가 되면서 궁궐이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수도(首都)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616년 후금(後金)이 건국되면서 명(明)나라의 심양위(瀋陽衛)는 사라지고 심양(瀋陽)은 후금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후 후금은 초기 수도인 요양(遼陽)에서 3년간 머물다가 심양으로 천도하면서 심양성(瀋陽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청태종(淸太宗)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르면서 공사는 완료되었다.
1634년 4월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으로 개칭하였고 1636년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개칭하게 된다.
1657년 청(淸)조정은 만주어 묵덴의 한자식 이름인 봉천성(奉天省)내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게 된다.
심양(瀋陽)이라는 지명은 혼하(渾河)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의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한 것으로 발해(渤海)가 심주(瀋州)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처음이며, 원(元)나라 당시 고려왕(高麗王)이 겸임으로 봉작(封爵)되었던 심왕위(瀋王衛) 또한 이 지역을 말하고 있음이다.
이곳은 고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京)으로도 추측되며, 고구려 당시에는 개모성(蓋牟城)이 있었고, 고구려 멸망 후 당(唐)나라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고 하며, 발해(渤海)가 흥기한 후 다시 이 지역에 심주(瀋州)를 설치하여 통치해 오면서 현재까기 심양(瀋陽)이란 지명이 이어져 오고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삼학사(三學士)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끌려가 머물렀던 곳도 심양(瀋陽)이고 이후 이곳은 만주족(滿洲族)의 고향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
20세기 초, 장작림(張作霖)-장학량(張學良) 부자로 이어지는 봉천군벌(奉天軍閥)의 근거지가 되었고 1929년 6월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2차북벌이 행해지고 북양정부의 수도 베이징이 위협당하자 장작림은 봉천을 북양정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여 짧게나마 베이찡을 대신한 수도가 되기도 했다.
1931년9월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 북쪽 8km에 위치한 류탸오후(柳條湖) 부근에서 몰래 만테쓰 선로 약1미터를 폭파한 후, 이를 장학량 군대의 소행이라며 군사행동을 일으킨 후, 차례차례 주요 도시를 점령해 나갔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한 것으로 남만주의 심양 즉 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발생한 일들이 되겠다.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기자인 지크프리트 겐테(Sigfried Genthe,1870-1904)는 구한말 인 1901년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한 그의 책에서 심양(瀋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주의 중요한 요지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경(盛京)의 유일한 해안(海岸)관문이 되는 잉커우(뉴좡-牛莊)항의 지리적 입지조건은 상당히 유리하다.
정착지로서 성경(盛京)은 광대하고 관개용수(灌漑用水)가 풍부한 평야와 농사에 적절한 기후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상정(李相定, 1897~1947)선생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1923년 만주(滿洲)로 망명, 북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 항일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회고록에서 심양(瀋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94.7월 淸日戰爭이 발발한 후 11월 일본이 여순과 봉천 등지를 함락, 勝利가 가시화되었다. 봉천은 일명 瀋陽이니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라 한다.
이곳 일대의 평야는 발해(渤海)시대의 심주(瀋州)고지로서 성동(城東)의 福陵은 발해 대조영(大祚榮)씨의 居城을 쌓았던 東牟山(동모산)의 구적(舊蹟)인데, 瀋水의 河名도 그때부터 시작하였다. 또 唐太宗의 東伐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둔 것도 이곳이라 한다. 당조(唐朝)이전은 고구려의 영토였고, 고구려 이전은 挹婁關(읍루관)이라 하였다.
瀋陽이란 이름은 元나라때부터 시작되었고, 明나라에서는 瀋陽 중위를 여기에 두었다. 瀋陽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 滿洲語에서는 버드나무 울타리를 둘렀다는 뜻의 묵덴(Mukden, 한자로는 奉天으로 음차)이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현 심양은 渾河(혼하)의 옛 이름인 瀋水에서 딴 이름이다.
강의 북쪽땅을 陽, 남쪽 땅을 陰이라 하는데, 瀋水의 북쪽에 있으므로 瀋水之陽 즉 심양 곧 선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淸太祖가 帝業을 창시함에 天命 中都를 요양(遼陽)으로부터 이곳에 옮기어 성경(盛京)이라 칭했다. 서쪽으로 明나라를 끌어 당기고 此(차)로는 蒙古를 이웃하고, 東南으로는 우리 조선과 接壤(접양)하였으므로 제도(帝都)로는 심양이 적당한 위치였다.
순치(順治) 초년(1664)에 北京으로 이도(移都)하게 되어서는 이곳에 장군을 두어 유수(留守)케 하고 유경(留京)이라 개칭하고 또 陪都(배도)라 하였다.>
3.
일제는 1931년9월의 만주사변 이후 1932년3월1일 만주국(滿洲國) 성립을 선언하고,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부의溥儀)를 다시 황제로 옹립하는데, 이때 수도인 신경(新京)을 바로 장춘(長春)에 세우게 된다.
역사속의 장춘은 심양(瀋陽)과 매우 밀접한 지역으로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 미국 기자였던 헨리 위그햄(Henry J. whigham)은 그의 방문기에서 장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관청쯔(長春-장춘))는 중화제국 북부에서 가장 번영한 시장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엄밀히 말해 몽골에 속하지만, 사실상 만주의 도시이며, 길림성(吉林省) 순무 휘하의 中國人 官吏가 통치하고 있다. 관청쯔는 대단히 비옥한 지역의 한복판에 있는 곡물시장으로서, 줄곧 쑹화 강에서 베이즈리灣(北直隸灣-渤海灣)으로 가는 교통로의 중심지를 차지해 왔다>
위 글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장춘이 몽골에 속했다는 내용이며, 이는 우리가 남만주의 강역을 고찰하면서 조선(朝鮮)과의 강역구분, 그리고 몽고(蒙古)와의 관계고찰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독재자 박정희(1917-1979)는 일제(日帝)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로부터 금시계와 일본육사 진학의 특전을 받는데, 만주국(滿洲國) 장춘에서 한글로 발행된 만선일보(滿鮮日報) 1942.3.24일자에 박정희가 최우수상을 탄 기록이 나온다.
만주군관학교가 있었고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던 군(軍)작전지역은 당시의 남만주로 현 신강(新彊) 북부지역이 되겠다.
일제의 패망후 서안(西岸-당시 감숙성 서녕지구)으로 박정희를 비롯한 한적(韓籍)장병들이 찾아오는데, 바로 현 신강북부지구에서 온 것이지, 현 반도 북쪽이라면 김일성의 공산세력이 모두 접수했을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문제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위대한 조선독립군 이청천(李靑天,1888-1957)장군의 따님이신 지복영(池復榮,1920-2007)여사는 독립운동 회고록인 <민들레의 비상>에서 장춘(長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33년의 일들이다.
<우리는 하얼빈에 도착하여 한밤중에 장춘행 기차를 탔다. 장춘역에 내리니 만주 산골로만 다니던 내 눈은 그야말로 휘둥그래졌다. 첫째 낮이 무색할 만큼 휘황한 전등 불빛에 놀라고 그리고 그 많은 倭女,倭人들이 나무 게다짝을 딸깍딸깍 끌며 거리낌도 없이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춘에서 사흘 동안을 여관에 숨어서 지냈다. 형부와 숙모를 찾아뵈었는데 숙모님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아가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다. 첫째 땔감(연로)가 없어 걱정이었다. 만주(滿洲)의 그 많은 목재와 풍부한 연탄은 다 어디 가고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쇠똥, 말똥을 주워다가 말려서 땔감을 삼는다고 하였다.>
위 글에서 묘사된 장춘은 현 반도위쪽의 장춘이 아니라, 나무가 없어 땔감을 쓸 수 없는 사막 초원지대를 말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 낼 수 있다. 요동으로 비정된 현 천산(天山)북부의 서북쪽 어디쯤으로 가정할 따름이다.
4.
지그프리트 겐테가 말한 심양(瀋陽)이 남만주의 가장 남쪽에 위치했다는 기록과 이 남쪽에서 심양을 기준으로 동쪽에 산성(山城)을 쌓을 수 있는 큰 산이 있는 곳. 바로 발해(渤海) 대조영(大祚榮)이 요동을 차지한 후 당군(唐軍)을 막아낼 버팀목으로 쌓아올린 역사의 동모산성(東牟山城)은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개모성(蓋牟城)과 연계하여 현 신강성(新疆省) 우루무치의 우측 천산(天山)에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천년의 세월을 보내왔던 것인데, 구한말 조선(朝鮮)의 멸망과 한족(漢族)이 공산이념을 바탕으로 흥기하면서 무서운 역사조작을 통해 조선민족 오천년역사의 강역을 좁고 왜소한 한 반도로 한정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大陸朝鮮史硏究會)는 그 어둠과 오욕의 세월을 뚫고 이제 고조선(古朝鮮)-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고려(高麗)로 이어오며 수천년동안 통치해 왔던 요동벌이라는 천부(天府)의 강역을 버팀목 삼아, 강대하고 웅혼한 역사를 펼쳐왔던 역사의 강역이 현 신강지역 천산(天山)이북지역 요동평야에서의 일들이었음을 고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2023.02.25.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정혜님.항상 건강하세요
잘 짚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하네요.
안 그래도 요즘 나라 꼬라지 보며 한숨만 나오느 터에 그나마 숨 좀 쉬네요. ㅎㅎㅎ...
인내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보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오겠지요..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