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만든 설날 풍경
매년 설날 전날 섣달그믐날이면 집사람과 고향으로 갔다. 집사람은 큰집으로 가서 형수와 차례준비를 하고 나는 사촌들과 만나 막걸리잔 기울이며 격조했던 정울 나누는 게 일상이고 큰 기쁨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그 일상이 깨져버렸다.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이후부터는 종가집인 우리 큰 집 부터 순서대로 차례를 지내던 몇십년 전통이 깨졌다. 각 집별로 지내다 보니 연초에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올 해는 집사람이 어깨통증으로 가지 못했다. 나마저도 몸이 좋지 않아서 그믐날 가지 못하고 초하루 날 아들과 아침 일찍이 내려가 차례만 지내고 오겠다고 연락을 했다.
시계를 맞추어 놓지도 않았는데 새벽 5시에 잠이 깨었다. 아침이면 늘 하던 대로 컴퓨터의 국선도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1시간가량 운동을 했다. 운동을 끝내고 주섬주섬 시골 내려갈 준비를 하는 사이 가락동에 사는 아들이 도착했다. 오늘 적지 않은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서둘러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항상 만원이던 주차장은 많은 차가 고향에 내려가서인지 설렁 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차가 소복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걸 보니 눈이 예상보다 많이 온 것 같다.
아침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재건축 추진이 진행되면서 부터 단지 내 청소가 부실하다 했더니 오늘은 눈이 많이 왔는데도 제설작업이 하는 둥 마는 둥 이다. 아들과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면서 눈 걱정을 하며 시골길을 재촉 했다. 연휴가 삼일이나 되어서 지방 갈 차가 대부분 떠나서인가 항상 차량으로 붐비는 영동대로가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차량은 오히려 양재대로 들어서니 차츰 많아진다. 다른 집들도 우리처럼 아침에 떠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이지 못하게 하다 보니 가능한 모임을 자제하고 간략하게 차례 지내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 가늠이 된다. 시골에 가까워지면서 많아지는 것은 차만이 아니고 창밖 산하를 하얗게 가득 덮은 서설도 시골로 갈수록 두터워 보였다.
최근 온난화 현상이후 이렇게 하얗게 변한 산하를 보는 게 처음인 것 같다. 허구한 날 제설작업으로 진절머리 났던 전방에서의 추억과, 천지를 분간 할 수 없는 눈보라와 2-3m의 눈은 눈도 아닌 사할린에서의 눈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귀국 후 얼마동안 눈 오는게 반갑지 않았는데 눈 없는 겨울이 20여년 되어서인지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진다.
오랜 만에 아들과 단둘이 드라이브 하는 것 같아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했다.
집안 이야기, 내 건강 이야기, 자질 구례한 당부 이야기. 그러는 사이 차는 비봉에 들어섰고 우리는 설날 선물을 사기위해 하나로 마트로 갔다. 일년 365일 24시간 영업으로 알고 간 시골 마트는 문을 닫았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없어 근처 24시간 마트로 갔다. 문이 열리기는 하였는데 물건들이 영 시원찮다. 할 수 없이 이웃집용으로만 와인과 보트카를 사고 큰집 형수한테는 현금으로 드리려고 봉투를 준비했다.
지방도로는 물론 좁은 1차선 시골길도 염화칼슘을 뿌려 훤하다. 그런데 굴다리를 지나 작은 우리 동네 길로 들어서려니 이게 웬일, 지금 시간이 8시가 다 되었는데 오고 간 흔적이 없다. 차도 사람도 하다못해 짐승 발자국도 없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이면 오고간 사람 발자국과 차바퀴 자국으로 어지러워야 할 길인데. 코로나 때문일까. 얼마 안 남은 사람들마저 도시로 떠난 때문일까. 아무 흔적도 없는 소복이 쌓여 있는 눈길은 마치 하늘이 깔아준 하얀 카페트 같았다. 아들도 전인미답의 하얀 눈 위로 차를 몰고 가는 기분이 이상한지 빙긋 웃으며 연신 밖을 내다본다. 이런 길을 드라이브 한다는 게 처음이고 앞으로 쉽지 않을 테니 좋은 추억이 되겠지. 200여m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고 대나무 소나무가 어울어져 松篁齎(송황재) 길이라 명명한 작은 언덕을 넘어서 멀리 고향집이 보여도 사람의 인기척은 고사하고 그 흔한 개짓는 소리조차 없다.
가는 길에 아래 집에 선물을 전달하려 마당의 소복한 눈을 푹푹 밟고 가 하씨 하씨하고 불러도 대댭이 없다. 성주가 고향이라 이번 설에는 안가고 여기서 명절을 쇤다고 했었는데 그간 마음 변해 고향으로 간 것 같다. 몇 번 더 부르다 기척이 없어 30여m 뒷쪽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갔다. 잔듸 마당도 주위 소나무와 밤나무 꽃나무들과 지붕도 모두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는 게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설경이다. 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사진에 담고 아들을 모델로 몇 장을 더 찍었다.
우리가 도착해서 사람소리를 내자 그때서야 큰집개가 소리 내어 짓는다. 아는 채를 하는건지, 늦게 왔다고 책망하는 건지. 아들과 같이 역시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어서 큰집으로 들어섰다. 나이 50이 되어도 아직 결혼을 못한 큰조카가 문을 열고 맞는다.
들어가 보니 아뿔사, 예상은 했지만 이게 웬일, 덩그라니 형수와 조카 둘이서 차례를 준비하고 있다. 8대 종손 종가이다 보니 언제고 준비하는 사람, 차례 지내러 온 손님으로 항상 법석댔었는데. 우리가 안 왔더라면 조카 혼자 지낼 번했을 것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세월이 변해도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을 가. 아무리 코로나가 창궐해서 못 모인다 해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거기에다 둘째 조카 인규는 애들이 독감이 들고 애 엄마 아빠까지 전염이 되어 약을 복용하고 요양하느라 못 온다고 했다, 의무감으로 차례준비를 하는 형수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어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매년 섣달그믐과 추석전날 저녁에 와서 같이 제수 준비하던 집사람마저 못 오다 보니 참 딱한 설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형수마저 몸이 좋지 않아 50 넘은 늙은 총각이 국자 들고 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마음을 슬프게 한다. 나이 30넘어서 부터 장가보내려 여러 번 중매도 하고 선도 보고 심지어 외국처녀들까지 만나기도 했는데 인연이 안 되어서인가 50이 되어서도 밥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 외국인이라고 반대한 형수한테도 문제가 있고 무엇보다도 본인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때는 남자 나이 들면 장가를 가는 것이 의무처럼 생각되었고 또 가고 싶고, 그래서 무리를 해서 가기도 했는데.... 결혼 권유도 이제는 지쳤다.
상을 차리고 제수를 진설하고 우리들 셋이 제사상 앞에 섰다. 종손인 장조카가 꿇어 앉아 향을 피우고 술을 딸아 하늘과 땅에 고하고 마지막으로 조상님에게 고하고 차례를 마쳤다.
넷이 들러 앉아 떡국을 먹자니 항상 20-30여명이 둘러 앉아 법석대던 그 시절이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는데 꿈 인양 아련하다. 코로나로 각 집별로 나뉘어 지내자고 약속들은 했지만 이런 차례가 계속되는 건 올해로 끝냈으면 좋겠다. 형수와 같이 앉아 조카와 아들로 부터 세배를 받고 일어섰다. 창밖 회색 빛 하늘에서 횐눈이 너풀너풀 내린다. 설날 내리는 눈은 서설이라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늙은 조카 장가 갈거 라는 징조였으면 좋으련만...
첫댓글 이제는 점점 모이기 힘들어 집니다
전과 같이 권위도 없어서 큰소리 친다고
모여지지도 않습니다
언제 옛날과 같이 자발적으로 모일까요?
복 받을 사람들 만 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