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 선 연 구
제4호,2015년 2월
부여의 개국시기와 도읍지 위치에 관한 연구
국문요약
부여국이 기록된 우리나라 사료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북부여와 동부여 개국이 설화로 기록되고 개국지 또한 혼동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사기』및『한서』·『후한서』·『삼국지』등을 참고한 기존 연구에서는 지명위치가 중국왕조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치(移置)된 사실이 배제된 채 연구해온 오류가 있었다. 부여 관련 어원 변화를 고찰한 사서자료에 근거하면, 부여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경 기록인『管子』와『史記』등 내용에 의거하여 연나라와 같이 이미 전국시대에 활동하였던 국가로 추정된다.
『사기』「화식열전」기록에 근거하면 부여국은 연(燕)이 존재했던 갈석과 발해의 북쪽에 있었으며 고대 갈석과 발해 위치를 연구한 결과 산서 동남부와 산동 접경지역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여국은 산서 중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대국가였으며 그 중심은 대군(代郡) 및 광령(廣靈)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제어: 부여, 리지(離支), 산서, 연(燕), 계현(薊縣), 갈석(碣石), 발해(渤海), 거야택(巨野澤), 대군(代郡)
Ⅰ.머리말
부여 관련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은 만주 발해사 연구의 일부분으로 1930년대부터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등에 의해 식민지 조선학계에 소개되었다. 이후 그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은 조선인 연구 집단에 의해서 진행된 결과물들을 기초로 하여 제시된 고조선 <평양 중심설>과 고구려 <만주 기반설>은 현재까지 전통적 사학 연구의 유효한 이론적 프레임으로 유지되고 있다.
부여사 관련 우리나라 사료로서 『삼국유사』기이(紀異) 편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형식으로 구성된 개국 관련 내용과 더불어 고구려 문자명왕에 의해서 멸망하는 5세기까지 상대적으로 허약한 모습의 부여가『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료에는 전체적으로 자세한 역사적 내용이 부족하고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기록이 혼재되어 충분한 연구에 부족한 면이 있다.
중국사료인『논형』·『위서』·『후한서』·『삼국지』·『진서』·『자치통감』등은 우리나라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풍부한 기술 내용으로 인해 연구에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기의 중국기록으로『관자』 및 『사기』등을 포함한 사서에도 북부여와 동부여의 사실 기록 등은 중국사필(史筆)의 특징인 상내외략(詳內外略)한 표기로 인해 그 구분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상기 사료 등을 기초로 하여 부여의 기원 및 위치 연구가 포함된 선행 연구물 등을 검토하면 대부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개국에 영향을 끼쳤던 고대국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부여사는 고조선과 고대 삼국을 연결하는 역사적 중요성에 비하여 위치와 기원과 관련된 적극적 연구시도는 미비한 실정이다. 부여를 연구하는 기존 연구자들은 진개(秦開)의 동정(東征) 기록을 근거로 연(燕)나라의 중심지를 북경유역과 난하(欒河) 지역으로 고정하고 그 동북쪽을 부여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결과는 사서의 지리적 해석과 별도로 사서 내용으로 설명이 미흡한 부분을 고지도 자료 분석을 통한 관련지명의 종합적인 위치 연구가 미흡했던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부여의 다양한 국명을 기록한 사료(史料)에 근거, 한·중 사료에서 그 활동기록을 분석하고 그 기원을 재검토하고 부여가 활동했던 현토지에 대한 위치 추정을 위해 고지도 등을 사용하여 부여국의 활동시기와 그 위치를 새롭게 고찰하려고 한다.
II. 선행 연구의 문제점
부여는 한국의 고대사중 고조선과 후대 고구려 강역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허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나라이다. 1930년대부터 일본학계에서 발해사 연구를 위해 시도된 만주지역의 고고학 발굴자료 및 사료들을 기반으로 별도로 연구된 결과가 그대로 우리나라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현재까지 그 연구결과가 이어져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일례로 대부분의 연구물에서 부족한 사서적 근거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지 않은 부여와 동부여의 활동시기를 기원전 2세기에서 4세기로 규정하고 위치로는 길림성 모아산(帽兒山) 발굴 결과를 들어 기존 통설대로 만주일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자는 부여가 등장하는 중국 사료인『사기』「화식열전」 및 『한서』·『후한서』·『삼국지』등을 참고하면서 부여의 기원과 위치를 추정하는데 선행연구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만주일대에 부여가 존재했었다면 그 남쪽인 한반도 북부에 연나라 중심지가 있어야 하는 지리적 오류가 생기게 된다. 즉, 관련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지명 등이 각 시대별로 당대의 사관(史官)들이 기록한 내용이 그대로 현재까지 전수되었다는 전제하에 연구를 했다는 점이다.
즉, 연대순으로 명멸한 중국왕조 소속 사관들이 당대(當代)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인용했던 지명 등이 후대 사관에 의해서 그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개작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대의 기록 내용들을 그대로 믿고자 했던 의식이 강했던 데에서 연유했다고 본다.
부여국의 위치가 최초로 기록된 『사기』「화식열전」에는 부여가 연나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燕)나라는 갈석(碣石)과 발해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사에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중심 영역을 가늠할 핵심 단어로 갈석(碣石)과 패수(浿水) 그리고 발해(渤海)에 대한 위치를 증명해내는 것이 중요한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고대 국가들의 강역문제를 풀어내는데 필요한 자료로『사기』「조선열전」및『한서』등 후대 사서 등에 등장하는 단어‘패수’와‘발해’그리고‘갈석’은 이후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기록 등에 지속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패수 이외에 한국고대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핵심지명인 ‘갈석’의 위치 추정을 위하여 새로운 사서의 해석과 연구방법의 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 새로운 거리계산 방법을 적용하여『후한서』·『수서』 및 『신당서』에 기록된 고대지명의 위치를 새롭게 제시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료를 기반으로 이미 연구된 부여의 활동시기와 위치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지도 및 군사지도, 중국 연구자료 등을 이용하여 선행 연구결과와 비교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하략)
全文 필요하신 분은 댓글주시길...
첫댓글 학회지 기고 축하드립니다.
저도 논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운영자님 저도 부탁드립니다....
메일 주소 올리세요.^^
shinejc@hanmail.net
@단구리 잘 받았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cpacsl@naver.com 입니다.
학회 기고 축하드려요....
메일 올리세요 보내드릴께..
@심제 cheonjihwa@00bokji.org
저도 부여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연구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좋은 자료 부탁드립니다.
anda153@hanmail.net
보내드렸습니다.
@심제 감사합니다.
잘 읽고,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