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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노동운동
1. 사회경제적 상황
1) 권력위기 타개 위한 독재체제 강화 (삼선개헌, 유신체제)
2) 외자의존 (차관 및 직접투자)·자본위주 고도성장 및 중화학 공업화, 수출제일주의 강행
3) 자본특혜와 노동조합 탄압 강화 (8·3조치, 금융 재정특혜, 국가보위법)
4) 농촌의 피폐화와 노사협조주의의 강제-공장새마을운동
5) 유신반대 민주화투쟁의 격화와 극심한 탄압→ YH노동자 농성, 부마항쟁 거쳐 10·26 사태로 몰락
2. 노동자의 생활 상태
1) 임금노동자의 증가 (1970년 3,786천명, 1979년 6,519천명)
2) 통화증발, 부동산 투기 등에 의한 물가 폭동
3)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 빈발의 일반화
4) 인권탄압의 일상화
3. 노동운동의 특징
1) 조직노동자의 급증 (70년 47만, 79년 110만)
2) 극한투쟁의 빈발 : 전태일 분신(70년), 한영섬유 김진수 피살(71년), 한국회관 프로판가스 위협(71년), 세종호텔, 아세아자동차 부산 조일청강사, 대구 정세달 자살 등
3) 자연발생적 투쟁의 격화 : 광주단지주민투쟁(70. 8), KAL빌딩 방화(70. 9), 현대조선 폭동(74. 9), 삼립식품 파업(74. 6)
4) 노동투쟁의 지속적 전개(75년 133건, 76년 110건, 77년 96건, 78건 102건, 79년 105건)
5) 지식인 노동운동의 대두 (언론노조 출현, 노동문제연구, 크리스챤 아카데미, 노동야학 전개)
6) 종교계의 노동운동 참여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7) 민주노조 등장 (원풍모방, 청계피복, 반도상사,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터, YH무역 등)
8) 연대투쟁의 출현 (79년 민종진 가스질식사건 항의 시위)
9) 한국노총의 투항과 실리주의 노선
4. 주요 투쟁 사례
1) 한국화이자 노조 결성투쟁 (70년)
2) 한국모방노조 민주화 투쟁 (72년)
3) 반도상사노조 결성투쟁 (74년)
4) 청계피복노조 수호 투쟁 (74-77년)
5) 종근당제약노조 결성투쟁 (75년)
6) 동일방직노조 수호투쟁 (76-78년)
7) 아리아악기 점거사건 (77년)
8) 풍천화섬 시위투쟁 (77년)
9) 미풍노조 결성투쟁 (77년)
10) 현대건설 사우디투쟁 (77년)
11) 민종진 질식사 항의 시위 (77년)
12) 인선사 유령노조 반대투쟁 (78년)
13) 기독교방송국 점거 (78년)
14) 부활절 예배 점거사건 (78년)
15) YH노조 신민당사 농성투쟁 (79년)
간략한 한국노동운동사-70년대 노동운동
1. 70년대 노동운동
60년대 저임금을 밑바탕으로 한 정부의 경제성장정책과 기업주들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탄압과 탐욕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던 노동운동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70년대 노동운동은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작업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정부와 노동단체,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로 하나도 실현되지 않자,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70년 11월 13일 작업장 부근에서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태일의 죽음은 결코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억압과 무관심, 어용적인 노조간부의 무사안일성의 죽음이자 70년대 노동운동의 흐름을 암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이 분신자살은 조직적인 집단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 입장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인 투쟁이라고 볼 수 없지만, 비인간적인 저임금의 경제정책과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줌으로써 노동운동의 발전에 많은 자극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전태일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투쟁형태가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이 노동운동의 발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70년대 노동운동의 객관적인 조건
기아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든 우리나라의 70년대 경제는 정부와 외국자본에 의한 수출중심의 공업화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마침 투자를 노리고 있던 외국자본과 베트남전쟁, 중동의 건설 붐이라는 우연적인 기회를 이용하여 숫자상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국민경제는 점차 외국에 종속되어 갔고 모든 산업시설은 수출에 알맞게 건설되어 세계경제가 조금이라도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통계로 살펴보면 72년의 경우 △수출; 16억불 △수입; 25억불에 비해 △외국빚; 35억불, △72년 외국빚 상환; 4억9백만 불로 나타났지만, 79년대에는 △수출; 151억불, △수입; 203억불에 비해 △외국빚; 205억불 △79년 외국빚 상환; 26억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자본과 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는 외국에 종속되는 경제를 낳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선 수출하는 기업체만 정부의 금융지원, 면세혜택을 받아 독점대기업으로 성장하게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메우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을 희생하게 하여 재벌을 키우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빌려 온 차관을 분배받은 많은 기업체들은 이것을 생산에 투자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동산투기, 사채놀이까지 벌였는데 70년대 초 세계적인 불황으로 이들 기업체들이 도산하자 정부는 72년 「8.3사채동결조치」를 통해 이들 부실기업을 구원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구조 때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심하게 피해를 받았던 쪽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즉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외국과 경쟁하여 상품을 팔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고 외국보다 싼 값에 팔면서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은 만큼 더 이득을 보아 온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자의 저임금을 강요하기 위해서 정부는 노동자들의 생활필수품인 농민들의 농산물 가격도 항상 생산비마저 못 건지도록 묶어두어, 많은 농민들은 도시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남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출재벌업체들은 수출목표량을 채우기 위해서 국내 판매 가격보다 훨씬 싼 값으로 상품을 수출하고 국내의 판매가격은 다시 독점체제를 이용하여 훨씬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국내물가를 치솟게 하면서 국민들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푼돈까지도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정책과 자본가들의 탐욕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태일 분신자살로부터 시작하여 70년대의 노동운동은 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폭발과 함께 71년 대통령선거에도 위기를 느낀 공화당정권은 결국 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72년에는 유신헌법으로써 군사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모든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노동운동에 대하서는 70년대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여 외국자본의 진출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자본기업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쟁의하는 기본권리를 제한했으며, 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노동 3권 가운데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3년에는 다시 노동법을 개악하여 ①노사협의회를 노동조합의 기능과 분리시켜 노사협조주의를 유도했고 ②산업별 노조체제를 부정하고 기업별 단위로 전환시키면서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켰고 ③공익사업이 범위를 넓혀 노동3권의 제한을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쟁의조정에 대한 행정관청의 개입을 규정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공화당정권은 노총을 완전히 어용화 시키면서 노동조직을 장악하고 노동운동을 철저히 금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근로자를 내 가족처럼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이라는 구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혀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마저 보장해 주지 않으면서도 노사협조를 강조하고 가족주의적인 노사관계를 추구하여 노동운동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적인 노동정책과 폭력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더 극단적으로 전개되고 학생, 종교인, 지식인까지도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시위와 저항을 하게 되자 정부는 긴급조치 9호와 함께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기본법 등 전쟁 때에나 등장하는 전시입법체제를 갖추고 정권연장을 위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70년 후반기에 시작된 중복되고 너무 많았던 중화학공업의 투기와 연간 10~20%에 이르는 물가상승, 외국빚의 증가, 무역적자의 심화 등으로 지금까지 숫자상으로만 고도성장을 해왔던 경제정책의 모순들이 정치적인 탄압과 함께 전면적으로 드러나면서부터는 점차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급기야는 79년10월 부산, 마산지방에서 대규모 시민봉기가 일어나자 김재규의 저격에 의해 박 정권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 70년대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
한편 이러한 정치, 경제상황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계속 증가하여 70년대에는 480만 명이었는데 77년에는 77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에 비해 임금, 노동시간 등의 노동조건은 갈수록 열악해져 77년의 경우 최저생계비는 13만7천5백72원이었는데 전체 근로자의 78.8%가 근로소득세면세점인 월 4만5천원 미만의 저임금을 받고 있었고, 전체 근로자의 74.9%가 3만원 미만의 저임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낮은 임금마저도 제때에 지불하지 않아 노동자들의 생활을 위협했는데 78년 4월부터 79년 4월까지의 1년간 체불임금은 117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장시간의 노동과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조건 속에서 이처럼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기아임금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은 정치권력과 기업주의 폭력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노동조합주의의 입장을 갖고 노사협조를 추구하고 있던 노총은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정부와 기업주에 대해 투쟁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70년대 전반기는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여 자살과 폭동에 이르는 극단적인 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노총에 대해서도 뚜렷한 한계를 느끼면서 보다 조직적이며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노동자들은 70년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후반기에는 이러한 민주노조들이 성장하면서 박 정권의 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로 우리나라 노동현실에 충격 받은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민주노조운동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도시산업선교회, J.O.C 등의 종교단체는 현장 속에서 민주노조 결성과 투쟁에 직접 참가하고 지원하여 노총이나 산별노조가 아무런 역할도 못해준 것을 보완하여 비록 직장단위노조운동이긴 하지만 많은 성과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다른 계층과 연대관계를 충분하게 갖지 못 한 채 고립되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지식인, 종교단체와의 관계도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자체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지나치게 의존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또한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으로서 가장 중요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70년대에 들어 60년대 보다는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노동운동을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수행할 만큼 이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얽매임에 따라 그에 따른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높아만 지지만 생활에 쫓기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난해야 되는 이유를 사회, 경제, 정치적인 구조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권리보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70년대의 많은 노동쟁의가 기업의 범위를 넘어서서 연대투쟁을 하지 못하고 산별노조조직도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 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자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쟁의의 실천과정 속에서 노동교육에 의한 이론(사상)투쟁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전국적인 조직인 노총이 노조를 통한 교육, 선전활동을 외면했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낮은 권리의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도시산업선교회, J.O.C,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의 종교단체와 일부 지식인의 야학교육에 의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많아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분의 노동자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전체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3) 70년대 노동운동의 흐름
자연발생적인 미조직 노동자 운동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조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위한 전국적인 노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의식이 뛰어난 노동자들은 노조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극단적인 투쟁까지 감행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고귀한 목숨까지 버리면서 저항한 분신자살의 경우와 집단적인 폭력으로 철면피 같은 기업주에 대항한 경우입니다.
특히 70년대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그 최초의 것으로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경제를 지배한 60~70년대의 비인간적인 경제성장정책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사회에 널리 알려 주었으며 둘째, 70년대의 폭발적인 노동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고 셋째, 지식인, 종교단체 등 민주운동세력에게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71년 3월 18일에는 한영섬유주식회사 노동자 김진수가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노동자 정지헌에게 타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기업주의 윤리적인 파탄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에 대한 이러한 비인간적이고도 폭력적인 탄압은 이후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노동자들의 권리가 개선될 기미가 전혀 나타나지 않자 이러한 극단적인 투쟁형태는 계속되어, 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이 노조결성이 좌절되자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등 71년 1월 20일 아세아자동차노조 분회장 지원영의 전기감전위협사건, 71년 2월 한국회관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자살 위협사건, 71년 12월 19일 조일철강사 노동자 김재형의 자살기도사건, 74년 6월 대구 대공신철공업사 노동자 정세달의 자살사건, 78년 7월 11일 농심라면주식회사 임석철의 사망사건 등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귀중한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저항하게 되는 것은, 그 만큼 정부와 기업주들이 완강하게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노동운동조차도 아직 고립분산되어 조직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조직을 강화해야 할 노동운동가의 입장으로서는 올바른 자세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은 결코 몇몇 뛰어난 개인의 희생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가 권리의식을 갖고 집단으로서 조직되고 단결될 때 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집단조직의 힘에 의해서만 현재의 노동문제는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집단적인 폭력운동으로 전개된 현대조선소의 투쟁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울산에 있는 회사의 기능공 2,500여 명이 회사 측에서 지금까지 기능공에 대한 대우를 직급에 따라 월급으로 주던 것을 능률급이라는 명목 아래 기한부 도급제를 도입하려 하자 크게 반발하여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74년 9월 19일 공장 본관에 몰려가 돌을 던지고 사무실로 뛰어들어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며 경비실과 승용차에 불을 질렀고, 본관 앞과 작업장에서 농성을 벌이면서 회사의 처사를 규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곧 이어 경상남도 내 16개 경찰서에서 급파된 600여명의 기동경찰과 대치하게 된 이들은 하청업체에 직원을 넘기는 도급제를 철폐하라!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빈번한 부당해고를 금지하라! 시간당 임금을 100% 인상하라! 상여금을 지급하라! 노동조합 결성을 보장하라! 임시적인 공원승격을 보장하라! 등의 13개 요구조건을 제시했지만, 김영주 부사장과 뒤늦게 내려 온 정주영 회장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노동자들의 폭력시위는 격화되어 현대조선소의 넓은 부지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동경찰과도 몇 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에 진압되어, 경찰은 노동자 663명을 연행한 다음 21명을 구속 시켰습니다.
이러한 현대조선소 기능공들의 폭동은 미조직노동자들의 불만이 일시에 폭발된 것으로서 그 규모와 격렬함에 있어서는 7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방식은 희생에 비해 얻어낸 것이 적은 소모전으로 끝나버려 비조직적인 자연발생적 폭동이 갖는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현대조선소의 노동자들이 먼저 합법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노조가 조직된 다음에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파업투쟁 등을 통해 기업주로부터 하나씩 획득해가면서 더욱 더 조직기반을 넓혀나갔더라면 오히려 훨씬 효과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체불임금의 지불을 요구하며 잡단폭력을 행사한 KAL빌딩 방화사건, 도시빈민층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폭발한 71년 8월 광주단지사건, 인천시 부평동사건 등은 노동자들의 억압받는 상태와 함께 도시빈민의 저항을 드러내어 앞으로의 노동운동은 실업자와도 전체적인 계급적인 연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②민주노조운동
노동운동에 있어서 노동조합이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서 비로소 가장 기초적인 단결을 이룰 수 있고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기업주와 교섭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의 교육, 선전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한 가장 초보적인 조직이며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진정한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 수가 많지 않습니다. 75년의 경우 전체 취업근로자의 15.4%, 78년의 경우 16.8%만이 노총 산하의 노조로 조직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지 않은 조직도 대부분은 노동자를 위해 적극 활동하는 노조가 아니라 기업주를 위해 노사 협조를 외쳐대는 어용노조이며, 유일한 전국적 조직인 노총마저도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이는 어용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권력과 자본가들의 조직적인 탄압에서 비롯된 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민주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자를 위해 적극적인 투쟁을 수행해 온 것입니다. 이에 비해 노총은 노동조합주의의 입장을 가진 채,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은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서로 대립하는 것인 데도, 자본가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노동조합의 투쟁을 수행한다고 선언하여 실제로는 노사협조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총의 조직은 조합 내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조합원의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를 반영하기는커녕 항상 정치권력에 굴복하고 협조하면서 실제로는 민주노조운동마저 파괴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는 74년 배상호 위원장이 행한 연설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민주노동운동 단체들을 “전평을 타도한 그 기개로써 단호히 분쇄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진정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민주노조운동이 70년대 전반기에 점차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각성된 노동자와 도시산업선교회, J.O.C 등의 종교단체, 소수의 학생운동출신 지식인들이 현장 속에서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싸워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노조가 결성될 때도 정치권력과 자본가로부터 부당한 탄압을 많이 받았지만 특히 70년대 후반기에 들면서부터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노동자들은 처절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계피복노조의 결성과 투쟁과정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이 발생한 지 2주일 후인 70년 11월 27일 결성되었습니다. 결성 후에도 경찰은 “노동조건 개선 위해 노동조합 가입하자”라는 플래카드를 철거하도록 요구하는 등 노조활동에 개입을 하였습니다. 이에 분격한 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노조간부 등 12명은 12월 21일 밤 ‘허수아비 근로기준법’이라고 쓴 혈서를 노조 사무실 벽에 붙이고 몸에 석유를 끼얹은 채 집단 자살하겠다고 경찰에 대해 저항하다가 경찰의 습격으로 모두 연행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청계피복노조는 끈질기게 노조활동을 벌여 74년 2월에는 조합원 200여 명이 7시간에 걸쳐 투쟁한 결과 기업주들이 폐쇄했던 노동교실을 다시 노동자들에게 개방하는 데 성공했고 75년 12월에는 40여 명이 노동청으로 몰려가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여 1일 근로시간을 12시간으로 줄이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업주들이 계속 근로시간을 안 지키고 노동조합 간부에게까지 폭행을 가하자 76년 8월에는 ①퇴직금제도 실행 ②부당노동행위 철폐 ③노조 간부를 폭행한 기업인의 처벌 ④근로기준법 이행 및 임금인상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77년 7월 10일 공장폐수의 유독가스로 사망한 노동자 민종진의 장례식에 참가한 청계피복노조원 및 다른 노동자들이 장례식이 끝난 뒤 노동청에 몰려가 항의를 하다가 경찰로부터 폭력을 당하여 몇 명은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70년대 후반기에 들어 점점 노조탄압을 노골적으로 시작하여 77년 7월 22일에는 이소선 여사의 집을 급습하여 목욕을 하고 있던 이소선 여사를 질질 끌어 연행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된 장 기표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다가 검사의 엉터리 발언이 있자 여기에 대해 항의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구속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기동경찰 수백 명이 포위한 상태에서 노동교실을 봉쇄해 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77년 9월 9일 이소산 여사의 석방과 노동교실의 반환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기동경찰이 쳐들어와 무자비하게 노동자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민종렬이 창문 위로 올라가서 “경찰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가 뛰어내려 죽겠다”고 외쳤지만 경찰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그대로 뛰어내려 척추를 크게 다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도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쳤지만 경찰이 물러나지 않자 일부는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과 배를 그어 온몸이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경찰을 향해 “들어오면 다 같이 타 죽자”고 불을 질러 온방에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자 그때서야 당황한 경찰들은 모두 물러갔다가 소방호스로 불을 껐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모두 창문으로 몰려가 “어머니(이소선)를 모셔와라!”라고 소리치자 무자비한 탄압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경찰은 거짓약속을 한 뒤 자진해산하는 노동자들을 모두 연행하여 무수한 고문을 가한 뒤 5명을 구속하고, 9명은 즉결심판에 넘기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처럼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으로서 무자비한 경찰의 탄압에 맞서 끈질기게 결사적으로 싸운 것입니다. 이것은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을 통한 노동교육과 치열한 투쟁 속에서의 헌신적인 실천에 의해 각성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인 것입니다. 이 청계피복노조는 81년 1월 정치적인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지만, 다시 84년 4월에 조합을 결성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화이자 노동자들의 노조결성투쟁
한국화이자는 미국자본이 50% 투자한 외국인 투자기업체인데 70년 1월 26일 화학노조의 지원을 받아 노조를 결성하였으며 서울시로부터 노조설립신고증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동청은 이를 무효라고 하면서 외국인 투자기업체에 관한 법률의 시행령이 제정될 때까지 노조결성을 보류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 틈을 타 회사 측은 노조지부장을 해고하면서 노조를 탄압하자 노동자들은 농성투쟁으로 맞서 싸워 결국 노조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한국화이자 노조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정 이후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최초로 결성된 것이고, 아직 미조직 분야이던 제약업계에서 처음으로 노조결성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외국인 투자기업은 물론 종근당, 유한양행, 국제약품으로 이어지는 70년대 제약업계 노동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한 미 대사관 경비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쟁의
70년대 12월 26일 외기노조 서울분회는 미대사관분회 경비원 임금의 50% 인상, 감원반대, 차별대우 중지, 취업중지 철회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미국사절단 후생회를 상대로 쟁의를 제기했습니다. 이 쟁의제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정당하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미국 사절단측은 대사관의 치외법권을 이유로 한국노동법을 적용할 수 없다면서 노동조합을 계속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농성을 하면서 계속 요구조건을 내세웠지만 미국사절단은 오히려 감원한다는 핑계로 경비원 92명 전원을 집단 해고하면서 교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미국사절단의 조치에 대해 해고 경비원 전원은 4일간 철야 단식농성을 했으나 끝내 미국사절단의 무시와 노동단체의 영향력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국모방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
한국모방노조는 63년 9월에 결성되어 7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회사 측과 가까워져 어용노조로서 활동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조건은 점점 나빠지게 되었는데 71년 말경에는 회사 측이 퇴사한 근로자에게 퇴직금마저 지불하지 않자 이들은 72년 4월 퇴직금받기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회사를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도 어용노조가 방관함에 따라 별다른 성과가 없자 노동자들은 지부장을 지동진으로 바꾸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회사 측이 지동진을 해고하려 하자 노동자들은 7월 8일 한국모방노조정상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섬유노조에 대의원대회의 소집을 신청했습니다. 그러자 회사 측은 “두 사람 이상 모이지 말라”고 감시를 하면서 지동진에게 노량진 공장으로 전출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6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운동장에 모여 지 동진의 노량진 공장전출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회사의 해산요구에도 불구하고 1,000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밤늦도록 도저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밤 9시경 회사는 할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지동진은 회사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8월 17일 노조대의원대회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는데, 회사 측은 그 다음날부터 열성 노조간부와 조합원들을 무더기 징계하여 22일에는 해고 14명, 부서이동 25명, 직위해제 2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특근거부로 맞서 싸웠는데 회사 측은 지부장 등을 구타하고서 아예 무기휴업을 공고하였고, 경찰은 노동자 2명을 연행해 간 것입니다. 사태가 이와 같이 발전하자 6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를 뛰쳐나와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양측을 중재하여 조합원에 대해서는 보복조치를 하지 않고 부서 이동자는 전원 원부서로 환원한다는 합의를 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 다음날 노동자들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혐의로 고발했고, 이 고발에 따라 경찰은 지부장 등 노조간부 14명을 연행하여 그 중 2명을 구속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모방 사태가 언론을 통해 여론화되자 9월 6일에는 회사 측과 노조간에 노조의 자주적인 활동보장, 단체협약의 체결 등을 내용으로 한 협정서가 체결되었고, 경찰은 9월 15일 구속된 노동자들을 석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체협약의 교섭과정에서 회사 측과 노조간에 임금인상률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었는데 조합원들이 태업으로 실력행사를 하였습니다. 이에 회사 측은 노조 측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들어줌으로써 마침내 회사와 노조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모방(뒤의 원풍모방)의 노동쟁의는 조합원간의 굳은 단결력으로써 그 당시 일반적이었던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킨다는 단계를 잘 선택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반도상사의 노조결성과 투쟁과정
반도상사의 노동자들은 다른 공장에 비해 형편없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천장에서 비가 새고 먼지가 많아 고통스러운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원 아래 점차 권리의식을 갖게 되어 비록 노조는 없지만 파업을 통해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이에 따라 74년 2월 26일 단결된 노동자들은 출근과 함께 수제실로 모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①임금의 60%인상 ②폭행사원 처벌 ③강제 잔업 철폐 등의 6개항에 이르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영하 13도의 추위 속에서 14시간 계속된 농성을 통해 결국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조결성 등을 회사로부터 약속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때부터 노조결성 방해 공작을 시작하여 우선 남자노동자를 여자노동자로부터 분열시키고 그들을 매수하여 파업주동자와 별도로 노조결성준비를 서두르도록 시킨 것입니다. 물론 일부 민주의식이 뚜렷한 여성노동자들은 이에 대비하여 노조결성준비를 하고 조직을 넓혀나갔습니다. 그러나 74년 3월 5일 회사에서 전국섬유노조 쟁의부장의 사회로 노동조합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는데 회의진행 중에 한 여성노동자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사 측의 매수공작을 폭로하자 대회장은 노동자들의 분노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따라 대회장은 즉시 농성장으로 바뀌었고 이들 노동자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단식농성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러자 기동경찰과 회사의 사원, 경비원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지쳐 있는 여공들을 난타하면서 강제해산시켰고, 농성을 주도한 한순임은 수사당국에 연행되어 도시산업선교회와의 관련 여부를 조사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연행된 주동자들은 다시 풀려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노조결성대회 개최를 전국 섬유노조에 신청해도 회사의 조종에 의해 계속 연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사 측에서 다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15일 열린 노조결성대회에서는 한순임이 많은 지지를 받으면서 무사히 지부장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반도상사의 노조결성투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도시산업선교회의 도움 아래 나름대로 노동교육을 받았으며 이에 힘입어 상당히 계획성 있게 조직적으로 쟁의를 수행해 갔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전국 섬유노조는 이미 회사와 정부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노동자들의 노조를 회사 입장에 따르는 어용적인 노조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쟁의를 통해 정부는 도시산업선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단체의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풍천화섬 노조결성에 대한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와 조합원들의 시위
풍천화섬의 노동자들은 이미 노조를 결성했으나 회사 측은 결성대회의 참석자를 집단 해고시키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76년 9월 9일 추석인데도 휴가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기숙사 베란다에 모여 임금인상, 기숙사 외출의 자유보장, 공휴일 근무제 폐지, 부서이동자의 복귀, 노조결성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마침 취재 나온 중앙일보사의 차가 나가면서 회사정문이 열리자 이 틈을 타서 일제히 밖으로 몰려나가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이들 여성노동자 50명은 성수동의 공장에서 약 1.5km떨어진 한양대학교 부근의 다리까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라고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데모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풍천화섬 노동자들의 가두데모는 공장노동자들로서는 처음이었고 당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도로 교통법,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기에 발생했기 때문에 특히 정부에 많은 충격을 준 쟁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직적이긴 했지만 아직 일반노동자의 역량이 고르게 발전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지속적인 싸움은 할 수 없었습니다.
●똥물을 사용한 노조탄압과 알몸으로 저항한 동일방직 노동자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는 똥물을 끼얹는 악랄한 노조탄압에 알몸으로 맞서 싸워 70년대 노동운동에서 가장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76년 7월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오던 동일방직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회사 측은 남성노동자를 매수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회사에 매수된 고두영 일파는 7월 23일 노조간부들을 경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고 나머지 여공들은 기숙사문을 못질하여 가두어 둔 채, 회사의 방침을 잘 따르는 대의원 24명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고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게 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여성노동자 200여 명은 기숙사 문을 부수고 노조사무실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농성 3일째인 25일에는 기동경찰이 농성 중인 여공 400명을 포위하고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경고하자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속내의 차림으로 노총가를 합창하며 저항했습니다. 이들은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설마 반나체의 여자 몸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경찰은 ‘돌격’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찰봉으로 여성노동자를 후려갈기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연행해 갔습니다. 어떤 여성은 죽어도 조합을 지키겠다며 속내의까지 벗고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경찰은 나체 그대로 차에 실었습니다. 4, 5명은 아예 경찰차의 바퀴에 드러누워 “이 차 못 간다!”고 저항하기도 했지만 모두 몽둥이에 얻어맞고 머리채를 질질 끌리면서 경찰에 잡혀간 것입니다. 이 사태로 72명이 연행되고, 40여명이 충격으로 졸도했으며, 14명은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고 어떤 여공은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77년 4월 4일 수습대의원대회에서 노조 총무부장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뽑았습니다.
이어 동일방직 노조집행부는 1978년 2월 21일 새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공고를 붙였는데, 2월 20일 남자공원 10여 명이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쳐 투표함을 부수고 노조 간부를 폭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노조간부들은 노조사무실에서 철야하며 경계하고 있던 중 21일 새벽 5시 40분경 회사 측 조종을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던 것입니다. 회사 측이 지지하는 지부장후보 박복례는 똥걸레를 가진 남자에게 “저년에게 먹여라”면서 지시를 했고, 남자들을 여자들의 입과 젖가슴에까지 똥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항의하는 오청자에게는 똥물 양동이를 머리 위로 뒤집어씌우기까지 한 것입니다. 근처에 서 있던 경찰에게 여공들이 “경찰관 아저씨 도와주세요”라고 구원을 요청하자 한 경찰관은 “야 이 쌍년아 입 닥쳐, 이따가 말릴 거야!”라고 욕설만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약 1시간 뒤에 도착한 섬유노조의 조직행동대는 노조를 돕기는커녕 노조 사무실을 검거하고 오히려 대회를 방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똥물로 짓밟힌 여공들은 그래도 회사일은 하기로 했는데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총각 지부장과 부지부장 2명,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를 들어 제명한 것입니다. 그 뒤 여공들은 그들의 사정을 교회에 호소하는 한편 명동성당과 인천답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회사 측은 여공들이 무단결근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예고 예외 인정신청’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이에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신청을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4월 1일자로 124명에 대한 해고통보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뒤질세라 전국섬유노동본부에서는 4월 10일 이들 124명의 해고자 명단을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공문을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조차 막아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인 것입니다.
동일방직 노동자의 투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노조탄압이 철저하게 정치권력과 한국노총, 기업주 간의 결탁 아래 조직적․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적인 노조파괴공작에 대해서 동일방직노조처럼 끈질기고 치열하게 맞서 싸운 예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역시 한 직장 단위노조역량으로서는 그 악랄한 탄압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연대투쟁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동일방직노조의 투쟁은 단순하게 기업주와 노동자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권력과 종교, 지식인들의 민주세력의 투쟁으로까지 발전되었지만 아직도 같은 민주노조의 긴밀한 연대운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제하와 해방 직후의 노동운동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인데도,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 민주적인 전국조직과 지역조직, 산별조직을 갖지 못했고 각 단위 민주노조의 간부들도 정치의식이나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124명의 해고를 시작으로 70년대에는 모두 1,000여 명의 해고노동자들이 나왔는데 이들의 복직투쟁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나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③ 연대투쟁
동일방직노조의 투쟁과정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연대투쟁은 70년 말부터 그 발돋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노조 조직 간의 연대차원은 아니며 같은 노동운동가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종교단체, 또는 정치적인 집단과의 초기적인 연대투쟁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종진 노동자의 가스질식사의 항의 데모사건
77년 7월 10일 오후 2시 한강성심병원 앞뜰에서 서울시내 청계천, 영등포지역 및 인천지방에서 모인 300여 명의 남녀노동자들이 7월 2일 가스 질식사한 협신피혁공업사 노동자 민종진의 장례식을 거행한 후 가두데모를 벌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영구차를 뒤따르면서 “노동자도 사람이다.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 “국가보위법을 철폐하라” “노동 3권을 돌려 달라”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자 경찰은 곧 이들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병원으로 되돌아온 이들은 다시 40여명이 노동청으로 찾아가 농성을 벌였는데, 이날 밤 경찰에 의해 모두 연행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기업주의 탐욕에 의한 살인행위에 대해 분개한 노동자들이 작업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공동투쟁을 벌인 것으로 70년대 처음으로 이루어진 연대투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국 점거사건
서울시내 각 공장에서 모인 남녀 노동자 수십 명이 78년 3월 20일 오후 6시 반경 기독교 방송국에 몰려가 “매스컴은 뭘 하는 곳이냐? 어째서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뉴스도 보내지 않는가” “이 건물의 다른 층에서 동일방직사건에 항의하는 목사들이 단식농성하고 있는데 기자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노동자들은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 문을 열고 욕설을 해 생방송이 잠시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노동자에 비해 언론기관들이 정치권력에 굴복한 채 아무런 사실보도도 하지 않자 이러한 한국 언론에 항의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부활절 예배장의 확성기 탈취사건
78년 3월 26일 여의도 광장에서 동일방직, 삼원섬유, 원풍모방, 방림방적 등으로부터 모인 6명의 여성노동자들이 4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부활절 기념 예배장에서 갑자기 단상으로 올라가 확성기를 빼앗은 후 “노동 3권 보장하라” “동일방직 사건 해결하라” “카톨릭노동청년회와 도시산업선교회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들에게 구타당하면서 끌려 내려온 사건입니다. 이 소동으로 라디오 중계방송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인파들에게 노동문제를 폭로하여 당시 어용적이거나 무기력한 노동단체와 언론에 대해 저항한 것입니다.
●YH무역 노동자들의 결사적 투쟁
YH무역의 여성노동자 200여 명은 79년 8월 9일 새벽 6시경에 공장폐쇄를 반대하는 농성을 벌이다가 회사의 기숙사를 나와 신민당사로 몰려가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폐쇄하려는 회사를 조흥은행 측에서 인수할 것과 회사 돈을 빼돌리고 미국으로 도망간 사장을 소환시킬 것, 빨리 기업을 정상화해서 여공들의 생계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이 투입될 때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신민당은 공화당 정권에 대해서 활발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사건은 정부에게 태풍의 눈처럼 보였습니다. 따라서 경찰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8월 11일 새벽 2시경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하여 신민당사 정문을 부수거나 사다리로 정문에 올라가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습격한 것입니다. 이어 경찰들은 당시 안에 있던 국회의원, 신민당원, 취재기자와 여공들을 가리지 않고 난타하며 건물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이러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100여 명이 부상했고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양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정권의 폭력에 분개했고 정부는 도시산업선교회와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해 탄압을 강화해 급기야는 10․26까지 그 긴장이 확대되어 유신정권은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변화과정에서 YH무역 노동자의 투쟁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80년대 노동자의식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4) 70년대 노동운동의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70년대 노동운동을 살펴보았는데 이 시기의 노동자들은 외부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싸워 정부수립 이후 침체되었던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을 다시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외부의 탄압과 내부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해 많은 승리와 함께 패배의 쓰린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70년대 노동운동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과연 무엇이고,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의의
첫째, 7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주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민주노동운동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노총이나 산별노조가 어용화 되면서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자 노동자들의 불만은 전태일 분신자살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 발생적으로 폭발하여 비조직적으로 진행되었는데, 70년대 중반에는 이들이 민주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70년 말기에는 공장 또는 지역단위로 투쟁하면서 연대운동의 가능성까지 보여줄 정도로 성장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된 조합원이 76만 46만 9천여 명에서 79년 1백만 7천여 명으로 크게 늘어난 데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 민주노조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단체가 외면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상 요구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둘째, 노동운동의 동조세력이 넓어졌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학생, 종교인, 지식인 등 민주세력의 관심과 참여에 힘입은 바 큽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민주노조가 활발하게 경제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셋째, 정치적인 탄압과 경제적인 불평등, 노동법의 개악 속에서도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조직하는 가운데서 자연히 노동자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모든 정치, 경제구조가 노동자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 정치적인 의식으로 발전되었고, 이러한 노동자 의식의 발전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발판을 이루고 있습니다.
넷째, 정치권력과 자본가 간의 조직적인 탄압 속에서도 노동운동세력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기에는 자주 패배하게 되는데, 이를 겪는 과정에서 자연히 노동자들은 공장단위, 지역단위, 산업별 단위의 연대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70년대 말에는 그 시초를 보이게 됩니다.
② 문제점과 반성
첫째, 노동운동이란 자신을 에워 싼 주변의 정치, 경제 사회구조의 모순과 싸우는 것인데 70년대의 노동자들은 아직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여, 노동운동이 탄압 속에서 과연 어떻게 싸워야 하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조합주의적인 경제투쟁에 머무른 채 공장단위의 기업주와 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차원으로는 진정한 노동자의 권익향상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더구나 정치권력과 자본가는 조직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 노조들은 연대투쟁으로 과감하게 맞서 정치투쟁을 하지 않고, 아직 우리노조에 관한 일은 아니니까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자기 조합 활동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결국 82년까지 이르는 동안 70년대의 모든 민주노조가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70년대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사상투쟁, 즉 노동운동의 목적과 투쟁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교육, 선전활동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조합주의적인 경제투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운동을 외면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역량을 크게 넓히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조합 내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노총이나 산별노조에서 대표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70년대에 등장한 민주노동의 경우도 대부분은 노조의 간부와 조합원 간에 의식수준과 활동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조합 활동이 노조간부에 치우친 것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조합 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육, 선전 활동과 노조의 회계, 재정에 일반 조합원을 참여시키고 같이 토론하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싸움과정에서 나타나는 단결은 아무래도 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운동은 결코 몇몇 개인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인 힘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발전정도는 바로 일반 노동자의 권리의식과 역량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셋째, 70년대의 노동운동은 각 민주노조가 개별적으로 싸워 나갔을 뿐 그러한 개별 민주노동운동을 통일된 연대운동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조직적인 노조파괴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절실하게 연대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노총과 산별노조가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새롭게 민주노조운동을 지지하는 지역별, 산별 차원의 통일된 연대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넷째, 70년대의 노동운동은 주로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보다 저임금, 장시간 상태에 놓여져 있었고 그만큼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일방직의 경우처럼 같은 작업장에서 남녀의 노동조건이나 의식차이가 나게 될 때 자본가는 항상 이것을 이용하여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동일방직노조는 남성노동자에 의해 거의 파괴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동국제강이나 사북탄광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남성노동자의 조직운동은 작업장조건이나 운동방식에 있어서 노동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종교단체나 지식인의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노동운동이 이들에게 의존하여 이끌려가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지원, 협조세력일 뿐이지 노동운동을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세력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들의 역량발전에 의해서 발전되어 가는 것이고 또 발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70년대 후반기의 패배과정은 점차 노동자중심의 노동운동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