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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인 김호준(70)씨는 중앙아시아 50만 고려인의 150년 역정을 집대성한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을 출간했다. 서울신문과 문화일보에서 편집국장, 편집인 등을 역임한 그는 10년에 걸친 현지답사와 취재 등을 통해 고려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사(通史)로 정리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이어간다.
고려인의 집단 강제이주를 은밀하게 추진하던 소련은 그에 앞서 고려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도급 인사를 체포해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했다는 증언과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식층에서부터 10월 혁명 후 적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백군에 대항한 공로 빨치산 원로들까지 체포했다는데 당시 고려인의 수난기록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달라.
강제이주를 지휘하다가 숙청이 두려워 뒷날 일본으로 망명한 원동지역 비밀경찰 책임자 류쉬코프의 폭로에 따르면 강제이주에 앞서 2천500명의 고려인이 체포됐다. 당시 소련내 고려인 수가 약 18만여 명임을 감안할 때 엄청난 인원이 탄압을 받았다. 기소된 고려인은 모두 일본의 간첩 또는 소련을 반대하는 폭동을 준비한 혐의를 뒤집어 씌었다. 조작된 죄목으로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어 흔적없이 사라지는 사태로 발전했다.
희생된 인물 중 저명한 고려인 명사에는 어떤 분이 있는가?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며 고려인 사회의 기대를 모았던 김 아파나시, 소련 공산당대회 원동지역대표 김 미하일, 조선에서 소련으로 망명해 고려문학을 이끌던 작가 조명희도 이때 희생된 분들이다. 이들은 15분간 진행된 비밀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당일 밤에 총살됐다.
마침내 강제이주를 실행하면서 벌어진 사태는?
미리 지도층을 검거해 공포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 스탈린 권력의 반인도적 강제이주가 실행된 것이다. 1937년 8월 21일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날 소련은 원동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긴급 비밀명령을 하달했다. 원동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임을 내세웠다. 일제에 대항해 싸워온 고려인들이 오히려 일제의 앞잡이로 매도되어 피땀 흘려 개척한 땅에서 쫓겨나는 수모와 고통의 장정(長程)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강제이주의 본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고려인 강제이주는 공산대국 소련의 국가이익 앞에 소수민족의 삶과 인권이 무시당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강제이주의 결정문이 세계에 알려지면 규탄과 비판에 직면할 것을 두려워한 듯 결정문을 크렘린 문서고에 넣고 잠가버렸다. 이 비밀명령서의 원문은 반세기가 넘게 실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인 1991년에 공개됐다.
이주과정에서 벌어진 고려인들의 암담한 실정과 혼란상황을 상상해보면 처절했을 것이다.
강제이주 일주일 전, 또는 2.3일 전에 통보를 받았으니 조용히 살던 그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부동산은 그대로 두고 한달 동안 여행에 필요한 식량과 옷가지 이부자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영문을 모르고 대다수 열차를 탔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을 안 노인들은 선대가 묻힌 땅의 흙 한줌을 싸들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해 단 한명의 이탈자도 허용되지 않았다. 입원 환자는 퇴원을 시켜 열차에 태웠다. 더욱 비인도적 극치는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 모르고 명령에 따르게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19세 대학생으로 이주열차에 올랐던 고려인 정상진은 2007년 서울에서 열린 강제이주 70주년 학술대회에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음과 통곡, 저주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회상했다.
절망과 통곡의 이주열차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열차 안에서 절망에 빠진 고려인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이주민 가운데 엘리트 계층 1천여명에게는 객차가 배정됐지만 나머지는 창문이 없는 화물차와 악취가 나는 가축 운반차에 실려갔다. 화물칸은 한 대에 4가구가 사용하도록 4칸을 만들어 가운데 난로를 설치해 함께 조리를 해 먹도록 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첫 이주열차는 1937년 9월9일 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열차에는 화장실도 없었고 준비해간 음식이 떨어져 열차가 쉬는 역에서는 화장실 찾는 사람과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차안에서 출산소동도 일어나고 식량 약탈과 겁탈로 인민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동승한 비밀경찰은 이른바 불순분자 색출을 계속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병으로 죽는 노인과 아이들이 속출했고 시신은 달리는 열차의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어쩌다 열차가 서면 가까운 철길 옆의 땅을 파고 죽은 자를 묻고 우는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밤하늘을 찢어놓기도 했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어느 정도인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권희영 교수는 강제이주의 희생자수를 1만6천5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그때 고려인 사회가 붕괴되고 절반이 죽었다고 할만큼 충격과 피해가 엄청났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도 황량한 허허벌판이라고 했는데..
한 달여 만에 장장 6천여km를 달려 도착한 곳들이 결국 땅을 개척해야하는 황무지였다. 10월말까지 수송열차 124대로 17만1천781명을 이동시켰다. 그 중 9만5천256명이 카자흐공화국, 7만6천525명이 우즈베크공화국에 짐을 풀었다. 뒤에 수송된 4천700명을 포함하면 18만명이 만리타향으로 쫓겨나 통한의 삶을 시작했다.
다시 개척의 삽질을 시작한 초기의 일화를 들려달라.
그곳에서도 자유롭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고려인들은 공민증을 회수 당하고 5년간 거주지가 제한되는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1938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 1천321명이 국가반역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시련도 따랐다.
이주한 곳에서도 탄압을 받았다니 정말 고려인의 유랑 역사는 끝이 없고 처절하다.
그들의 수난사를 표현할 언어가 모자란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실려 온 고려인들은 타슈켄트 등 시내로 들어가 살 수 없게 했다. 갈대가 무성한 강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소련은 고려인의 취학 취업도 제한했다. 공직에 진출 못하게 하고 모스크바 등 대도시 대학에 진학도 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소수민족 언어도 사용 못하게 해 고려어, 즉 조선어를 배우는 민족학교도 문을 닫아야 했다. 고려인은 모든 것에서 소비에트화 되어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주지역에서 탄압으로 희생된 고려인 지도자는 어떤 분들이 있는가?
일본군에 살해된 연해주고려인 지도자 최재형의 차남 최성학은 카자흐스탄에서 일본 스파이로 몰려 총살 당했다. 그는 18세 어린 나이로 항일 빨치산에서 활동했고 12년간 소련 해군장교로 근무한 충직한 인물임에도 과거 빨치산 때 무기양도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전력을 문제 삼아 처형했다. 강제 이주 전부터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박정훈은 1935년 이동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총살했고, 백마를 타고 시베리아를 누비며 전공을 세운 항일 빨치산 영웅 김경천은 1939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옥사했다. 1938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조선사범대 벽보신문에 ‘밭갈던 아씨에게’라는 시를 발표한 강태수는 ‘아씨’가 단지 젊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당국은 연해주를 그리워하는 시적 이미지를 떠올렸다며 반동으로 몰았다. 1959년까지 21년간 북극의 원시림에서 감옥살이를 시켰는데 그로부터 고국 고향 등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표현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고려인 문학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작품은 모두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검열을 받아야 했다.
핍박 속에 재기의 삽질
그럼에도 고려인 사회가 재기의 틀을 마련하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이주한지 3년만에 집단농장의 창고와 농장원들의 곳간에 여분의 벼와 옥수수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의 사막성 기후는 일조량이 풍부해 물만 충분히 공급하면 곡식과 채소농사가 잘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1941년 히틀러의 침공과 함께 소련이 대조국전쟁으로 부른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고려인들은 파종에 쓸 볍씨만 남기고 식량을 헌신적으로 국가에 바쳤다. 스탈린은 고려인 남자들을 노동군으로 동원해 탄광 군수공장 건설현장 벌목장 등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중노동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전쟁기간 중 탄광에서만 2천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사망했다고 하니 고려인들에게 또 강제이주 때보다 더 끔직한 재앙이 따랐다.
이제 고려인들의 성공 신화를 듣고 싶다.
전시체제에서도 고려인들의 집단농장은 기적을 일구었다. 많은 남자들이 노동군으로 차출되어 농장을 비웠지만 남은 인력이 중심이 되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농장은 목화와 벼농사의 경작면적을 3.5∼5배 이상 크게 확장시켰다.
카자흐스탄의 김만삼은 1942년 세계 최고 수준인 ha당 17톤의 벼수확량을 기록했고,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는 300만평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북극성 콜호스를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육성해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쌀에서 목화와 황마 재배까지 경이적인 수확기록을 세워 100명이상의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수난과 억압의 고통을 딛고 오히려 수익을 모아 국방기금 모금에 앞장서는 등 모범 민족 고려인의 기개를 과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종전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함께 북한 체제의 권력형성과 태동에 참여한 고려인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2차대전 종전시기에 소련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지식층 2천700여명을 차출해 연해주, 사할린, 북한 등지의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투입했다. 북한 정권에 참여한 고려인도 최대 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해방 조국에서 점령군의 통역을 맡거나 행정실무, 언론기관, 학교, 군대정보요원 등으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질서의 전위대 역할을 했다. 6.25에 참전한 고려인도 있다. 그러나 1950년 중반 김일성에 의해 소련파가 숙청 당했는데 그중 50명 정도가 처형되거나 행방불명 됐다.
소련에서 고려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며 마음 놓고 숨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53년 3월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고려인 사회는 일대 변화를 맞게 된다. 특히 소련최고회의가 1957년 특별 이주민의 거주제한조치 해제법을 공포해 고려인은 소련 전역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치도 참여하고 공직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소련 국민의 공민권을 인정받아 중앙아시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소비에트 군인도 되고 최고학부 군사학교에서 대도시의 명문 고등교육기관으로까지 돌진해 들어갔다. 고향인 원동을 그리워하며 문학 활동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항일 빨치산 영웅들의 기록도 문학으로 복원했다. 작가 김세일이 렌닌기치에 발표한 시 ‘내고향 원동을 자랑하노라’와 역사소설 ‘홍범도’, 김준의 장편소설 ‘십오만원 사건’ 등이 그 무렵에 나왔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해 1965년 출간된 고려인 역사학자 김승화의 ‘소련 한족사’도 그 부문은 기술하지 못했다.
거주지 이전이 자유로워지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사는 고려인들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고려인 사회의 시대별 인구이동 추이를 알 수 있는가?
강제 이주 초기는 농촌의 집단농장이 주거지였다. 거주 이전이 가능해지면서 1950년대 20%에 불과했던 도시 이동 인구가 1989년 조사에서 80%를 상회했다. 역시 도시 진출 배경은 자녀 교육열과 사회적 신분상승 욕구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구체적인 조사 결과를 보면 교육 목적이 44%, 그 다음이 결혼, 군복무 등이다. 그런 변화과정에서 조선어를 모국어로 여기던 고려인이 1959년 약 80%에 달했지만 30년 후인 1989년에는 49%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그것은 소련내 소수민족 34개 가운데 두 번째로 빠른 속도였다.
그렇다면 도시로 간 고려인들이 주로 진출한 직업은 어떤 분야인가?
고려인의 대학 진학률은 소련내 140개 민족 중 아르메니아인 다음가는 2위를 기록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모두 20%가 넘었다. 고학력의 고려인은 교사 의사 기술자 건축가 법률가 공무원 등 고급 전문직으로 진출해 종사자가 55%로 가장 많았다. 문화 예술 체육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다음이 노동자 30%, 농업 12% 순이었다. 그런데 주류사회에 진출해도 의사결정권을 가진 핵심 지위는 러시아인들이 차지해 중간계층에 머물렀다. 이같은 신분 상승은 민족 정체성과 민족 언어의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인들이 대한민국을 역사적인 모국이라고 인식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방문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1985년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의 실용정책을 펴면서 고려인 사회도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맞이했다. 자유 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고려인도 있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는 한국어 배우기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 진출이나 기업 취업의 경제적 상승으로 발전했다. 금기사항인 1937년 강제이주 문제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사태로까지 세상이 바뀌었다. 소련 당국도 소수민족에 가한 박해를 사과하고 권리회복을 선언했다. 1993년 러시아연방 최고회의는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강제이주의 탄압이 불법적이고 범죄였음을 인정했다. 연해주로 복귀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받은 것이므로 참으로 맺힌 분노와 울분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사태였다.
모국으로 돌아온 고려인의 꿈
1991년 고르바쵸프에 의해 공산주의 소련이 74년만에 해체되면서 소련연방 15개 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하고 이어서 옐친의 러시아연방이 등장하는 과정에 고려인 사회도 많은 변화가 따랐을 것이다.
독립된 소수민족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언어생활이었다. 신생 독립국들은 소련시절 공용어였던 러시아어 대신 자신들의 토착 민족언어를 국가 공용어로 선포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토착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은 고급 전문직종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고려인들의 비애는 당시 ‘조국이 두 군데 있어도 오라는 곳이 없다’는 말로 회자됐다. 신분추락을 감수하느냐, 러시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다시 이주하느냐의 갈림길에 선 곤혹스런 시기였다. 그 무렵 많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피땀으로 조성한 터전을 버리고 다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 중에 러시아 이주와 함께 한국의 산업화 바람을 타고 모국의 귀환 이주를 꿈꾸는 사람도 많았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고려인들에게 잃어버린 모국 한국은 자부심을 갖게 했고 새로운 꿈과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
2013년 현재 한국에 취업중인 고려인의 실태가 궁금하다.
현재 국내 취업 고려인은 1만1천여 명에 이른다. 영주 귀국한 사람도 4천명에 달한다.
이제 고려인들의 유랑은 끝났다고 볼 수 있는가?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유랑을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다. 돌아보면 그들의 역사는 끝없는 유랑의 연속이었다. 대이동만 모두 네 차례였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1953년 스탈린 사후 거주이전의 자유와 함께 맞이한 이주, 마지막으로 1991년 소련 붕괴 후 사방으로 확산된 이주시대까지 끝없는 유랑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현재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나 한국에서도 일체감이나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나그네 같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려인의 슬픈 역사를 함축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들려달라.
강제 이주전 숙청당한 고려인 사회의 최고 지도자 김 아파니시의 작은 아들인 연해주 고려인 재생협회장 김 텔미르의 기구한 인생 역정의 고백을 소개하겠다. 그는 “나의 부친은 하바로프스키 시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크림주 엠프트라시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 주 사마로스코예 촌에,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의 침켄트 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촌에 안치되어 잇다. 그 고인들을 누가 모셔서 성묘할 것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악마의 나라에서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탄식을 남겼다.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떠돌며 살아온 참담한 고려인의 과거사를 상기시켜 주는 고백이다.
이제 각지에서 성공한 고려인들의 활약상을 듣고 싶다.
고려인은 우수한 민족이다. 모든 지식에서 타민족보다 빠르고 앞서가는 역량을 발휘해 어디서나 성공신화를 만들어 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참여해 국가와 지역경제를 리드하는 대사업가로 성공한 사람도 많다. 카자흐스탄의 카스피그룹 총수 채유리를 비롯해 각국에서 금융, 건설, 가전제품, 유통업, 레저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고려인이 얼마든지 있다.
고려인 속에 들어가 그들의 내력을 정리하고 그들과 함께 정분을 맺으면서 느낀 소회를 정리해 달라. 고려인은 과연 우리 모국 동포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피붙이들이다. 150년 전 떠났지만 한 번도 모국을 잊지 않고 살아온 동포들이다. 구한말과 일제 때 10만명 이상이 구국 항일투쟁의 선봉이 됐으니 후손 대에서 모국이 갚아야할 빚도 많다. 글로벌 시대에 해외동포는 소중한 민족자산이며 미래와 같다. 1990년대 한국 기업의 중앙아시아 진출의 길잡이도 고려인들이 했다. 유랑민족으로 서럽게 살아온 고려인들을 위해 이제 모국 국민들은 따뜻한 둥지가 되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