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습자 |
최규성,유명자,이호춘,고경순,박양림,정동준,차재덕,이용화,이지연,원희정,조민희,민응덕 이용철,문성환,양정순,오세분,김은주,김은영 김기만,김기옥,손애란,유명복,유제정,장기순,박지열 |
유아세례 |
하나래,하나별 |
세례자 |
이미자,유영인,유동현,김현주 |
세례입교인 |
이흥상,이정희,이정순 |
입교인 |
탁선주,김현주,박명균,김성희,이근선 |
1986년 교회 임원 명단
담임 |
임순혁 장로 |
장로 |
김남철,탁완순 |
원로권사 |
최순이,이효녀,김양순,김학배 |
권사 |
박영례,조성심,허 관,이영순,이호수, |
원로집사 |
유태복,박치매,송순섭,강순례 |
집사 |
원옥순,장옥순,한을순,임연심,김연자 이종섭,신현순,신은교,장정순,김갑순 하우성,고창연,이근선,유병숙,이흥기 허필수,간명순,천춘자,최정분,오용순 서정복,엄기남 |
신천집사 |
정은진,조상애,정은숙,최인숙,엄기복 |
기획위원 |
임순혁,탁완순,김남철,박영례,조성심,허 관 이호수,이영순 |
선교부 |
조성심,원옥순,임연심,장정순,서정희,허필수 김연자,천춘자,최정분,김봉임,서정복,엄기남 최귀순 |
교육부 |
김남철,하우성,이근선,조상배,최인숙,전은진 신은교,이호수,차은숙 |
재무부 |
허 관, 탁완순,김남철,이호수,이흥기.이근선 이종섭,장정순 |
관리부 |
탁완순,엄천봉,간명순,유병숙,서경원,신현순 장옥순,한을순,이흥기,엄기복,정은숙 |
사회봉사부 |
탁완순,김남철,박영레,이영순,허 관,조성심,이호수 |
예배부 |
박영례,김갑순,오용순,양춘자 |
1986년8월20일~23일 여름어린이 성경학교를 북내중앙교회에서 개최합니다.
1986년 8월31일 주일 낯 예배시 교회 창립 80주년 기념 예배를 갖고 주일 저녁 예배시에는 축제의 순서를 갖습니다.
1986년 12월1일 그동안 어려운 교회 재정과 환경속에서 담임자로 수고하신 임순혁 장로님이 이임하시고 김지원 목사님이 부임하십니다.
김지원 목사
김지원 목사님은 1981년부터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중리교회를 1986년12월까지 담임하시다가 1986년 12월5일 북내중앙교회로 부임하여 오셨습니다. 김지원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대를 1981년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목사님이 되신 분으로 다재다능 하고 투철한 개혁주의 학자풍의 목사님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님의 설교는 차분 하면서도 명료하고 지적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김인희 사모님 역시 감리교 신학대 음악과를 졸업하였고 성악에 능하셔서 손수 피아노를 치시며 이제까지 접하지 않은 많은 성가를 불러 주셨고 성가대를 직접 하시며 부활절 칸타타를 도입하여 직접 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군부 독재정권의 폭압 정치가 최고조에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김지원 목사님은 현실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목사님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독재정권 타도에 선봉에 서서 목회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셨습니다.
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하였고 각종 민중집회와 박종철 고문치사 항의 집회는 물론 대통령 직선제 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물론 많은 집회에 직접 참여하셔서 활동하셨습니다.
이에 김남철 장로님은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를 반대하셨고 두분의 마찰은 계속되었습니다.
정치적 중립도 중요하지만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양심이 아니다는 목사님과, 개인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데 굳이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설교 시간에 정치적 설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김남철 장로님과의 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마찰이 계속되던중 김지원 목사님은 이러한 싸움은 교회나 자신이나 혹은 장로님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고 1987년 10월 서울에 있는 “종교교회” 부목으로 전임을 가십니다.
현재 김지원 목사님은 안산 와동 한빛교회 담임목사 이시며 안산 제1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제37대 노삼용 목사(1987년10월9일 ~1992년 2월)
노삼용 목사
노삼용 목사님은 1952년 9월1일 경북 경산시 진양면 상림동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성령을 체험하고 군 생활 중 군종으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대후 신학을 전공하여 목회의 길을 걷습니다. 1977년 협성대 신학과를 졸업하시고 1982년부터 86년 까지 여주매화교회에서 시무 하시다 1987년 10월 북내중앙교회로 부임하여 오십니다.
노삼용 목사님은 남달리 음성이 좋고 찬양을 좋아하셔서 음악적인 부분을 많이 신경 쓰신 분입니다.
당시는 여주가 동.서 지방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합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여주 관내의 모든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부흥회를 하였는데 준비 찬송은 항상 노삼용 목사님이 차지할 정도로 찬양집회를 좋아하셨습니다. 한번은 북내교회에 마땅한 앰프와 악기가 없는데 교회에 요구를 하니 교회 형평상 어렵게 되자 손수 악기를 마련하고자,청년부(당시 청년부 회장:김경원)와 힘을 합하여 돈을 마련합니다. 당시엔 여주중앙교회가 완성 전이라 여주의 모든 교인들이 한곳에서 연합성회를 하기엔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형 천막을 치고서 그 안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대형 천막을 북내교회 청년부가 맡아서 공사를 했습니다. 일주일간의 천막 설치 공사로 약 200만원의 악기 및 앰프 구입 자금을 마련하여 드럼,일렉트릭 기타,베이스 기타,신디사이져,앰프등을 구입하여 찬양단을 조직합니다.
*베데스타 찬양단 조직
천막공사로 청장년부가 마련한 돈200만원을 기초로 악기를 구입하여 찬양단을 구성하였는데 악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교회 앞에 식당을 하시는분이 이사를 오셨는데, 그집 아들 길승배란 청년이 “윤수일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던 분이었는데 베이스 기타는 물론 드럼 일렉기타등을 자유자재로 다룰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순탄하게 최초의 밴드 찬양단이 결성되게 됩니다.
노삼용 목사님은 당시 지금의 교회 터가 일부는 감리교 재단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감독의 명의로 되어있고 작고(作故)하셔서 자녀들은 미국 이민으로 교회 땅을 찾고자 하는 일이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변호사를 500만원에 선임하여 200만원을 주고 잔금은 추후에 주기로 약속하고 교회 땅을 찾고자 하였는데, 정말 눈물나는 고투가 계속됩니다. 당시 교회 땅은 독립운동가 조병욱 박사의 명의로 한때 되어있다가, 한때는 감리교 재단으로 되어 있다가 일부는 미국으로 이민간 감독의 명의와 일부는 “국”자가 찍힌 나라의 명의로 되기도 하여 정말 복잡하고, 기나긴 법정 투쟁의 연속이였습니다. 그러나 김남철,조성심,탁완순 장로님을 중심으로한 지루한 싸움 끝에 1990년6월 현 교회부지 2,187평을 재판하여 승소 하지만 등기부가 법원과 군청 기록이 서로 달라 등기를 내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노삼용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등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일단은 땅을 찿았다는 안도감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노삼용 목사님은 1992년 2월 지금의 담임 목사이신 김 린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신 철원 육담교회로 가시고, 김 린 목사님이 북내중앙교회로 전임하여 오십니다.
노삼용 목사님의 전임 기간 동안의 행적을 정리 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988년 4월17일 부활절 연합예배를 새벽 5시에 북내중앙교회 주관으로 개최합니다.
-참가교회:북내중앙,은천,덕암,지내,주암,금현등 6교회
-참가인원;약150명
-사회: 노삼용 목사 기도:김남철 장로
설교: 이승률 목사
연합성가대의 성가와 여선교회의 차 대접으로 성대하게 개최하였습니다.
*1988년 6월6일 제37대 노삼용 목사 취임 예배 개최
사회: 안병조 목사 기도:탁완순 장로
설교: 김의식 교수 축사:이충근 목사
축도: 김보섭 목사
약200명이 참석하여 축하하였고 여선교회에서 중식을 제공하였으며 6월 여주지역 교역자 회의를 2시에 개최 하였습니다.
*1988년 8월 임원세미나를 북내교회 출신 최운기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대전 성락교회에서 선교부 주관으로 40명이 참석하였고 약 30만원의 헌금이 모여져 성락교회에 헌금 하였습니다.
*1988년 11월에는 20일간 구 사택을 240만원을 들여서 부엌과 창고를 개조하여 방과 입식 부엌으로 꾸미고 기름보일러로 교체하여 현대식으로 바꾸었습니다.
*1988년 11월28일 이대복 소장 초청 통일교저지무장 대회를 북내중앙,학동,덕암,지내,은천,금현,주암,운암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2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사회 |
담임자:노삼용 목사 |
신천장로 |
조성심 |
신천권사 |
이종섭,김연자,한을순,이흥기,최정분 |
신천집사 |
곽순희,차상규,이원익,오세분,김정희 이정희,박순자 |
기타사항 |
양애연 교육전도사 부임함. |
*1989년 주요 교회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날자 |
행사 내용 |
89.1월11~27 |
성가대 훈련(여강종고 김창욱 선생님 초청) |
1월19일 |
김주남 청년 서예교실을 기도실에서 개강 |
1월23~26 |
부흥성회 강사 이충근목사(한빛감리교회) |
2월16일 |
선교부,사회부 주최 원로 임원위로회(목욕및식사대접) |
3월26일 |
부활절 칸타타 성가대주최 “증인들의 고백” |
4월2일 |
부활주일 가족 총동원 예배 세례입교자:윤재옥,김미자 유아세례:김준영 |
5월7일 |
야외 예배를 상교리 운동장에서 드림 |
6월19일 |
나라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군수와 지역 교역자 참석) |
7월1~3 |
노삼용 목사 부친상을 교회장으로 드립니다(문막충효공원안착) |
8월7~11 |
지방강변성회 참석 |
8월21~22 |
청년수련회(점동면) |
11월13~ |
추계대심방 |
11월25일 |
양애연 전도사 송별예배 |
12월11~14 |
부흥성회 강사:고용복 목사 |
12월29 |
연합속회를 갖고 시상식을 개최 주일성수상:박명균,김정숙,권지선,고창연 성경다독상:김정희,고영희,김정숙 속회출석상:김학연 |
12월30일 |
성가대,교사 시상 및 속장,인도자,교구장 선물 2부로 척사대회를 개최:1등2교구,2등1교구,3등 3교구 |
*1990년 주요
90년1월21 |
헌금궤를 예배실 뒤에 비치 |
1월28 |
제자반 실시(전도 특공대 조직) |
3월7일 |
춘계 대심방 |
4월4일 |
교역자회의 |
4월15일 |
성가대 주최 부활절 칸타타 “승리의 주님” |
4월29일 |
제자반 졸업 (안종선,임연심,오용순,고창연,정은숙,곽순희,박순자,고영희 진복순,윤영희) |
6월10일 |
교육전도사로 가명진 전도사 부임 |
6월13일 |
여주군복음화 성회 북내중앙교회 개최 강사:김병섭 목사 |
7월22일 |
여름성경학교 개최 |
8월1일 |
중고등부 수련회(C.C.C주최 한양대학 체육관) |
*1992년 2월 인사 구역회
사회:박종선 감리사
위원:김남철,탁완순,조성심,이종섭,김연자,오용순,김정숙,허 관,이흥기,원성호,임연심,차상규,김주남중 11명이 출석하고 2명이 결석합니다.
찬송:459 기도:김남철 장로
성경:고전 13장1~13
말씀을 마치시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인사 구역회가 열립니다.
노삼용 목사가 철원 육단교회로 가시고 육단교회 김 린 목사가 북내교회로 전임함에 거수로 찬반을 물으니 찬성8명,반대3명으로 김 린목사 전임을 결정합니다.
제6장 새로이 도약하는 북내중앙교회
김 린 목사
김 린 목사님은 세련미 보다는 투박한 뚝배기와 장맛이 더 어울리는 외모의 서민적이고 교인들을 위한 사랑과 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김 린 목사님은 1949년 10월15일 전남 구례군 봉북리에서 태어나서 어머니 이정옥 전도사님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키워 오십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어느날 무릎이 너무 아파서 걸을 수 가 없었습니다.
아픈 다리였지만 가난한 처지에 병원에 갈 엄두를 못내고 내일이면 나아 지겠지 하고는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리는 점점 더 아파오고 이젠 거의 앉은뱅이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뒤 늦게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골수염이 너무 깊어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절망 끝에 어린 김목사님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달렸습니다.“하나님 저의 다리를 낳게 하여 주십시오. 제 다리만 걸을 수 있다면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장장 6개월간 매달려 목메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 같이 다리가 나았고 목회의 길을 걷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항상 좋은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워 갑니다.
그후 군에 입대에서 캬츄사로 제대를 하고,협성대 신학대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던중 1972년 12월7일 이선례 사모님과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을 하시고, 충북 보은군 탄부면 대양리 대양장로교회에서 첫 목회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일년쯤 되던 해 였습니다. 목회가 힘들고 짜증과 함께 스트레스로 고민중에 목회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고, 신도들에게 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 하나님의 가혹한 매질이 돌아왔습니다. 치주암이 걸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목회 도중 힘들고 지칠때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 몸에 가시를 두신것처럼 하나님께서 연단을 주시었던 것입니다.
카츄사 시절 김 린 목사님과 이정옥
전도사님
서울 석관교회 부임 시절
철원 청아교회 부임 시절
김 린 목사님이 부임하시고 북내중앙교회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여러 목사님들과 좋지않은 모습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여주지역에 본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 린 목사님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가지고 계셨고 본인이 희생하더라도 교회를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였습니다.
김 린 목사님 부임과 동시에 당시 법원에 계속하여 등기를 마치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던 것을 마침내 법원에 친분 있는 분이 중재하여 1994년 6월 현 교회 부지 2,194평을 미비된 서류를 정리하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유지재단 명의로 등기 합니다.
새 교회당 건축의 열망이 드디어 1994년 8월 2일 구역회를 통하여 당우리92-10번지에 성전 건축을 결의를 하고 건축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신접리 접줄에 사시는 조성심 장로님은 지금에 교회 터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당시는 개인 자가용이 적었던 시기라서 지척에 거리도 멀게만 느껴지던 시기였습니다. 조성심 장로님은 되도록 신접리와 가까운 곳으로 교회를 짓고 싶었던 마음에 새로운 땅을 매입하자고 하셨습니다.
이 에 김 린 목사님과 대부분의 교인들은 반대를 했지만 목사님은 조성심 장로님께 직접적으로 반대를 하시는 것 보다는 지혜롭게 대처 하여 설득을 하셔서 지금의 땅보다는 더 좋은 부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새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탄력을 받습니다.
당시 김용진 집사는 교회를 양조장에 1억5천만원에 매각하는데 앞장서서 성공하여 그 돈을 종자로 김남철 장로님를 건축위원장으로 1996년 4월30일 드디어 교회당 320평 교육관 50평 주택 44평을 건축 봉헌 하였는데, 목사님을 비롯하여 전 교인이 삽을 들고 봉사하고 모든 교인들이 협력하여 헌금과 봉사로 1년만에 훌륭한 교회와 교육관, 사택을 완공 하였다. 이것은 목사님과 함께 온 교우가 한마음이 되지 않았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여주 다른 교회에서는 교회를 신축하면서 많은 빛을 지고 채무에 못이겨 고통받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교인들은 떠나고 교회는 파산 위기에 서 있는 위태한 상황의 놓인 경우가 있는데,북내중앙교회는 큰 건물 공사를 하면서 또한 주택 공사 까지도 함께 공사를 강행했으나 감당할 수 있는 적은 채무로 1년 만에 완공이란 큰 기적을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갔고 여주동지방 중심으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1.김 린 목사님의 목회 방향
선지자와 율법의 대강령을 좌표로 경천애인의 옛 선조들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기리며 하나님 사랑,사람 사랑,자연 사랑의 가치아래 내 백성을 위로 하라는 명령을 가슴에 품고 겸손과 나눔의 삶을 실천해 나감으로 상호 유무상통 하는 이타주의적 헌신의 삶으로 안티 기독교 분위기를 쇄신하고,지역 복음화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종 계획을 수립 하여 운영코자 합니다.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생각할 때 인생 유아기에 신앙으로 인생 기초를 탄탄하게 이루도록 유아교육에 정진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학생부를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끌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여가를 선용하여 계몽시켜 나아가고 노년기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아 드릴수 있는 복지시설을 보완하여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족으로 어우러져,더블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열린 교회생활이 되도록 이끌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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