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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와 감천 그리고 혈청소의 추억
1962 송도해수욕장
1964 송도해수욕장
1965년 송도해수욕장
1965년 송도해수욕장 케이블카, 박카스D선전문구가 보인다.
1967년 송도해수욕장
1970년대 송도해수욕장
'60년대 중반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송도에 외삼촌 집이 있어서
여름방학때만 되면 일주일 정도 놀다가 왔었다.
낙동강가 엄궁수문 부근과 장인도 선착장, 학장동 홍깨호수에서 물놀이와
마구잡이 수영으로 단련된 나는 송도해수욕장에 가면 물만난 고기였다.
1960년대 후반 송도해수욕장 다이빙대
1975년 송도해수욕장 다이빙대
해수욕장 다이빙대까지 해엄쳐가서 마구잡이 다이빙으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었다.
1952년 송도 아랫길쪽 모습
1965년 송도 아랫길, 오른편 바닷가에 갯바위가 보인다. 저기서 세수를 했었다.
1965년 송도아랫길, 왼편 안 보이는 쪽이 남부민동, 오른편이 영도이다.
송도에서 아침에 일어나 학장 개울가에서 세수하던 것 처럼
송도 아래길 바닷가 갯바위에서 바다물로 세수하고 갔는데
외숙모님께서 세수안하나 하길래 바닷가에서 바닷물로 세수
했는데요 하니까..웃으시면서 바닷물은 짠물이라서 세수하면
안되니 수도물로 다시 세수 하라고해서 다시 한 기억이 난다.
1926년 혈청소 모습
1959 송도해수욕장과 진정산 기슭의 혈청소 가는길 모습
송도바닷가에서 보면 우측 멀리 산쪽에 임도 같은 길이 보였는데
그게 혈청소 가는 길 이라고 한다. 혈청소에도 외가 친척 할머니집
이 있어서 혈청소 할머니라고 부르던 기억이 나는데 혈청소에는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릴 적 혈청소는 신비의 땅이었다.
1967년 감천화력발전소
1970년대 감천화력발전소
감천에는 외사촌 이모님이 살고 계셨는데 '66년도 1차 중학교 합격
기념으로 그 이모님께서 어머님과 나를 오라고 해서 국제시장에서
책가방과 학용품 일체를 사 주셨다. 사촌이지만 어머님과 친남매
처럼 잘 지내시던 분이고 어머님을 친동생처럼 사랑하던 분이라
그러셨던 것 같다. 또 외가쪽에서는 제일 잘사는 집이었다.
이모님 아들중에 나하고 동갑인 친구가 있어 가끔 놀러 갔었고
중학교 시절인 그 때 감천화력발전소를 처음 구경했다.
오십년도 훨신 더 된 이야기를 주절되고 있는 걸 보면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던데 그런 모양 입니다.
번외, 송도 아래길 남부민동 천마산 기슭의 마을
1904년 호주의 사진가 조지로스가 촬영한 남부민동 해안 사진
위 옛 소년분들 서 있는 자리가 아래 1950년 사진의 남부민 방파제 입구 부근이라고 한다.
위 사진 위치의 1950년과 근래의 항공 사진 비교
1960년대 남부민 방파제 모습
2010년대 남부민 방파제 모습
부산 송도 해수욕장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에 개장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이다. 부산 중심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
하고 해수욕장을 개발한 것이 시작이다.
부산 송도해수욕장 1910년대 후반
1987년과 2003년에 태풍 ‘셀마’와 ‘매미’로 인해 다이빙대가 유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하여 해수욕장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기도 하였다.2013년에 해수욕장 개장 100주년을
기념하여 송도 100년사 편찬, 추억의 다이빙대 복원, 전국 해양스포츠제전, 국제컨퍼런스
등의 사업이 펼쳐졌다.
송도 명칭의 유래는 주변의 산에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에서 송도라는 명칭이 유래
하였다는 설과 거북섬에 소나무가 많아 송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는 해수욕장 입구
에 있는 작은 반도를 야망대(夜望臺)라 불렀는데 이곳에 소나무가 울창하다는 데에서
송도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송도로 불리기 이전에는 거북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섬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기 때문이다.자연환경송도해수욕장은 송도반도(혹은 암남반도)
의 남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수욕장의 서쪽과 북쪽으로는 천마산, 장군산, 진정산이
있다. 장군산과 진정산은 서로 이어져 있지만, 천마산은 시가지에 의해 장군산과 분리
되어 있다. 송도해수욕장의 백사장은 길이 약 800m, 너비 약 50m에 달한다. 해수욕장의
파도가 조용하고 물이 깊지 않아 천혜의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송도해수욕장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모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백사장 유지를
위해서는 매년 모래를 공급해야 한다. 깨끗한 흰 모래사장과 물이 맑아 1960∼1970년대
전국 최고의 관광지로 꼽혔던 훌륭한 해수욕장이었다. 송도해수욕장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많은 여행객들의 추억과 낭만을 간직한 곳이다. 오락시설 및 위락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유원지로서의 명성도 높다.부산광역시 서구에서는 연안정비사업 등을 통해
송도해수욕장을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연간 550만 명의 피서객이 찾는 명소로 발전시켰다.
2000년부터 5년여간 대대적인 연안정비사업을 실시하여 태풍피해와 모래유실을 막는 수중
방파제와 이안제를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해변은 아름다운 친수공간으로 변모하였으며
자갈이 많이 있던 곳은 희고 고운 백사장으로 탈바꿈하였다.수중방파제에는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해수욕장에 세워진 아름다운 분수와 녹지공간, 넓어진 모래사장 등으로
해수욕장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야간에는 밤을 밝히는 불빛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해변
분위기가 연출된다. 해수욕장에서 남쪽의 해변을 따라 송도 해안볼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해안볼레길은 3개의 코스로 이루어지며, 코스를 도는 시간은 1∼3시간 가량 소요된다.
해수욕장 동쪽의 송도공원에서 서쪽의 암남공원까지 이어지는 1.67㎞ 구간의 송도 해상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송도해수욕장 전경은 물론 암남공원과 지질공원, 부산항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전국에서 최초로 해상조각작품인 고래조형물을 설치하였으며, 해수욕장
백사장과 해안도로 사이에는 수변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해안도로변 암벽에는 높이
20m의 2단 수직형 송도폭포가 만들어졌고 해수욕장 동쪽의 송림공원 입구에는 음악분수가
설치되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해수욕장 동쪽에 설치된 다이빙대는 국내 유일의
해상다이빙대이며, 어미거북이(5m)와 아기거북이(3m)를 형상화해 만들었다.거북섬 인근에는
바다위로만 이어지는 길이 365m, 폭 2.3m에 달하는 송도구름산책로가 2016년 6월에 개설
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9.3m 아래의 바다가 보이는 투명 강화유리 바닥으로 조성되었다.
구름산책로 입구에는 거북섬을 스토리텔링화한 젊은 어부와 용왕의 딸 인룡(人龍)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청동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부산 송도 해수욕장 주변의 현재 모습들
혈청소
부산은 우리나라 근대 수의학(獸醫學)을 발전시킨 중추관청의 발상지이다.
첫번째 기관은 가축검역을 담당하는 수출우검역소(輸出牛檢疫所)가 대한제국시절인 융희(隆熙)
3년인 1909년7월에 대한제국 농상공부 직할기관으로 현재의 남구 우암동에 설치되었다.
두 번째 기관은 가축위생을 담당하는 우역혈청제조소(牛疫血淸製造所)가 한일병합후인
1911년4월에 일본 농상무성 직로의 현재의 서구 암남동에 설치되었다.
이 두기관은 각각 국립동물검역소와 국립가축위생연구소로 발전되어, 현재는 경기도 안양시에
본부를 둔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검역본부의 구성원이 되었다.
부산에서 태동한 수의학 중추관청은 얼마 후 경상북도 김천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수출우검역소(輸出牛檢疫所)는 일본에 보내어지는 한우를 사전 검역하는 기관이나, 한일병합후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로 명칭이 변경된 기관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보내는 것은 수출이 되나, 수출이란 외국으로 보내는 것을 뜻하므로
수출우검역소는 한일병합후인 1910년10월 조선총독부 탁지부의 소관으로 부산세관 부속기관으로
존치하다가, 1912년4월에 관제 개정으로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뒤에 경무국으로 변경) 소관
업무로 변경되어, 부산경찰서 부속기관으로 변경되어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후 1927년7월에는 경상남도 경찰부로 지휘기관이 이관되었다.
이출우검역소에는 1912년4월 당시에는 소장 1인, 수의관 1명, 수의관보 3명, 용원 2명이 근무
하였다. 우암동의 이출우검역소의 사무실 위치는 현재의 부산은행 우암동지점북서쪽의 우암
번영로에 위치한 양지아파트에 있었다고 하며, 주위인 우암로, 장고개로, 동항로 사이에
23,725평의 부지에 4,600평 규모의 축사시설을 갖추었다.
우암동 부산이출우검역소 전경(1937년)
1946년발행 부산지도의 부산이출우검역소 위치
이출우검역소는 1916년부터 인천,진남포,원산,성진, 포항 등에서도 이출이 시작되어 각항만별로
설치되었으며, 1941년11월19일자 훈령 제103호인 조선총독부 사무분장을 개정으로 각도지사에게
위임되어 있던 이출우 검역업무가 조선총독부 농림국 축산과 소관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1943년6월26일 조선총독부 이출우검역소 관제(조선총독부령 제174호)에 의하면 부산, 진남포,
원산 검역소는 존치시켰으나, 인천, 포항, 성진 폐지하였다.
부산이출우검역소는 광복후인 1949년6월 부산가축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62년5월
국립동물검역소 부산지소가 되었다.
우암동의 구 부산이출우검역소와 축사 건물에는 광복후 귀환 동포와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게되면서 협소한 골목에 밀집하여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낙후된마을이 되었다.옛 우암2동
주민센터앞에는 2009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서 수출우검역소 옛터”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사진 87-3) "수출소 검역소 옛터" 표지석
우역혈청제조소(牛疫血淸製造所)는 많은 부산사람들이 송도혈청소 또는 혈청소로 기억하는 곳으로
우역의 면역혈청을 생산하여 보급과 우역 연구를 하는 곳으로 출발하였다.
우역(牛疫)은 인간에게는 전염이 안되지만, 소나 양과 같은 우제류의 급성, 열성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이 질병에 감염된 동물은 고열, 구강조직의 미란, 괴사, 출혈 그리고 소화장기에
심한 타격을 주어 극심한 설사로 인한 탈수로 80%까지 폐사하는 걷잡을 수 없는 폭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우역 발생은 기근과 경제적 피해로 이어졌다.
우역은 국내에서는 최초 발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31년까지 질병이 유행했으며,
유사한 가축 돌림병으로 마역(馬疫), 저역(猪疫)이 있다.
설립 당시의 동래군 사하면 암남리 모지포마을 인근의 734,000평의 용지를 확보하여 건축부지
80,000평의 우역혈청제조소는 사무실, 도서관, 혈청저장실, 독소주사실, 채혈실, 세균시험실,
외역우사, 면역우사 해부실, 소각실 등을 갖추었다.
(사진 87-4) 암남동 수역혈청제조소(혈청소) 전경 1935년
(사진 87-5) 옛 수역혈청제조소 위치의 검역계류장
이곳에서 생산된 면역혈청은 한반도, 일본, 대만, 만주, 중국화북지역까지 공급하였다.
초기의 조직은 고등관인 소장외 사업부, 우역연구담당, 혈청제조담당, 사무부 등에 56명이
근무하였다. 이 기관은 1918년3월에 조선총독부 수역혈청제조소(獸疫血淸製造所)로 개편되었다.
수역혈청제조소는 ① 가축전염병의 예방접종액 및 혈청제조와 시험에 관한 사항,
② 가축전염병의 조사 및 시험에 관항 사항, ③ 두묘(痘苗)의 제조 및 시험에 관한 사항,
④ 가축전염병의 예방접종액 및 혈청, 두묘와 그 부산물의 배포 및 판매에 관한 사항을 사무
분장으로 1918년3월 칙령 제31호로 규정되었다.
1942년3월에 다시 가축위생연구소로 개칭됨과 동시에 안양에 지소가 설치되었다.
1962년에 “농촌진흥법” 공포에 따라 농촌진흥청 가축위생연구소로 발족되어 본소와 분소의
위치가 바뀌어 안양에 본소, 부산에 지소를 설치하였다.
1963년 부산지소를 본소에 통합하여 송도에서의 기능은 중지되고, 부지는 국립동물검역소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가축위생연구소는 1994년에 수의과학연구소로 개칭되었다가, 1998년8월1일
동물검역소와 통합되어, 국립수의과학검역원(國立獸醫科學檢疫院)으로 발족하였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國立獸醫科學檢疫院)은 2011년6월 국립식물검역원과,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
을 통합하여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가 되었다.
현재는 2013년3월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이 해양수산부 발족으로 이관되어,
농림축산검역본부(農林畜産檢疫本部)로 개편되었으며, 동물방역, 동물검역, 식물검역,
동식물위생연구를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독립기관이다.
부산지역에는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북도, 경상남도를 관할하는 농림축산
검역본부 영남지역본부(운영지원과, 축산물위생검역과, 식물검역과, 시험분석과)가 현재 중구
중앙대로30번길 8호(중앙동6가 10-4)에 있으며, 가축질병방역센터는 대구에 있고, 김해공항,
부산신항, 신선대, 대구, 양산, 창원, 김해, 구미, 울산 등에 사무소가 있다.
서구 암남공원로 185(암남동 620-2) 구 혈청소(동물검역소) 부지중의 대다수인 산림녹지는
부산시에 이관하여 자연공원인 암남공원으로 1996년4월5일부터 개방되어 있으며, 현재 농림축산
검역본부 영남지역본부 검역계류장으로 사용 중인 나머지 부지도 2016년까지 강서구 지사동에
조성중인 새로운 검역계류장으로 이전되면 부산시에 이관될 예정이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미카3 161"
blog.naver.com/bit567/110182800519
2018년12월 농림축산검역본부 영남지역본부 검역계류장은 암남동에서 강서구 지사동의 신축된
검역계류장으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감천 화력발전소 (현 부산 화력발전소)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있는 화력발전소.
석탄과 중유 혼소용 기력발전설비 2기와 중유 전소 기력발전설비 2기로 구성된 총시설용량
33만㎾의 전력을 생산하였다. 부산 및 영남지역 전력공급원으로서 연간 약 29억㎾h의 전력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적으로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성능전기
집진기와 종합폐수처리설비 및 소음기 등 공해방지시설을 갖추어 대기 및 해양수질오염 방지
에 적극 대처하였다.
1960년대초 국내 전력 공급능력은 32만2000㎾(총시설용량 36만7000㎾)로서 최대수요 30만6000㎾
대비해 예비전력이 절대 부족하여 제한송전이 불가피하였는데, 당시의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세워진 제1차전원개발5개년계획에 의하여 이 발전설비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건설공사는 일괄도급방식으로 미국의 벡텔(Bechtel)회사가 일괄 수행하였고 한국전력주식회사는
부지조성 및 항만시설 등 부대시설의 공사만 담당하였다. 1961년 3월 29일 공사를 착공하여,
1964년 3월 1일 1호기가 전력생산을 개시하고, 1964년 8월 10일 준공되었다.
총건설비는 외국자본 2251만 4000달러와 내국자본 9억 9800만 원이 투입되었다. 이 설비는 단위기
용량 6만㎾급 2기로 구성된 기력발전설비로서 국내 저급무연탄(80%)과 중유(20%)를 혼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무연탄은 선박에 의하여 감천만(甘川灣)에 설치된 전용부두로 수송되었다.
발전설비의 본격가동과 함께 광복 후 계속된 제한송전이 1964년 4월 1일부터 완전히 해소되었음은
특기할 사항이었다. 3,4호기는 제2차전원개발계획에 의하여 1970년 준공 예정이었던 서울화력 4호기
와 영동화력 1호기의 건설공사가 지연됨에 따라 1960년대 말 전력수급상 차질이 예상되어 긴급히
설치된 발전설비로서, 1967년7월15일 착공, 1969년6월4일 준공되었으며 총공사비는 82억 7000만원이
소요되었다.총시설용량은 21만㎾h(10만 5000㎾급 2기)이었으며, 보일러는 서독의 바브콕(Durr Babcock)
회사 제품으로 국내최초의 반옥외식 관류형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터빈은 서독의 지멘스(Siemens)
회사 제품이다. 1·2호기는 약 27년 동안 발전한 뒤 1997년 1월 1일 폐지되었다.
부산화력발전소는 2001년 4월 한국남부발전에 이관되어 한국남부발전 부산발전본부로 변경되었다.
도심 속에 위치한 부산발전본부는 2004년 3월 청정연료인 천연가스(LNG) 발전소로 변천하여 총시설
용량 180만㎾h(GT 15만㎾ × 8기, ST 15만㎾ × 4기)로 운전 중이며, 3년에 1회 지정되는 녹색기업에
3회 연속 재지정되어 도심속 친환경 발전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산화력발전소 [釜山火力發電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 사하구 서구 중구 영도구 모습
첫댓글 조용만씨의 옛 부산의 역사를 파악하여 새삼읽으보니 감개무량합니다 감사히 봤습니다
귀한자료다. 격세지감을 느껴지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