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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3)
목란관다리, 금수다리에 이은 오늘의 세번째 교량인 만경다리를 건넌다. 맑게 흐르는 선계의 계곡물을 행여 속진에 찌든 발로 밟아 더럽힐새라 계곡의 양옆 기슭 어디라도 발을 잘 디딜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을 따라 길이 나있기에 가끔은 계곡의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건너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이따금씩 다리가 놓여 있는데, 전망대로서의 역할도 겸하도록 했는지, 이 들 다리를 건너가며 그 위에서 보게 되는 경개가 또한 더욱 일품이다.
“꿈꾸고 기원하고 별러오던 순간인데, 봉봉이 기막히고 골골이 숨막히네, 이곳이 어디메런가 아무래도 몽중이지”
만경다리라는 이름의 ‘萬景’이란 말은 만경창파란 말에서의‘100이랑’이라는 의미를 지닌 ‘넓다는 의미’의 ‘頃’이 아니란다. ‘빛경’자를 쓰는 ‘萬景’이라니, 결국 일만가지 모든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다리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겠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어 시계가 짧고 또 부지런히 앞서가는 일행을 행여 놓칠세라 따라가자니 이리저리 이것저것 따져가며 볼 형편이 안되어 매양 아쉽다. 그러나 이 다리의 중간에서 바라보는 계곡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일만가지 경개를 갈음할 수 있다는 벅찬 감회도 가져진다.
V자로 흘러내린 계곡의 양 산자락이, 오른쪽은 짙푸른 녹음에 감싸인 한 점 티도 없는 청정 숲자락이요, 왼쪽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반듯하게 잘라진 거대한 바위비탈에 드문드문 나무들이 달라붙어 자라고 있는 청정 암벽자락이다. 한쪽이 ‘살(肉)’이며 ‘토(土)’라면 다른쪽은 ‘뼈(骨)’이며 ‘암(岩)’이라 볼 수 있겠다. 한쪽이 ‘청(靑)’이라면 다른쪽은 ‘황(黃)’이라 할 만하고, 한쪽이 ‘음(陰)’이라면 다른쪽은 ‘양(陽)’이라 할 만하다. 저 계곡 가운데의 뒤로 구름속에 가려진 어렴풋한 봉우리는, 아직은 육이나 골, 청이나 황이 아닌‘현(玄)’이고, 음도 양도 아닌 ‘태극’이 아닐거냐는 상상도 해본다.
계곡바닥에 흩어진 대소 바위들을 기세좋게 넘나들며 바로 내 앞으로 저렇듯 하얀거품을 내며 밀려들어오는 계곡물들은, 가물한 음과 양의 조화를 통해, ‘현빈(玄牝)의 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삼라만상을 양육하는 생명의 정수이겠다.
계곡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계곡물도 아름답고, 계곡물에 씻기우는 저 많은 바위들도 하나 하나가 다 아름답다. 어디라도 지나치기가 다 아깝고 아쉽지만, 그래도 여길 지나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도, 저기도, 아까도, 지금도, 다 아름답고 아깝고 감탄스럽다. 문득 이렇듯 금강산을 보면서 일어나는 나의 헤픈 정감이 부끄러워진다. 혹 내 마음속에 변덕쟁이로서의 자질이 다분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보게된다. 아니다. 이곳도 떠나기 싫고 저곳도 헤어지기 싫으니, 평생 주변의 사람들과 아웅다웅 복닥복닥 부대끼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아끼고 이해하고 양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긍정적 성향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집채같은 바위가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곳에 이른다.‘金剛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두 바위의 밑부분에 세모꼴의 공동이 있고 그 안을 통과하여 오르도록 돌계단과 난간이 있다. 듣건대 금강문 밖을 본 것은 기실은 금강을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금강문 밖과 안의 경치가 그만큼 다르다는 것인데, 나로서는‘다정도 병’이라선지는 몰라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 금강문은 보통의 불교사찰에 비유하면 일종의 사천왕문과도 같은 일종의 단순한 경계표지에 해당할 수 있을 뿐이라고 저항해 본다. 산줄기와 계곡을 놓고 생각해 보면 상류로 올라갈수록 점입가경의 승경을 이룬다는 것인데, 상류는 상류로서의 예리하고 정치(精緻)한 아름다움이 있고, 하류는 하류 나름으로의 부드럽고 넉넉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금강문 밖에서의 기암절벽과 계곡을 보면서 얼이 나가도록 감탄하고 찬양한 그 감동이 다 허사(虛辭)가 되어지게 하고, 새로운 풍경에만 마음을 다 뺏긴다면 그는 결코 금강문 아래쪽의 금강에 대한 정리로라도 결단코 안될 일이다.
금강문을 통과한다. 또 하나의 다리가 있다. 직선과 아치가 절충된 아취있는 다리를 건넌다. V자 계곡면의 음과 양, 청과 황의 방향이 뒤바뀐다. 그러나 어디라도 천하절승임은 여전하다. 계곡미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중에 뒤늦게라도 등산로 주변의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들의 아름다움도 새삼 눈에 들어온다. 일개잡수야몰유(一個雜樹也沒有) - 금강에 뿌리를 내리고 그 대지의 젖을 자양으로 자라난 때문인가 나무들 역시 속계를 벗어난 준수한 기상과 맑은 풍모를 지닌다. 계곡을 따라 이리저리 뻗어가는 등산길도 아름답다. 오랜 세월동안 당당히 금강의 한 부분이었을 자연석들을 잘 다듬고 정성스레 괴어서 조성한 산길이라 주변의 풍광과도 순하게 잘 어울린다.
연세가 8순에 들어선 두 분 선생님도 빗속에 우산을 받쳐들고 지팡이를 짚으시면서도 시종 쇄락(灑落)한 얼굴빛을 잃지 않으신다. 우리 한민족의 성산이고 천하명산인 금강산에 설레는 마음으로 원족을 나온 청춘소년이 바로 이 분들이다. 부지런히 걸으신다. 하긴 선계의 기준으로 보자면 세속의 나이 80이란 아직은 미성년의 범주를 채 벗어나지 못한 ‘유치(幼稚)’한 연령일시 분명타 하겠다.
금강문을 나선지 10여분이 지난다. 계곡 왼쪽의 수직암벽 아래로 난 좁은 길을 지나니 오른쪽 계곡의 물길 위로 일부러 잘 쪼개어 다듬어 놓은 듯 판판하고 널찍한 바위가 다리처럼 걸쳐있다. 바위 옆면에“무대바위-선녀들이 내려와 춤추었다는 바위”라고 새겼다. 미상불 10평이 넘어보이는 반석이 반듯하게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니, 누구라도‘무대’를 연상할 수 있겠다. 어디를 둘러봐도 으레‘선계’를 떠올리게하는 금강산의 풍광인지라, 이 천연의 무대에 선녀가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겠다. 서포(西浦)의 소설 ‘구운몽’에서 육관대사의 상좌인 성진이 남악 위부인의 시녀들인 8선녀와 화답하는 장면의 무대로 연출한다면 아주 딱 제격이겠다.
이 무대바위에 이어지는 바로 위는 옥류동이다. 계곡바닥 전체가 한덩이 매끈한 바위인 채 길게 뻗어내리는 비스듬한 폭포면을 타고 옥구슬처럼 타래로 미끌어져내린 물들이 잠시 초록의 옥빛 담소(潭沼)를 이루었다가 넘쳐나는 곳이다. 옆에 있는 석비의 설명을 읽는다. “옥류동-수정같은 맑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린다고 하여 옥류동이라고 한다. 담소의 넓이는 190평, 깊이는 6m, 폭포의 길이는 58m이다.”
연일 내리는 비로 계곡물이 한창 불어있는 지금은 온통 하얀 포말로 굵게 쏟아져내리는 형용이, 구슬들이 흘러내리는 옥류라기보다는, 마치 계곡을 따라 도도하게 휩쓸려 내려오는 하얀 눈사태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비스듬히 누운 폭포(臥瀑)나 옥류동 담소의 크기 또한 경이롭고 이곳을 지키는 장수인양 우뚝 솟은 주변 봉우리의 준수함도 경탄스럽다.
찬탄을 넘어 경배하는 마음으로 다시 5분여를 걷는다. ‘련주담(連珠潭)’이라는 안내비가 있다. “구슬처럼 아름다운 초록색의 두 개 담소가 비단실로 꿰어놓은듯 연이어 있다 하여 련주담이라고 한다”고 새겨있다. 흐르는 물이 많아서인지 두 개 아닌 여러 개의 담소로 보이고, 비단실이기 보다는 두툼한 실타래로 이어진듯 하다.
100m쯤을 더 올라간다. 계곡이 아닌 왼쪽 옆의 높직한 산에서 4단 정도로 꺾어지며 길게 계곡으로 뻗어내리는 폭포가 있다. ‘비봉폭포’임을 알리는 석비가 있다.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한다. 금강산 4대 명폭의 하나이다. 폭포높이 139m”- 석비의 설명내용이다.
이 폭포와 직각을 이루며 같은 담소로 계곡물이 떨어지는 이른바, 누운폭포도 있다. 큰 바위 옆면에 ‘무봉폭포’라고 새겨져 있고 “봉황새가 춤추는것 같다하여 무봉폭포라고 한다” 고 부연하고 있다. 한마리 봉황은 날개를 저으며 춤추고, 다른 한마리 봉황은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정경을 그려보며 두 개의 폭포를 주시한다.
봉황새는 기실 수컷을 봉이라하고 암컷은 황이라 한다고 들었다. 비봉폭포는 길쭉한 자태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형상이니 봉이라는 상정이 가당타 여겨진다. 그러나 무봉폭포는 넙직한 자태로 날개를 너울거리며 계곡에서 춤을 추는 형상이니 봉이 아닌 황으로 봄이 마땅하겠으니, ‘무황폭포’라 부르는게 맞겠다. ‘무황(舞凰)’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즉 4부중생이 다 암과 수의 자웅으로 어우러지는 것이 순리일 것이라는 점도 있다. 이를 일러‘자웅조화미(雌雄調和美)’라는 말을 지어낼 수 있을려나?
비를 맞는 불편함을 무릅쓰는 오늘 우리들의 행보는, 어쩌면 상서로운 구름너울을 둘러써서 한껏멋을낸 봉우리들과 용양호박(龍攘虎搏)의 넘치는 폭포수와 계곡물을 보게되니, 오히려 금강의 신령으로 부터 특별히 극진한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근 10분에 또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이른다. 구룡폭포가 불과 230m 상류에 있다는 지점이다. 좌측으로 굽어든 주계곡(主溪谷)에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틀어지며 우쭐우쭐 쏟아져 내리는 물은 응당 상팔담과 구룡폭포를 지나오는 큰 물이겠다.
정면의 산줄기에서 반듯하게 내려오는 가는 물줄기가 ‘은사류(銀絲流)’이다. 물의 흐름이라기 보다는 한가닥 가느다란 은실이 늘어져 있는 듯 하여‘은사류’라는 이름을 얻었다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한가닥 실이기 보다는 어쩌면 한웅큼의 실타래라는게 좀더 걸맞을 듯한 제법 도톰한 물줄기로 내리고 있다.
구룡폭포의 굵은 물줄기와 은사류의 섬세한 물줄기가 y자를 그리며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빠르고 거친 물줄기를 보노라니, 어느 풍류선비가 일필휘지로 써내리는 그런 글자의 형용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굵게 또 가늘게, 뻗치고 움추리고 긋고 둥글리고 당기며, 주흥이 도도한 가운데 춤추듯 쓰여지는 김삿갓이나 왕오군의 글씨라면 아마도 이런 기세였을 것이다.
고금을 통털어 단연 최고의 서법휘필(書法揮筆)로는 중국 동진(東晉) 때의 선비였던 왕휘지(301~361)가 쓴‘난정서(蘭亭序)’를 꼽는다고 들었다. 수십명의 친지들과 함께 경관이 빼어난‘蘭亭’에서 시회(詩會)를 연다. 권(勸)커니 작(酌)커니 술자리가 무르익어 주흥이 도도한 중에 시회의 서문을 일필휘지(一筆揮之)한다. 술이 깬 다음에 자신이 쓴 324자의 글자를 보고, 이는 결코 자기가 쓴 글자일 수 없는 귀신의 것이라며, 스스로도 크게 놀랐다는 글이 바로‘난정서’이다. 술과 파격과 예술- 술의 신‘Dionysus’가 예술의 후원자로도 그려지는 그리스신화로 보면 이들의 상관성에는 고금동서가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왕오군이 만약 이곳에서 그 시회를 열었더라면 그리고 이 내금강 구룡연 계곡의 삼록수(蔘鹿水)로 담근 미주(美酒)를 마셨더라면 아마도‘난정서’를 훨씬 능가하는 신필‘금강서(金剛序)’를 남겼을 것이 아닌가 한다. 강산지조(江山之助)라는 말도 있으니,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이곳에서 우리 겨레의 어느 시인묵객이 그러한 경지의 ‘금강서’를 남길 수 있을 것임을 기대해 본다.
‘상팔담’으로 가려면 ‘은사류’쪽으로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좌측에서 내리는 물을 벗하며 아홉마리 용의 폭포를 향해 ‘무용교(舞踊橋)’를 건넌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계곡 전체에 걸쳐, 아니 산 전체에 걸쳐 어디하나 범상한 구석이 없었다. 모두가 진(眞)이고 선(善)이고 미(美) 그 자체이다.
발길을 구룡폭포를 향해 옮기면서도‘상팔담’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사진에서 본 상팔담이 정말 멋지던데! 개별행보가 허락된다면 늦지않게 다녀올 수 있는데! 아니지, 너무 많은 것을 탐하면 안되지. 이렇게 금강산에 온 것만도 너무나 행복한 일이지.” 마음속 분요(紛擾)를 추스리며 계곡을 따라 걷노라니 돌연 우뚝 솟은 돌계단과 그 위에 솟구친 높은 정자가 앞을 막는다. 가파르게, 가지런히 잘 쌓은 2단계로 층(層)이진 계단이다. 아랫단계도 윗단계도 각기 얼추 스물다섯 내외의 돌층계인데 일직선으로 곧장 배열되어 있어, 그 위에 세워진 정자는 저만큼 멀리 또 저만치 높게 보인다. 마치 돌로 쌓은 높은 성벽같고 그 위에 세운 성루같다. 시계는 11시50분을 가리킨다.
계단 초입에 있는 석비를 보니, 보존유적 제169호의 앞면 3간, 옆면 2간의 합각식 건물인데‘관폭정(觀瀑亭)’이란다. 폭포를 관망하는 집이라는 의미일테다. 드디어 저 위에 오르면 폭포가 있나보다며 바쁘게 쉰개 쯤의 돌층계를 오른다. 총총히 정자에 올라서는 순간, 홀연히 의식이 흐릿해지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디서 나왔는지 갑작스럽게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는데, 전부가 어두컴컴한 구름에 싸여, 그들의 형체가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고, 뭐라는 와글와글한 그들의 말소리도 들릴듯 말듯 희미하다. 그래도 사람들 자체는 희뿌옇게 보이는데, 짙은 운무속에서, 뭔가 둔중한 굉음속에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순 의아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그런데 폭포는 어디에 있는가’에 생각이 미친다. 사람들 뒤로 난간이 있다. 난간 뒤로 굵고 길다란 물줄기가 겨우 희뿌옇게 드러난다. 아, 저게 폭포인가? 그러고 보니 주변의 군중들이 모두 그 쪽을 향하여 서있는 듯 보인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의 대성폭포와 더불어 조선의 3대폭포로 꼽혀 왔다는 구룡폭포는 이렇게 정신이 얼떨떨한 상황에서 희미하고 뿌연 모습으로 나의 뇌리에 들어온다.
하얀 폭포의 모습이 겨우 희미하게 보이도록 얇은 휘장, 아니 결코 얇지만은 않은 휘장을 쳐서 가리고 있는 것이 구름안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그 순간에는 몰랐다. 우천의 날씨에 드리워진 운무가 아니고, 폭포되어 쏟아지는 온통 하얀 큰 물기둥이 뿜어내는 비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홉마리 용들이 서로 승천을 다투면서 자기 몸을 감추려는 듯 뿜어내고 떨어내는 비말과 비늘조각에 옷이 눅눅해질 무렵이었다.
이 폭포의 윗쪽 협곡에 상팔담이 있다고 하니, 아마도 이 구룡연의 아홉마리 용들이 천상계인 상8담으로 승천하여 제각기 석담(石潭) 하나씩을 먼저 차지하려는 다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들 아홉 영물들이 사방에 흩뿌려대는 것이 비단 포말의 장막만은 아니었다. 지축을 울리는 낙숫물의 진동과 파장 또한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시각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혼몽한 가운데 보고 듣고 느끼는 폭포의 흐름이 어찌 우리 선인(先人)들에게 아홉 용의 승천으로 비유되지 않았겠나 이해가 된다.
2016년 9월 3일의 구룡폭포에는 분명히, 새하얀 아홉룡이 비상을 위해 서로 몸싸움을 벌이면서 강력한 환각성분들을 주위에 온통 짙게 뿌려대는 이적을 행했었다. 엄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아주 온전한 정신으로 이를 증언할 수 있으니, 그 날 그 곳에 있던 수십명의 관폭객들 모두가 다 집단적인 환각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천명하는 바이다. 바로 옆 동료와 얘기를 나누는데도 고함치듯 목청을 높이는 광적인 흥분증상이 너 나 없이 발현됐었고, 물기둥 바로 오른쪽 암벽에 “彌勒佛(미륵불)”이라는 세 글자가 폭 3.6m에 길이가 19m나 되도록 크고 길게 종으로 내려 새겨져 있었는데, 불과 50m쯤의 거리에서도 그 글자를 제대로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총체적 환각사실의 훌륭한 방증사례가 될 것이다. 뒤에 알고보니 이는 海岡 金圭鎭(1868~1933)이 1919년에 쓴 글씨라고 하는데, 마지막 글자인 ‘佛’字의 맨 오른쪽의 내림획을 구룡연의 깊이에 맞추어 13m의 길이로 길게 내려 그었다고 한다.
관폭정은 3x2간의 전통 한옥건물이지만, 건물의 바닥면은, 반듯하게 돌로 높게 쌓아올린 6개의 받침기둥을 이용하여, 지붕 아래를 벗어나 폭포쪽으로 더 넓게 이어져 있어, 많은 북한의 주민들이 정자의 바깥인 앞쪽에 모여서서 폭포를 바라보며 경탄과 환호를 보내고 있다. 몇 사람은 아예 비옷을 입고 있다. 김형근단장이 그들에게 우리가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말을 건네고,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를 타진하는 모양이다. 아주 흔쾌하고 밝은 표정으로 다들 기꺼이 응락한다. Miller보살이 이곳까지 들고온 “북부조국 사찰순례 및 문화유적답사단”이라고 새긴 배너를 다함께 펼쳐 들고, 우리들과 한데 어우러져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린이 2명을 포함한 16명의 주민들이다. 한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성이다.
폭포에서 흩뿌려지는 비말로 모두들 전신이 함뿍 젖어있으나 다들 즐겁게 상기된 얼굴이다. 머리에서, 또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들로 지금 막 머리를 감고 일어선 여인들로 보여진다. 친근하고 예쁜, 촉촉한 얼굴들이다. 피가 물보다 진한 것임을 웅변해주는 정경이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사시사철 조석주야 용틀임의 비늘과 비말에 젖고 있을 듯 여겨지는 관폭정과, 비류직하(飛流直下) 굉음으로 부서져 내리는 폭포성을 차마 뒤로 한다. 내키지 않는 아쉬운 걸음 걸음을 옮기어 하산에 임하는 것이다.
이곳까지 오르면서 쉴새없이 놀라고 감탄하던 바로 그곳들을 다시 지나면서, 아까는 없었던 새로운 차분한 감동들이 샘 솟는다. 소(沼)를 이루며 고여있는 부분의 물을 푸른 ‘옥구슬’이라 하고, 와폭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수렴(水簾)’이라고 형용한 조상님들의 표현에 경의를 드린다. 요세미티국립공원의 “Bridal Veil(신부의 면사포) Falls”의 이름의 의미도 이해된다. 온통 하얗게 직하하는 구룡폭이나 비봉폭의 물줄기를 보노라니, 이는 금강의 비로불(毘盧佛), 신령, 상제(上帝)가 우리 강토의 온갖 모든 생명을 자양키 위해 내리시는 은혜의 젖줄기라는 사실이 깨쳐진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을 젊은 남녀 한 쌍이 나를 스치며 상류쪽으로 올라간다. 여인은 비옷을입었으나 남성은 비에 젖는 것에 괘념치 않는 듯하다. 수건의 한쪽을 한 손에 거머 쥔 남성이 앞장을 섰고, 수건의 다른쪽을 한 손에 거머 쥔 여성이 뒤를 따라 오름길을 올라간다. 앞에서 끄는 남성은 자랑스러움으로 상기된 얼굴이고, 뒤를 따르는 여성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행복감에 듬뿍 젖어있는 모습이다. 그들의 사랑과 신뢰가 아름다워, 소박한 내 축복의 마음을 담아본다.
“단풍목 비에 젖는 구룡연 수려한 골, 실한 사내 앞장서고 환한 여인 뒤 따르네, 스친후 깨달아졌네 나무꾼과 선녀임을.”
사진을 찍고 찍히느라 일행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걸(奇傑)한 구룡연 계곡을 내려간다.
“鳳凰이 날갤치나 외금강 飛鳳瀑布, 龍이 흘린 여의준가 구룡연 連珠연못, 산머릴 감싸는 雲霧 신선세계 분명쿠나.”
목란관에 다다른다. 여기서 점심을 먹는단다. 오후 1시20분이다. 우산을 접어놓고, 4명 단위로 원탁에 앉도록 안내되어, 임원기 김수곤 류마이클님과 동석한다. 계곡의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잘 볼 수 있도록 건물의 한 부분을 계류쪽으로 둥그렇게 돌출시키며 운치있게 지은 곳이다. 우리 말고도 백인을 포함한 손님들이 꽤 많아 보인다. 봉사원들의 자세가 반듯하고 정중하다. 지름이 5cm쯤, 길이가 10cm쯤은 될 크기의 푸른 대나무도막 안에 넣어 익힌 양념밥이 나오고, 직경이 15cm는 될 듯한 둥근 자갈돌을 불에 달구어 그 위에 얇게 뜬 양념고기를 얹어 익혀 먹도록 준비한 버너가 고기와 함께 개인별로 제공된다.
천하절경의 기봉(奇峯)과 계곡과 계류를 보고 느끼며, 맥주를 곁들인 특별식의 호사를 누린다. 진시황의 아방궁이나 조조의 동작대에서 8진미(珍味) 5후청(侯鯖)의 환대를 받는다 해도 이와는 결코 바꿀 수 없겠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 배달겨레의 성산성소(聖山聖所)에서의 성찬(聖餐)에 참예(參預)한 이 시간, 이 감동을 잊지 못하리.
목란관 경역(境域)을 벗어난지 10여분쯤에 불교사찰 신계사(神溪寺)에 이르게 된다. 금강산의 경내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넓은 평활지이다. 방금 버스에서 내리는 많은 북한주민들과 뒤섞인다. 아이들과 여인들이다. 구룡폭포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사람들로 보인다. 국보유적 제95호라는 석비가 있다. 넓고 반듯하게 닦은 사찰진입로는 흙길인데, 길 중심부에 너비 1.5m정도의 폭으로 시멘트 벽돌을 길게 깔아 보행에 이용토록 해놓았다. 모든 절 건물들이 새것인양 선명하고 깨끗하다. 배후를 둘러싸고 있는 푸른 송림속에서 더욱 환하게 빛이난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는데, 민주정부시절에 남한의 조계종단이 참여하여 남과 북의 불교종단이 공동으로 힘을 합하여 재건한 것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들은 번듯한데도 세월의 손때가 묻은 편안함이 없고, 길이나 길섶의 차분함도 아직은 없어 보인다. 건물 가까운 경내의 수목들도 이제 갓 자리를 잡은 듯, 우거지고 늘어진 무성함이 없고 설익은 듯 다소 어설픈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해결이 될 터이다. 남과 북이 손을 잡고 복원한 불교사찰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흐뭇하고 소중하다.
맨 앞의 건물에‘金剛山神溪寺’라는 현판(懸板)이 있다. 획이 굵은 예서체(隸書體)의 필획이다. 낙관이 없다. 일중 김충현의 글씨가 연상되는데, 필획이 강직(剛直)하다. 이 건물을 지나니 아주 넓게 조성한 13층계의 돌계단 위로‘大雄寶殿’이 서있다. 정중앙에 3층 석탑도 있다. ‘大雄寶殿’이라는 묵직한 해서체(楷書體)의 편액(扁額)에 낙관이 있다. 丹山 金載一이라고 씌여있다. 서체는 서로 다르지만 ‘金剛山神溪寺’라는 현판을 쓴 사람과는, 획필이 느리고 굵다는 공통점이 있어, 동일인일 것이라 짐작한다.
만세루(萬歲樓) 칠성각(七星閣) 종각(鐘閣) 요사(寮舍) 등 10여채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부처님께 조국의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축원을 올리고, 새삼 우리민족의 뜻깊은 절이 된 신계사를 뒤로 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확인해보니, 丹山 金載一은 남한의 중견 서예가로 신계사의 현판을 쓴 것이 사실이었다. 신계사 복원에 관한 당시의 남한의 조연현기자가 쓴 기사를 인터넷 게시물에서 인용한다. -“금강산 신계사가 남북 공동으로 복원돼 명산 명찰의 면모를 드러냈다. 남쪽 조계종과 북쪽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이 공동으로 복원을 시작한지 3년6개월만이다. 신라 법흥왕 5년(서기 519년)에 보운스님에 의해 창건돼 장안사(長安寺), 유점사(楡岾寺), 표훈사(表訓寺)와 함께 금강산 4대 명찰로 꼽히던 신계사는 한국전쟁때 소실돼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廢寺址)였으나, 2000년 6·15공동선언때 복원키로 한 약속에 따라 2004년 4월 공사가 시작돼 대웅전, 만세루, 극락전, 축성전, 칠성각, 종각, 나한전, 어실각, 산신각, 요사채 등 모두 14채의 전각이 들어섰다. 지난 2007년10월13일 경내에서 연 남북공동 낙성법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신계사 복원불사는 남북불자들의 마음과 땀이 어우러지고, 남북의 목재, 물, 돌, 흙들이 하나로 모여 소중한 우리민족의 성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이었다’면서 ‘신계사 준공을 계기로 금강산을 통일의 상징으로 지켜나가고, 남북 불교계의 교류와 협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유영선 조불련 위원장도 ‘이번 불사가 제2, 제3의 통일불사로 발전하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복원엔 남쪽이 실제 공사비로만 70억원 가량을 들였으며, 북쪽은 주로 공사인력을 제공했다. 이렇듯 남북이 힘을 합쳐 복원했지만 앞으로 사찰 운영은 남북이 다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지난 2004년 조계종과 조불련이 체결항 실행합의서엔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한다는 내용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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