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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 자료 스크랩 윤치호의《애국가》
주님젤사랑 추천 0 조회 26 12.03.03 2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6183


윤치호의《애국가》

 

 

                                                                               

                                                                                 글 : 오소운 목사

 


1. 애국가는 윤치호가 작사하였다.

1905년에 감리교 장로 윤치호는《찬미가》라는 작은 책을 내었다. 자기가 소속한 남감리회를 배경으로 1906년에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현 송도고등학교)에서 자기가 편찬한《찬미가》의 애국찬송을 가르치며 애국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다.

 

 

  

윤치호 장로

 

필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작고하신 선배 목사님에게 물려받은 재판(隆熙二年, 1908년) 판이다. 표지까지 합쳐서 B5판(182×257) 용지 12매에 좌우 두 쪽씩 실어, 한 면만 인쇄한 후 이를 반으로 접어, 찍개로 두 번 찍고 표지를 붙이었다.


오른 열기에 세로짜기를 했다. 역술자(譯述者)는 윤치호(尹致昊), 발행자는 김상만(金相萬), 인쇄소는 탑인사(塔印社), 발행소는 광학서포(廣學書?), 값은 2전5리(二錢五厘)이다.  머리말이나 차례 따위는 없고, 15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현 찬송가 장수. 띄어 쓰기는 필자가 한 것임.)


1장: 우리 황상폐하 텬지일월 갓치 만수무강

2장: 나 사랑하난 예수 품속에 들이소사(441장)

3장: 성재 성재 성재 전능하신 주여(9장)

4장: 서라 십자가 군사 예수 위해 서게(390장)

5장: 벳네헴 새벽별은 창공에 찬란하고(126장)

6장: 아참 날이 도드니 어둠이 다 가네

7장: 일하세 밤 되나니 아참에 일하세(37장),

8장: 내 믿고 발아난 십자가 속죄한 구세주여(435장)

9장: 그리스도 군사 앞서 나가세(389장)

10장: 승자 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11장: 귀하다 우리 맘 서로 맷난 사랑(525장)

12장: 쥬를 밋난 자의 견고한 터가(합동 434)

13장: 해는 지고 밤은 갓가오니(531)

14장: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15장: ?릴난 어름 산과 인도 산호섬과(273장)



여기서 주목할 것은 1장(우리 황상폐하 텬지일월 갓치 만수무강), 10장(승자 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14장(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이다.


   먼저 1장과 10장을 살펴보자.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에는 5,000 여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만 내외였다 하니 대단한 인파였음을 알 수 있다. 찬양 순서는 감리교 선교사로 와서 배재학당에서 교육선교를 하는 벙커 선교사가 지휘하는 배재학당 남성찬양대가 맡았다. 내외법이 심하여 이화학당 찬양대는 나오지를 못했다.


《培材80年史》에 보면 그 날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던 당시, 그 식순 중에 唱歌 곧 愛國歌를 培材學堂이 맡아서 하게 되어, 갑자기 부를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가사는 尹致昊 박사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벙커 교사가 스코틀랜드의 놀래라이 곡을 붙여서 연습시켜 정초식에 불렀다...."

 

 

 

 윤치호 장로가 미국 애국가 'My Country 'tis of Thee' 곡조에 맞춰 작사한「죠션노래」

 

 

이 식전에서 배재학당 찬양대는 모두 세 곡을 불렀는데, ?죠션노래?, ?독립가?, ?진보가? 등이다. 


먼저「죠선노래?(KOREA)란 어떤 노래인가? 1908년 판 윤치호의《찬미가》1장에 있는 애국찬송(Patriotic  Hymn)이다. 우리말 제목은 ?죠션노래?(KOREA요), TUNE NAME 은 AMERICA인 것이다. (위 악보 참조.)


두번째 부른 ?독립 가? (Independece )도, 윤치호 작사임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됐다. [培材80年史] 에는 윤치호가 작사하여「스코틀랜드의 놀래라이 곡을 붙여? 불렀다고 하였으나, 10장의 애국 찬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부르는 ?애국찬송? 이다.

 

주지하는 대로 ?로렐라이? (Loreley) 는 독일 민요이다. ?독립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노래는 윤치호의《찬미가》10장에 수록되어 있다. 곡명은 AUULD LANG SYNE으로 되어 있다.


?올드 랭 사인? 이란 이 가사는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6-1796)가 작사한 것이라고 전하는데, 막상 당사자인 번스는, 자기 작사가 아니라 ?어느 노인에게서 들은 노래를 다시 쓴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노래 곡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789년에 조지 톰슨(George Thomson)이 펴낸《스코틀랜드 전통노래 모음》(A Collection of Original Scottish Air) 제3부이다.


 

 

     윤치호의 《찬미가》 10장에 있는 [독립가]    

 

 

여기 첫 단어 ‘승자신손’은「聖子神孫」으로서, 성인 성(聖)자를 기호(畿湖)지방에서는「승」으로 발음하였고, 지금도 70대 이상은 聖經을 「승경」이라 발음하고 있다.「聖子神孫」이란 말은, 임금님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는 천손사상(天孫思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노래는 윤치호가 작사한 현 애국가의 시상(詩想) 그대로이다. 특히「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란  후렴 구절은 현 애국가의 후렴 아닌가.


그리고 이 구절은 법으로 국화(國花) 지정을 아니 하고도 무궁화를 우리나라 국화로 인정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중론이다. 이 찬송은 윤치호의《찬미가, 1908》10장에 있다. 배재학당 학생들의「독립가」가 끝났을 때 청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화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제 14장을 살펴보자. 영문 노래 제목은 'Patriotic Hymn' 곧 ?애국 찬송 ?이다. 곡명(TUNE NAME)은 「AULD LANG SYNE」으로서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던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 곡조요, 가사는 현 애국가 가사와 일치한다.

 

왜 10장과 14장 곡조를 같은「올드 랭 사인」곡조를 채택하였을까? 한국의 음계는 궁상각치우(도레미솔라) 5음계로서 Fa와 Si 가 빠져 있다. 서양음악은 7음계이기 때문에 5음계에 익숙한 선조들은 서양 7음계의 찬송을 틀리게 불러 가르치다가 지친 선교사들은「한국인은 음치다」 라는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같은 서양 곡조인「올드 랭 사인」곡조는 정확하게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선교사들은 자기네들의 무지와 오만을 회개하였다고 한다. 윤치호 장로는 이를 간파하고  애국가 곡조로「올드 랭 사인」곡조를 채택하여, 안익태가 작곡하여 해방 후 정부에서 이 곡조를 채택하기까지 40여년 동안 우리 애국가는 이 곡조로 불렀던 것이다.

  

 

 윤치호 장로가 펴낸 <찬미가, 1908> 14장에 실려 있는 현재의 애국가. 몇 군데 가사가 다르다.

 

 《통일 찬송가, 1983》304장「어머니의 넓은 사랑?을 작사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은 경향신문(1955. 4. 19)에 기고한「愛國歌 作詞者는 누구??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春園 李光洙가 島山 安昌浩에게,「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지요?? 하고 물었을 때, 島山이 笑而不答(웃기만 하고 답을 안 함, 필자 주) 하였다, 고 한다…. 그러므로 或은 그 時節의 安,尹 兩氏의 合意로 새로운 歌詞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2)

 

               2)  閔庚培:《韓國敎會讚頌歌史》62쪽에서 재인용.



주요한의「안창호와 윤치호의 합작설?은 한동안 여기저기 회자되었다.

그러나 안창호와 윤치호는 같은 시대의 민족지도자였지만, 평생 한 번밖에는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이 없다. 윤치호는 그의《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1935년 3월 24일 일요일 :

“오후에 중앙호텔에 머물고 있는 안창호 씨를 방문하였다. 그를 단독으로 면담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극심한 반남(反南) 파벌주의자라는 내용으로 자기에게 쏟아지고 있는 비난을 반박했다. 그의 설명이 모두 사실이라면, 안씨와 관계를 끊은 쪽이 오히려 이승만 박사였다. 안씨는 훌륭한 얘기꾼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에게 지역적 적대감을 부추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로 자기 얘기를 마무리했다.”   출처 : 김상태 편역;《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간, 626-7쪽.



윤치호와 안창호 두 사람은, 같은 민족 지도자이면서 평생 한번 밖에 독대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은,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뿌리 깊은 지역감정 때문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온갖 벼슬은 일부 양반 계급인「기호(畿湖) 사람들?3)이 독점하였고,「서북(西北) 사람들?은 완전 소외되어 왔다.

 

3) 기호(畿湖); 우리나라의 서쪽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및 충청남도 북부를 이르는 말이다. 「서북(西北) 사람들? ③[지리]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국어사전).



윤치호는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어났으니 기호사람이고, 안창호는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으니 서북사람이다. 그때 상황을 윤치호의 일기에서 보자.


1933년 10월 4일 수요일

“… 그런데 안씨는, ?일본인들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적이지만, 기호인들은 500년 동안 서북인들의 적이었으므로, 먼저 기호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 안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호파 인사들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있으며, 안씨가 이보다 더한 말도 했다고 믿고 있다….”5)


                                                                      5) 김상태 편역;《윤치호 일기》624쪽.

 


이런 두 지도자가 애국가를 합작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희망적인 환상일 뿐이다. 그림에서 보는 대로, 윤치호는 친필로 자신이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했음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이 육필본은 현재 미국 뉴욕시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만주에서 군관학교를 운영하며 광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동휘(李東輝, 1873, 고종 10, 함남 단천-1935)는 [최신창가집 부 악전, 1914] 이란 노래책을 내었는데, 거기 윤치호 작사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아래 그림에서 보는 대로「國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림 1) 만주군관학교 창가집에 있는 [국가]

 

 

 

  한편 朝鮮日報는 2003년 12월 17일자에서 김용운 기자의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 확인” 이라는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 가사를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1865~1946)가 지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기독교 서지연구가 신인수(서울 회현교회 장로)씨는 ‘윤치호 쟉가 애국가’ 를 수록한 ‘셰계명쟉) 가곡집-무궁화’ 책자를 미국 LA에서 입수해 16일 공개했다. 1931년 LA 종우서관이 펴낸 노래집으로, 편집?발행인이 LA 리들리(Reedley) 지역에서 교육자로도 활약한 한석원 목사다.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scotch folk song’ (스코틀랜드 민요) 이라 적은 올드랭사인 곡조에 ‘동해물과 백두산…’부터 ‘이 긔(기)상과 이 맘으로…’까지 1~4절 가사와 함께 노래집 앞부분에 담겼다. (사진 참조)

 

 

 ‘셰계명쟉) 가곡집-무궁화’ 책과 애국가. 윤치호 작사 라고 적혀 있다.


  서지학자 겸 애국가 연구가 김연갑 씨는 “이번에 발굴한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일제의 한국 강점기 국내외서 출판된 인쇄물 가운데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명기한 최초의 자료” 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도산 안창호가 이끈 신민회가 주관한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애국가 가사와 일치하는 ‘국민가’가 ‘윤치호 작’ 이란 이름으로 실렸지만, 제목이 ‘애국가’가 아니어서 논란이 돼 왔다” 면서 “이번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곡명과 가사, 작사자가 정확히 일치해 애국가연구의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현재 부르는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5년 11월 작곡,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해 오늘에 이르고있다….


 

 


2. 교육구국 운동과 창가집(唱歌集) 사건

한일합방이 되자 각처에서 구국운동이 벌어진다. 그 중에 하나가 교육구국운동이다. 애국정신 교육에 창가를 통한 교육은 단연코 효과적이었다. 이 창가는 주로 반일, 애국, 독립, 민족의식 등을 주제로 하는 노래들이었다.


당시 소학교 학생들에게 많이 불리던「아동십진가(兒童十進歌)?라는 재미있는 노래가 있다. 이 창가는 한 명의 아동이 일부터 십까지 숫자를 하나하나 선창으로 메기면 나머지 아동들이 큰 소리로 부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가사를 보자. 메기는 아동이 “일…” 하면 모든 아등들이 “일본놈이 간교하여” 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일 ― 일본 놈이 간교하여

이 ― 이상타 생각했는데

삼 ― 삼천리 약탈하다

사 ― 사실이 발각되어

오 ― 오조약에 떨어지니

육 ― 대륙반도 분통친다.

칠 ― 칠조약 맺은 놈들

팔 ― 팔도강산 다 넘기니

구 ― 국수(國讐) 왜놈 박멸하자

십 ― 십년 독립투쟁 일어난다.



이러한 창가의 보급에 대해 일제는 혈안이 되어 이를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불시에 학교를 급습하여 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창가집을 압수하고 해당 학생과 교사를 연행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사건을 ?창가집 사건 ?이라고 불렀다. 일제의 수사기록에 보면 많은 창가집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 것들이다.6)


6) 경고기발(警高機發) 제574호(1916. 12. 22). ?사립학교(私立學校)에 있어서 불온교수(不穩敎授)?, 동(同) 제581호(1916. 12. 20). ?불온자 발견 처분건(不穩者發見處分件)? 경고기발(警高機發)제5호(1917.1.9). ?불온 창가집 발견(不穩唱歌集發見)?. pp.14-18. 강영 심: 조선국민회연구(朝鮮國民會硏究)에서 재인용.



①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

② 호수돈 여학교 창가집 사건

③ 온천학교 창가집 사건

④ 일신재 창가집 사건,

⑤ 문명학교 창가집 사건

⑥ 온천학교의 창가보급 사건



그 중에서도「1917년의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이 널리 알려진 큰 사건이었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개성에서 경영한 남감리회 계통 학교로서, 윤치호는 자기가 만든《찬미가》의 애국 노래들을 거기서 가르쳤다.


한영서원 졸업생으로 같은 학교 소학과 교사로 있던 신영순?백남혁과, 같은 학원 서기 오진세, 같은 학원 음악과 교사로 있던 정사인, 그리고 남감리회 권사 이경중들이 애국 창가집을 발행하고 보급하였다하여 1917년 9월 조선형사령의 형법에 의한 불경죄와 그 밖의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자로 판결을 받고 징역과 구류처분을 받은 사건이 바로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 ?이었다.


한영서원 창가집은 윤치호가 펴낸《찬미가》를 중심으로 당시 은밀히 전파된 애국노래들을 모아 등사판으로 인쇄해 만든 노래집이었다. 이 창가집을 한영서원과 같은 지역의 호수돈여숙, 그리고 남북예배당 및 그 밖의 각지의 동지들에게 보급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자료로 쓴 것이다.

이런 노래들이 선교사들과 교회의 애국지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자, 일제는 식민지 조선교육령에 따라 1911년에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였고, 1915년 3월에 기존의 규칙을 대폭 개정하여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함으로서 웬만한 사립학교들은 거의 다 문을 닫게 하였다.


그러나 만주 땅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양성소이니 강제로 폐교시킬 수도 없었다. 미국의 ?조지아 행진곡? (Georgia March) 곡조7)로 부르는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보자.


7) 통일 찬송가 393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 곡조이다. 노랫말 가운데「서북으로 흑룡대원?은 중국,「동해섬중 어린 것?은 일본을 뜻한다. 즉 중국과 일본 모두가 오랜 옛날에 우리 겨레의 교화(敎化)를 받았다는 뜻이다.



<1절>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令節)의

여러 만만 헌헌(軒軒)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2절>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8)

 

8) 독립군 가곡집《광복의 메아리》獨立軍歌保存會 編, 1991 증보판 48쪽에서.


윤치호의《찬미가》는,「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판매 금지가 되었고(朝鮮總督府警務局 [警務月報](1912) 第21號), 선교사들의 인정도 못 받는다. 찬송가라기보다는 애국노래집의 성격이 강하고, 모처럼 얻은 선교의 기회에 일본정부의 방해를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장로회공의회는 이를 미리 알고 1900년에「정교분리(政敎分離)?원칙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던 것이다.9)

 

9) 쟝로회 공의회 일긔[그리스도신문] 제5권 제40호, 1901년 10월 3일자.


一、우리 목?들은 대한 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야 도모 지 그 일에 간셥 아니 ?기? 작뎡? 거시오。

二、대한국과 우리 나라들과 서료 약됴가 잇??、그 약됴대로 졍?? 다 밧으되、교회 일과 나라 일은 ?흔 일 아니라。 ? 우리가 교우 ? ??치기? 교회가 나라 일보? 회가 아니오。 ?? 나라 일은 간셥? 것도 아니오。

三、대한 ?셩들이 예수교회에 드러와셔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젼과 ? 치 대한 ?셩인?、우리 ?라치기? 하?님의 말?을 가?림 업시 황뎨? 츙셩으로 셤기며 관원을 복죵?여 나라 법을 다 ?죵? 거 시오。

四、교회가 교인이 ??로히 나라 일 편당에 참례하? 거? 식힐 것  아니오 금? 것도 아니오。 ? 만일 교인이 나라 일과 실슈?거나  범죄?거나 그 가온? 당? 일은、그 교회가 담당? 것 아니오  가리울 것도 아니오。

五、교회? 셩신의 붓친 교회오 나라 일 보? 교회 아닌?、례?당이 나 회당 샤랑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야 쓸 집이오。 나 라일 의논?? 집은 아니오。 그 집에셔 나라 일 공론?러 모힐 것 도 아니오。 ?? 누구던지 교인이 되어셔 다??셔 공론?지 못? 나라 일을 목?의 샤랑에셔 더욱 못? 거시오。 모든 교우 형뎨들 은 이 권계?? 말?대로 시??기? ?라옵。


어떤 사람은 선교부의 이런 정교분리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포악한 왜정하에서 섣불리 애국운동하기보다는, 먼저 복음을 전파하여 국민을 계도하고, 신앙인으로 키워 강력한 민족교회를 만들기 위한 선교사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심정은 로마제국에 있는 수천만 노예들에게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권고한 바울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1).


이런 말을 했다고 바울을 「노예제도 찬성론자?라 할 것인가?

만일 바울이 노예에게 순종하지 말라 하여 이들이 그의 말을 따랐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인가? 만사에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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