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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의 다리가 짧다 해도 이것을 이어 주면 괴로워한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이를 잘라버리면 슬퍼한다.” ‘장자 변무’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변무란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이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변무인 사람을 보면 불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보는 사람의 생각일 뿐, 결코 변무를 가진 그 사람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원래 그대로 두는 편이 좋을 때가 많다. 남이 고심해서 만든 작품도 함부로 자르거나 늘이면 작가의 의도가 망가지니 조심할 일이다. 짧은 식견으로 괜히 긁어 부스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영천 은해사에도 전해 온다.
은해사에는 추사 김정희(1786년~1856년)가 맘먹고 휘호해 준 ‘불광(佛光)’이란 글씨를 새긴 편액이 전해온다. 그런데 ‘불(佛)’이란 글자의 세로획이 길다고 당시의 주지 스님이 그만 짧게 잘라 편액에 새겨두었는데 훗날 추사가 그 편액을 보고 크게 노해서 다시 바꿨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편액을 보면 추사가 원래 휘호해 준 글씨 그대로 불(佛)자의 세로획이 길게 새겨져 있다.
유명한 산에는 반드시 유명한 절집이 있고, 이름난 절집에는 틀림없이 명필의 글씨가 걸려 있다. 은해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추사의 글씨가 여러 곳에 걸려 있어 야외전시장에 온 기분이 든다. 조선을 대표하는 추사의 멋들어진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감상하는 것도 사찰여행의 특별한 재미가 될 것이다.
◆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인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300년 동안 조성된 소나무 군락지의 솔가지에 내려앉은 눈을 감상하면서 고관대작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 앞에 이르자 맞은편 만세루에 걸려 있는 보화루란 편액이 반긴다.
‘보화루’는 추사의 글씨이다. 속진과 기교를 벗어던지고 모나지 않으면서 살집이 있는 당당한 글씨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보화루를 넘어서면 이 절집의 상징인 대웅전이 보인다.
이 건물에는 원래 대웅전이란 편액과 기둥에 붙어 있던 주련(기둥에 장식 삼아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도 추사의 글씨였다.
특히 대웅전이란 글씨는 추사 후반기의 작품으로 투박하면서도 웅장한 기상이 서려 있어 사찰 편액으로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중진서예가인 학정 이돈흥이 쓴 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아마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때문에 그렇게 바꾼듯하다. 날카로운 방필의 역동적인 필획으로 강인함을 풍긴다. 주련 역시 생존하고 있는 중진작가인 소헌 정도준의 예서로 장식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 걸려 있던 추사가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은 이제 성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지난 1998년 개관한 성보박물관에는 추사의 명작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구경을 잠시 미루고 은해사의 역사와 추사가 이 절집에 글씨를 남긴 연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된 건물들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경북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이 절집의 나이는 1,200살이나 된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운부암 아래 해안평에 해안사라 하였다가 700년 뒤 조선 인종 때(1545년) 큰 화재로 많은 건물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듬해인 1546년 천교 스님이 왕실의 운영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사찰 이름도 은해사로 고쳤다. 지금 사찰규모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몇 번의 화재는 귀중한 문화재를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었다.
특히 헌종 13년(1847년)에는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 극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게 된다.
당시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로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영조는 왕자 시절에 은해사의 부동산을 잘 지켜내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그가 직접 지어 보낸 어제완문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 완문을 보관하고 있었던 은해사를 중창하기 위해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기철이 앞장서 시주하면서 대구감영과 서울왕실의 시주도 계속 답지했다. 그리하여 수 만 냥의 재원을 확보해 3년여 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때 지어진 건물마다 그 건물의 얼굴격인 현판을 추사의 글씨로 단장하여 사찰의 격을 높이려고 한 듯하다. 이 중에서 대웅전·보화루·불광의 삼대 편액이 당대 최고의 명필인 추사의 글씨로 장식되었다.
이 시기 추사는 제주 유배가 해배(1848년)된 60대 중반 시절이었다. 추사는 주지 스님과의 인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은해사와의 인연을 생각해 현판글씨를 써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1862년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 중건기’에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의 묵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도 “문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의 일로향각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이 은해사는 추사의 글씨로 꾸며진 야외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박물관에는 추사글씨를 받아서 새겨놓은 현판들이 고스란히 수장되어 있다.
◆ 불광에 얽힌 일화
은해사에 있는 추사의 글씨 가운데 불광이란 편액에 관해 전하는 일화가 있다.
헌종 14년(1848년) 12월 6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다. 8년 3개월 만의 유배를 마치고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는 당시 은해사 주지 스님의 요청에 의해 몇 점의 글씨를 주었고 뒤에 봉은사에도 최후의 절필작인 판전을 남겼다.
원래 불광은 은해사 내의 불광각에 걸려 있던 현판이었다. 지금은 이 글씨만 남아 있고 전각은 소실되었다.
이 글을 쓴 시기는 유배를 끝내고 서울에 있었던 64~65세(1850년) 때 대웅전이나 보화루편액과 같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봉은사의 ‘판전’처럼 소박하면서도 강건한 기상이 들어 있어서 ‘판전’과 쌍벽을 이룰 만한 추사의 대표적인 편액이다.
현재 이 편액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걸려 있어서 한눈에 들어온다.
실측해보니 세로 135㎝, 가로 155㎝의 대작이고, 불(佛) 자(字)의 가장 긴 세로획이 130㎝ 정도로 길게 뻗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추사에게 몇 번이나 글씨를 요청했지만 글씨가 내려오지 않자 불상을 하나 가지고 갔더니 크게 웃으면서 아랫사람을 불러 벽장 속에 수십 장 써놓은 불광이란 글씨 가운데 잘 된 것을 골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골라온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 추사가 직접 골라서 주지 스님에게 내어주었다.
주지 스님은 그 글씨를 받아 나무판에 새겼는데 나무가 작아서 그랬는지 불(佛) 자의 마지막 세로획이 너무 길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길게 뻗어내린 세로획을 짧게 잘라 光(광) 자와 비슷한 크기로 새겨서 걸어 놓았다.
훗날 추사가 은해사에 와서 그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 편액을 떼어 내리게 한 뒤 땔나무로 법당 마당에서 불 질러 버렸다.
주지 스님은 그때야 추사가 크게 화를 낸 이유를 파악하고 사과한 뒤 원본 그대로 세로획을 길게 하여 다시 새겨 걸었다고 한다. 지금 성보박물관에 있는 편액이 바로 새로 판각한 그것으로 보인다.
이 편액은 송판 4장을 이어붙인 대작으로 추사의 문자에 대한 조형감각을 엿볼 수 있는 역작이다. 광(光) 자의 윗부분 두 점을 다르게 처리했으며 아랫부분을 글자의 폭 정도로 비워둠으로써 공간을 살린 여백미가 일품이고, 불(佛) 자의 인(人)변은 짧게 했고 세로획 두 획 가운데 한 획도 왼쪽으로 짧게 삐쳐 변화를 구하면서 마지막 세로획은 팽팽한 활시위처럼 힘차면서 길게 뻗어내림으로써 기운미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 핵심은 바로 마지막 세로획인 것이다. 단조로운 두 글자지만 전체 장법(서예작품의 글자 사이나 글줄 사이의 공간경영)으로 보면, 글씨가 있는 부분은 꽉 차게 했고 아랫부분은 비워 둔 허실 처리가 일품이다. 그런데 이런 추사의 의도를 모르고 아랫부분을 잘라버렸으니 화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은해사에 갈 기회가 있을 때 본사와 백흥암 등에 남아있는 추사의 글씨를 찬찬히 살펴보면 오래도록 감흥이 남을 것이다. 특히 성보박물관에 있는 불광을 감상하면서 160년 전 추사의 필의를 느껴보면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정태수
한국서예사연구소장·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