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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정리 및 독후감
1980년 5.18민중항쟁을 아주 얕게 경험(?)하면서 어렴풋하나마 현대사 모순을 인식하고 군대에 다녀오다. 우리 사회의 현대사모순을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군생활을 체험하고 부딪히면서 1984년 2학기 복학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의 현대사의 모순을 단편적으로 조금 알고 있었는데 복학 후 독재정권하의 유화정책으로 학원자율화조치와 일정한 정도의 학문자유화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의 모순을 폭로하는 책들과 진보적인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의 민족 모순을 쓴 책들 중 가장 충격으로 다가온 해방전후사인식 Ⅰ~Ⅴ권과 모교수가 쓴 한국 근현대사 등등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현대사의 모든 인식을 완전히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공교육에서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날조되게 배웠고, 이는 민족과 민중이익을 배반한 친일앞잡이들이 그대로 민족이익보다 미국이익을 위해서 봉사했는가를 안 순간 얼마나 분노했는가
이는 자연스럽게 대학내 시위현장으로 참가하다. 온몸으로 현대사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위현장에서 투쟁하는 선후배(주로 후배)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당시 운좋게 중앙도서관 고정석에 앉아서 현실모순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사회과학서적을 주로 보다.
근현대사에 관한 자료를 어느 정도 검토한 이유는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이다]라는 말처럼 과거는 과거로만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현대사모순이 현재 진행형이고 이를 납득할 정도의 해결이 없으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인식은 대학에서도 시위현장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교육에 몸담으면서도 전교조에 일찍히 뛰어들다. 전교조에서 잠시 아주 작은 직책인데 당시 상황이 매일 나가게 만들어서 나가다. 당시는 전교조 활동한다는 이유로 담임이고 보충수업도 없는지라 부담이 덜한 때여서 가능하였다.(담임은 참교육으로 반학생들과 함께 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주지 않았고, 보충 수업은 암기식 주입식 교육과 연합고사에 반대한 이유는 있었고 조금은 강제성이 있었다.) 이 때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여 회원으로 가입하는 자료가 있기에 기꺼히 가입해서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이론에 관심이 없이 현장에만 매몰되어 실천하면 맹목적이 되기 쉽고, 현장의 실천이 없이 이론만 논하면 관념적이 된다는 말이 나를 능력 등은 미미하나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다.
학교 다니면서 읽었던 <아리랑>은 여기 나온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산(본명은 장지락)이라는 아나키스트를 취재해서 미국기자가 쓴 책이었는데 1980년 중반 대학 내 인기리 읽힌 책이었다. 이 책에 나오듯이 독립운동을 위해서 대다수 사람들은 재산과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민족해방투쟁하는 모습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동시에 같은 처지에 있는 베트남도 동병상련인지라 여대성이 미제에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여준 <사이공의 흰옷>도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을 생생히 그리고 있었다.
오래 전에 교사 생활하는 도중에 <백범일지>를 보았는데 백범은 너무 우측에서 민족해방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리 감동 있게 보지는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을 위해서 온 몸을 바친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계몽소설인 <상록수>로 학생들에게 잘 알려진 심훈이 만주 독립운동가둘의 심정을 노래한 가사가 인상적이었다.물론 나도 도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시골에서는 교양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중2때 이 책을 우연히 구하여 보면서 이런 세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그래서 어떤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광수의 전집이 10권이 친구집에 있어서 중 3 겨울방학 때 다 보다.
특히 북의 주석이 자서전이라할 수 있는 <새 봄을 기다리며>라는 책에서 항일독립투쟁과 북조선 건설과정을 엿볼 수 있다.
<해방전후사 인식>을 학교 다니면서 읽을 때 조금은 의아해 한 점은 임정이 주류가 우측에 있는데도 당대 민중모순인 토지문제를 매우 진보적인 관점에서 해방 후 해결한 주안점을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임정에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독립운동세력도 있었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투쟁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1987년 개정된 헌법으로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찾고 있는데 실은 자본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우측에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말의 시대상황과 토대를 바탕으로 의병활동을 하고 이를 일정 정도 비판적인 계승발전하면서 한일강제병합되면서 만주지방에서 어떻게 독립기지을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장기적으로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다양한 세력들이 간도 등지에서 기지를 만든다. 대한민국 군대도 마땅히 독립군에서 광복군ㅇ에서 그 정통성을 갖고 있다면 현재처럼 주체성을 상실하고 병사들에게 민주적인 생활은 하나도 없고 오직 명령만(자주 부당한 명령도 있다.)이 있고 여기에 더해서 부당한 대우와 탄압이 항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제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일제 부역하면서 얻은 노예근성(식민지)과 제민족.제민중을 위하기보다는 관리대상이나 탄압대상으로만 보아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성과물이 신흥무관학교이다. 이를 통해서 무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무력양성에 힘쓰다. 이 세력이 주축이 돼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그리고 광복군 등에 핵심인자로 참여한다.
식민지를 경험하여 해방된 국가들은 마땅히 민족해방투쟁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과세력들이 새로운 국가건설에 주역이 되어야 하는데 남쪽은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민족과 민중이익에 반하는 민족반역자들이 주역으로 등장하여 일제잔재청산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나마 부친의 친일을 사죄하면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를 열어 제낀 선생이 있어서 그나마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빛을 봐서 최소한 민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외세의 앞잡이가 누구이고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행을 기록하여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이를 삼가는데 우선 목적이 있다.
물론 제대로 된 국가라면 이런 민족반역자들은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받았어야함에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는데 이런 기록이나마 가지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 사전도 이 세력들의 방해로 국가의 쥐꼬리만한 지원도 무산되어서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귀중한 책이다. 그런데도 개인구입은 차치하고라도 학교 도서관, 공공도서관 보급률이 아직도 매우 미미하다니 우리 의식수준을 보여준 것 같아서 아쉽다.
이번 답사도 작년에 이어서 2년째인데(횟수로는 몇회인 것 같다.) 명색히 대한민국정통성이 임정에 있는데 이를 외면할 수 없어서인지 답사비를 얼마 지원할 모양이다.
앞으로는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생들도 교사와 결합든지 전교조나 진보적인 단체와 결합해서 임정과 신흥무관학교 유적지에 갈 수 있도록 국가가 앞장서서 해야 되지 않을까?
이 책 저자는 학생들에게 이런 내용을 과제물로 내어주면 무관학교를 조선말 몇 번째 안되는 거부들이 온 재산을 다털어서 학교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 하고 본인도 투쟁하다가 나중에는 굶어 죽고 그 가족들은 몇 푼이 없어서 질병에 걸린 아이들을 죽게 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외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이해하겠는가?
이는 우리 사회가 일제앞잡이에 의해 민족과 민중이익을 위한 교육철학이 없기 그렇고 이는 학생들에게 이런 교육보다 사회를 이런 모순을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닌 단순하고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고 이를 정답 맞추게 하는 로봇(노예?)이 되게하는 교육상황이기에 그 사회가 당면한 모순을 동료나 선후배.이웃들과 함께 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겠는가?
1930년 이전까지는 신흥무관학교 출신과 임정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벌어지나 임정이 27년동안 임시정부로 장기간 투쟁한 점은 높이 살만하나 이미 1921년에 국내민중에 토대로 독립운동할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연통제는 일제탄압으로 붕괴되고 무관학교는 다행히 더 길게 만주지방에서 이주해온 교민들을 기반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만주를 침략해 온 일제에 의해서 세력이 매우 악화된다.
이럴 때 1930년 이후 해방까지 국내민중을 일정하게 기반하여 투쟁한 사회주의 세력의 독립운동은 아예 우리 교과서에서는 사라지고 없으니 우리 역사를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떤 내용인지 검토해보자
1910년 일제에 의한 한반도의 강제병합은 조국을 되찾으려는 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독립운동 및 독립군의 기본역량 또는 토대를 조성하고 배양하는 기지를 건설하는 운동인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이 가장 호응을 받다.
즉각적인 무력항쟁ㅇ은 비현실적이고 무모하고, 국내에서는 비밀결사운동은 가능하지만 기지건설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이 기지운동은 의병투쟁의 한계를 극복하는것이다. 무력양성을 목표로 하되 경제력을 포함한 총체적인 실력양성이고,근대적인 교육과 함께 의식의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자주독립국가라면 주변부국가이기에 자본-임노동을 위로부터 형성하여 시민사회를 만드는 우파적인 근대국가를 만들어 가겠지만 당시에 독립운동 세력들이 대다수가 사회주의 영향을 받고 있기에 낮은 생산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대기업에서 채용된 효율적인 회계제도나 과학기술발전에 매진하되 이가 곧 자본주의에서 시행하는 물질적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하는것이 아니라 도덕적 인센티브를 도입해서 높은 의식과 사상무장속에서 생산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새 국가 건설을 해야할 것이다.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전국민을 상대로 하여 근대민족국가의 의식을 창출하고, 근대적인 군대는 외침에 대해서 민족과 민중이익을 보위하는 민족군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맞게끔 산업화가 진행되고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건설이 되고 상황에 따라 집단 속에서 개인자유를 일정하게 보장되는 사회가 되겠지.
이는 근대민족국가 건설이 자주독립국가에서 가능한 일이고, 식민지상태에서는 이런 정상적인 국가가 가능하지 않기에 봉건질서를 지양하고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제 상황을 염두해면서 투쟁을 해야할 것이다.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을 위해서는 물질적 토대가 너무 빈약하기에 사상무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기지건설운동은 즉각적인 무력항쟁은 비판적이엇지만,준비론 또는 실력양성론과 대비된다. 후자는 군사력 양성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실력양성은 자본주의 경제력양성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독립을 먼 훗날의 일로 상정하고 있었기에 전자와 달리 독립운동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신민회 일부 간부들과 독립운동지사들이 독립운동기지건설에 고민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만주에 기지건설을 위해 답사도 다녀오는 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이회영 6형제와 이석영의 재산은 당시 조선에 내놓으라는 갑부였는데 이를 모두 처분하여 기지건설과 운영 모두 바치고 다음으로 영남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이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기지건설로 만주로 정한 이유는 한반도에 인접해 있고, 개간할 땅이 많으며 배일적인 이주자들이 많고 중국과 한국이 가까운 사이라는 점, 권력의 공백이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부여,고구려.발해가 건국한 지역이어서 민족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삼원포일대가 기지건설의 요람이 된 것은 고구려중심지라는 것과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라는 점이다. 이점은 중국당국의 주시도 적게 받고, 일본관헌이 통제하기도 어려웠다.넓은 평야지대는 병농체제를 꾸려갈 수 있다.그러나 혹독한 자연조건인 겨울추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입적과 토지매매문제는 당시에 이회영이 원세개를 통해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그리고 중국인의 의구심과 배척운동을 해소할 목적으로 변장운동을 전개하였고,와신상담하기 위해서 역사의 변장을 하였다.
신흥무관학교가 견고한 이유는 독립운동의 주체가 유력인사 였고 이들이 큰일을 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배수진을 치고 온 것이었다.
서간도 사회적 경제적 조건은 소작농으로 가난하기 배일성향이 강햇고.빈한한 소작영세농으로 계급이 분화되지 않았고 이들 농민 대부분이 평안도 사람으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균일적인 면이 컸다. 이석영의 재력과 둔전제와 같은 방식의 채용, 자치조직도 중요한 기반이었다.대의아래 잘 단결되었다.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 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이주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제도 할 필요가 있어서 민호를 배정하고 구획을 정해서 자치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에 경학사가 긴밀히 관여하였을 것이다.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신흥이란 신민회 신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자를 합한 것이었는데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하겠다는 의미도 함축되었을 것이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중등교육을 교수하는 본과와 무관훈련을 시키는 군사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3년 기한의 본과에서도 군사훈련에 비중을 두었다.
시설과 무장의 결핍을 메울 수 잇는 방법은 엄정한 군기확립과 임전태세, 철저한 정신교육이었다.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가 울리면 3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가 인원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체조를 하였다.체조와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식탁에 둘러 앉았다. 주식은 부유한 중국인들이 오래 저장해두어서 상한 가축용이나 다름없는 윤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좁쌀이었다.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뿐으로,썩은 좁쌀밥 한 숟가락에 콩장 두어 개를 입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었다.의복과 긴긴 추위에 보수도 없는 교직원은 단의초모를 쓰고 교육을 시켰고, 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훈련에 열중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나 부민단 관계자들은 각처에 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엿다.비교적 소원한 지역인 장백현이 18교에 382명인 것을 제외하면 학생들이 통화현과 유화현에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졸업생은 1919년 이전까지 8백명 내외로 추산된다.
신흥무관학교에 군사훈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국내 여러 지방에서 오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지역사람들이 없는 것은 대한제국 말기에 이 지역에서 치열한 의병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희생자가 많았던 것이 주 요인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신흥학우단)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 또는 유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 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백서농장은 이원적으로 운영되었다.교육과 훈련은 훈독의 감독하에 시행하고, 작업과 농사일은 장주의 전관하에 농감의 지휘를 받았다. 제 2군구로서 건설된 백서농장은 부민단이 상급기관이라고 할 수 있고 신흥학우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사실상의 독립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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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년에는 3·1 독립시위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교세를 확장했다.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도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전쟁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중국이나 일본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또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20년 이후 상해임정이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현재 교하현)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대황지(현재 남강자)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영안현 신안촌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 나갔다.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경학사-부민단-한족회가 강력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김학규는 경학사를 만주 한국인 혁명결사의 개시로서 한국혁명운동의 효시라고 평가했는데, 경학사(耕學社)는 이름 그대로 경제적인 실력을 쌓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근대교육을 시키고 무력을 양성하기 위해 서간도에 온 망명자들이 1911년에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 노천회의에서 조직했다. 경학사를 설립한 직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경학사의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었다.
1915년말 1916년 초에는 서간도 주민자치조직으로, 만주 부여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할 결사를 세운다는 의미와 이주민들을 부양시킨다는 뜻을 가진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부민단은 10호에 십가장을, 백호쯤 되는 마을에는 백가장을, 큰 마을에는 천가장을 두었다. 일제의 한 자료에는 부민단에 1,229호, 6013인이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부민단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고국에서 오는 동포를 맞이하여 살게끔 해주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중국인과의 계쟁(係爭)사건을 관장하는 등 행정처리뿐만 아니라 사법처리까지 맡은 명실상부한 주민자치기관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왕성해짐에 따라 부민단을 확대 개편한 것이 한족회다. 한족회는 매호에 의무금을 내게 하고 민·형사 소송까지 맡아 완연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족회는 고산자에 새로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지어 본교로 했고,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인 이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한족회와 같은 시기에 조직된 군정부는 독립군 조직이었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교장 교감 교관 교사가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무관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간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서간도에는 많은 학교가 있었다. 한 기록에는 20호 또는 몇 십호만 거주해도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이주민들 자녀를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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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 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학우단은 무관 양성 등 독립운동 인재 양성의 참뜻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신흥무관학교 및 분교와 지교, 부민단이나 한족회에 적이나 적의 앞잡이가 침투하는 것을 막는 자위조직으로도 기능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와 분교, 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을 고취
하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 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 및 분.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 역할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 고취의 주된 미디어였던 <신흥학우보>의 역할이 컸다. 서간 지역 한국인인 재학생들로부터 졸업생.이주민들로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원과 이주민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혁명이념을 선전하여,학술을 연구하여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싸울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제2군영으로 백두산 서쪽 쏘베차에 세운 백서농장도 신흥무관학교의 성가를 높이 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동삼을 장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한 백서농장 은 4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인적미답의 메마른 고원에서 필설로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극히 힘들고 고된 훈련을 했다. 이들 중 채찬(白狂雲) 등 상당수가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활약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이건 6·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운동이건 모두 다 불법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 내내 국내에서는 지하투쟁의 형태로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동남아식민지를 둔 나라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세웠기에 인권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에 식민지에도 일정하게 최소한의 천부인권을 부여하려 했던 반ㅂ면 일제처럼 봉건사회에서 바로 위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하여 인권 등에 대한 합의가 거의 없었기에 식민지에 대해서 철처히 탄압일변도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은 후방 식민지 독립기지를 건설하는데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이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에 대해서 민중들의 시선이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는 만주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저렇게 운동가의 목숨부지도 힘들지만 그 가족도 위험에 처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도 다 거덜난다는 사실을 통해서 가까이 하려고도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는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나 유족이 어떤 처지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가를 보면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7.19 11:20 동신여고 교육정보실에서
집에서 앞부분 머리말은 대부분 적었는데 간단히 정리하려고 하여도 집중이 되지 않아서 오늘 부득히 집에 있는 책과 자료를 학교로 가져와서 정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