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후광 김대중 평전/[12장] 시련의 제1차 해외 망명시절 2009/09/20 08:00 김삼웅이른 시일 안에 귀국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미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미국의 각계 저명 인사들을 만나 인맥의 구축이 필요하고 여론의 조성이 시급한 과제였다. 오래전부터 교류해 온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만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보스턴에 가서 하버드대학의 에드윈 라이샤워와 코헨 교수를 만나고, 이들을 통해 미국의 아시아 정책 형성에 영향력이 있는 상하 양원 의원과 민주ㆍ공화 두 당의 원내총무 등을 소개받았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고 미국을 방문했을때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과 하버드대학교 코웬 교수의 환영을 받고 있는 김대중 후보.
박정희는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단독출마하여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정희가 무력을 동원한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 다시 개헌을 단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 밖으로 고전한 데다, 야당에 의한 국회의 비판기능의 활성화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이런 내막을 재미 교포들에게 널리 알렸다.
김대중은 해가 바뀐 1973년 1월 5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항의 활동과 성명을 낼 경우에도 워싱턴보다 도쿄가 뉴스를 타기 쉽고, 한국정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주석 7)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 사이 국내에서는 유신체제의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한 지역에서 2명씩을 선출하고 3분의 1 의석은 대통령이 추천하는 ‘유신국회의원’으로 충원하였다. 신민당은 진산계가 당권을 장악하고, 반진산계 일부가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임했다. 선거 결과는 전국 73개 선거구 146개 의석 중 공화당 73석, 신민당 52석, 민주통일당 2석, 무소속 19석이었다. 대통령추천 73석 의석은 유신정우회라는 별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공화당의 2중대’, ‘박 정권의 원내 유격대’라는 평을 들으며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번 선거에서 38.7%의 득표에 불과했지만 실질적 의석의 70% 정도를 차지했다.
김대중은 이같은 국내의 정세를 지켜보면서 결코 국민이 유신체제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더욱 강력히 유신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한다.
지난 197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여당은 총 득표수의 52%를 획득했다. 그에 비해 이번의 득표율은 38.7%로 국민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졌다.
나는 커다란 용기를 얻었고 박 정권에 대한 고독한 투쟁을 일본에서 더욱 넓혀나가기로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박 정권의 독재정치와 그것이 한ㆍ미ㆍ일 3국의 공동이익에 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정치실정을 호소했다. (주석 8)
김대중은 일본 정부인사와 여야 의원들을 폭넓게 만났다.
그 중에는 건설부장관 기무라 다케오와 전 농림부장관 아카기 무네노리 의원이 있었고, 특히 우츠노미아 도쿠마 의원은 자신이 주재하는 아시아ㆍ아프리카 연구회의 멤버들을 소집하여 김대중을 초청하여 연설을 하도록 주최하였다.
또 사회당 이시바시 마사시 서기장을 비롯하여 많은 의원들을 소개받아 아시아문제 등을 토론하고, 재일 한국청년동맹 동기강습회와 민족통일협의회, 민단동경본부가 공동주최한 간부 연수회에서 국내 실정을 소상히 밝히는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회에는 많은 교포들이 참석하여 상황을 이루었고 성공적이었다.
김대중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 <중앙공론>을 비롯하여 각종 매체에 통일문제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일본의 매체들은 크게 보도하였다.
ㅇ <한국 계엄령에 대하여 직언한다>(주간 아사히, 1972년 11월 3일자)
ㅇ <나는 한국의 계엄령에 분노한다>(선데이 마이니치, 1972년 11월 5일자)
ㅇ <김대중씨 한국의 위기를 호소한다>(주간 포스트, 1972년 11월 17일자)
ㅇ <분노하며 한국의 현상황을 호소한다.>(세까이, 1973년 2월 2일자)
ㅇ <민중은 침묵하지 않는다>(아사히 저널, 1973년 2월 2일자)
ㅇ <민주화야말로 남북통일의 전제>(이코노미스트, 1973년 2월 6일자)
유신 쿠데타 직후 야당 정치인들이 당국에 끌려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거나 아예 시류에 영합, 숨을 죽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김대중은 해외라는 지리적 강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고통받는 동지들을 멀리서 성원하는가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박정희의 오늘을 규탄하기에 바빴다.
그가 유신 쿠데타 직후 처음 한두 달 동안 얼마나 정력적으로 활동했는가는 그와 접촉한 몇몇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곧 알 수 있다.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그는 흡사 일제에 조국이 강점되었던 시절 해외에 망명, 독립투쟁을 하던 선열들을 생각하며 민주회복 투쟁을 벌였다. (주석 9)
김대중은 3월 25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러 곳에서 강연 초청이 있었고, 무엇보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국본부의 결성을 위해서였다. 미국과 일본, 유럽 여러 지역에 한민통을 결성하여 이를 토대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본격화하려는 계획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김대중은 4월 19일 김상돈ㆍ임창영, 그리고 5ㆍ16 뒤 반혁명으로 몰려 미국에 망명한 최석남 예비역 장군 등과 뉴욕에서 4ㆍ19혁명 기념행사를 갖고, 시애틀ㆍ시카고 등 지역에서 교포와 유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였다.
4월 29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는 연설 뒤 박정희 정권타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을 요구하는 교민들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5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인터네셔널홀에서 강연할 때는 주미 한국영사관 부영사가 한국계 폭력배 10여 명을 데리고 강연장에 난입하여 소란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때부터 한국의 중앙정보부(KCIA)가 김대중의 뒷조사를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 한국 청년이 미국 폭력배들에 의한 암살테러 가능성이 있으니 각별히 대비할 것을 바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국본부를 결성했다. 임창영ㆍ안병국ㆍ동원모ㆍ김성동 등 30여 명이 참석, 김대중을 명예회장에 선출하였다.
한민통은 명칭대로 한국의 민주회복과 통일을 위한 교포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뒷날 한국의 독재정권과 어용화가 된 사법부는 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빌미로 삼았다. 한민통 미국본부를 결성한 김대중은 7월 10일 일본본부 구성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차 망명 기간 중 세 번째의 일본행이었다.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군사 독재에 짓밟히게 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보았다. 1970년대 초에는 군사독재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군사독재의 도미노현상이었다. 베트남ㆍ라오스ㆍ캄보디아ㆍ버마의 군사쿠데타와 필리핀의 계엄통치에 이어 한국에서도 유신쿠데타가 일어나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인도와 일본 뿐이었다.
김대중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는 상극이면서 결과적으로 공산화를 재촉하게 되는 군사독재가 반발하게 되는 이유를 첫째,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잘못, 둘째, 민중의 힘에 의하지 않는 민주제도의 이식, 셋째, 민주적 지도자의 부재를 들었다.
당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중의 바람과는 달리 반공만 내세우면 독재정권이나 부패정권을 가리지 않고 지지해 주고 있었다. 정권이 반공체제이기만 하면 막대한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독재자들은 이렇게 지원받은 물적 기반과 무기로 제 나라의 국민을 탄압하는 데 사용하였다.
주석
7) <김대중 자서전 (1)>, 301쪽.
8) 앞의 책, 303쪽.
9) 김진배, <인동초의 새벽>, 161~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