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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설 오탁번
강설(降雪)&
외출의 발 끝에 내리는 겨울 흰빛 휴지부(休止符),
공상(空想)을 한컵 마시고 나온 나를
세종로 한복판에 토해 놓고
버스는 시간의 노선 위로 달아나 버렸다
서류와 기름끼 등 이런 것들을 차려입고
강한 자들은 기관의 정문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들을 신고하는 시민에게
검거해낸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수사관에게
내 포케트에 든 공상(空想)의 음료를 주고
약한 자여
너희들은 지금 휴지부(休止符)를 집어들지만
너희들 본능의 체온 때문에라도
흰빛 겨울은 수포(水泡)가 되고
다시 난해한 곳으로 승차하기 직전
세종로는
가벼운 신(神)의 완구(玩具)가 덤핑으로 판매되는
흰 시장이 되었다
내 의식의 점포 안에도
겨울의 본능은 하강(下降)하고
약자들의 흰 빛 거래가 활발해진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개똥참외 오탁번
개똥참외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자유가
싱싱한 평화가 시장바닥에 쌓여 있는 주말
배낭에 한 주일의 불만을 담아
버너에 일곱밤의 성욕을 채우고
떠났다 시외로 가는 버스에 실려
이제하의 푸르디 푸른 냉소는
내 방 오른편 벽을 사시사철 간지럼 태우는데
그대는 아는가, 개똥참외를
참외를 씨채 먹은 사람이
오 하나님 당신의 양이 그 참외를 먹고
된똥을 누면 참외씨는 무슨 보석인 양
빛나며 대지에 떨어져서
수캐든 암캐든 운수좋은 날의 개가 그 똥을 먹고
들판을 달리며 달리며
교미도 붙고 별 지랄 다 하고 나서 컹컹 짖으며
개똥을 눌 때까지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깊고 질긴 어둠을 헤치고
다시 나오는 씨앗
그 빛나는 자유가 흙에 묻혀서
또 그 가을과 겨울의 어둠을 지내고
이듬해 봄에 싹이 트는 진실을
들판에 돌서덕에 밭두럭에 자라는 개똥참외의
그 개같은 똥같은 참외같은 보이지 않게 기어다니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요즘 자유의 드넓은 높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모를 것이야 오늘밤 그대의 냄새나는 화실에서
푸른 고름이 낭자한 냉소를 아이스크림처럼 빨며
저 청조나 영은이의 아름다운 바람을
잡초들의 보이지 않는 뿌리를
씹어볼까나 마셔볼까나 조져볼까나
화가도 시인도 작가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이 시대의 무이한 예술가
이형 제하여,
마흔을 넘기고도 죽지 않는 흔한 시인들이여
개똥참외를 쪼갤 과도를 준비하라
더러운 보이지 않는 자유를 위하여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어둠 속에서 벌어질
흔적도 없는 빛나는 자살을 위하여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거울 오탁번
거울&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
이렇게 말한 시인이 있었지
띄어쓰기도 할 줄 모르면서
우리 현대시사의 문법을 다 띄어놓고 죽은
버릇없는 시인이 있었지
꽃샘추위가 밀려오는 오늘 아침
면도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까
앗!
낯모르는 왼손잡이 늙은이가 나를 바라본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하는
흰수염 깎여나간 낯선 늙은이!
당신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올봄 시골형님 회갑잔치에 가서
술이 취해서 어머니 부르며 울던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당신이 아니다
쉰한 살 먹은 늙은이가 아니다
어린 여자와 소주 마실 때
초저녁에는 삼십년 차이의 세월이지만
한 시간마다 십년씩 세월은 좁혀져서
나는 그제나 이제나
밤 아홉시쯤 되면 팔팔한 청년이 된단다
말도 안되는 사랑
말도 안되는 말로 고백하다가
넘어져서 코가 깨지는 무모한 젊은이란다
선생님 취하셨네요
좋은 글 많이 쓰셔야지요
아니다 아니다
나는 안 취했다
나는 안 늙었다
이렇게 소리치는 나는
거울 속의 당신이 아니다
餠銓? 세계사, 1994
겨울강 오탁번
겨울강&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餠銓? 세계사, 1994
겨울 경포에서 오탁번
겨울 경포에서
겨울 경포의 모습을
연필화 그리듯 꼭 그대로 글로 그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시인이 된 지 스무해가 지났는데
나는 왜 아직도
경포의 모습을 그릴 수 없는 것일까
흰 파도 부서지는 겨울 바다
배고픈 갈매기 날아오르고
수평선 너머 하늘
너무나 아득하다
그리운 사람은 서울에서 꼼짝않고
강릉에 사는 옛 친구는
허리가 아프다
겨울
바다
남자
여자
하느님은 덕대에 걸린 동태처럼
내장 다 빼앗기고 죽어서
겨울 바다에
나 홀로 서면
세상이 너무
무섭다
餠銓? 세계사, 1994
겨울비 오탁번
겨울비
눈이 펑펑 쏟아져야 할 텐데 비가 온다 소한 대한 추위에 불알까지 꽁꽁 얼어야 할 텐데 비가 온다 겨드랑이에서 게을러 터진 땀냄새 나고 지난해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움도 다 젖는다 흰 눈 내려서 이 세상 어둠 모두 뒤덮어서 쑥덤불 같은 내 마음도 흰 도화지처럼 되어야지 순백의 마음 엮어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수 있다 한겨울 깊은 저녁인데 비가 내린다 슬픈 사람 슬픈 사람끼리 눈을 맞으며 저 멀리 원시림이 매몰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눈을 밟으며 귀가 맑게 틔였던 지나가버린 아침을 겨울비 맞으면서 찾을 수가 없는 슬픔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그때 그 이름 저녁해 빛날 때마다 그토록 숱하던 그리움도 이제는 철 지난 겨울비로 흉칙하게 흩어진다 눈 맞으며 달려가고 싶은 그 옛날의 사랑이여 비가 온다 비가 온다 겨울비가 온다 겨울비에 젖어서 그 옛날의 사랑은 간 곳이 없다
餠銓? 세계사, 1994
겨울연가 오탁번
겨울연가(戀歌)
연안(沿岸)의 겨울 아침을 헤치며
당신의 선박은 모호(模糊)를 싣고 왔지
동량(同量)의 모호를 싣고
출항하는 나의 선박
아침마다 눈을 뜨는 우리는
연안의 긴 모래톱을 달려
대안(對岸)으로 배를 띄웠지
내륙에서 부는 바람은
갑판 위의 겨울철 양식과
영양이 담기는 식기들을 흔들고
얼지 않는 우리의 항해는
바람보다 더 큰 자연이었지
이루어지지 않는 파혼의 약속과
약한 시력을 재료 삼아
조선(造船)의 힘든 노동을 끝내고
나의 아침을 헤치며
당신의 선박은 질서를 싣고 왔지
동량(同量)의 해후를 싣고
항해하는 나의 선박
겨울을 향해 우리는 출항했지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굴뚝 소제부 오탁번
굴뚝 소제부(消除夫)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제기동(祭基洞)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해풍(海風)이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노모(老母)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 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난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코오피 집에 가는 오후 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사람들,
우리는 에리제에서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잔을 저으며 슬프고 가난한 시간속으로 내달려 갔다.
아침의 그를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은이후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석탄처럼 검은 빛
그를 다시 만났다.
길고 깊은 암흑을 파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골목을 내달리는
그에게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내 전신에 쌓인 암흑의 기류를 파낼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은이후니
겨울저녁의 안개를 모호한 우리의 어둠을 두드렸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김수영론 오탁번
김수영론
김수영이는 시는 잘 쓰지 못해도
그 정신이 제법이야 시를 아무렇게나 써갈기는
그런 정신이 좋아 다른 놈들이 비유 찾고 주제 찾을 때
되는 대로 휘갈겨 쓸 수 있는 김수영이는 죽었다
눈치코치 없는 평론가들은 김수영을 훌륭한 시인이래
김수영이는 훌륭한 시인이 아니고 훌륭한 시민이야
엊저녁에는 술을 개판이 되도록 마셨어
시인이 갑자기 똥개가 됐지 뭐야 술이 함뿍 취하면
분노와 희열은 종이 한 장 차이야 풍자냐구?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속 숨은 야만의 똥개가
보신탕이 되는 것을 전신으로 거부한 거야
알맞게 살이 찐 놈들의 아가리에 들어갈 영양식품보다
되는 대로 짖어대다가 김수영이처럼 죽는 자유
자유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개똥 같은 자유여
내 책상머리의 안개꽃과 장미는 이젠 숨넘어갔어
꽃송이마다 열렸던 그리움도 다 증발해 버리고
창을 열면 미칠 것만 같은 가을아침 햇볕이다
추석 성묘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있던 코스모스는
저승에서 나를 손짓하는 어머니의 사랑 같았다
슬픔도 빛이 바래서 한나절의 추억이 되는 몹쓸 세상에
나는 오늘도 시와 소설을 논한다? 연애를 논한다?
상징 찾고 운율 찾을 때 되는 대로 써갈긴 김수영이는
요컨대 무엇을 논한 적이 없다 오직 정복뿐이었지?
현대시를 신체시처럼 쓰는 자유뿐이었지?
여자를 유혹해서 싸구려 여관으로 잠입하는
진정한 용기는 없이 오늘도 또 무엇을 유창하게
논하고 분석한다? 정말 나는 보신탕이 될 수는 없어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나의 아기 오탁번
나의 아기
지나가 버린 어둠에서 나와서 햇살 속에 서봐
꽃피고 바람 불 때 어떤 녀석과 불장난했지?
여인숙에 몇 번 가고 낙태수술했지만
보이지 않는 아기를 죽이는 일이 어떤 뜻인지
너는 잘 모르지? 그때는 몰랐지만
생애의 옹이처럼 못 박힌 것을 차츰 알게 될 거야
아무도 모르게 훔친 가을 햇빛은 찬란하였다
네가 춤추는 잔디밭의 가상자리 조그만 공간
내가 훔친 너의 바람 너의 입술 너의 머리칼
이 세상 풀과 나무가 모두다 눈가림인데
너는 어찌하여 내 앞에서 맑은 눈빛으로
깊이 감춘 나의 비밀을 똑바로 쳐다보는지?
네가 버린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숨결을
나는 알 것만 같다 그 놈이 보고 싶다
조그만 너의 자궁에 소나기 퍼부울 때
나는 번개처럼 벼락처럼 하늘 빗기어
얼굴도 모르는 아기의 슬픈 아버지가 될 거야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동해 오탁번
동해
서울에서 죄짓고 동해에 오면
죄도 벌도 몽땅 잊고 오직
오직 하나 낚시대다
빈 낚시대 들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만 대숲에서 나비 벌이
춤추다 빛바랜 족자로 들어가고
송장 메뚜기 한 마리
오죽헌 섬돌에서 날아오른다
오랜만이다 평화여 떡밥이여
갯지렁이여 딸랑딸랑 방울이여
허전한 가슴을 뼈를 더운 피를
끝도 없이 던진다 당긴다 던진다
하루 이틀 뜻 없는 되풀이하다가
허리 잘린 지렁이가 되어
피도 똥도 아닌 눈물 흘린다
아침 바다는 미친 듯 춤추고
머리맡의 라디오를 켜면
북한방송이 너무나 잘 들려
목이 메었다 물도 공기도
진작 통일이 되었거늘
파랑불 빨강불 신호에 맞춰
인간들만 두 토막을 치고 있다
호박엿 엿치기하며 침 흘리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마흔아홉의 까마귀 오탁번
마흔아홉의 까마귀
자기공명영상 필름에 나타난 나의 목뼈는
다섯번째 여섯번째 물렁뼈가 어긋나서
오른쪽 어깨 신경을 누르고 있다
아주 완고하게 또 너무 아름답게
쓸개 떼어낸 법학교수는 6512호에 누워 있고
목뼈 빠진 문학교수는 7211호에 자빠져 있다
아침 여섯시면 체온계를 들고 들어오는
손이 따뜻한 어린 간호원이
청량리쪽 아침 해무리 가리킨다
너무너무 곱지요? 아침노을이 멋있죠?
오른팔이 저리고 손가락이 쑤시고
무슨 죄 많이 졌기에 손발이 저린 문학교수
생각하면 눈물뿐인 마흔아홉의 저녁 나절에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소월의 시 문득 생각하면서
울고 있다
목뼈 달아매어 제자리로 앉힐 때까지는
침대에 꼼짝않고 누워서
하루종일 라디오만 듣는다
병무상담 세무상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들
육아상담 프로는 나하고 무슨 상관 있을까
이십 개월 된 아기가 엄마한테 제 꼬추를
자꾸만 만져달라고 조른단다
너무너무 무서워요 젊은 엄마의 하소연에
귀가 나쁜 상담의사가 점잖게 말한다
너무 우스워할 것 없습니다 유아기에 흔히 있는
아녜요 우스운 게 아니라 무섭다니까요
이 세상은 무서운 것일까 우스운 것일까
목빠지게 기다려온 나의 서산에서 우는
까마귀여 까마귀여
자기공명영상 필름 한 장으로 흰 벽에 내걸린
나의 운명아
餠銓? 세계사, 1994
배추흰나비 오탁번
배추흰나비
호수보다 더 잔잔한 기다림으로
저녁 노을 지는 그리운 하늘 아래
배추흰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저녁 새 깃드는 먼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무 아래 이끼를 기르듯
그렇게 수많은 아픔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보고 싶은 눈썹 날리는 머리칼
양 한 마리가 초원으로 멀리 숨듯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흐려지는 눈앞에 밟히는
눈 코 입 귀 머리칼
나무숲보다 더 그윽한 그리움으로
이슬 방울조차 무서운 배추흰나비처럼
지금 나는 날아오르고 싶다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빙어에게 오탁번
빙어에게
간이주점 때묻은 식탁
큰 유리대접 안에서 헤엄치는
빙어
오늘 아침까지도 의림지 깊은 물 속에서
산란의 꿈을 꾸던
빙어
한 마리에 3백원씩 주고
열 마리를 산 채로 먹다
젓가락으로 대가리를 꼭 집어서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다
빙어
미안해 잘가 안녕
의림지 깊은 추억 속에서
너는 신라 때부터의 내력으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몸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지만
지금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흐리다
꽃샘바람
더 춥게 불다
1년살이 꿈이
헤엄칠 때마다
빙어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땅거미 진 고개를 올라서며
내가 나를 죽인다
염치도 없는
대가리를
매운 고추장에 처박는다
빙어 사랑해
안녕
餠銓? 세계사, 1994
사랑의 깊이 오탁번
사랑의 깊이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설날 아침 오탁번
설날 아침
마흔아홉 살에 꼭 죽을 줄만 알았다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서른 살까지 못살 줄 알았다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장만하고
아내 모르게 슬금슬금 딴 여자도 보며 살던
서른 살의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마흔 살까지는 정말 못 넘긴다는
조바심 때문에 목이 말랐다
마흔 살이 되어 한 예닐곱 해쯤
저승길 익히며 덤으로 사는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마흔아홉도 넘기고
오늘이 쉰 살 되는 설날 아침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들 딸한테 세배받고
떡국 한 그릇 가볍게 비웠다
이 무수한 나날 앞에 놓고 보니
세뱃돈 많이 받은 아린아이처럼
까불고 싶다
고드름 하나 따서 창처럼 들고
골목골목 내달리면서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하고 싶다
쉰 살이 된 설날 아침
나는 정말
두렵다
餠銓? 세계사, 1994
솔잎 오탁번
솔잎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더 진한 생애의 때
잿빛의 머리칼은 한줌도 안 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 짐작만으로도 다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 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을 꿀 때
살며시 솔잎을 따야 아프지 않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 거둘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샘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활활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을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녘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 나이 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 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키던 그것과도 같아
餠銓? 세계사, 1994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슬픔의 잠 오탁번
슬픔의 잠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나를 거부한다
처음에는 어깨가 그냥 결리더니
팔꿈치가 저려오다가 어느 날 아침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말을 안듣는다
나를 배신한다 복종해 온 지 오십년쯤 되니
이제는 주인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쌀뒤주 열쇠도 챙기고 마나님 엉덩이도
모두모두 마음대로 만져도 된다는 뜻일까
오른손 높이 들어 콧구멍도 쑤시고
젊은 여자의 순결도 잘 익은 꽈리를 깨물듯
장난삼아 망가뜨리며 돌아다닐 때
나팔꽃보다 작은 우산 속으로 숨어도
가슴마다 피는 숯불 손톱 위의 반달모양
하얗게 죽으면서도 숨을 쉬었다
늦은 겨울 아침처럼 식어가는 손가락이
하늘 멀리 한점 그리움을 가리킬 때
손가락마다 민들레 씨앗 같은
금침 은침 맞으며 울고 있다
아직은 다 작별하지 못한 사랑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제는 저승의 이슬밭에서
뽀얀 젖 뚝뚝 흐르는 젖가슴 헤치고
탁번아 탁번아
막내를 부르고 계실
아아 나의 어머니
餠銓? 세계사, 1994
아이들의 화실 오탁번
아이들의 화실
아이들의 손에서 태어나는
썰매 타는 여름과 꽃 피는 겨울
십자가 위에 앉은 까마귀가
몽당 크레용을 뒤집어 쓰고
비둘기 흉내를 내며 웃는다
꽃병 위에 뜬 아침해는
앞니 빠진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구름 사이로 솟은 미끄럼틀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아침에 자른 생일과자의 촛불은
어른들의 근심으로 곱게 타오르고
오후의 그림교실에서는
마차를 타고 가는 왕자님이
벽시계에 부딪혀 곤두박질한다
시계바늘이 깜짝 놀라
묵찌빠 묵찌빠
가위바위보를 하고
하늘은 온통 화재가 났다
소방수 아저씨의 날개에도
빨주노초파남보 불이 붙었다
어른들의 근심은
물방울 같은 별이 되어
참 잘 했어요 별도장을 찍는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아침의 예언 오탁번
아침의 예언(豫言)
추운 겨울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이 숨어 흐르듯
추울수록 강(江)은 따듯해지고
모든 가까이 있는
사물(事物)이 눈물겹고 고맙듯
서러운 몸에서
뜨거운 사랑이 태어나고
온 오물(汚物)속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말구유에서 나신 그대는
별이 내리고
뜻있는 자(者)가 경배할 때
아침과 저녁, 암흑과 광명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전지(全知)의 하늘.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힘든 대낮에
그대여, 우리도 2천년전 아침처럼
그 빛깔의 하늘 아래 있게 하라.
서러운 몸과 마음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하늘과 땅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어두워도 한 닷새 어두우면 좋지
열두달 어둡지는 말아야 되는 법,
언덕에 부는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숲은 잎을 떨구었지만
그 안에 바람의 속도를 잠재운다.
열매의 양분을 아낀다.
바람은 중앙선에서 고속도로에서
시속을 자랑하며 살아가지만
글 아는 사람들은
스토브 위에 무위를 끓인다.
한 두컵 마시며
목이 떨어지는 전봉준(全琫準)의 사랑을
노래하며 춤추며 부끄럽다.
일주일 전에 땅에 오신 그대는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을 주시고
강물을 뿌리며 죄를 씻으셨지만
별을 따라 주인을 찾아 가는
현자(賢者)의 야행(夜行)처럼
부활의 시대는 어둡고 길다
어둡고 길다.
손바닥에 박히는 형벌의 아픔이
진실로 구원의 기쁨이기를
땅의 평화이기를.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서러운 몸과 마음이여
추운 들 사이로 흐르는
따듯한 예언(豫言)을
이 새 아침에 이해하리라.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아침행진 오탁번
아침행진(行進)
아침마다 날아오르는 빛나는 새떼,
그대들의 발자욱 소리에
큰 마을의 잠이 깨고
반듯한 견장 위에 드리우는
곧바른 시간의 팽팽함이여.
아침의 순수는 날아올라
하늘과 땅의 모음을 노래할 때
가장 아름다운 불이
그대들의 대면에서 남 몰래 점화된다.
나라의 울타리에 한 그루
사철나무를 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모든 것을 정말 얻을 줄 아는
오, 나라의 아침,
그대들의 하나같은 발자욱 소리.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오죽헌지에서 오탁번
오죽헌지(烏竹軒池)에서
오죽헌(烏竹軒)에 자라는 대나무를 보려고
지난 겨울 폭설을 헤치며
아내와 아들 딸 데리고 왔었다
사임당의 첫 순결은 깨어져서
달이 되고 별이 되다가
지상의 흙냄새가 그리워
깜장 대나무로 피어났다
율곡이 자란 자궁도 터져서
마디마디 의미 있는 생애가 되어
역사가 되고 관광이 되었다
이 여름 다시 오죽헌을 찾아서
홀로 뜻 없는 묵념 올린다
소나무 그림자 무더기로 나자빠져 있는
오죽헌지(烏竹軒池)에 세 칸 반 낚시대 드리우고
떡밥 뭉쳐 바늘에 꿰고
똥 지렁이 토막쳐서 성찬 차린다
얼굴도 모르는 잉어를 기다린다
입질도 못 받는 나의 생애는
역사도 관광도 똥도 못 된 채
오죽(烏竹)잎에 듣는 빗방울처럼
울고 있다 울고 있다
텃세가 센 저수지에서
특수 떡밥처럼 특수하게 풀리고
바늘에 꿰여 죽어가는 지렁이
더럽게 나는 죽어가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우리말 오탁번
우리말
겨울숲에서 잠을 자던
깨끗한 말과 글이 비로소 눈을 뜨고
아지랑이 비낀 언덕으로 올라서면
지붕과 지붕이 마주보는 마을
금사슬 은사슬 찬란한 햇빛
땅위에 우렁찬 노동의 삽질소리에
모음과 자음이 만나 뜻을 이룰 때
이른 새벽 늦은 밤의 발자국 소리에
새싹들이 터뜨리는 무수한 꽃망울
땀흘린 만큼 풍요로운 창고의 내실
창과 창이 서로 가슴을 여는 마을
서로 아끼고 나누어주는 노동의 결실이
꽃망울 터지듯 아름답게 전파되면
한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삽질소리에
가득가득 피어나는 모국어의 넉넉함
餠銓? 세계사, 1994
우리 시대의 시인론 오탁번
우리 시대의 시인론
□ 1
개가죽 방구가 무슨 뜻입니까?
거 있잖아 풍물 놀 때 땅바닥에 놓고 치는 커다란 북 모르는가, 개 가죽으로 만든 북일세
그러니까 개가죽 방구에서는 개같은 소리가 나겠구만요
개년들이 오줌을 싸고 퉁소 부는 놈들이 개같은 불알 하나씩
차고, 식식식, 이런 바람소리도 나겠구만요
암, 고렇고럼 되는 것이지, 뭘
□ 2
지훈은 죽어서도 꿈에 한번 안 보이고
김수영같은 눈깔을 한 시내버스는 뛰다가 멎다가 하는데
김춘수가 꺾어보낸 한 송이 꽃은 이미 꽃이 아니다
이중섭의 꽃대궁은 아직도 독한 향기 풍기고 뻔데기 자지도 발딱발딱 숨을 쉬는데
박성룡과 박재삼은 그 빛나는 괴물과 울음은 어디에 두고
이젠 붓도 말도 더듬거리는지
이 시대의 시인론은 서론에서부터 갈팡질팡 쏙빠진 논문되기는 다 틀렸다
□ 3
조태일이는 오늘도 작두날만 가는구나
그 옆에서 통속작가는 공장처녀들의 월급을 착취하여 포니에 에어콘을 달고
취한 듯 만 듯 앉아 있는 박재천과 강우식의 이마가 제법 좋았다
이만익의 콧수염이 나는 좋았다.
내 친구 현대시 동인의 주지주의는
3차쯤 가야만 비로소 술이 되고 시가 되는데
학교에서는 노스롭 후라이로 점심을 먹고
신동엽의 금강 속에 그의 애호가들을 수장해버렸다
□ 4
소월이여 목월이여 그대들은 우리 시문학사의 초승달인가 그믐달인가
마종기의 꽃으로 서서 흔들리는 슬픔을
김영태 황동규의 웃음도 눈물도 아닌 웃음과 눈물을
이성부의 톱밥을 오규원의 단추 한개를
정진규의 열쇠 하나를 최승자의 오 개새끼를
동해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고은이의 자유를!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나는 언제나 술래다
우리 시대의 시인론은 여기서 일단 끝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장모님 오탁번
장모님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이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한 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다섯 해 전 장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닷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서 나를 벌주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 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조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를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밤 나를 울리는 미운 아내여
餠銓? 세계사, 1994
저녁나절의 꿈 오탁번
저녁나절의 꿈
베란다의 화초들을 모두 거두어들인다
여름 내내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진딧물 똥오줌 받아내며 잎이 시든
슬픔의 기억들을 하나씩 불러들인다
가을은 척추뼈 통증처럼 엄습하고
물러설 수 없는 막바지에서 울고 있다
들국화 피듯 피지 못할 운명이라면
난초칠 붓 한 자루 애당초 소용없이
하늘 멀리 날아오는 기러기의 눈빛으로
서리 덮인 귀밑머리 차갑지도 않으련만
이제 방탕의 기억들도 다소곳이 시들고
스쳐가는 구름 비껴나는 햇살도
허허로운 저녁나절의 꿈으로
조그맣게 접어서 베개 맡에 놓아둔다
금간 척추에서 거문고 소리 들릴까
기러기똥 입으로 받아 삼키면
만성 맹장염으로 젊음을 보낸 창자에서
무서운 가을 하늘 손가락질하는
이제는 잊어버린 슬픔 다시 눈뜰까
餠銓? 세계사, 1994
저녁연기 오탁번
저녁연기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 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 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쪽빛 사랑 오탁번
쪽빛 사랑
우주가 처음 열리던 날 새벽
알에서 갓 나온 새가
아주 작은 눈 첫번째로 뜨듯
우리들 가슴마다에 지피는
소중한 불씨 하나
지금은 어둠에 묻혀 이름도 없는
아직은 모습 이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저 먼 바닷가로 내닫는 그리움
저 높은 산봉우리로 치닫는 사랑
혼돈의 어둠이 아무리 모질더라도
심지를 돋구어 밝혀나가는
그리움의 사랑이여
사랑의 그리움이여
우리의 겨레가 내달려온
북방의 찬 하늘가에 피는 얼음꽃
추운 계절에도 마주보며
언 볼 부비며 밝혀가는 겨레의 불빛
그 아래 우리들은 하나 되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쪽빛 사랑으로
우주의 새벽 앞에 우뚝 서 있다
餠銓? 세계사, 1994
천둥산 박달재 오탁번
천둥산 박달재
천둥산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모두 보냈다 산은 편안하게 강 건너 멀리 앉아 있었다 흐린 날이면 이마를 구름으로 가리고 비가 오면 비 뒤에 숨었다 산불이 났을 때 아무도 산에 올라가 볼 엄두도 못내고 동네가 두런두런 두려움으로 납작해졌다
밤이 되면 박달재를 넘어 흑인병정들이 여자사냥을 나왔다 헬로! 쪼꼬레뜨 기부미 기부미! 후레쉬를 번쩍이며 여자를 찾는 병정들을 따라다니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하나 얻어먹었다 어른들은 밤늦도록 잎담배만 말아 피웠다
천둥산 산불이 아침이면 저절로 꺼져서 햇빛 속에 빛나는 것도, 내 뱃속에 들어간 쪼꼬레뜨가 동네여자들의 몸값이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누룽지를 달라고 보채다가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눈물 흘리며 바라보면, 높고 평화로운 산이 미웠다 돌멩이를 걷어찼다 발톱이 아파서 깨끔발로 뛰기만 했다
어두운 술집 모퉁이에서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리는 지금도 나는 잘 모른다 천둥산의 산불도, 동네에 자욱했던 잎담배의 연기도, 숯처럼 까만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던 창덕이엄마의 한숨도, 나는 하나도 모른다 천둥산이 나의 이마 높이로 와 닿아 있고 박달재의 긴 구렁 짧은 구렁이 내 가슴까지 와 있다는 것을 그저 눈곱만큼 눈치채고 있을 뿐, 정말이다 하나도 모른다 몰라!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첩란 오탁번
첩란
잎사귀 뻗쳐나간 모습이 꼭 난초처럼 생긴
우리나라 야산에 흔하게 자생하는 다년생 풀이
난초가 아니면서도 난초인 듯 대접도 받고
잎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흙에 닿으면
그 자리에 또 뿌리내려 새로운 잎을 피운다
밤중에 오줌 마려워서 몇 번씩 잠을 깨는
예쁜 첩이 서방님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것같이
난초 흉내 그럴 듯하게 내는 요염한 첩란
진짜 난초는 박하담배 연기에도 고개 돌리고
꽃망울 터뜨리다가도 도로 입술 다물며
세상일 세상 사람 모두 얕잡아보는지
은은한 꽃향기 나에게는 전해주지 않지만
가느다란 허리가 너무 요염한 첩란은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며 꽃을 피운다
예쁘고 어린 계집얻어 딴 살림 몰래 차린 듯
삼동을 지나고도 입술 열지 않는 난초는 잊은 채
어느 야산 자락 봄햇볕 아래 첩란과 잠들고 싶다
餠銓? 세계사, 1994
큰스님 오탁번
큰스님
이승을 떠나는 그대의 누더기 옷자락 사이로
해인사 가을바람 한 줄기 낙엽처럼 빠져나가고
참나무 연기 뼈와 살을 태우며 계곡을 맴돈다
어느 고요한 날 저녁 무렵 둠벙에서 연꽃 피어나듯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서 오동잎 하나 뚝 떨어지듯
무심히 돌아왔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그대여
대웅전 앞 석등에 불이 켜질 때마다
목탁 도끼로 패어 불바다 만들려고 안했나
내가 죽어 참나무 장작 위에 자빠졌다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건 아니지?
석가는 큰 도적이고 달마는 작은 도적이니
나는 도적놈들 밑씻개나 만드는 땡추여
29는 18이요 씨팔은 두 아가리가 맞붙어야지?
두견새 우는 골에 흩어지는 붉은 꽃이여
저승문 앞에 선 그대의 검정고무신 사이로
해인사 가을낙엽 한 줄기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녹두알 좁쌀만한 똥고집만 누리처럼 하늘을 덮는다
천하 잡놈 잡년들 불두덩에 굵은 서캐로 남아서
백련암 뒷산 소나무 가지에 송충이로 태어나서
훌쩍 떠났다가 무심히 돌아오는 미운 그대여
餠銓? 세계사, 1994
편지 오탁번
편지&
안개꽃 사이로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에
초겨울 바다 바람소리 잠들고 있다
세상 살아가는 모진 모퉁이에서 넘어져
참 우습게도 몸져누운 금요일 저녁나절
서울은 이상난동이지만 나의 목뼈는 춥다
너의 목에 걸어준 손톱만한 사랑의 추억도
영혼 깊이 상채기 내준 뜻없는 욕정도
이제 모두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날아가버리고
전할 수 없는 그리움
잠재울 수 없는 뼈저림에 울고 있다
겨울 안개 자욱한 대학병원의 아침 여섯시
빈 주차장의 장명등 홀로 빛나고
겨드랑이 속의 체온계가
아직도 뜨거운
내 피의
내 정액의 슬픔을 재고 있다
물리치료실 의자에 앉아 턱을 조여매고
아무리 잡아당겨도 뽑아지지 않는 완강한 거부
뽑으려고 뽑으려고 애쓰고 있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살아가고 싶은
내 마지막 사랑의 혹독한 건널목에서
보고싶은 너에게
고려대학교병원 7211호실에서
오늘 편지는
이만 끝
안녕
餠銓? 세계사, 1994
하관 오탁번
하관(下棺)&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 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너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