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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김 살로메
사흘 째 내리던 눈발의 휴지기.
흔하게 불어대던 칼바람조차 잦아들었다.
숨막힐 듯한 흰 대지의 고요를 뚫고 갑자기 왕대 꺾이는 소리 요란하다.
창 너머 보이는 대숲은 가지마다 쌓인 눈꽃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의 적요를 뚫고 대가지는 퍽, 퍽 쓰러지고 있었다.
폭설 끝에 무너져 내리는 대숲은 대자연의 경이로움과 처연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댓잎 위에 앉은 눈은 날개를 한껏 펼친 백로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중 날개 다친 몇 마리가 추락하는 것처럼 숲 여기저기에선 무거운 눈송이들이 내려앉고 있다.
그 대숲을 지나 삼촌이 돌아온다.
외삼촌 박윤호는 지금 꺾이러 오고 있는 중이다.
엄마인 박미자 여사에게.
그것도 모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대를 잡고 있으리라.
서울을 벗어났어.
이제 막 고속도로에 진입했는데 차들이 영 제 속도를 못 내네.
좀 늦을지도 모르겠구나.
두 시간 전에 나는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송수화기 너머 삼촌의 목소리는 밝았다.
삼촌은 언젠가는 자신의 삶이 장밋빛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니까.
구린내 나는 돈 냄새에 질식하도록 만들어 줄게.
엄마가 다그치면 마흔이 머지 않은 미혼의 삼촌은 능글맞게 대꾸하곤 했다.
가끔씩 눈 내린 대숲을 삼촌과 순례하곤 했다.
그 때 이미 내 눈에는 삼촌이 특별하게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무기로 하는 여자라면 결코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삼촌을.
진숙아, 이런 대나무는 죽이면 안 돼.
댓잎에 앉은 눈을 털어 내며 삼촌은 말했다.
삼 년 생 대나무는 경제성이 크거든.
꺾어지기 전에 눈을 털어 주는 게 상책이야.
대숲을 살피던 삼촌이 몇 번을 가르쳐주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어떤 게 쓸 만한 삼 년 생 대나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삼촌이 가리킨 대나무 둥치에 다가가 가지를 흔들어줄 뿐이었다.
쌓인 눈은 그 무게감 때문에 잘 털리지 않았다.
묵직한 것들의 속성은 언제나 흔들림에 강한 법이다.
그 와중에도 숲 깊은 곳에선 쉴 새없이 대나무 꺾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그 뻔한 대나무의 섭리를 삼촌은 근거도 없이 자신과 연결시키고 싶어했다.
이 봐, 휘어질 바에야 대나무처럼 꺾여버려야 해.
삼촌은 무너진 대나무 가지를 발로 차며 중얼대곤 했다.
적어도 그런 이미지는 삼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대숲을 보는 눈이 아무리 깊고 섬세하다해도 그것은 대나무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의 경험에 불과한 것이지, 삼촌의 근본이 대쪽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한 해 겨울을 잘 견딘 대나무는 때가 되면 죽세품을 만드는 새 주인을 만날 터였다.
일손이 모자라 수확량이 확 줄어들긴 했지만 대숲은 여전히 할머니 여생의 요긴한 돈줄이긴 하다.
대나무의 경제성에 대해서 운운하던 삼촌은 전혀 경제적인 사람이 못된다.
천팔백 평의 과수원을 날렸고, 육백이십 평의 농공단지 부지까지 말아먹었으며, 사천오백만원 어치의 선산 땅을 은행에다 담보로 묶어놓기까지 했다.
모두가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무리한 카드 빚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어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삼촌은 단순히 운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뉴스에서 은행강도범이나 현금 수송차량 날치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머리에 점퍼를 뒤집어 쓴 채 인터뷰를 당하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나는 공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카드 빚을 갚으려고 그 짓을 했노라고.
그런 밤이면 나는 꿈을 꾼다.
삼촌과 환상의 이인조 혼성강도가 되어 은행을 터는 짜릿한 꿈.
그렇게 해서라도 단순함이 원죄일 뿐인 삼촌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싶다.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적잖이 신경이 쓰인 나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할머니는 말이 없다. 분주한 손놀림만이 앞으로도 좀처럼 내게 밥할 기회가 오지 않음을 예고할 뿐이다. 오늘 저녁 밥상은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삼촌 때문에 진수성찬이 될 것이다. 엄마도 지금쯤 골목길을 휘돌아 집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삼십 분 거리의 시내에서 이불집을 하고 있다. 원래는 할아버지가 남긴, 아파트 단지의 열세평 상가가 엄마의 가게였다. 하지만 삼촌에게 당할 만큼 당했다고 생각한 엄마는 얼마 전 상가를 처분해버리고 지금은 세를 내어 장사를 하고 있다. 송수화기 너머의 삼촌은 그 돈을 할머니가 갖고 있다고 믿는 듯 했다. 해서 손쉽게 낚아챌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길이 마냥 흥에 겨운 것처럼 보였다. 이런 단순한 삼촌을 나는 미워할 수 없다. 듣기 좋으라고 남들은 엄마의 일터를 ‘홈패션 가게’ 라고 불러준다. 엄마는 이불집 어쩌고 하는 고객보다 홈패션이 어쩌고 하는 눈치 빠른 고객들을 더 교양인으로 추켜세운다. 그래봤자 솜먼지 날리는 좁은 노동 공간에서 한 발짝도 나아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가끔씩 어머니 가게에 출근을 한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불솜을 놓거나, 낡은 고무 골무를 끼고 홑청을 바느질한다. 할머니는 언제나 엄마의 성실한 고용인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이 모든 것은 할머니의 천성적인 바지런함 때문이다.
압력밥솥 추가 돌아간다. 피식피식 김이 빠질 때마다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풍긴다. 밥 뜸이 들고 한 김이 나가면 할머니는 고슬고슬한 밥을 퍼서 전기밥통에 옮겨 담으리라. 아욱국 끓는 소리도 코끝을 파고든다. 머지 않아 저녁 식탁에는 아욱국 곁들인 보리밥상이 차려질 것이다. 쌓인 눈길을 헤치고 돌아온 삼촌은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리라.
삼촌은 아욱국을 좋아했다. 병원비와 약값으로 집 한 채를 맞바꾼 아버지의 죽음 뒤에 엄마와 나는 할머니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할머니집으로 옮기던 첫날에도 삼촌은 된장 푼 아욱국에 보리밥을 후룩후룩 말아먹고 있었다. 식욕이 안 날 땐 말야. 이렇게 스태미나식을 해야 돼. 진숙아, 너도 이렇게 말아 먹어봐. 같이 식탁에 앉았어도 삼촌은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삼촌은 국 따로 밥 따로인 내 식성을 끝내 헤아려주지 않았다. 잽싸게 내 앞에 놓인 아욱국에다 공기밥을 엎어버렸다. 그리곤 어린아이 달래듯 어여 먹으라고 재촉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저돌성과 아욱국이 스태미나식이라고 우기는 삼촌의 호기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제 안 깊숙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선량한 심성을 삼촌은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줄 몰랐다.
아욱국이 한 소끔 끓었다. 국냄비를 불 위에서 내려놓은 할머니는 큰 냄비에다 찬물을 중간까지 붓는다. 돼지 목살을 삶으려는 것이다. 할머니는 된장 몇 술을 천천히 물에다 갠다. 나는 얼른 싱크대 찬장을 열고 커피통을 꺼낸다. 할머니는 커피 두 숟가락을 그 물에다 더한다. 된장과 커피가루가 밴 육수는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없애줄 것이다. 거뭇거뭇한 육수를 내려다본다. 곧 대면할 엄마와 삼촌의 얼굴빛이 저처럼 변하지 않을까 걱정이 인다. 할머니는 어슷어슷 썬 생강을 듬뿍 넣는다. 대파 몇 쪽과 양파 하나를 더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단골 푸줏간에서 삼촌을 위해 성의껏 골라왔을 목살이 육수 속으로 잠긴다. 삼촌이라는 허방의 물 속으로 할머니의 심연 한 덩이가 푹 잠긴다.
삼촌에 대한 할머니의 각별함은 언제나 음식으로 나타난다. 황해도 먼 땅으로 시집을 갔던 할머니는 평생 익혀야 할 음식을 단 삼 년의 신혼생활 동안 다 배웠노라고 말하곤 했다. 그곳이 평야지대라서 곡물과 야채가 풍성했제. 오뉴월 삽지 밖을 나가면 온 들이 시퍼랬으이께네. 그 많던 음식 종류는 다 잊어뿌맀다. 하기사 삼 년 동안 길들여진 입맛이 아직꺼정 남아 있는 것도 내사 신통쿠만. 할머니는 황해도식 음식을 만들면서 꿈인 듯 사라진 신혼의 회한에 젖곤 한다. 삼촌은 머지 않아 편육과 아욱국과 보리밥이 있는 따뜻한 밥상을 받게 될 것이다. 황해도식 행적과 미리 삭혀 둔 연안식혜도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오르리라. 내일 아침상엔 어김없이 햇팥으로 쑨 황해도식 남매죽이 차려질 것이다. 편육이 알맞게 삶기자 할머니는 마른 도마 위에 뜨거운 고깃덩이를 올려놓고 부엌을 나선다. 알맞게 식으면 할머니는 편육을 썰어 가지런히 접시에 담으리라. 할머니를 따라 주방을 나선다. 창 너머엔 마음껏 눈을 받아들인 대숲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다.
엄마가 큰 목소리를 내며 대문을 들어선다.
“또, 그놈 먹이고 싶어 안달이네!”
대문 밖까지 퍼졌을 편육 냄새를 맡았음에 틀림없다. 연녹색 스카프를 두른 엄마는 큰 숄더백을 메고 있다. 그 속에는 서류뭉치와 깨죽이 든 보온병과 생식봉지 따위가 들어 있을 것이다. 온통 흰빛인 겨울 풍광과 맞서 연녹색 스카프는 훨씬 도드라져 보인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스카프 색깔이 엄마의 개성을 잘 말해준다. 그녀는 벌써 자신만의 봄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에게 봄이 온다는 것은 삼촌과의 법적인 혈연관계를 청산하는 것일 게다.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은근히 엄마의 뜻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도 있다. 그것이 내 개인의 감정 문제인지, 집안 전체의 조화를 위한 것인지는 나도 혼란스럽다. 엄마는 기어이 서류 뭉치를 내놓을 것이다.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청구 소송. 미로 찾기 게임 같은 법률 용어를 쳐다만 봐도 나는 머리가 아프다. 법이 약자 편이 아니라는 건 이 서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니까. 엄마는 그 길고도 어려운 제목을 가진 서류 뭉치를 들여다 볼 때마다 투덜거린다. 엄마는 오늘이 가기 전에 미뤄왔던 숙제를 해결하듯 삼촌 앞에 서류뭉치를 꺼내놓을 것이다. 비록 저당 잡히긴 했지만 아직은 할머니 재산인 선산과 살고 있는 이 집, 열세평 상가를 판 돈만은 삼촌에게 뺏기고 싶지 않으리라.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임을 증거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심정을. 엄마는 스카프 자락을 명치끝에다 대고 돌려댄다. 초조함을 충분히 내비치고 있는 셈이다. 엄마가 들고 다니는 보온병에는 검은콩이나 검은깨로 만든 죽이 들어 있다. 목이 브이자로 파진 앙골라 스웨터를 입은 엄마의 쇄골이 앙상하다.
170㎝ 키에 45㎏을 넘지 않는 엄마는 비정상적으로 마른 체형이다.
엄마는 자신의 비쩍 마른 몸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이어트 중이다. 이러다가 거식증 환자가 된 엄마를 지켜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끔씩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다이어트 증후군을 앓는 여자가 폭식을 하다 말고 토악질을 해대는 장면이 비칠 때가 있다.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의 여자는 헬륨 가스를 마신 듯한 변조된 목소리로 다이어트의 폐해에 대해서 뒤늦게 역설한다. 머지 않아 엄마가 그런 인터뷰 자리에 서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엄마, 검은 음식은 건강 식품인 동시에 다이어트 식품이래. 혈압 안 오르려면 엄마도 다이어트 해야 돼.” 엄마가 깨죽을 컵에 따라 할머니에게 권한다. 할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혈압과 다이어트의 상관관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엄마는 자신의 다이어트 식품이 할머니의 혈압을 조절하는데도 일조를 한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 검은 깨 3, 해삼 3, 생마 1의 비율에다 생수를 넣고 푹 달인 미음 같은 것을 엄마는 마신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을 즐기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쩜 그리 몸 관리를 잘했느냐고 부러워하는 주변인이 많을수록 엄마의 다이어트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이제 엄마에게 다이어트는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청구소송 만큼이나 소중한 필생의 업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날씬할 것을 강요하지 않지만 스스로 말라깽이가 될 것을 주문하는 엄마의 신산한 삶이 삼촌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놈 위한 밥상을 차릴 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엄마는 할머니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고정시키려 애쓴다. 엄마는 자신의 뜻대로 삼촌을 밀어낼 수 있을까? 그에 앞서 할머니를 설득할 수 있을까? “무신 말?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일라 카믄 가게로 되돌아가라. 처먹으라 카는 밥은 안 처묵고 맨날 엉뚱한 소리나 해쌌노? 말라 비틀어져도 시퍼런 돈으로 열두 폭 치마 만들어 깔고 앉으면 좋제?” 열두 폭 치마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유감이다. 만원권 지폐로 만든 치마폭을 펼치는 말라깽이 엄마의 환한 얼굴. 상상만으로도 목젖이 울컥거린다. “날씨가 우예 될라 카노? 유스(뉴스)할 때 됐는지 테레비 한번 켜 봐라.” 할머니는 엄마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낡은 소파에 허리를 털썩 뉘는 할머니도 이제 많이 늙었다. 뉴스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서해교전 당시 부상을 입고 퇴역한 병사의 후일담을 담담하게 비춰준다. 당시 할머니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하루에도 몇 번 씩 텔레비전 화면은 해주만 근처의 북방한계선이 그려진 지도를 보여주곤 했다. ‘해주’라는 글자만 보고도 할머니는 쏟아지는 눈물샘을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재혼을 했다. 먼 황해도 땅 해주로 시집을 간 할머니는 전쟁이 터졌을 때 남하한 남편을 찾으러 왔다가 남편 대신에 할아버지를 만났다. 집안끼리 정혼한 상대자가 친척을 따라 해주로 이주하는 바람에 경상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그 먼 땅까지 시집을 갔다고 했다. 시부모 없는 부부만의 단출한 신혼 생활이기에 꿈 같은 삼 년이었다. 신혼의 할머니는 목재소 일을 하는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며 황해도식 음식을 배우는 게 취미일 정도로 호사했다. 삼팔선이 뚫리자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경상도 바닷가로 옮기려고 먼저 떠났던 남편은 주검이 된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상처한 할아버지도 재혼이었는데 전쟁통에도 싸전을 할만큼 사업 수완이 좋았다. 물만물만 같이 산 지 십여 년만에 엄마를 낳았고 몇 년 뒤 사내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일 년 뒤에 출생신고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홍역으로 죽었다. 그 몇 개월 뒤 할머니는 강보에 덮여 울고 있는 사내아기를 발견했다. 배곯은 아기엄마가 자식만은 배불리 먹이고 싶어 싸전 앞에다 놓고 간 것이라 했다. 그 아기를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죽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키웠다. 몇 년이 지난 뒤,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취학 통지서가 나왔다. 그제서야 할머니 부부는 친생자의 사망신고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행정 업무를 대리한 동장과 동사무소 간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사회 곳곳에 오류가 심심찮던 시절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업둥이도 학교 갈 때는 되었고, 급한 마음에 그 통지서로 입학절차를 밟았다. 그 때부터 죽은 친생자의 이름이 곧 업둥이 이름이 되어 버렸다. 여덟살 때 아이는 졸지에 재호에서 윤호가 되어 버린 것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서도 법적으로 완벽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들, 박윤호가 되어 버렸다. 할아버지로서는 찜찜했지만 뒤늦게 하는 사망신고의 벌금이 만만찮고 입양절차 역시 번거롭다는 것을 알고는 차일피일 서류정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는 서류 정리할 여유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업둥이를 아끼는 할머니로서는 굳이 호적 문제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그 고아가 바로 박윤호, 아직은 법적인 나의 외삼촌이다.
북한어선이 먼저 엔엘엘을 넘어왔죠.
우리 고속정에선 시위 기동을 하며 여러 차례 경고 방송을 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함포와 기관총 소리가 들렸어요.
누가 먼저라는 판단을 할 새도 없이 저는 그대로 쓰러졌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더라구요.
목발을 짚은 퇴역 병사가 한참이나 지난 그 때 일을 회상하고 있다.
나는 할머니를 곁눈질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해주만이나 연평도가 떠있는 서해안 지도가 곁들여졌다면 할머니의 표정은 이지러졌을 것이다.
다행인지 할머니는 서해교전 후일담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느 퇴역 군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 적 일인데, 또 들먹이고 있어!” 못 참겠다는 듯 엄마는 리모컨을 들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혹시라도 해주, 서해안, 북방한계선 등의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할머니의 기억 회로가 작동해 원하지도 않는 과거사를 떠올리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요즘은 유스만 하루 종일 틀어 주는 데도 있두만. 거기 한 번 틀어 놔봐라. 혹시라도 눈이 또 오면 큰 일이제.” 할머니는 삼촌의 귀가길이 순조롭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때 되면 오겠지. 도움 안되는 가짜 아들에 그리 목을 맬까?” 엄마는 할머니의 요청을 묵살한 채 여섯시 내고향에 채널을 고정시킨다.
처음부터 삼촌이 재산을 탕진한 것은 아니었다.
삼촌은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했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던 삼촌이 그런 일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몇 년 동안 소규모의 중고자동차센터에서 일을 한 삼촌은 매매 시스템을 익혔다.
운이 좋았는지 기회가 왔다.
자신이 일하던 업체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
돈이 된다는 삼촌의 말을 할머니는 무조건 신뢰했지만 엄마는 미심쩍어했다.
삼촌이 한 번 씩 목돈을 내놓는 것을 보고서야 엄마는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할아버지가 남긴 땅을 처분하거나 담보해서 사업 확장을 하는 것까지 묵인했다.
하지만 아이엠에프다, 불황이다, 악재가 계속되면서 빚이 늘어나자 엄마의 마음은 돌아섰다.
원래 삼촌을, 음료수 마신 뒤 버리는 종이컵만도 못하게 생각했던 엄마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돈방석이 아니라 빚방석에 오른 삼촌은 서울에서 잠행 중이었다.
따뜻한 밥 한끼라도 같이 먹고싶다는 할머니의 간청을 삼촌은 사업자금을 마련해놓았으니 가져가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삼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삼촌.
엄마로서는 금쪽같은 할아버지 재산을 탕진하는 가짜 동생을 더 이상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중고차를 이 바닥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 배꼽이라 부르지.
잘못 고르면 구입 비용보다 수리비용이 더 든다 이 말씀이야.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지.
한마디로 애물단지가 된다고.
제 값보다 비싼 값으로 중고차 몇 대를 팔고 온 날이면 삼촌의 목소리는 한껏 부풀곤 했다.
그 때 삼촌은 스스로가 애물단지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자신의 불분명한 태생에 대한 의문도 없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단순한 삼촌.
파리지옥을 쳐다본다.
그것은 어제서야 배달되었다.
자그만 상자에 담긴 파리지옥 화분을 나는 텔레비전 위에 장식용으로 얹어두었다.
며칠 있으면 파리지옥이 배달될 거야.
일주일 전에 삼촌은 전화를 걸어왔다.
파리지옥, 그게 뭔데? 넌 신세대도 아니구나.
식충식물 파리지옥을 모른단 말야? 요즘 아이들 사이에 애완용으로 인기라던데.
그냥 한 번 키워봐.
굉장히 재미있대.
혼기 꽉 찬 나를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듯 하는 삼촌의 단순한 대화법.
나는 그 단순한 삼촌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삼촌은 인터넷 주문으로 파리지옥을 사서 보내는 거라고 했다.
삼촌이 안내해준 그곳은 식충식물을 전문으로 파는 쇼핑몰이었다.
파리지옥, 끈끈이 주걱 등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들이 애완용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파리지옥의 잎은 대여섯 개 정도이다.
조개 모양의 잎 가장자리에는 뾰족뾰족한 돌기가 돋아있다.
사진으로 보니 날벌레를 먹은 파리지옥은 꽉 다문 조개 같다.
해충을 발견하고 이를 악 물면 돌기들끼리 깍지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저 조가비 속에 삼촌은 편안히 갇히고 싶은 것일까.
왜 파리지옥을 키워보라고 하는데? 나는 삼촌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꽉 잡아주잖아.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아무도 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지 아니? 이제껏 보아온 삼촌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버림받은 삶이야.
난 이 세상에 없다고! 하다 못해 이름까지 잃어버렸잖아.
남의 이름으로 사는 것까진 좋다 이거야.
하필이면 죽고 없는 사람이냐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대신 사는 이 기분 이해 못할 걸.
하루에도 몇 번 씩 날벌레나 파리같다는 생각을 해.
파리지옥은 제 잎을 열어 파리나 날벌레를 감싸주지.
녀석을 가만 쳐다보면 그 속으로 몸을 숨기는 파리같은 나를 발견하곤 해.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삼촌의 파리지옥이 돼주고 싶었다.
마지막 세포조차 끈끈해질 때까지 완전히 감싸안는 파리지옥.
잘만 키우면 십 년 이상 살 수 있대.
일 년에 두 번 이상 꽃도 핀다니까 잘 보살펴.
삼촌은 아직 파리지옥이 배달도 되지 않았는데 전화로 잔소리를 해댔다.
“할머니 이게 벌레 잡아먹는 식물이래요. 겨울이라 날벌레가 귀해서 관찰하기는 쉽지 않지만요.” 나는 동봉된 설명서를 읽으며 할머니에게 귀띔을 한다.
“참, 요사시럽다. 무신 식물이 벌레를 잡아먹는단 말이고? 내사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 할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진다.
그것은 식충식물 자체보다는 삼촌이 보내온 것에 대한 전적인 미더움의 표시로 읽힌다.
설명서에 적힌대로 투명한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서 화분에다 덮어준다.
파리지옥의 이파리를 이물질과 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어린왕자가 덮개를 덮어 장미꽃을 키우는 것처럼.
삼촌은 자신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촌의 단순함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자기 과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충이 되어서라도 이제는 파리지옥의 그 안온한 보호막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해충의 입장에서 보면 파리지옥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자신을 잡아먹는 먹이사슬의 상위자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파리지옥은 자신의 모자란 인, 질소 등의 양분을 얻기 위해 독특한 향으로 먹이감을 유인한다.
벌레가 잎에 앉으면 조개 모양의 양쪽 잎을 눈 깜짝할 새 오무려 잡아먹는다.
그런 파리지옥을 삼촌은 해충의 천국으로 이해하려 든다.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파리지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삼촌은 단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엄마라면 저 파리지옥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마도 파리지옥 자체로 이해할 것이다.
해충이 가까이 오면 엄마는 단박에 포획하고 순간에 녹여버릴 것이다.
나른한 포만감으로 만족한 엄마의 얼굴이 파리지옥 위로 겹쳐진다.
할머니의 음성이 높아진다.
엄마가 다시 검은 깨죽을 권했기 때문이다.
“니나 실컷 묵어라. 먹기 싫다니까 와 자꾸 들이대고 난리고? 나는 윤호 오면 같이 저녁 먹을 끼다.” 검버섯이 핀 할머니의 손등에 퍼렇게 핏대가 선다.
“엄마, 고혈압이라고 병원에서 조심하라고 그랬잖아. 쓰러지면 누가 책임지는데? 그놈이 약값이라도 대줄 것 같애? 제발 정신 좀 차려.” 둔탁한 파열음이 들린다.
할머니는 기어이 깨죽을 던져 버렸다.
할머니는 지금 엄마의 파리지옥이 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삼촌이 오면 그리스에 가보자고 조를 참이다. 지금 형편으론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빚쟁이 삼촌과 혼기 찬 조카의 여행. 아니 자연인 박윤호와 이진숙의 여행을 나는 꿈꾸고 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기어이 삼촌을 우리집 가계사 언저리에서 몰아낼 것이다. 할머니의 동의를 얻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엄마는 할머니의 대리인이 되어 거짓 핏줄을 말끔히 청산할 것이다. 나는 은근히 그것을 바란다. 단순한 삼촌이 물론 그것을 원한 적은 없다. 삼촌으로서는 아직 탕진해도 될 재산이 조금은 남아 있고, 이진숙의 존재 역시 삼촌에게는 조카의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에. 삼촌의 죄라면 내면을 숨긴 단순함에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지 자기 식으로 보아버리는 단순함.
델피에 가볼 거야. 그리스 델피, 알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다음으로 인기가 있다는 고고학 유적지 말야. 아니 네가 가르쳐준 옴파로스가 있는 곳. 언젠가 집에 들른 삼촌은 말했다. 평범한 일본인 셀러리맨이 노벨 화학상인가 뭔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온 세상을 도배할 무렵이었다. 적어도 삼촌에게 있어서 그 노벨상 수상자는 특별했다. 그가 생부로 알았던 사람이 큰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고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는 특집방송을 보면서 삼촌은 고개를 숙였다. 한 숨을 고른 삼촌이 그 때 델피를 입에 올렸다.
삼촌이 델피를 다 기억하고 있어? 델피엔 왜 가고 싶은데? 배꼽을 만나러. 진지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삼촌이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늑골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마음의 소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내게 어떻게 특별한가, 나는 자문해본다. 그냥 단순해지고 싶다.
시간적, 환경적 간극을 넘어서 나는 삼촌의 그 단순한 에너지를 진작부터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삼촌은 내가 얘기해준 배꼽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우주의 배꼽 옴파로스. 한 시에프 광고에서 그 말이 나오자 삼촌은 내게 물었다. 옴파로스가 뭐야? 나는 언제 읽은 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렸다. 배꼽이라는 뜻이야.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 천국과 지상이 만나는 중심.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풀어놓은 두 마리 독수리가 만나는 장소가 바로 델피야. 이 독수리가 만나는 곳이야말로 지구의 중심 중의 중심이지. 이 중심을 나타내는 조각물이 바로 옴파로스야. 우주의 중심, 대지의 중심, 어때 그럴듯하지? 현재 그 배꼽 조각물은 델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대.
삼촌은 중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촌을 삼촌이게 한 근원에 대한 그리움. 그토록 단순하고 저돌적인 삼촌도 그런 본능적인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대숲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넌지시 말을 꺼낸다. “요즘은 개인 빚도 나라에서 탕감해준다 카던데.”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떠올린 모양이다. “엄마는 무식한 소리 좀 그만 해라. 아무나 빚 탕감해주면 누가 빚을 겁내겠노? 채무기관도 동정할 가치가 있는 놈을 돌봐 주지, 아무나 구제하는 줄 알아?”
엄마가 하루 빨리 삼촌을 버렸으면 좋겠다. 할머니만 삼촌을 포기한다면 이 게임은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현실적인 엄마와 앙큼한 모반을 꿈꾸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인 박윤호를 꿈꿀 때마다 나는 쾌감을 느낀다. 엄마가 삼촌을 밀쳐내는 그 강도만큼 나는 단순한 삼촌의 어깨를 떠올린다. 할머니와 엄마를 동시에 배반하고서 얻는 단순한 휴식. 삼촌에 대해 아무런 조건 없는 할머니에게 나는 이런 식으로 초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어쩌랴. 생이란 저 대숲의 눈처럼 온갖 비의를 쌓아 가는 일인데. 순간의 바람 한 점에 허망하게 무너지는 눈이 되어버릴 지라도.
할머니는 요즘 인공 이를 심으러 치과에 다닌다. 어금니가 없어 음식물을 씹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내가 벌인 일이다. 할머니는 떼밀리다시피 치과에 따라나서곤 한다. 의사는 어금니 네 개만 심으면 음식물을 씹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와 삼촌에게 줄기차게 맛깔스러운 음식을 해주면서도 정작 당신은 제대로 음식 맛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임플란트라는 인공 이는 수월찮은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은 전적으로 내가 부담한다.
나는 이 마을 농공단지 섬유업체의 직공이다. 공부가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집 가까운 이곳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애초부터 사명감이나 직업의식 같은 건 내게 없었다. 내 노동의 최대 가치는 할머니에게 임플란트를 해줄 수 있다는 소박함과 맞바꾸는 정도이다. 나는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다. 직기들은 알아서 폴리에스테르 직물을 짜낸다. 하루 여덟 시간, 밤낮 교대로 나는 열 대의 직기 사이를 쫓아다닌다. 터진 씨실을 연결하거나, 날실의 엉김과 흐트러짐을 바로잡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이다. 일이 그다지 고되지는 않다. 모두가 기계화 자동화된 공정 덕택이다.
베테랑일수록 불량품을 잡아내는 안목이 있는데, 아직도 나는 그 일이 서툴다. 해서 작업반장에게 질책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나는 그 질책에 무신경할 만큼 여우가 되었다. 어차피 작업반장의 직무 중 하나는 질책에 있고 나의 업무는 그 질책을 듣는 것까지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삼촌을 떠올린다. 단순하고 무식한 삼촌이 나는 편하다. 나는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다. 삼촌과 나는 어쩌면 같은 배를 탄 사람인지도 모른다. 삼촌은 이런 내 마음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나보다는 단순하다. 세상의 모든 복잡한 것들은 대가를 요구한다. 나는 반들반들한 폴리에스테르 직물이 잘 짜여지다 말고 저희들끼리 실을 툭툭 끊기라도 할 때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 불량 실을 보면 마치 복잡한 것이 가치 있는 것인 줄 아는 인간들의 꼬인 배알을 보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난다.
나는 단순해지고 싶다. 삼촌은 그런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인 우리는 원할 때 섹스하고, 마음껏 단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엄마가 삼촌을 상대로 하는 친생자 관계 부존재 청구소송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삼촌을 기다리는 할머니도 이제 지쳐 보인다. 부엌에선 아욱국과 햇보리밥과 편육이 식어가고 있을 것이다. “올 때가 됐는데. 아직 전화 한 통도 없제?” 할머니가 갑갑증을 표시하자 생식 봉지를 뜯다말고 엄마가 받아친다. “올 때 되면 어련히 올까. 엄마보다 내가 그 놈을 더 기다려. 엄마도 머지 않아 그 녀석을 포기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 시기를 좀 앞당기자고. 같이 망하고 싶지 않으면!”
엄마의 저녁 식사는 생식이다. 곡물과 야채의 날 것에 밴 특유의 비린내가 생식봉지에서 풍겨 나온다. 복용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엄마가 생식 봉지를 뜯는 것으로 보아 일곱 시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실은 한 시간쯤 전에 나는 다시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눈 때문에 차가 엄청 막혀. 지금은 다시 눈이 내리고 있어. 삼촌은 추풍령 휴게소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아직도 멀게만 보이는 삼촌의 귀가를 미리 할머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도 어쩌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삼촌에게서 더 이상의 전화 연락은 없다. 자꾸만 전화기에 눈길이 간다. 혹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라도 남겼을까 몇 번이나 확인을 해본다. “하이고, 와 이리 답답하노? 진숙아, 유스 나오는데 한 번 틀어봐라.” 나는 리모컨을 들어 뉴스전문 채널 와이티엔을 찾는다. 화면은 온통 눈으로 꾸민 대지의 잔칫상이다. 한 시간 전부터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앵커가 말한다. 중부지방부터 폭설이 시작되어 남부지방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멘트를 되풀이한다. 삼촌은 지금쯤 마을 어귀에 도착하고 있을까? 골목길을 바라본다. 흰 눈이 쏟아진다. 기어이 하늘은 이곳까지 폭설주의보를 내릴 참이다. 삼촌이 마당을 들어서면 나는 가장 먼저 대숲을 찾을 것이다. 삼촌의 손을 잡고 대숲에 내리는 눈을 맞아볼 참이다. 댓가지에 쌓인 눈을 마음껏 흔들어 보리라. 이름 잃고 사는 삼촌의 단순한 어깨도 원 없이 흔들어 볼 것이다.
폭설이 내리는 화면 위로 뉴스속보가 뜬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십중 추돌사고. 이십 여명 사상’이라는 자막이 기차꼬리처럼 이어진다. ‘사상’ 이라고 표기된 저 정보는 언제나 애매모호함을 동반한다. 몇 명 사망, 몇 명 중경상 이렇게 표현하면 얼마나 깔끔할 것인가. 단순함의 법칙을 혐오하는 저 군상들. 넌더리가 난다. 이럴 때 나는 얼치기 삼촌의 단순한 얼굴을 떠올린다. 삼촌에게선 연락이 없다. 어쩌면 삼촌은 귀가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우주의 배꼽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났을지도.
할머니가 차린 저녁 밥상은 너무 식어버렸다. 아욱국과 편육이 차가워지는 동안에도 다이어트 중인 엄마에게선 풀 비린내가 날 것이다. 가만 대숲으로 시선을 돌린다. 완연한 폭설이다. 대숲엔 다시 눈이 쌓이리라. 쌓인 눈에 서북풍이 스치면 더러 댓잎은 동해를 입기도 할 것이다. 상처 입어 누런 잎을 흉물스레 남기기 전에 대숲은 스스로 꺾이고자 폭설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팽팽하게 부푼 고요를 뚫고 대숲 어디선가 퍽퍽 대나무 꺾이는 소리 들릴 터였다. 삼촌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김살로메
*1965년 안동 출생 *경북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천마문학상 소설 당선 (1986년) *포스코 문예대전 콩트 당선(1995년) *포항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당선(2003년) *글쓰기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