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그림
김만년
노인 병동은 적막했다. 핏기없는 시침에 붙박여 천장을 응시하는 눈빛들은 무료하고 공허하다. 인체를 장악한 호스들이 몇 눈금밖에 남지 않은 생들을 가파르게 펌프질하고 있다. 가족들도 처음엔 자주 찾아오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뜸해진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곳처럼 명료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으리라. 치매를 앓는 노인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의 기억들이 소진된 자리에 가족들의 살가운 감정이 들어설 틈이 없다. 어쩌다가 툭 튀어나오는 생뚱한 단어에 한바탕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지만 그뿐, 이내 병실은 공허한 침묵만 흐른다. 그나마 기억이 살아있는 노인들은 여기서는 대우를 받는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감정의 돌기들로 교감되는 생명체들이기 때문이다.
"글쎄 어제는 쥐를 잡는다고 병원을 발칵 뒤집어 놓더니만, 오늘은 소변 봉지를 가는데 무신 남존여비 여필종부하시면서, 여자가 아랫도리 만진다고 할배가 발로 차서 이렇게 됐니더. 여기 이 시퍼런 멍다구 좀 보소.”
간병인의 원망 섞인 하소연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허물어진 유가(儒家)에 앉아서 완고한 고집으로 떵떵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고관절 수술 후유증으로 극심한 섬망 증세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병실 문을 들어서면 아버지가 밤새 생산해 놓은 대형뉴스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병인들은 간밤에 있었던 아버지의 사건 사고일지를 브리핑하듯이 나에게 일러바친다. 의사의 호출도 부쩍 잦아졌다. 어르신 때문에 병원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니 소견서를 써 줄 테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간병 하는 게 옳은 것 같아요. 아버님도 우리가 없으면 저리 불안해하시니,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잖아요."
"내 직장은 어쩌고? 당신 맘대로 해!”
아내의 말에 괜한 퉁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추석 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 올망졸망한 육 남매와 병든 아버지를 바통 터치하듯이 나에게 맡기고 훌쩍 떠나신 어머니가 야속했다. 아버지는 평생 남들한테는 호인 소리를 들었지만 가족에게는 아픔이었다. 전란의 후유증으로 인한 화병, 투전 가산탕진이라는 위태한 생의 작두 위에서 끝내 피폐 된 삶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상처하시고는 맏이를 따라 서울로 오셔서 이십년을 방 윗목에 앉아서 낡은 명심보감만 들척이셨다. “당신, 여서 쌀이 나오니껴 밥이 나오니껴!”하시던 어머니의 옛 성화가 이해되었다. 결가부좌를 틀고 면벽하는 고승의 모습이 저러실까. 아버지가 기댄 벽지엔 세월의 떼에 절은 달마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농사를 억척스럽게 지으시며 집안 대소사를 호령하시던 시절도 영 없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억만으로 아버지의 무위한 삶이 탕감되진 않았다. 아파트 베란다로 해가 뜨고 지는 동안 아버지의 일생도 속절없이 저물어 갔다. 혼주 노릇을 하며 동생들을 결혼시킬 때면 유독 아버지의 빈자리가 컸다. 기대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래도 현실의 무게가 버거울 때면 아버지의 등에 한 번쯤은 기대어보고도 싶었다. 애증(愛憎)은 하나의 연줄에서 잉태된다고 했던가. 사랑하고 공경할 수 없는 아버지란 이름이 미웠고, 그 미움의 가시는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와 나를 찌르던 세월이었다.
나는 애착을 가졌던 홍보실 일을 접고 집 가까이로 전근을 자청했다. 담당 의사에게 직접 간병을 할 테니 사정을 좀 봐달라고 간청을 드렸다. 아내와 나는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교대로 아버지의 간병을 시작했다. '살면 얼마나 사실까?' 하는 아내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일상이 뒤엉킬수록 나의 심기는 비뚤어져 갔다. 일생 씻는 것을 터부시하는 성격이시기에 목욕을 시킬 때면 늘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이 등이 어머니의 등이었다면 조선팔도를 업고 다닐 등이건만,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의 등을 세게 문지르는 것으로 미움의 멍울을 풀어내기도 했다. "당신 그러면 죄 받아요.” 아내는 눈을 홀기며 추석 밥을 아버지 입에 잘도 떠 넣는다.
금실 같은 햇살이 내리던 어느 가을 무렵이었다. 퇴근 후 병원 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공원 한 귀퉁이에서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옛날에 어머님 만나시기 전에 바람피우신 적 있으세요?”
"흐흠, 딱 한 번 있기는 허지. 거 맥골 뽕나무 밭에서, 허허~”
"어머 그러셨어요. 그럼 하늘나라 어머님께 일러바쳐야겠네요. 호호!”
"아버님 십팔 번 노래 한 번 불러보세요.”
"백마아강 다알밤에 물새에가 우~울어~”
"와아, 짝짝짝!”
아내는 휠체어를 밀며 아버지의 노래에 맞장구를 친다. 아버지는 며느리의 살가운 채근에 즉흥화답을 하신다. 폭력적이고 괴팍하기까지 하던 증상은 온데간데없고 새우깡을 오물거리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이처럼 순하고 평온해 보였다. 피가 섞이지 않아서 저럴 수 있는 것일까. 아내의 저 여유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아내는 아버지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결혼 전 편찮으신 홀아버지를 모셔야 하는데 괜찮은가?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아내는 일찍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한 친정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아버지에게 연민의 정으로 투사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신심으로 대했던 것 같다. “커 가는 아이들이 무섭다.”며 아버지를 원망하며 돌아서는 시동생들을 다독였다. “그러니까 장남 아니에요.”라며 미움 쪽으로 기우는 내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곤 했다. 어쩌면 내가 아버지를 겉도는 세월 동안 아내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각박한 세상의 시류처럼 나 역시 아버지를 '주고받음'의 잣대로만 생각해 왔던 것은 아닌지. 저 가랑잎 같은 아버지를 진즉에 놓아 드리지 못하고 아버지란 이름에만 너무 집착해 온 것은 아닌지. 부모자식 간에도 상대성의 논리가 작용한다며 받은 것이 없으니 줄 것도 없다고 긴 세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들숨 한 번이면 이미 저승길인데 내 미욱한 가슴에 마른 잎 하나 떨어질 즈음에야 겨우 보이는 아버지.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른다. 아이들이 햇살 속으로 뛰어간다. 정말 받은 것이 없는 것일까. 저 파란하늘과 구름, 아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랬다. 아버지는 눈 코 입 똑바로 박힌 나를 주셨던 것이리라. 이 세상을 주신 것이다. 생각을 돌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잘난 부모 보다 못난 부모 잘 모시는 것이 참 효도일진데, 이 평범한 말 한마디를 터득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휠체어를 미는 아내의 등 뒤로 부채 같은 햇살이 내린다. 은행잎들이 아내의 어깨 위로 떨어진다. 노란 물감으로 채색된 한 장의 가을 그림 같다. 내가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한 번도 그려주지 못한 그림을 아내가 살랑살랑 앞서가며 그려가고 있다.
“아부지요!”
휠체어를 밀며 나도 슬그머니 아내의 그림 속으로 끼어든다. 그림 속이 환해진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첫댓글 조정 선생님, 마음에 너무 와닿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보면서 지금 나는 그분들과 함께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