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배달이 된다는 것을 아시나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고 내게 물으면 주저 없이 가을을 고르고 가을을 품은 9월, 10월, 11월 중 시월을 무척 좋아한다고 덧붙여 말한다. 나는 은은하게 변해가는 시월의 고즈넉한 단아함이 좋다. 그런데 9월과 11월은 초가을과 늦가을이라는 낭만적인 수식어가 붙어 사색(思索)이라는 근사한 시적 분위기를 띄워 주는 반면에 시월은 지칭하는 별다른 말이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가을이 속한 시월을 딱히 뭐라 칭하는 지 모를 수 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월엔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한층 높아진 파란 하늘에도 가을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다. 파릇하던 나뭇잎이 오묘한 빛깔로 채색되는 것이 내 눈과 마음엔 신비롭고 경이로울 뿐이다. 물론 세상 빛을 처음 보며 우렁차게 울어 젖히던 그날의 이유를 갖다 대며 어부지리로 시월이 속한 가을이 좋아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을은 그런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먹거리뿐만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해서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계절이다.
특히 가을이 되면 유난히 창밖을 주시하게 된다. 평소엔 관심도 두지 않다가 뭔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자석에 이끌리듯 창가에서 망부석이 되길 자처한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빛 조명 아래 패션쇼처럼 연출된 형형색색의 향연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패션모델 같은 자태의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에 심취하다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턱을 괸 팔이 저려서 구부린 양팔을 피려 해도 쉽게 펴지지 않아 곤란을 겪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며 움직이지 않으면 은근한 통증도 유발한다. 그래도 가을이 되면 나는 창문을 열고 또다시 턱을 괴고 있다.
‘정말 예쁘게 물이 들었네.’ 한줄기 나뭇가지에도 제각각의 서로 다른 패턴으로 물든 나뭇잎은 오늘도 창가로 시선을 붙들어 놓는다. 겨우 양팔이 자유로워질 즈음에 뻣뻣한 목덜미를 쳐들고 손깍지를 끼며 기지개를 켜는데 창밖이 소란스럽다. 매달렸던 나뭇잎이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지 소리를 뱉으며 일제히 몸을 흔들어 댄다. 적당히 강약을 조절하며 바람은 나뭇잎의 군무를 이끌고 허공에서 너울대던 잎은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이 되려는 듯 길 위에 내려앉는다. 낙엽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이 얻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가을이 되면 아니 해마다 그 해의 고운 낙엽을 처음 주워 드는 날은 예쁜 그리움 하나가 내 눈앞에 나타난다. 연중 가을 행사처럼 미소가 지어지며 신기하게도 그 가을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래서 2004년 초가을 딱지를 겨우 붙들고 있던 9월 말은 내겐 잊혀 지지 않는 행복한 가을의 단상이 되었다. 그것도 귀엽고 예쁜 가을의 모습으로… 그 가을은 그랬다.
기승을 부리던 마지막 더위가 사그라지자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온에 제법 가을 냄새가 섞여 가던 오후였다.
“딩동딩동~~”
“누구세요?” 당연히 올봄에 일학년이 된 울 아들놈이다.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아들 녀석인 줄 알면서도 나는 짓궂게 누구냐고 물으며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아침에 힘껏 위로 세워 놓은 머리카락 끝이 겨우 모니터에 비친다. 분명 발끝 또한 한껏 세우고 있을 아들 녀석. ‘꼬맹이들 생각은 안 하고 인터폰을 이렇게 높이 달아 놓으면 되나…’ 계속 키가 자라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잊은 채 애꿎은 관리실만 탓하는데, “딩동딩동~~ 딩동딩동” 연신 울려대는 벨 소리.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은 없다. “딩동딩동” 까치발로 지탱하며 팔을 뻗고 힘겹게 누르고 있을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자 왠지 나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누구세요?” 짐짓 모르는 척 무뚝뚝하게 재차 물으니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뭐라 하는 아들 녀석. 그런데 대답이 엉뚱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누구요?” “가을이에요.” 이번엔 제대로 들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말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다. “누구요?” 이미 사라진 장난기 대신 진지하지만, 호기심이 묻어난 한층 높아진 톤으로 물어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들리는 말은 역시 “가을이에요.”라고 한다.
게다가 아들 녀석 또한 평소 말투와 다른 마치 아기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처럼 귀여운 목소리로 변조까지 하며 내뱉고 있다. 아무래도 이젠 문을 열어줘야 할 것 같아서 “집에 오면 재깍 들어올 것이지 문밖에서 뭔 장난이야?” 말꼬리를 힘껏 끌어올리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가을이에요. 가을 배달 왔어요.”
세상에나 새빨갛게 아주 잘 익은 낙엽 하나가 인디언 깃털처럼 아들 녀석의 귀 뒤에 꽂혀있다. 새카맣고 풍성한 긴 속눈썹이 트레이드 마크인 울 아들놈은 눈을 아래로 감다시피 내리깔고 자기 귀를 내게 들이댄다. 매력적인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도록 재빠르게 깜박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가을 배달 왔어요.” 양어깨 아래로 활짝 펼친 두 손바닥은 아기 새처럼 날개짓을 하 듯 파닥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던지… 표정은 또 어찌나 우습던지, 게다가 귓가에 꽂혀있는 낙엽은 그해 내가 처음 보는 낙엽이었다. 아직 단풍 들기엔 이른 시기이기도 했지만, 무료한 일상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가을이 짙게 밴 붉게 물든 낙엽을 전해주는 아들의 모습은 반가움이 극대화된 행복의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은 너무 기쁘거나 좋거나 행복할 때 일시적으로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멍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한 마디로 감동의 쓰나미가 터지기 직전이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내게 울 아들놈은 자기 귀를 더 바짝 들이댄다.
“가을 배달 왔어요. 받으세요.” 흐뭇한 미소를 가득 담고 나를 올려다보는 아들.
“오~우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귓가에 꽂혀있던 고운 낙엽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며 아들 녀석을 꼬옥 안았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고마워” 자기 뺨에 비벼대는 엄마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던 아들 녀석은 “나도 엄마 사랑해. 그런데 엄마, 나 배고파.”
입안 가득 담고서도 울 아들 녀석은 낙엽과의 만남을 신나는 모험담을 들려주듯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열었다.
친구와 걷는데 예쁜 낙엽 하나가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울 엄마 줘야지’ 생각이 들자 낙엽을 주워서 책갈피에 끼워 넣고 학교에 갔다고. 어떻게 책갈피에 넣을 생각을 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려는데, 엄마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싱긋 웃는 녀석은 해맑은 표정과 말투로 나의 입을 닫아 놓는다.
“엄마가 작년 가을에 낙엽을 두꺼운 책에 끼워 놓아야 예쁘게 된다고 말했잖아. 엄마가 하는 거 봤어. 그리고 그전에도 하는 거 다 봐서 알아….” 말하는 아들의 눈빛이 수정처럼 맑고 빛이 나고 있었다. 불현듯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며 그 마음이 내게 전해오는 것처럼 전율이 온몸을 흩고 지나간다.
나는 지금도 그 낙엽을 가지고 있다. 색이 바라져서 그 곱던 예쁜 색은 볼 수 없지만, 여름 끄트머리에서 신선한 가을 향을 느낄 때나 그 해 처음 만나는 예쁜 낙엽을 주워 들 때면 사랑스러운 그 가을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자녀로부터 가을을 배달받아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것은 가을을 알리는 소중한 의식처럼 내 마음과 머릿속에 각인되어 가을이 올 때마다 받아 드는 울 아들놈의 추억의 선물이다.
엄마가 주운 낙엽을 소중하게 여기고 책갈피에 끼워 넣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아들 녀석. 그래서 더욱더 신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알려 주신 것 같다. 마가복음 10장 14~16절에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순수하고 정직한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도록 초심을 잃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나의 모습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아들의 행복한 삶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직접 가을을 배달해 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통해 천국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 시월의 청명한 가을 하늘빛에 빛나는 나뭇잎들의 멋진 모습에 홀리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