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 고종의 건강법 (2)
오늘도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죠.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 연결 - 인사 나누기)
Q1. 전 전대 임금 헌종과 전대 임금 철종 모두
후사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고종도 아들을 얻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었겠죠?
물론입니다. 고종 7년 윤 10월 10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약원(藥院)에서 입진하고 중궁전(中宮殿)의 태후(胎候) 즉 뱃속 아기의 상태와 관련하여 산실청(産室廳) 즉 왕비의 출산을 담당하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도록 아뢰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제조 이유원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태후가 지금 일곱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의관이 진찰하고 산실청을 설치하는 것을 모두 택일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는데요. 다시 말해 출산 3개월 전부터 왕비의 출산을 위해 산실청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실제 고종 8년 10월 7일의 <왕조실록>에서도 도제도 이유원이 아뢰기를, “산실청은 매번 해산하기 석 달 전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약원의 세 제조가 산실청을 설치하면서부터 돌아가며 입직하였다가 해산달이 되면 으레 모두 숙직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출산 3개월 전부터 왕비의 출산을 준비하는 기구가 설치되는 것이 법도임을 말하였습니다.
Q2. 왕비가 임신하니까
아주 철저하게 대비를 한 거였군요?
네 맞습니다. 또한 이어서 아뢰기를, “산실청을 설치한 동안에는 매일 중궁전의 진맥을 청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여, 매일 어의들이 숙직하면서 왕비의 건강상태를 진단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후 고종 7년 10월 22일과 23일에는 각 신하들이, 입진한 의관이 “왕비의 맥박이 평온하여 탕제를 쓸 필요가 없다.”라고 전한 말을 언급하면서, 고종에게 축하인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고종 8년 9월 13일에도 “삼가 중궁전에 입진한 의관의 말을 듣건대, 맥후 즉 맥 상태가 고르고 건강 상태가 좋으셔서 몸을 보할 탕제를 드시지 않아도 된다 합니다. 대소 신하들이 기뻐하고 축원하는 마음을 어찌 다 형용하겠습니까?”라면서 축하하는 말을 전하는데요. 이는 만약 반대로 임신을 한 왕비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오히려 탕약을 처방했음을 반증해주는 대목입니다.
Q3. 아 임신하면 양약뿐만 아니라
한약도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왕실에서는 아예 적극적으로 처방을 했었군요?
네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임신했을 때는 한약을 복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하지만 방금 <왕조실록>에서 본 바와 같이, 왕비는 매일 어의의 진맥을 받으면서 필요한 경우 처방을 받아 한약을 복용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비엄마가 임신 중에 어떠한 증상으로 고생한다면, 당연히 뱃속에 있는 아이도 엄마와 함께 그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에, 빨리 한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임신한 예비엄마들은 이미 매일 한약을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보리차 둥글레차 결명자차도 일종의 한약이며, 심지어 쌀 보리 등 곡식도 일종의 한약재일 수 있기 때문인데요. 물론 그 효능이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식품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임신했을 때는 반드시 한의원에 가서 정확한 진찰을 받고 한약을 복용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Q4. 그러면 어떤 경우에
임신 중 한약을 먹어야 하는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나라 정부의 지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임신 여성에게, 정부에서 지급되는 행복카드가 있는데요, 이 행복카드로 임신 중 한약을 복용할 수 있는 증상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입덧 기침 감기 태동불안 출혈 복통 부종 등의 증상인데요, 출산 후 산후 조리 뿐만 아니라 유산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즉 조선 왕실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임신 중의 한약 복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거지요. <동의보감>에는 당연히 그러한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이 나오는데요, 임신했을 때 복용하는 한약 처방은 수천 년 동안 수천 수백만 명에게 검증되어온 안전한 처방이며, 왕조실록에서 보듯이 왕비가 처방받던 최고급 처방인 것입니다.
Q5. 고종도 60세 이상 장수한 왕으로 알고 있는데,
건강상태는 어떠했는지요?
네 고종은 풍열(風熱)로 인한 붓기와 간지럼증 증상을 앓았었는데요. 고종 26년 4월 3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신하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전하를 뵈니 귀에 약을 붙인 데가 있는데, 혹시 풍열의 징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까?”하니, 하교하기를, “며칠 전에는 과연 괴로웠으나 지금은 나아간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비록 고종이 다 나아간다고 얘기하였으나, 신하들은 귀가 편안치 않다는 고종의 말을 들으니 걱정을 금할 수 없다면서 치료를 받기를 권하는데요. 특히 판중추부사 김홍집이 아뢰기를, “귀의 테두리에 아직 붉은 윤기가 있습니다.”라고 하여 귀에 풍열 증상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Q7. 풍열이라는 것이
결국 피부 증상을 얘기한 것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원래 다른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피부 증상을 말하는 것이 맞는데요, 왕조실록에는 다시 또 이러한 피부 증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종 31년의 기록을 보면,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얼굴 과 눈, 그리고 몸에 나타나는 풍열 증상에 대해 더욱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월 29일에는 고종 스스로 “얼굴의 증상은 점점 나아가지만 두 눈과 몸의 풍열증으로 여전히 괴롭고 매우 가렵다.”고 호소하는 구절이 나오고요. 이어서 30일에는 “얼굴이 붓고 붉어지던 기운은 빨리 나아가지만 두 눈의 풍열증과 온몸이 가려운 고통은 어제와 마찬가지인데다가 체증(滯症)도 겸하여 나타났다.”고 말하여 체증까지 합병해서 나타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Q8. 그렇다면 증상이 더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12월 1일에는 어의들이 “여러 가지 증상이 계속 번갈아 괴롭히는 것은 원기(元氣)가 빠져서 약해지고 체증으로 허한 틈을 타서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고종이 스스로 “밤새 온몸이 가려웠고 눈의 풍열증도 아직 차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어의 진료까지는 굳이 할 필요 없다면서 진료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12월 2일에 아들인 의화군 이강이, “탕약은 가미소풍산(加味消風散)으로 의논하여 정하고 한 첩을 이제 달여서 들이겠으며, 겉에 바를 것으로는 파초 즙에 우황을 섞어서 지어 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강제로 치료를 받게 합니다.
Q9. 신하들의 말은 거부했는데,
아들이 얘기하니까
고집을 꺾은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필요 없다고 계속 말했었지만, 정작 치료를 받으니 좋았던가 봅니다. 고종은 5일에 “풍열증은 더하였다 덜하였다 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오늘 저녁 이후로는 얼굴이 또 가려운데 이것이 괴롭다. 가미소풍산을 이전 처방대로 한 첩 지어 들여오라.”고 명을 내립니다.
이어서 12월 7일에는 마침내 “얼굴의 풍열증과 몸의 가려운 증상이 끝내 시원하게 낫지 않으니, 탕약은 이전 처방대로 하되 약기운을 끌어올려주는 승마(升麻)와 뭉친 것을 풀어주는 갈근(葛根)을 각각 한 돈씩 더 넣어서 지어 들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어의 진단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던 고종이 한약 한 첩으로 효과를 보자, 이어서 계속 복용할 뿐만 아니라, 직접 처방의 가감까지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 고종이나 의화군도 어느 정도 한의학에 대한 공부를 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