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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의 고장으로 가면서 옷깃 조차도 흐트러질까 조심스러워라.
먼저우리는 안동에 들르기전 그들의 저변을 이해 해야 안동을 보았다고 할수있지요.
그 밑 바닥에 흐르는 맥은 퇴계 이황선생으로 시작되는 진성 이씨와 고려의 개국공신 이도의 예안 이씨 하회 마을 류성룡의 풍산 류씨와 김상헌의 안동 김씨를 알아야 인맥을 알 수 있고 하회탈과 차전놀이의 성격을 알아야 안동을 조금은 이해 했다고 할수있겠이지요.
우리 역사 정신사의 맥을 이루었던 것은 도산서원 화천사원 병산서원 호계사원이 있어 가능 했으리라, 이들사원 유생들이 있어 조선시대 불교를 이단이라고 내 몰았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런 내용들이 이육사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로 이어 왔다.
이곳에서 도산서원의 기와편과 같은 위용은 볼수가 없었다. 이육사의 이야기는 유생들 숙사 의 크기를 가늠하게 할 따름이다. 도산서원의 기와편들은 지금도 아동댐 물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이퇴계(1501-1570) 조선 학자 문신으로 이와 기를 기본으로 서로 순환하는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으로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 이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당쟁과도 관련되었지요.“ 모든 일은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지말라. ” 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이번 방문은 안동 문화재 지킴이 축제의 한 분야로서 시간상 이퇴계의 도산서원은 배제 되었기 때문에 도산서원 이야기로 시작 하고푼 마음이 앞섰네요.
안동 톨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동 지킴이 선생님과 동승, 해설과 함께 충효당으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길은 사람 하나 구경하기 힘든데 집집마다 가을 걷이로 충만하고 과실수 마다 풍년이니 이 보다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보냐. 참으로 좋은 계절이로다. 흥이 절로 나네. 까치란 놈이 내 마음 아는 듯 얼씨구 좋다 추임새를 놓네 ! 내 마음이 너무 했나.
충효당에 이르러 담장 사이로 보이는 마당엔 안동 사랑 지킴이 이백 여명의 열화와 같은 숨결이 우리들 가슴으로 포게져오는 느낌이여… 우리 위례 역사 지킴이들 구십 여명이 들어서니 그것은 역사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불타오르는 듯 하였다.
먼저 양쪽으로 갈라 서서 양반의 격식은 접어 두고 구십도 절로 대신했다.
안동 문화 지킴이 회장님의 지킴이란 울타리와 위례라는 울타리가 한 마음이라는 취지의 인사 이야기로 시작 되었고 위례 역사 지킴이 회장님의 이야기로 두 단체는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갔다. 안동과 위례를 대표한 학생들의 문화헌장 낭독을 선창으로 모두들 선서를 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적 권리를 창달함에 기초를 둔다는 내용으로 문화 시민으로 한 걸음 나아간 느낌은 모든 참석자들의 느김이었으리라.
다음은 예안 이씨 문중 이준교 선생님으로부터 인사와 고택에 대한 내력을 들었다.
충효당
보물553호(1971.8.30.지정) 경북 안동시 풍산읍 하리1리189
이집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충과 그 후손 이한오의 효행으로 정효각에서 충효각으로 또충효당으로 격상 된것같다. 안동 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는“□”자 형으로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어 손님은 내 식구와 같은 배려를 하겠다는 마음이 배어있다. 뿐만 아니라 굴뚝은 옆으로 내어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어려운 사람들이 배 고품을 충동 한다하여 남을 배려하는 보이지 않는 행위가 갸륵하다.
기단부분의 허튼 층 쌓기와 홑 처마 지붕은 위엄을 내 세우지않는 얼마나 이웃을 배려한 모습인가. 이런 배려는 집에 담장도 없었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담장이 있는 것은 어인일일까?
담장은 육십년대 후반에 시공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담장은 안보정권 시대의 맥락에서 시공 되었으리라 담장은 역사의 현실성을 말 하는 듯 하다.
본래 남문이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 하고 있다. 서문 밖에 평행하게 있는 바깥채를 철거한뒤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는-자형으로 팔작 지붕을 가진 쌍수당 이라는 별당이 있으며, 쌍수당 앞으로 연못을 만들어 집앞의 여유로움이 돗 보이며 ,배산임수의 풍수사상을 간직한 모습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형의 성격이 강하며 풍산 평야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어쨌든 쌍수당 백원당 충효당으로 불리게된 내력은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배출 시켰는지를 가늠하게하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사백십년 만에 발굴되어 세상을 울린 원이 엄마의 편지는 효의 근간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 하는 부분이며 내용은 우리 어머니들이 들려주는 회심곡을 듣는 듯한 심회를 감출 수 없어 눈 시울이 시큰하네. 또한 이선생의 효의에 귀감을 삼고 싶은 마음이다.
어려운 내색 한번 없이 자리를 내어주신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으로 제기차기 줄넘기등 행사로 이어지며 분위기는 충효당을 달구었다. 이어서 지금은 안동 대표 음식으로 안동소주와 안동소고기 간고등어등으로 잘 알려져있다. 식사시간은 주최측의 배려로 안동 소주가 곁들여져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시간은 우리를 나두질 않고 소산마을 김상헌의 고택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청원루
경북 유형 문화재199호(1985.10.15.지정)
경상북도안동시 풍산읍 소산리87
원래평양 서윤을 지낸 김반(1479-1544)이 살던 집으로 1645년(인조23년) 청음 김상헌(1570-1652)이 누각으로 고쳐세웠다. 원래 두채로 된 건물이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만 남아있다. 김상헌이 1641년에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심회를 표현하기를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 수야
고국을 떠나고자 하랴마난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그리고 1645년 돌아와 거처하며 청원루라 한 곳이지요.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던 그로서는 척화를 주장 할 수밖에 없는 명분 때문에 청원루라는 이름처럼 한번 생각은 바꿀수 없다는 신뢰의 의지가 담긴 큰 그릇 이었으리라.
김상헌의 대꼬챙이 같은 사상은 그 후대에도 안동 김씨 세도로 이어져 조선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의 증손 되는 김창집의 생활사를 엿볼수 있게하는 공간이다.
당시 아들 같은 최명길과 아버지 같은 김상헌이 후에 소론과 노론으로 대립의 씨았이 되기도 하였지요. 이와 같은 사상적 대립의 저변에는 오늘날 여야 정치사에 까지 이어온 것은 아닌가 생각 되어지는 부분이다. 헌데 김상헌의 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것은 그렇게 살았던 것이 옳았나를 생각게하는 부분이다. 고향 소산 마을를 그리며 고향이 있는 동남쪽을 향하고 역사속으로 묻혀 갔던 것이었으리라. 봉헌의 마음으로 안동지킴이와 함께 고택에 묻은 먼지와 청소로 가신님들을 그리워 했다.
흐르는 시간은 물과 같아서 류운룡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겸암정사와 부용대로 향하니 멀리 보이는 강변 암벽엔 암각자가 있을까, 울진 반구대의 암각화가 있을까, 기대로 설래기도 하였다. 겸암이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바위돌이 켭켭이 싸여있는 모습이지 않는가, 바위돌이 쌓인 것같이 학문도 그와같이 쌓아 나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어라.
겸암정사
중요 민속자료 제89호 (1979.1.23.지정)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37
겸암 류운룡(1539-1601)이 세운 정사 운룡이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보통 정자와 달리 서당 구실을 하였으며 류운룡은 조선 문신으로 안동 현감을 거쳐 사복시 첨정이되고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토적을 소탕했다. 퇴계 이황이 쓴 겸암정 현판이 걸린 바깥채는 정자채이고 안채는 바깥채를 보조하는 살림채이다. 당시 류운룡보다 38세가 많은 퇴계는 사랑하는 형제 제자들의 기특한 모습에 기꺼이 현판을 썻으리라 짐작된다.
겸암정사에서 강의하는 유림들의 기본자세와 수신하는 마음 가짐을 압축한 계판이 마음속을 다짐케 한다. 제수각 앞에서는 다시 옷깃을 다듬케하는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부용대
하회마을 서북쪽 강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에 있는 해발 64메타인 절벽.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해 정상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할수 있고, 마을이 연꽃이 떠있는 모습처럼 보인다하여 하회마을을 아끼는 마음이 담긴 부용대라 이름지었다한다. 또한 만선의 모습을 이룬 배의 모습이라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하니 식수야말로 인간을 이루는 기본인데 어떤방법으로 이루었을까 생각케한다. 청정한 낙동강 물속에 잠긴모래톱까지도 선명하니, 학문하는 마음까지도 맑게하여, 시선의 세계로이끄네.
저 건너 마을엔 하회탈춤이 있었고 강변에는 북촌 남촌 갈라서서 차전놀이가 펼쳤졌을 것을 상상하게된다.
하회탈
국보121호(1964.3.30.지정) 하회 마을과 그 이웃 병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은 12개로 이루어지며, 대체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며,턱을 노끈으로 달아 입체감과 표현기법을 돗보이게 하므로 다른지방의 탈과 구분되며 이매탈에 얽힌 사랑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한다. 해마다10월이면 축제가 열려 각종 가면들과 길놀이 마당극등이 펼쳐지는 것은 그옛날 개성 장터에서 팔도광대가 벌였던 굿판의 축소판은 아니었을까 생각 되어진다. 하회탈은 파계승에 대한 조소와 양반들의 잘 잘못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구성 자체가 전국 탈놀이의 주류를 이루는 것과 같다.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풍류와 멋을 느끼게 하는결정판이다. 양반의 고장답게 금기시 하는 것도 많아서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 나려는 몸짓으로 하회탈과, 별신굿 서낭굿의 대잡이가 마을 전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연상케하며 양반이 많은 이곳은 서민과의 대화의 장으로 필요 했으리라 여겨진다. 차전놀이 또한 양반과 서민의 괴리를 메꾸고자 행해졌던 놀이로 생각게한다. 음력 칠월 보름날 강물엔 불꽃을 띄우고 배를 타고 줄불 놀이가 벌어진다고한다. 마을앞 강변엔 소나무가 있어 만송정이라 이르네.
만송정
천연기념물 제473호 (2006.11.27.문화재청 지정)
류운룡이 부용대의 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 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천여그루의 나무만 남아있는 듯 하다.
낙엽이 쌓이듯 발갈음 하나 하나에도 역사 이야기는 화천사원에 책들이 쌓여가듯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화천서원
경상북도 풍천면 광덕리16-2
부용대 옆쪽으로 위치하며, 겸암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묘우를 짓고 위폐를 봉안, 제자인 김윤안(1560-1620)과 증손자인 류지원(1598-1674)공을 배향하는 추모의 기능을 갖춘곳.
지리적으로는 자연과 잘 어울리며 한적한 곳이라 서원으로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곳이다. 경내에는 방황하는 우리에게 갈길을 알려주는 유도문이있고, 하회마을을 조망 할수있는지산루, 선 후배의 수양장소를 구분하는 동/서재가있어 선배의 배움터는 존헌재(동재) 후배의 배움터는 전학재(서재)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이 담긴 이름들이다. 효도와 형제우애와 선비정신을 기리는 경덕사.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모범된 가신님의 넋을 기리는 숭교당과 전사청이 옷깃을 여미게하는 장소다. 비가 갠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도 명쾌해지는 광풍제월이란 현판은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쉬게하네…
옆에있는 옥연서원은 가희 신선을 모방한 이상세계를 추구하고 있기도하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굽이 바라보니 감사한 마음이어라 감록헌, 마음 씻고 마음두어 하나라도 이룸이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세심재, 이집 장만할때 탄허스님 도움이 컷네 스님을 배려한 완적재, 먼곳으로부터 친구가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친구의 내방을 기다리는 원락재, 이집을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간직된 애오헌.
이와같이 소중한 뜻이 담긴 내용을 류성룡(1542-1607)은 다음과같이 심회를 털어놓았네.
우리 형님 정자지어 겸암이라 이름 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는데 매화는 뜰 가득히 피어났구나 발가는데 마다 향그런 풀 냄새 따르고 호젓한 산길에는 안개만 피어나누나 그리움이 강물되어 소리없이 흐르는데 강물은 무심히 밤새 흐르네
류성룡은 지난 일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징심록(국보132호)을 지었다한다.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가 죽은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고향을 얼마나 사랑 했으면 호 조차도 서애라 하였는가 화천서원과 옥연정사를 연상시키는 지형적 모습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지않은가?
오늘 마음의 정서가 잘 간직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한 모든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하며
또한 안동시민과 각 문중에 누 가 없었는지 반성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가을이 저녁 노을에 더욱 익어가고 있었다.
첫댓글 선생님의 후기글에 감탄일 뿐입니다. 그날 안동을 자니치며 제가보지 못한 부분까지도 샅샅히 볼수있도록 한권의 책을 보는듯하게 완벽한 표현해 주신 곰마리 선생님의 훌륭한 후기글 잘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에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컴퓨터로 하는 작문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심오한 역사 인식의 후기글 반복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따뜻하고 고마운 뜻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할수 있으리요 안타깝기만 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