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우물 양보의 뜻
창세기 26장 12절 -20절 2012년 9월23일 주일 오전 말씀지
오늘은 실수로 온전해진 이삭을 나타내주십니다. 이제 큰소리 못 칩니다. 왜?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는가? 왜? 원죄의 역사를 두셨는가? 왜? 노아가 실수케 되는가?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실수케 내버려 두시는가? 우리들도 실수할 때마다 더 겸손해지고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해진 이삭을 블레셋 땅에서 높이 들어 큰 자가 되게 하셨지만 이제 그들과 그 무엇 때문에도 다투지 않습니다. 지난날 실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실수로 인해 온유하게 된 것입니다. 민12:3-
12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땅은 가나안 땅으로 열매맺게 하시려 젖과 꿀을 주시는 땅입니다. 이삭 때에는 블레셋사람들이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평안 중에 잠들어 부끄러움 창피를 당했지만 그것으로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더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봅니다.
이제 농사한 것은 말씀의 씨를 뿌려서 싹이 나면 자신을 가꿔서 열매맺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한 것을 나타내주시는데 똑 같은 말씀을 받아 옥토의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되새기면 백배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백배를 맺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13:23-
옥토가 되지 못하면 60배 30배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옥토는 처음부터 옥토 밭이 아니라 길가의 밭과 돌짝밭과 가시밭을 거쳐서 된 밭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길가와 같이 말씀은 받았으나 세상생각이 가득하여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19절 돌밭은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쁘나 계속하여 되새김질하지 못함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하는 것이요 20절 가시밭은 말씀은 받았지만 자기의 형편사정으로 인하여 남을 미워하고 돈 걱정만 하다가 말씀 받는 것을 중지함으로 더욱 남을 미워하며 정죄하는 자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잘못돤 것임을 깨닫게 하신 심령이 옥토입니다. 22절 옥토의 마음은 마리아와 같이 주의 발아래 겸손히 앉는 것이요 (눅10:39)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 내게 하신 말씀으로 받는 것이요 (행10:34) 뵈레아 교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이 그러한가?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행17:11-
이제 이삭이 옥토의 심령을 주신 것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옥토의 심령을 가진 자들은 무엇이나 복으로 받습니다. 평안과 환난까지도 복으로 받아 기쁨과 감사의 생활하는 것이 복입니다. 평안한 생활은 더 말씀 받는 일에 힘쓰고 더 남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고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 사마리아 사람처럼 주신 것 가지고 생명 살리는 여행하라고 땅 끝까지 증인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눅10:33-
환난은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소망을 이룸으로 환난도 복인 것입니다. 구약에는 세상 평안만 복으로 많이 나타냈고 성령시대에는 환난도 첫째부활을 얻게 하시는 복으로 나타냈습니다. 계20:6-
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대케 하신 것은 옥토의 심령을 가진 자들을 그 땅에서 높이 들어 등대와 같이 세우기 위함입니다.
왕성한 것은 말씀의 권위를 높이 세운 것입니다. 자라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높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왕성한 것도 말씀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행12:24- 19:20-
우리도 말씀을 높이면 교회는 말씀이 흥왕케 되게 하십니다.
거부가 되게 하신 것은 육신을 위해 주신 것으로 생명 살리는 일을 하게 하심입니다.
14절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양은 영적으로 순종이요 소는 충성입니다. 욥에게도 주사 동방에 큰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욥1:3-
노복은 말씀에 복종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시기하는 것은 자신들은 이삭처럼 살 생각은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받으러 나오면 되는데 바리새인처럼 듣지도 않고 비판 정죄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떠나 말씀 찾아가는 자들이 생기므로 교인들을 잃으므로 시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 시기하는 바리새인을 나타내주셨습니다.
15절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이삭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우물에 물을 먹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 우물에 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 우물에 물은 복음이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자라나 마음껏 열매맺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거부가 되게 하사 생명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 이삭입니다.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운 것은 복음의 말씀을 받을 생각은 없고 더 이상 그 말씀을 못 먹게 못 받게 하려고 하는데 흙은 육이요 세상입니다. 그물을 먹고 더 열매맺게 하지 못하게 하려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이 그러하고 초대교회 때에는 대제사장 장로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행4:1,2-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자들은 복음과 진리를 말하면 그런 것이 어디 있냐? 틀렸다 잘못되었다하며 유대인들처럼 방해를 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리시고 자라게 하사 열매맺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16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우리보다 강성한 즉 떠나가라 무엇이 강성해졌나요? 이삭의 영이 강해진 것입니다. 날마다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가니 열매와 생명 살림의 역사는 갈수록 성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이삭을 따라오면 될텐데 자기가 세운 왕국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데 그 자리를 잃을까봐 따르지는 않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으로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직분을 계급과 감투로 아는 자들입니다. 교권주의자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17절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이삭은 그들이 떠나라 하니 떠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떠나게 하신 줄 알고 미련도 없이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도 환난이 가까울수록 성경을 잘못 배운 자들이 교회를 장악할 것이요 겉옷을 달라할 것이니 속옷까지 주라 하셨습니다. 마5:40-
그 생명으로 살리심 받은 참 성도는 세상과 교권에 빠진 자들의 횡포에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겉옷은 직분이요 속옷은 그들에게 받았던 잘못된 교훈으로 그동안 들었던 말씀까지 다 버려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복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병사들이 네 깃으로 찢어 나눠가진 4복음의 말씀인데 영적 복음 요한복음에만 나타냈습니다. 요19:23-
18절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아비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블레셋사람들은 함의 후손으로 영적인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을 사람의 머리로 지식으로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복만 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 가려 블레셋 사람들이 메운 그 우물을 다시 판 것입니다.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영적으로 풀어주면 그런게 어디 있느냐? 하며 듣지 않고 들으려 하는 자들도 못 듣게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구원의 복음 (엡1:13,롬1:16) 은혜의 복음(행20:24), 영광의 복음(딤전1:11,고후4:4)이 분명히 있는데 이상하다하며 아예 듣지 않고 남도 못 듣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신앙은 그 아비를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우물의 물은 아르박삿. 셈, 노아, 아담을 통해서 내려온 신앙입니다.
19절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샘 근원을 얻었으니 샘 근원은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로 창세기 3장까지 영원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삭이 창1:1의 근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샘 근원은 어린양 보좌로 영원한 구원입니다. 계22:1-
20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는 것은 신앙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이삭의 종들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서 근원까지 얻어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밝히 보는데 그랄 목자들은 우리가 열심해서 구원 받는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투는 것입니다. 그때 이삭은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부르고 그 우물을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영광길 가는 우리들에게도 세상 것 밖에 보지 못한 그랄 목자 같은 자들이 맞지 않는다하여 다투려 할 것입니다. 이때 다투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변론은 유익이 없습니다.
딤전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