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한명회,권람,신숙주,최항,정인지,김국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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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양반관료층 내부에 형성된 하나의 정치세력.
관학파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즉 1453(단종 1)~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뒤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양 세력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의 학문경향을 사장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초기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경술보다는 현실적으로 사장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이른 시기에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림파와 대립하여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되기 전부터 조선의 국가체제 정비에 깊숙이 참여했다. 한명회·권람·홍윤성·정인지·신숙주·조석문·정창손·최항·김국광·구치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계열에 주축이 된 관료들은 대부분 집현전을 거쳐 성장한 이들로, 그중에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초의 집권인물들 모두가 훈구파는 아니고 대개 세조대 이래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이 훈구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즉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들은 1453년(단종 1)에 정난공신, 1455년(세조 1)에는 좌익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세조의 즉위가 선양(禪讓)이라는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이라는 기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이 일어났고 그결과 세조와 공신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토지를 강점하고 양인농민을 노비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이러한 훈구파의 지위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1467년에 세조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한명회·신숙주·김국광·노사신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이는 태조의 외손이라는 강력한 배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왕권강화책을 둘러싸고 남이 등의 세력과 종전의 훈구파 사이에 본격적인 갈등이 재연되어 남이옥사가 일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세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남이의 옥은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의 훈구대신을 제거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유자광의 고발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옥사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 등의 새로운 세력은 제거되고 종전의 훈구파가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 사건 직후에 익대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훈구대신들은 더욱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471년(성종 2)의 좌리공신 책봉 때 종전의 공신으로 책봉 받았던 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들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됨으로써 훈구파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세조 13) 이래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다스리는 직책)이 되어 특정한 직사를 갖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 상호간에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습적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했다. 독점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15세기 후반 이후에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를 운용하기 어렵게 했다.
조선은 고려와 비교하여 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정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대단위 농장을 경제기반으로 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이에 대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층인 사림파가 비판을 제기했다. 이러한 권력독점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추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논리로 나온 것이 성리학적인 공도론(公道論)을 제시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주장하면서, 훈구파의 권귀적(權貴的) 성향에 대해 비판을 한 정치공세 논리였다.
1476년(성종 7)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철회하고 원상을 폐지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훈구대신들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림파계열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정착시킴으로써 향촌민의 안정과 향촌지주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훈구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사림파는 이전에 혁파되었던 유향소(留鄕所)를 복립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은 1483년부터 계속되다가 1488년에 유향소가 다시 생겼으나 이때의 유향소는 중앙집권체제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복립된 유향소는 결국 이전과 같이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 없었다. 이에 사림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훈구파를 더욱더 비판해갔다. 이러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초래했다. 무오사화에서 사림파가, 1504년 갑자사화에서는 훈구파가 각각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배출된 정국공신은 이후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515년(중종 10)을 전후하여 서서히 사림파가 언관 진출 등을 통해 등장하여, 정국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가 주도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후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외척인 김안로가 잠시 전횡했으며 김안로를 제지한 이후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 기묘사화). 그런데 김안로일파의 제거에 외척들도 가세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훈구파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외척세력과도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갈등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로 인해 책봉된 위사공신 역시 외척에 의존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종 연간을 거쳐 이기와 같은 인물이 잠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하더라도 점차 종전의 공신세력은 퇴조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중요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척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사림파와 대립했던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도 퇴색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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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길제-김종직-김굉필-조광조 로 이어지는 사림파..
조선시대 정치세력의 하나.
특히 조선 전기 집권세력인 훈구파에 대응하는 세력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학문배경으로 하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사족'(士族)·'사대부'(士大夫)·'사인'(士人)·'사류'(士流)와 같은 용어와 함께 사림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독서인층, 곧 지식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종전의 지배계급은 사회체제 및 정치권력 구조의 재편성에 따라 조선사회 내부에서 분화되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기존의 양반지배층은 물론 향촌사회의 향리까지도 조선의 관료제에 참여하거나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신진사대부가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문무양반으로 정권에 직접 참여했고,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은 관권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던 품관층, 일반사족, 그리고 향리세력으로 나뉘었다.
조선초에는 품관층이 사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 역시 신분으로 보아 사족이라 불렸다.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통으로 보아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성종 연간에 김종직·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로 나누기도 하는데 주로 비거족계(非鉅族系) 재지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일부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사림파라 해도 시기에 따라 상이했으며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혹은 사림파에서 훈구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훈구파에 비하여 군현 이족(吏族)에서 사족화하는 시기가 늦었던 영남사림파의 경우에 대체로 고려말 조선 초기에 이족으로부터 사족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시기는 크게 나누어 성종과 연산군대에 일어난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의하여 축출되는 때까지,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 점차 세력을 형성했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또 그 활동은 각각 영남사림파와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었다.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비판활동을 제기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근거지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언론활동과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노력이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군주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특권을 독차지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강력한 인신적 지배예속을 매개로 농장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양인농민에 압력을 가하여 전지노비(田地奴婢)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인구(人口)를 은점(隱占)하고 있었던 훈구파에 대하여, 하천부지 등을 개간하여 자신의 농지를 확대하면서 소농(小農)을 기초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던 사림파로서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초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종대에도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정치세력의 중심이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물론이고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대간(臺諫) 등 언관(言官) 계통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고 관료적 지배체제라는 조선 본래의 권력구조의 운용이 어려워지는 것을 뜻했다. 김종직이 경직(京職)에 복귀하면서 그의 문인 중에서 관리가 되어 대간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생겼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훈구파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기의 사림파의 정치활동은 주로 이러한 언론활동에 한정되었으며 한편으로 향촌질서의 안정을 위한 유향소 설치를 주장했다. 유향소는 조선초에 유향품관층을 중심으로 조직한 기구로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태종에 의해 한차례 폐지되었다. 그뒤 세종대에 향풍교정(鄕風矯正)을 내세우면서 부활되었지만 유향소 세력이 수령과 결탁하여 농민을 수탈하거나 자체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세조 말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유향소 복립운동은 사림파에 의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질서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인식되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세조 말년에 혁파된 유향소라는 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데 있지 않았으며, 〈주례 周禮〉의 향사례·향음주례를 시행하기 위한 기구로서 유향소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두 의례는 덕행이 있는 자와 연로한 자를 각각 앞세우는 것으로서 유교윤리 기준에 의한 향촌질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향소의 복립운동은 훈구파의 맹렬한 반대로 1483년(성종 14)부터 5년간 논의되다가 1488년에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경재소(京在所)를 통한 유향소의 장악이 가능한 상태에서 유향소가 곧 사림파의 세력기반이 될 수는 없었다. 경재소는 본디 그 지방관련자에 의하여 구성·운영되는 것이었는데 훈구파는 경재소제도를 고쳐 중앙 고위관료의 지방연고권의 범위를 넓혀 그를 발판으로 수령을 통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림파는 우세한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소가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시) 통과자라는 제한적인 인적 자원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강력한 세력 구축이 어려웠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는 강제 혁파당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타격을 받았지만 훈구파 역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양대 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인물은 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김굉필·정여창 등의 문인은 크게 관련되지 않았다. 중종반정은 훈구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므로 중종 초기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림파의 본격적인 진출은 1515년(중종 10) 이후에 가능했다.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대의 사림파는 강력하게 삼대(三代:夏·殷·周)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와 같은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천거제(薦擧制)를 통하여 과거제나 문음으로써 등용할 수 없는 유일(遺逸)과 학생(學生)을 선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또한 여악(女樂)·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기신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책봉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제거당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파는 중종의 제1계비 윤씨에게서 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제2계비 문정왕후가 난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두 외척 다툼 사이에서 위축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원형과 이기(李芑) 세력이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에도 명종 연간에 잇달아 일어난 사화로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권신 이기의 죽음과 척신의 배후였던 문정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더 이상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넓은 의미에서 사림의 재등장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훈구파와 대립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사림파는 훈구파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찾기 어렵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동일한 계급으로, 두 세력을 차별짓게 하는 것은 성리학 실천의 방법에 있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사림파는 경술(經術)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으나 양자는 서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향촌에서 주자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수양론(修養論)·도학론(道學論) 등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훈구파를 비판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사상은 수신(修身)에 두고 있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은 유교정치 사상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강조점은 시기와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사림파는 치인보다는 수기를 앞세웠고, 수신의 기본교재인 〈소학〉 공부를 강조했다. 〈소학〉은 생원·진사시나 잡과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성균관의 학령(學令)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강조는 사림파의 수기강조라는 또다른 뜻이 있었다. 그외에도 수신을 강조한 것은 〈삼강행실〉·〈이강행실〉의 번역·배포라든가 향약·향음주례·향사례의 실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학의 정통을 세우고 이를 현실사회에서 급속히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기의 강조가 곧 치인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서의 활동 자체가 이미 치인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종대 사림파의 경우 치인에의 관심은 보다 확실했다. 사림파가 군주의 수기와 권한을 강조했다고 하여 곧 전제적 왕권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량과(賢良科)의 실시와 같이 관료제의 강화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는 추진하는 힘이 필요했던 것이고 현실적인 필요에서 군주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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