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현대작가로는 드물게 한국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다. 하루키 열풍은 한국뿐만 아니다.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하루키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18개 국가에서 최소 15개국 언어로 번역 소개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하루키의 소설들은 물론이거니와 가벼운 에세이집, 여행기, 칼럼집까지도 빠지지 않고 번역 출간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엇이 독자들을 사로잡을까 ?
나는 하루키의 등단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부터 시작해 내면적 자아의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근작 『해변의 카프카』(2002, 이 소설의 국내 번역판은 아직 출간 전이다. 두권으로 나올 이 번역판 소설을 문학사상사에서 원고 청탁을 하며 전문을 보내줘 미리 읽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하루키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소년이다. 소년의 비현실적 모험 얘기가 이 소설의 스토리의 축이다.)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번역된 하루키의 책들을 거의 모두 읽어왔다. 달콤함과 슬픔, 유머와 청결함, 놀랍게 정제된 정직함을 갖고 있는 하루키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아무리 가벼운 에세이집이라고 해도 하루키의 책들은 내면의 노스텔지어를 예민하게 자극하는 요소들을 품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산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면서 겹쳐지는 상실감의 흔적들에 대한 통찰과 체험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주제다. 하루키의 문체는 재즈의 경쾌한 리듬을 담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문장이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주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루키 소설들이 독자들을 지겨움이나 괴로움에 빠뜨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사에서 권위의 흔적을 거의 완벽하게 지워 없애버린 작가다. 내가 아는 범주에서 말한다면 그 점에서 그는 최초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다. 소설의 형식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에서도 독선적 판단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루키에겐 다른 어떤 작가들도 따라올 수 없는 서사를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하루키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작가다.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거침없이 새로운 세계에 자신의 전부를 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늘 새로운 작가다. 그것이 젊은 독자들을 폭넓게 흡인하는 매력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그래서 일부 비평가들은 하루키의 문학을 폄하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들은 너무 난해하고,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것은 "공허한 일회성 오락물"에 그치고, 미시마 유키오는 "이국적인 일본"을 그려낸다. 반면에 하루키는 외국 독자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이국적인 일본의 국제판"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한 예다. 하루키를 진지한 작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냉혹한 흥행사라고 깎아 내리는 비평가도 없지 않다.
하루키 소설의 내밀한 특징들을 분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한 작품을 골라보자. 내가 고른 것은 『렉싱턴의 유령』(1996)이다. 하루키 마니아가 아니라면 그냥 흘려보냈을 하루키의 단편집 중의 하나다. 「렉싱턴의 유령」은 주인공인 작가가 알고 지내는 한 건축가의 부탁을 받고 그 빈집을 봐주면서 겪는 얘기다. 작가는 그 빈집에서 보낸 1주일의 첫날밤 유령들이 벌이는 파티 소리를 듣는다. 흥겨운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뿐이다. 1주일 뒤에 건축가는 여행으로부터 돌아온다. 반년쯤 지났을 때 작가는 건축가로부터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이 끝난 다음 3주일 동안 내내 잠만 잤던 아버지의 얘기를 듣는다. "땅 속에 묻힌 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몽유병자나 유령"처럼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혼자 그 아들을 묵묵히 키웠다. 그리고 커다란 집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뿐이다. 집주인이 없던 그 빈 집에서 파티를 열었던 것은 그 아버지의 유령이었을까 ?
이 단편집의 또 다른 소설 「토니 다키타니」도 죽은 자의 얘기이다. 재즈 연주자인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토니 타키타니는 인기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거대한 집과 몇 채의 임대주택을 소유한 자산가가 되었다. 그는 우연히 만난 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 빠져 결혼을 했다. 그들은 행복했다. 다만 아내의 과도한 의류구입 욕망이 문제가 됐다. 아내는 끝없이 새 옷을 사들였다. 그러다 아내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산더미같은 새옷 더미와 2백 켤레가 넘는 구두를 남기고.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을 입어줄 사람을 찾는 이상한 광고를 낸다. 아내가 사들였던 새옷들은 "생명의 뿌리를 잃고 시시각각 메말라가는 볼품없는 그림자떼"에 지나지 않는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들을 처분하고, 다시 2년 뒤에 죽은 아버지가 남긴 악기와 방대한 레코드도 처분하고, 외톨이로 살아간다. 그뿐이다.
두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자명한 현실의 틈새 얘기이다. 현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엄청난 물적 자원의 생산과 소비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도시적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얘기를 꺼내고 있다. 현실이 소거(消去)된 환(幻), 다시말해 헛것의 이야기다. 유령 얘기란 근본적으로 없는 실재, "부재의 현존"의 얘기다. 삶은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지만, 그 기초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재의 현존이다. 그것을 하루키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결락감"(「토니 타키타니」)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죽고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 그 부재를 끌어안고, 그 부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옛기억들을 조금씩 꺼내 먹으며 사는 것이다.
「녹색 짐승」과 「얼음 사나이」는 죽어서 부재자가 된, 그 "부재의 현존"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한다. 그들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킨다. 정원의 모밀잣밤나무 밑에서 번들번들 빛나는 녹색 비늘로 온몸이 덮힌 짐승으로, "나한테는 미래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죠. 얼음에는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음에는 그저 과거가 단단하게 봉해져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얼음사나이로. 여자는 녹색 짐승에게 프로포즈를 받고, 얼음사나이와는 결혼을 한다.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보통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벽이 있다. 평범한 삶을 살던 작중인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일에 이끌려 미지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물이 급류를 이루며 배수구로 빠져 들어가듯이 현실에서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수로들의 입구에는 언제나 "우물"이 있다. "우물" 저 밑바닥에 미로와 미궁이 있고, 그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연결된다. 그리고 현실 저 너머 미지의 세계와 한번이라도 조우한 사람은 더 이상 평범함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 점을 가장 강력하게 본격적으로 탐구한 소설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다.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다채다극의 상상력을 분출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하루키 소설이 도달한 한 정점이다. 환상이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젊은 이들의 연애담을 담은 『상실의 시대』(1987)에도 "들판의 우물"이 나온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객원 연구원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3, 4년의 준비 끝에 내놓은 대작 『태엽 감는 새』(1994)에서 하루키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나"로부터 출발해 "나"의 무의식의 미로로 들어간다. 거기에 자명한 일상의 세계와 변별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태엽감는 새』에서 개인의 무의식의 미로가 아니라 실제 역사의 현장이 등장한다. 전쟁이 지나간 현장 속에서 개인의 무의식의 미로와 완벽하게 조응하는 우물 속 미궁이 새롭게 나타난다.
하루키는 왜 이 소설들을 썼을까 ? 1960년대 말 비등점에 올랐던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이상이 무너져내리고, 급격하게 탈정치화, 탈역사화로 치달으며 그 자리를 자본주의의 소비 욕망으로 채웠던 경험을 우리보다 20년쯤 먼저 치렀던 일본. 그 사회 속에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 현실과 현실의 틈새, 죽은 자들, 그들이 남긴 결락감...... 그의 주인공들은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옛날 레코드를 듣고,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가끔은 정원의 잡초를 뽑기도 하였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가족 이외에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았다."(「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다. 나는 하루키의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동시대성의 감각"이라고 말할 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안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내면의 질병들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처와 상실감, 무의식의 환상과 소외감,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불안과 위기감 !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작중인물들은 대개 외톨이들인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머금고 있는 코드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루키 자신도 매우 평범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아들로 태어나 평범하게 성장했다. 청소년기에는 공부 대신에 책과 재즈, 그리고 흡연에 빠지기도 한다.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해서 입학하고, 여전히 공부 대신에 술과 재즈, 친구들에 둘러싸여 대학시절을 보낸다. 로스 맥도날드, 에드 벡베인,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커트 보네거트 들의 영어소설들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엘비스 프레슬리, 릭 넬슨, 비치 보이스와 같은 로큰롤과 재즈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른바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고 세계인으로서의 보편적 감각을 키운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란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젼의 야구중계를 보거나 재즈를 들으며 샌드위치를 씹어 먹거나 뜻밖의 여자들과 섹스를 나눈다. 그들은 고결한 도덕의 강박증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퇴폐적이지도 않다. 평범한 삶의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들을 앓고 있다. 그것은 소외와 고독이라는 이름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사회 현상으로서의 가족 해체와 자본주의의 물신사회가 빚어내고 있는 인간의 소외의 결과이다. 그들은 소외와 고립 속에서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결락된 자의 관계에 대한 열망을 안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트레바스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것은 예측불가능의 미로이며 미궁이다. 일상의 삶이 가리고 있던 형이상학적 혼돈의 공동(空洞)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내(蔬內)한다. 소외(疏外)가 아니라 소내다 ! 하루키의 소설들은 여전히 소내하는 현대인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