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87. 실업가.
이칭별칭 | 호 호암(湖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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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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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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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910년 ~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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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실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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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의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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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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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경주(慶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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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0∼1987. 실업가.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호암(湖巖).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아버지 이찬우(李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의 2남 2녀 중 막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같은 해 9월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 중학부에 들어갔다. 1929년 박두을(朴杜乙)과 혼인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사업에 뜻을 두고 아버지로부터 300석 추수의 토지를 분재받았다. 1936년 첫사업으로 정현용(鄭鉉庸)·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돈을 갖게 되려면 시대흐름 시대상의 조류에 최대한 합류되거나 합승되어야 한다.
같은 해 6월 일본인 경영의 히노데자동차회사[日出自動車會社]를 인수했으며, 또한 토지에 투자하여 200만 평의 대지주로 등장했으나 실패하고, 협동정미소와 히노데자동차회사를 매각, 부채를 청산했다. 1938년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국제 그룹으로 알려진 세이코도 역시 삼성에 많은 전수를 해 주었다. 시계 외에 더 알려진 것이 해외이고 시장이 늘 한시적으로 작은 한국은 워치만 공급받게 되었다. 얼마전 파텍필립 가문의 후손들의 극찬을 공개적으로 받았다. 오십년 지나서 어마한 가격상승은 예고된다. 시장성이나 경제성이 다 그렇듯이 그러하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였고, 1947년 상경하여 1948년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착수하였다. 1950년 일본경제시찰단원으로 업계를 시찰하였고, 6·25전쟁 때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환도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1953년부터 상업자본에서 탈피하여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자본화하였다. 같은 해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54년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법률가들의 삶은 그저 전문성이고 기업가는 나름의 전문성이지만 뭐가 더 나은 직업이라 불리우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단 자기들의 삶에서 바라볼 때에 단점 장점만 잘 파악해 보면 무척 도움이 될 일이기도 하다.
그 뒤 동방생명·신세계백화점·안국화재보험·전주제지·성균관대학교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중앙개발·고려병원·한국비료·삼성전자·제일합섬·삼성중공업·동양방송·중앙일보사 등을 창설, 운영하였으며, 삼성문화재단·삼성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많은 회사를 설립, 인수 또는 합병하여 재벌기업을 형성하였다.
또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이병철 [李秉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자동차 회사를 인수 했다가 잘 되지 않아 바로 매각 팔았다는 대목에서 주목해 보고 있습니다. 빠른 판단력 결정 등이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