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흡연가의 천국, 내가 본 유럽 이야기/ 전 성훈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세계지리부도를 통해서 처음 접해 본 유럽, 살아오는 동안 늘 한번 쯤 가보고 싶다고 꿈을 꾸었던 곳, 나이 육십 중반을 바라보면서 드디어 유럽 땅을 밟아보는 기쁨을 누렸다. 올해 1월초 13년간 기르던 강아지가 죽은 후 우리부부는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러한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딸아이가 기획한 일이 유럽지역 자유 여행이었다. 스위스, 독일, 벨기엘, 프랑스, 터키 다섯 나라를 주마간산으로 돌아보는 17일간의 여정으로 7월 하순 출발하여 뜨거운 여름을 해외에서 보내고 8월 중순에 돌아왔다. 120년 전 조선왕조 고종황제 시절 유길준 선생이 미국과 유럽지역을 시찰하고 ‘서유견문록’을 남겼다. 그 당시 선진국인 서구 문물을 보시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신 우리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 눈에 비친 유럽 풍경과 그 곳에서 느낀 개인적인 소회를 적는다.
7월 26일 한 밤중, 인천공항에서 터키항공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의 비행 끝에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 중 시인 전봉건 시집 ‘북의 고향’을 차분히 읽었다. 여행 전에 어떤 책을 가지고 갈까 고민하다가 고른 책이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신 막내 할아버님의 시집이었다. 내 나이 육십 넘어서 읽어보니 막내할아버님의 고향사랑 이야기가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고 진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이스탄불 환승역으로 나오니 묘한 냄새가 났다. 딸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이 즐겨먹는 향신료 냄새라고 한다. 스위스 쥬리히행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이스탄불 공항에서 기다리며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한 몸을 쉬었다. 공항 대합실이라 특별한 것이 없다. 단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띤다. 프랑스인의 코맹맹이 같은 말소리, 눈만 보이는 커다란 검은 옷을 입고 손과 발만 보이는 중동여성의 모습 등.
<호수와 만년설의 스위스>
7월 27일(월), 오전 11시 경 쥬리히 공항 도착. 중년의 여성 담당자가 상당히 까다롭게 입국 심사를 한다. 유럽에서의 여정을 묻기에 간단히 대답하였다. 쥬리히 공항을 빠져나오자 고약한 담배 냄새가 나를 맞이한다. 공항터미널 여기저기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쥬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Bern)으로 가서 기차를 갈아탔다. 낮 기온이 섭씨 26도인데 산악국가라서 그런지 선선한 느낌이다. 하늘이 높아 우리나라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그동안 그림이나 책 또는 T.V를 통하여 익히 눈에 익은 세모꼴 모양의 자그마한 집들이 널려 있다.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는 소형차가 훨씬 많아 놀랐다. 기차는 2층 열차인데 기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소곤소곤 이야기 한다.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년 두 번에 걸친 일본 지역 자유여행에서 보았던 배려심 깊은 일본인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스위스의 숙소는 인터라켄 그린델발트(Interlaken Grindelwald)의 엘리스 할머니 민박집.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기차를 내려 좁은 협궤 열차로 갈아타고 그린텔발트로 향했다. 협궤 열차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여행의 해방감과 이국의 모습에 흥분되어서 그런지 큰 소리를 떠들고 있었다. 서울 집을 떠나 거의 30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하였다. 엘리스 할머니 집은 너무나 아름답다. 반 지하를 포함한 3층으로 된 목조건물로 우리는 2층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석양이 지는 테라스에 앉아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잔설이 남아있는 알프스를 바라보았다. 중늙은이가 되어서 그런지 흥분이나 감흥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역시 먼 곳으로의 여행은 젊은 시절에 해야 제격이다. 그래야만 큰 꿈을 키우며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다양한 외국인들의 모습과 말소리가 들려온다. 오후 9시가 넘었는데도 주위가 어둡지 않다. 정말로 이상한 엘리스의 나라다.
7월 28일(화), 눈을 뜨니 새벽 4시 40분. 스위스 첫 번째 여행지는 체르마트(Zermatt)다. 협궤열차와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체르마트 시내에 도착하여, 마터혼 패스를 끊어 케이블카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체르마트 정상에 도착하였다. 해발 3700미터 정도인 체르마트에서 바라보이는 웅장한 산, 바로 미국영화제작사 파라마운트의 심벌로 유명한 마터혼이다. 장엄하여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듯 한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한 동안 만년설의 잔설과 맑은 호수를 내려다보고 나서 트래킹 코스를 천천히 두 시간 정도 걸었다. 이곳은 햇볕이 아주 따갑지만 땀이 나지 않아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여름 날씨다. 아내와 딸과 함께 하늘과 구름, 눈 덮인 높은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직장 일로 집에 있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만큼 걸을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하이킹코스에서 내려와서 체르마트 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고생하였다. 노상카페의 식탁마다 재떨이가 준비되어있다. 가게나 카페에 커다란 개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자연스런 이곳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문화다. 개들이 대부분 온순하여 짓는 일이 거의 없다.
7월 29일(수), 아침부터 비가 뿌린다. 숙소인 그린델발트를 출발하여 기차를 타고 알터호번에 갔다. 산악마을을 구경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가 조성된 꽃길을 걸으면서 건너편에 보이는 ‘융프라우’를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정상은 안개로 보이지 않는다. 유럽 알프스의 최고봉인 융프라우의 정상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일 년에 한 달도 안 된다고 한다.
오후에 인터라켄으로 돌아와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인터라켄은 ‘호수에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의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인터라켄은 너무나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툰(Thun)호수 유람선을 탔다. 호수 주변 산자락에 집을 짓고 사는 이곳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 농사를 지을 땅도 없고 호수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도 없고 그렇다고 목축업을 할 만큼 커다란 초지도 보이지 않는다.
7월 30일(목),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타고 루체른(Luzen)시를 찾았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보이는 경치는 남진의 ‘님과 함께’의 노랫말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림같이 맑고 잔잔한 호수와 푸른 초원에 빨강색 지붕의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루체른 시에 도착하여 빈사의 사자상과 카펠교 다리를 거닐었다. 빈사의 ‘사자상’은 용감한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심과 용감함을 사자 모습으로 표현한 조각이다. 구석기 유물전시관을 들려보니 출토된 화석을 근거로 이곳이 그 옛날에는 아열대기후였다고 한다. 카펠교는 14세기 전반에 지어진 도시 요새의 오래된 목조다리이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다가 반가운 한글 표식을 발견하였다.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우리끼리 잘 살자 from corea"라고 막 흘려 쓴 문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저주의 글이 써있다는 것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기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인터라켄의 또 다른 호수(브리엔츠, Brienz)를 다니는 여객선을 타고서 주위 경치를 구경하였다. 시계산업과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영세중립국으로 세계의 많은 기구와 단체의 본부를 유치하여 존재하는 국가 스위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종교전쟁으로 참혹한 내전을 겪은 탓에 전쟁의 피해를 벗어나기 위한 지혜가 주위국가와 중립적 위치에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게 한 것일까?
7월 31일(금), 날씨는 선선하고 맑다. 하지만 햇살은 따갑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피로스트의 바이알프제 호수 주변을 보러 나섰다.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고 피로스트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호수까지 약 1시간 정도 하이킹코스를 걸었다.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 보이는 경치가 달라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가 걷힌 주변 산들의 모습들이 달라진다. 호수 주변에는 온통 젖소와 양들의 세계, 아주 큰 덩치의 젖소 목에는 상당히 커 보이는 방울이 아니라 종을 달아놓았다. 방목하는 짐승들이 움직일 때 마다 종소리가 나는데 내게는 묘하게도 깊은 산사의 스님들이 두드리는 목탁소리로 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알퐁스 도테의 단편 ‘별’의 주인공 목동이 사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젊은 우리나라 여성이 여기에 매점을 차리면 대박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멋지고 기막힌 자연을 바라보면서 그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와 다른 그 느낌이 ‘돈 벌이’ 이야기라는 데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호수 전경을 구경하고 다시 걸어 내려와서 피로스트 전망대에서 ‘플라이어’를 탔다. ‘도르레’에 몸을 고정시키고 활강하는 것이다. 출발하기 전에는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높은 하늘에 붕 뜰 때의 기분은 더없이 짜릿하고 흥분되었다. (201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