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되는 장사상륙작전
1997년 3월 5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 앞바다. 바다 속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대원 12명이 개펄에 박혀 있는 배를 발견했다. 폭 30m, 길이 100m 규모 상선(商船). 선체(船體)는 심하게 부식됐고, 사람 무릎뼈로 보이는 유골도 발견됐다. 하지만 배 인양은 미뤄졌다. 장비와 인원 동원에 상당한 비용이 드는 탓이다. 가라앉은 배는 그렇게 잊혀져 갔다. 1950년 9월 14일 새벽 4시30분. 사방은 폭풍우로 휩싸였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유격대원 700여명은 숨을 죽였다. "쿠웅!" 소리와 함께 배가 멈췄다. 암초에 부딪힌 것이다. 해변까지는 50여m. 파도 높이는 4~5m에 달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상륙(上陸) 명령. 배에서 나오던 대원들은 인민군이 뿌려대는 총알에 차례로 스러져갔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 대원도 많았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6·25 전쟁 때 있었던 '장사(長沙) 상륙작전(1950년 9월14~19일)'의 모습이다.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 하루 전날, 반대쪽 동해안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장사상륙작전 때 좌초된 문산호. 군에 징발돼 군용으로 쓰이던 일반 화물선이었다.(왼쪽 사진)
◆10대 학도병들로 꾸려진 유격대
15일 서울 용산구 서계동의 한 5층 건물 옥상 위에 만들어진 10㎡(3평) 남짓한 사무실. 장사상륙작전 생존자들로 꾸려진 '장사상륙 참전유격 동지회' 본부다. 70대 노인 셋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정부 여러 부처에서 온 회신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를 인정해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동지회 사무총장 이천수(76)씨는 6·25 당시 17세였다. 경기도 용인에서 대구까지 피란 온 그는 학도병(學徒兵)으로 자원했다. 이씨가 배속된 부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이는 유격대로, 부대장 이명흠 대위 이름을 따 '명(明)부대'로 불렀다. 이후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로 명명됐다. 부대원 대다수는 17~18세 학도병이었다. 이들은 9월 11일까지 부산·밀양 등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9월 12일, 부대장 이 대위에게 작전지시가 내려왔다. "포항에서 공세를 펴고 있는 인민군 제2군단을 약화시키기 위해 적 후방인 장사에 상륙해 유격활동을 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 임무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군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었다.
적 시선을 동해안으로 돌려라
이 같은 작전 내막을 아는 부대원은 거의 없었다. 이들을 태우고 장사로 떠난 2700t급 화물선 문산호는 작전 첫날인 14일 새벽 태풍의 영향으로 고전하다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 부대원들은 배에서 해변가 소나무까지 간신히 줄을 연결한 뒤, 줄을 붙잡고 상륙을 시도했다. 당시 18세였던 동지회 감사 류병추(77)씨는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고, 죽고 사는 기로에 선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고 했다. 해안에 상륙해서도 고지(高地)에서 쏴대는 적 기관총과 로켓포에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류씨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손톱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모를 정도로 손으로 모래사장을 깊이 파 참호를 만들어 싸웠다"고 말했다. 10시간 넘는 사투(死鬪) 끝에 상륙에 성공했다.
▲ 장사상륙 참전유격 동지회 이천수 사무총장·김영재 회장·류병추 감사(왼쪽부터)가 서울 용산구 서계동 5층 건물 옥상의 동지회 사무실 앞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채승우 기자
◆병사 아끼는 미군에 감동, 조국에는 섭섭해
유격대원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 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당황한 인민군은 포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 장사 해안으로 출동시켰다. 그 와중에 맥아더 사령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쟁 주도권이 아군으로 넘어왔다. 9월 18일, 유격대대의 철수가 시작됐다. 남은 실탄으로는 적의 공격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이튿날 새벽 조치원호가 도착했다. 적의 공격 탓에 배를 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바다 가운데 세웠다. 상륙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 대원 다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이들을 데리러 온 미 해군 지휘관이 "군장을 벗어 던져도 되니 살아남는 데 집중하라"고 명령하자 가까스로 헤엄쳐 배에 오르는 대원이 많아졌다. 이천수씨는 "병사 목숨을 아끼는 미군 태도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류병추씨는 "부산항에 도착하자 국군 지휘부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는 반응이었다"며 "상륙작전에 학도병과 일반 화물선을 투입한 점을 보면 희생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유격대대 2중대 선임하사였던 김영재 동지회장은 "배에 타 세어본 생존자가 400명이 채 안 됐으니 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경북 영덕군, 기념공원 추진
1960년 10월, 6·25 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은 동지회에 서한을 보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당신들이 수행한 전투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동지회가 1980년대 이후 정부에 요구한 명예회복과 전적지 성역화 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들을 위해 이뤄진 일은, 1980년부터 동지회가 영덕군과 보훈처 도움을 받아 매년 장사 해안에서 위령제를 연 것과, 1991년 경기도 양평 청운사가 모금운동을 벌여 이곳에 위령탑을 세운 것이 전부다. 영덕군은 2013년까지 이곳에 기념공원을 세우는 계획을 세워 최근 예산을 확보했다. 동지회와 영덕군은 오는 6.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장사상륙작전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열게 되었다. 참고자료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2009.6.16) |
출처: 왕돌잠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