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행의 날이 다가왔다.
내일이면 그 동안 수없이 구상해온 그 계획이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따라 빈틈없이 진행될 것이다.
효진과 지석은 틀림없이 약속장소로 나와줄 것이고, 모든 것은 각본대로 진행될 터였다.
정효진은 신애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선배간호사였으며, 신애보다 두 살 위인 32세의 주부였다.그리고 신애가 그 효진을 살해하려는 것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열등감 때문이었다.
혹자는 열등감 때문에 같은 동료직원을, 그것도 3년 동안이나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지내온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당해보고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심리의 한 단면인 것이다.
신애는 효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자기와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판이한 그녀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개심과 열등감을 느꼈었다.
신애는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놓고 볼 때는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더욱이 나면서부터 줄곧 불만스럽고 창피한 것이 작은 키였다. 그렇다고 난쟁이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초등학생의 키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미터 50센티의 작은 키와 매력포인트 전무랄 수 있는 외모, 이것이 그녀의 가장 큰 컴플렉스였던 것이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사실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효진은 비록 주부라지만, 날씬한 몸매에 흰 살갗, 서글서글한 검은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포근한 목소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근무하는 병원은 요양원이라는 특성상 여느 병원과는 달리, 7,80명이나 되는 남자병동과 역시 많은 인원의 여자병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애와 효진은 그 중 남자병동을 맡고 있었다.
효진이 비록 간호사로서는 선배였지만, 이 병원에는 신애가 먼저 와있었고, 효진은 2년 뒤에 옮겨온 바 있었다. 간호사가 5명이었고 그 중에는 신애를 비롯해서 미혼이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주부인 효진에게만 관심을 두고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자의사들마저도 미혼이고 기혼이고를 불문하고 효진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이었고, 그것이 신애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물론 아직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총각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청년의사 역시 신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상의 효진에게 다가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신애는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는 효진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신애는 한 때 효진과 떨어져서 근무하고 싶은 심정에서 여자병동으로 옮길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해보았으나, 그 때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반발심리도 곁들여져 그저 벼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효진이 그 병원을 그만 둘 기미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신애의 열등감은 나날이 더해갔다.
<2>
얼마 전 30세의 젊은 환자가 퇴원을 했다. 그는 3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결핵 때문에 입원을 하고 있었는데 첫눈에 호감이 갈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 환자---윤지석이 처음 신애가 있는 병동으로 왔을 때, 그녀는 남성다운 매력이 넘쳐흐르는 그에게 호감을 넘어 가슴깊이 작은 울림이 일어남을 느꼈다.
그런데 입원한 지 두 달쯤 지나 그 지석이 남모르게 은밀한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다. 신애의 마음 속에는 그의 애정어린 표정이 새겨졌다.
신애는 병원생활이 즐거웠다. 더욱이 그 환자를 돌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날 하오, 지석이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그녀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지석은 올곧은 콧대를 쳐들고는 그녀에게 낮은 소리로 말해왔다.
[김간호사님, 다름이 아니라....이거 정말 쑥스러운데요......실은.....]
그는 내내 우물쭈물했다.
[무슨 말씀인지 어려워 말고 해보세요.]
신애는 뜨거워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상냥하게 말했다. 보나마나 드디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지석의 다음말은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와닿았다.
[저어, 왜 정간호사님 있잖습니까? 그 분과 병원 말고 밖에서 만났으면 해서요. 김간호사님이 어떻게 좀........]
신애는 너무나 뜻하지 않은 말에 한동안 멍청히 있었다. 그 다음말은 들리지를 않았다.
[김간호사님이 다리를 좀 놓아주셨으면 해서요.]
그녀는 찢겨져나간 자존심을 가까스로 달래고는 로보트처럼 아무 감정없이 말했다.
[그래요? 힘닿는데까지 한 번 해볼께요.]
신애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였다.
[아이구,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김간호사님이 워낙 성격이 쾌활하시고 좋기 때문에 이렇게 염치없이 부탁하는 것입니다.]
지석은 이게 웬떡이냐는듯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 본 순간부터 잔뜩 호감을 품어왔고, 그래서 정성을 다해 간호해온 윤지석이 이렇듯 가증스러운 인간이었던가!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는 여자에게 그런 흑심을 품다니?
(뭐? 나보고 저희들 중개역을 맡아달라구? 뻔뻔스럽기는......)
그러나 다음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동안 줄곧 효진을 말살해 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효진과 같은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며, 자칫하다가는 금새 발각된다는 두려움 탓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잘 하면 효진을 감쪽같이 없애 버릴 수 있는 묘안이 생겨난 것이다.지석의 그런 뻔뻔스러운 제의를 효진은 물론이고 지석마저 말살하는데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그들을 살해한 후 정사로 위장하는 것이다.
이 수법은 추리소설에서는 이미 보편화되다시피한 트릭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이야기일 것이다. 빈틈없이만 실행한다면, 제아무리 빼어난 수사관이라도 소설 속의 명탐정처럼 그렇게 쉽게 밝혀낼 수는 없는것이다.
무릇 살인사건에 있어 범행이 발각되는 것은 피살자와 범인이 가까운 사이, 즉 그 사람이 죽음으로서 이득을 얻거나, 또는 그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있거나 한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알리바이를 조작하거나 강도살인을 위장하거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사라면 두 사람이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해 주는 물적증거나, 최소한 정황증거라도 있어야 한다.
효진은 품행이 단정한 교양 있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총각 윤지석과 동반자살을 했다면, 그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신애는 오직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결과 고안해낸 것이 유서였다. 두 사람이 정사체로 발견된 현장에 유서가 놓여있다면, 누구나 그들이 자살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수사는 자연히 소홀해지게 마련이다. 그 맹점을 한껏 이용하는 것이다.(
<3>
지석이 퇴원하기 이틀 전에 그는 또다시 신애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이 무렵에는 신애의 계획도 구체화되어 약간의 보완작업만 남겨놓고 있는 상태였다.
[지석씨가 퇴원하는 즉시 효진언니한테 말해볼 테니 그 때까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주세요. 벌써 귀뜀은 해놨거든요. 언니도 싫은 눈치는 아니였어요.]
그러자 지석은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우선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거죠. 이런 일엔 뭣보다도 끈기가 필요하니까요.]
신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누르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 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요, 이건 어디까지나 여자로서의 감수성문제인데, 효진언니한테 편지를 써보내면 어떨까 생각돼요. 아무래도 불쑥 다가서면 저쪽에서 당황하게 될 테니까요.]
[편지라구요?......이거야, 저는 워낙 글재주가 없어놔서......]
[그래요? 하지만 염려말아요.내가 대신 써줄 테니까 그걸 지석씨가 옮겨쓰면 돼잖아요?]
[아아, 참 그렇군요. 김간호사님은 머리도 좋으셔.]
지석은 마냥 기뻐하며 능글맞게 웃어댔다.
[그런데 아무래도 처음으로 편지를 받으면 당황하면서도 거부감 같은 게 일어나기 쉽거던요. 상대가 경계심을 품게 만드는 문구는 삼가해야겠고, 그러면서도 열렬한 애정이 담긴 그런 순수한 글을 써드릴께요.]
[아이구, 김간호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제 개인적인 일에 그렇듯 관심을 갖고 힘써주시니.]
[뭘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닌데요, 뭐.]
신애는 자꾸 굳어지려는 얼굴표정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무튼 연락처를 가르쳐 줘요. 일이 성사되는 대로 즉시 연락을 할 테니까요.]
그러자 지석은 자기의 핸드폰번호를 메모지에 적어 건네주면서 신애의 핸드폰번호를 가르쳐 줄 것을 요구했다.신애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지석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는 통에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녀는 자칫 용의자로 지목되어 핸드폰번호의 발신지 추적으로 인해 지석과의 관계가 드러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아마 그렇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에게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지석에게 연락할 때는 공중전화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석에게는 웬만해서는 그 쪽에서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4>
지석이 퇴원한 얼마 뒤 신애는 정성들여 편지지 두 장 분량의 글을 노트에 또박또박 채워넣었다.
내용은 연애감정을 판에 박힌 미사여구로 써내려간 것으로, 첫눈에 당신이 마음에 들었고, 날이 갈수록 사모하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으니 꼭 한 번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지석은 신애가 써준 그 글을 베껴가지고는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고, 신애는 그것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불에 태워 버렸다.
실상 앞으로 필요한 것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답장은 반드시 정효진의 자필로 쓰여진 것이라야만 했다.
신애는 한가한 시간을 잡아 효진에게 말했다.
[언니,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놀라실지 모르지만, 왜 얼마 전에 퇴원한 윤지석이라는 환자 아시죠?]
[알지. 그 잘 생긴 남자 말이지? 그런데 왜요?]
[실은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해왔거던요.]
[그래? 그거 잘 됐네.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좋아한다면야.]
효진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는듯, 과히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신애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상냥하게 말했다.
[언니가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내가?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야?]
[언니도 알다시피 저는 워낙 악필이잖아요? 제가 쓴 편지를 그대로 편지지에 옮겨만 주면 돼요. 그걸 부탁드리려구요.]
효진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실상 신애는 초등학생의 글씨만큼이나 필체가 형편없었다.
[알았어요. 그런 부탁이라면 김간호사 입장을 봐서라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아무튼 그 윤지석이라는 사람과 잘 됐으면 좋겠네. 그런데 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어?]
[퇴원하기 얼마 전에 그 사람이 프로포즈를 해왔답니다. 어저께 편지를 받았는데, 워낙 글씨가 엉망이라 답장을 보낼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언니한테 이렇게.......]
신애는 대답하고나서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 이 사실을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아직 연인사이도,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망신이지 뭐에요?]
[알았어요. 그렇다면 비밀로 해두지 뭐.]
효진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제 보아도 빈 틈이 없는 단아한 얼굴이다. 신애는 이 얼굴만 보면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자신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지성미가 넘쳐흐르는 반지르한 얼굴.........
그로부터 이틀 후 신애는 효진의 필적으로 쓰여진 답장을 지석에게 건네주면서 이 편지를 꼭 보관하고 있도록 일렀다. 물론 그들의 만남은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대가 유부녀인 만큼 철저한 보안이 필요하다고 못을 박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5>
오전의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승용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갈증이 느껴질 정도로 태양열이 지상을 달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날씨는 오늘의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안성마춤의 조건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빠른 시각이었다. 꼭 그래야만 했다. 만일 효진과 지석이 그녀보다 먼저 나와있으면, 그녀의 계획은 무산되고마는 것이다.
지석은 효진이 자기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여 만나주는 것으로 알고 있고, 효진은 효진대로 신애의 모처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의정부에서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애는 효진에게 오늘의 만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효진은 신애가 하도 쉬쉬하는 바람에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지석과의 관계를 아직은 비밀에 붙여두고 싶어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신애는 그녀에게 소풍삼아 잠깐 구리로 가서 지석을 만나 자기의 성격이나 환경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설득해 놓았던 것이다.
한편 지석에게는 올 때 반드시 효진이 보낸 그 편지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워낙 들떠 있는 지석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흔쾌히 꼭 가지고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날을 선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간호사가 5명인데, 주간근무 2명, 야간근무 2명, 그리고 새벽근무 1명씩 짜여진 교대근무 운영상, 효진과 신애가 똑같이 쉬는 날짜와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효진이 야간근무를 하고, 신애는 새벽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효진은 5시까지는 병원에 출근해야 한다. 하지만 병원이 있는 남양주시와 이제 곧 가게 될 구리시와는 승용차편으로 20여분 밖에 안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다. 게다가 효진에게는 승용차로 병원까지 데려다주마고 약속해 놓고 있엇다.
지석과 효진은 곧 이 곳 서울역으로 올 것이다. 예정대로 살해장소인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그 빨간 벽돌집 앞 잔디밭에 도착한다. 그 집은 신애가 고등학교 시절 자주 놀러갔던 이모님댁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때부터 이미 사람이 살지를 않는 빈집이었다.
지금은 이모 내외도 작고하고 그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 현재 그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연고도 없는 곳이다. 신애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며칠 전에 답사를 마친 바 있다.
승용차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두고, 가방을 짊어지고 그 벽돌집으로 효진과 지석을 안내하여 나아간다.
상수리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나뭇잎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내려쪼인다. 숲에서는 풀벌레들이 자연의 청명함이 묻어나는 소리로 끊임없이 울어댄다. 약간 비탈진 길을 내려가면, 드디어 살해장소로 택해 놓은 곳에 이른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을 10여분 이상 걸어온 효진과 지석은 한 잔의 시원한 음료수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때이다.
그들은 사이다를 컵에 딸아주자마자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 속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독극물인 스트리키니네가 들어있다. 하지만 무색무취의 독성이 서서히 온 몸에 퍼지기 때문에 먹자마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지는 않는다.
스트리키니네를 택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만약 청산가리 같은 것을 사용하면, 체내흡수반응이 불과 몇 초 사이에 오기 때문에 두 남녀중 어느 한쪽이 일찍 마시거나 늦게 마시면ㅡㅡㅡ즉 동시에 마시지 않으면 ㅡㅡㅡ당연히 눈치를 채게 되기 때문이다.
효진과 지석이 숨을 거두면, 먼저 자기의 지문을 지우고 완벽한 정사로 보이기 위한 몇 가지 작업을 한 다음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서울에 있는 망우동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다행히 가족들과는 떨어져 자취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외출을 하고 돌아와도 아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다. 이 점 만일 나중에 알리바이를 추궁당하더라도 그 시각에 집에 있었다고 둘러댈 수가 있다.
하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용의주도한 계획아래 이루어진 범행인 만큼, 아마 알리바이 조사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추리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테니까.
이런 청사진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으려니 저멀리 스마트한 반팔셔츠차림의 윤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6>
9월 중순 하오 4시 경 구리시 토평동, 민가에서 제법 떨어진 숲지대에 관할경찰서 형사대와 감식반원이 들이닥쳤다.
신고자는 부락의 50대 남자로서, 그는 빨간 벽돌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심어놓은 농작물에 비료를 주기 위해 그 곳을 지나가다가 두 구의 남녀시체가 있는 것을 보고 발견 즉시 경찰에 알린 것이다.
사망추정시각은 2일 정도 전으로 나왔고, 시신들은 후덥지근한 기후 탓에 이미 상당부분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사체와 그 주변 일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남자는 등을 구부린 자세로 얼굴이 땅에 닿아 엎어진 상태였고, 여자쪽은 몰골사납게 큰 댓자로 벌렁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중형음료수통이 내용물을 쏟아낸 채 뒹굴고 있었고, 그곁에 종이컵 두 개가 역시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발가에 하얀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던 것이다. 수사진은 필시 유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현장상황이 동반자살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들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었고, 그 사실은 곧 주소지 경찰서로 통보되었다.
정효진---32세,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직장 경기도 남양주시 XX병원
윤지석---30세, 주소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직장 XX건설회사 건축기사
모든 정황이 동반자살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그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이 정효진의 친필로 된 유서였다. 그 유서에는 다음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지석씨를 처음 본 순간 저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설레었답니다. 그 후 지석씨가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왔을 때는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지석씨나 나나 사랑을 나누기에는 극복할 일들이 너무 많지만, 우리의 뜻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해요.
이제 곧 가을이 옵니다. 나는 가을을 무척 좋아해요. 샛노랗게 물든 낙엽쌓인 거리를 걷다보면, 그 노란 물결이 온통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던져오지요. 어서 속히 지석씨와 낙엽이 쌓인 거리를 마음놓고 걷고 싶어요.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우리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야 할 텐데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까요?
지석씨를 위해 시 한 편을 적어보냅니다. 베를렌느의 <잊혀진 아리에타>라는 제목의 시랍니다.
그것은 나른한 황혼
그것은 사랑에 빠진 피로
그것은 산들바람 끌어안은 속에........
촬영담당자가 시신을 비롯해서 주변 일대를 카메라에 담고, 감식반원이 일차적인 작업을 마쳤을 무렵에는 모두들 일손을 놓고 있었다. 현장을 지휘하던 최반장도 한 숨 돌리고 그늘에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뙤약볕 밑에서 악취를 뿜어대는 시신을 조사하는 일이 결코 유쾌할 리 없었고, 일단 정사로 판명된 사건에 열을 올릴 까닭도 없었다.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가족들에게 유해를 인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기는 일단 부검은 해보아야 할 테지만.......
그런데 유독 한 사람, 마치 사냥개가 먹이냄새를 맡듯이 의혹의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신을 살피고 주위를 이잡듯이 뒤지고 돌아다니는 키작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 형사---강민수는 사건을 마치 추리소설의 민완형사나 명탐정처럼 부풀린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동료들은 그런 그를 괴짜취급하며 내심으로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뻔히 결말이 나버린 단순사건조차도 좀체로 수긍하려들지를 않고 버티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사건을 뒤집은 경우가 단 한 번이라고 있었으면, 그의 그런 수사의욕을 높이 살만도 했지만, 여지껏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7>
신애는 병원생활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 보기싫은 효진이 가증스러운 지석과 함께 볼성사납게 풀밭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그녀의 눈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보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 마디로 통쾌했다. 그러면 그렇지, 경찰이 무엇을 알아낸단 말인가?
물론 처음 한동안은 불안과 초조함이 불현듯 엄습해와, 매번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지만, 경찰이 한 번 다녀가고 사건이 동반자살로 최종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이내 불안감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뜻밖의 방문객에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한 번 와서 이것저것 캐묻고 간 형사 한 사람이 커피숍으로 동행할 것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그는 다름아닌 강민수 형사였다.
[실은 얼마 전에 자살한 정효진씨에 대해 몇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자리에 앉자마자 형사는 말했다. 체구도 왜소하고 얼굴도 여자처럼 희고 갸름한 것이 강력계 형사라는 인상이 전혀 풍기지 않는 젊은이였다.
커피숍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 한가로운 홀 안에 색스폰소리가 단조롭게 울리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앉은 바로 옆자리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와 그보다 한참 나이아래로 보이는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정효진씨 말씀인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거던요. 세상이 변했다지만 그래도 남편과 자식이 있는 가정주부가 총각과 정을 통하다가 자살을 했다.....영 도무지.........]
[네, 옳은 말씀이에요.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신애는 이렇게 대꾸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참, 신애씨는 글씨를 잘 쓰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느닷없이 의표를 찌르는 형사의 질문에 신애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 글쎄요.......잘 못쓰는 편인데요.....그런데?]
[아뇨, 그 정효진씨의 유서가 갑자기 생각나서요. 그 분의 글씨는 아주 반듯하더군요.]
신애는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는냐고 항의하고 싶었으나 막상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자 형사는 다시금 물었다.
[신애씨는 시를 좋아하십니까?]
[시요? 네, 원래 문학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시도 좋아하는데요.]
말은 이렇게 태연하게 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공포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역시 그랬었군요. 그럼 혹시 베를렌느라는 시인의 시도 좋아하나요?]
형사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베를렌느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는 읽어본 적이 없는데요.]
신애의 입에서는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런 말이 나왔다.
유서에 적혀진 시는 몇 해 전 서점에서 산 뒤로 처음 몇 줄을 읽어보았을 뿐, 줄곧 책꽂이에 꽂아놓고 있다가 이번에 찾아내어 몇 줄을 베낀 것이었다.
[물론 신애씨는 모르실 테지만, 실은 그 유서에 바로 그 베를렌느의 시가 적혀있었거던요. 그런데 말입니다, 효진씨의 남편이나 친지들에게 물어봐도 효진씨는 시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신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뻥긋뻥긋 했다.
그녀는 이 볼품 없는 생김새의 형사가 사건의 진상에 상당부분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커피숍 안에는 색스폰곡이 가요로 바뀌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팽팽한 기류를 타고 공중에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동반자살을 하려는 남녀가 남기고 간 유서치고는 너무 알맹이가 없는 불합리한 것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었죠.]
형사는 신애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유서란 글자 그대로 죽으려는 사람이 주위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서 쓰는 글인데, 처음으로 사귀게 됐을 때 주고받은 연애편지 같은 것을 달랑 놓아두고 떠나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정작 동반자살을 택한 이유는 빠져있거던요.]
[.........]
[그래서 나는 이 유서, 아니 편지가 어디까지나 자살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눈속임이라고 생각했죠.]
형사는 다시 말을 중단하고 신애를 보았다. 신애는 그 눈길을 피하지도 못하고 멍청해진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형사의 말이 어디까지나 증거라고는 없는 단순한 추측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코 두려워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유서의 내용은 모르겠지만 효진언니가 직접 쓴 글이 틀림없다면서요?]
[그건 그래요. 유서의 필적은 틀림 없는 정효진씨의 것이었죠.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그렇다면 효진씨의 필적으로 쓰여진 그 유서는 어떻게 되느냐?]
형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나는 그것이 대필이라고 판단했죠. 윤지석씨 앞으로 쓴 그 편지는 필경 누군가의 글을 대필해 준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을 하고 사건을 재분석해 봤더니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어요. 가장 결정적인 미스가 그 편지에 정효진씨의 사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
형사는 말을 중단하고 신애를 보았다.
[그렇다면 효진씨에게 편지의 대필을 부탁한 사람이 과연 누구냐?]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불쑥 말했다.
[김신애씨, 당신이죠? 효진씨에게 대필을 부탁한 건 바로 당신이었어요.]
신애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형사을 쏘아보며 반문했다.
[내가요? 왜죠? 뭣 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죠?]
[그럴 줄 알았죠. 그렇담 할 수 없구먼.]
형사는 점퍼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본 순간 신애는 경악했다.
[김신애씨, 이것은 바로 사건현장에서 윤지석씨의 바지주머니에서 나온 수첩입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것은 윤지석과 가까운 인물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소위 인명록이죠. 그런데 여기 마지막 부분이 화이트펜으로 지워져 있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이것을 과연 윤지석씨가 직접 지운 것일까? 나는 이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만일 그가 지웠다면 그냥 펜으로 지우지, 번거롭게 화이트펜으로 지울 리가 없다.]
그는 담배갑에서 꽁초보다는 조금 긴, 피우다 남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신애는 그가 짐짓 꾸물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이쪽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맨 처음 정효진씨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나 확인해 봤지요. 그런데 묘하게도 정작 효진씨의 전화번호는 없더란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화이트펜으로 지운 번호가 그것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곧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윤지석씨의 입장에서 효진씨의 연락처를 지울 까닭이 없잖겠어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이상해지죠.]
그는 마치 동의를 구하듯이 신애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지워진 부분이야말로 범인의 것이었다, 수첩을 찢어 버리면 흔적이 남을 것이고, 공연한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요. 나는 생각했죠.]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신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칼로 화이트컬러 자국을 긁어보면, 글씨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긁으면 그 안에 잇는 글씨마저 뭉개져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단념해 버렸죠.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XX대학 화학과 조교로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봤지요. 그랬더니 말입니다, 그 친구 말이 방법이 있다는 거에요. 암모니아 용액을 화이트자국에 떨어뜨리면, 그 속에 있는 글씨를 훼손시키지 않고 화이트만 종이에서 떼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를 좀 보시죠. 잉크가 조금 번지기는 했지만, 분명히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잖습니까?]
형사는 수첩의 한 페이지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른 글씨와는 달리, 한 번 물에 젖은 것처럼 줄무늬가 퍼져있으나, 식별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김신애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신애는 형사가 코 앞에 들이대고 있는 수첩의 그 부분이 멀어졌다가는 가까워지고, 또다시 멀어지면서 눈 앞이 가물가물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경련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8>
그 때 옆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남자가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강형사, 수고했네. 자네의 그 집념이 마침내 진가를 발휘했군그래.]
[별말씀을요. 이게 다 반장님 덕분입니다.]
강형사는 신애를 돌아보고 말했다.
[김신애씨, 여기 이 분이 이번 사건을 맡으셨던 반장님이십니다. 같이 가시죠.]
신애는 할 말이 없었다. 실상 형사가 내세우는 증거는 구속요건으로서의 결정적인 증거는 못되었는데도 상대를 제압하는 그의 화술에 자기도 모르게 위장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만 것이다.
신애를 정효진 및 윤지석 살해혐의로 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한 후, 강민수 형사는 반장과 동료들에게 신애를 체포할 수 있었던 수훈담을 털어놓았다.
[제가 이번 사건에 의문을 품은 것은 그 유서였지요. 주변사람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효진씨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하더란 말씀입니다. 그녀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하의 남자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고 정사를 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거에요. 게다가 효진씨는 시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겝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유서는 분명히 정효진의 필적이었고, 윤지석을 열렬히 사모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지요. 이 바람에 저의 추리는 매번 원점을 맴돌 수 밖에 없었답니다. 결국 이 유서의 맹점을 찾아내는 것이 사건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힘겹고 맥빠지는 추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누군가의 대필이었다는 것이었죠.]
강형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했다.
[즉 유서---아뇨, 이제부터는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 편지의 내용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고 필적만 정효진의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추정을 바탕으로 사건을 다시 바라보니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처럼 그 하나 하나의 윤곽이 드러나더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런 편지의 대필을 부탁받고도 아무 의심없이 정효진이 수락한 배경의 조건이 무엇일까? 저는 생각했죠. 그 결과 그 의뢰인이 악필이라는 것이었죠. 김신애는 아마 중요한 연애편지를 써야겠는데, 상대방 남성에게 자기의 유치한 필체를 보이고 싶지 않으니 대신 좀 써달라고 했겠죠. 상대편 남자는 물론 윤지석이었구요, 그래서 편지 말미에 정효진의 사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애는 이름은 넣지 않아도 된다고 했겠죠. 한편 윤지석은 정효진에게 접근하고자 김신애를 이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애의 간계에 넘어가 오히려 이용을 당하고 만 것이죠.]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악필의 소유자는 누구냐? 두 말할 것도 없이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동료간호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판단하에 정효진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간호사를 조사해 봤더니 2명은 기혼이고 2명이 미혼이더군요. 연애편지의 대필을 부탁할 수 있는 자는 이 미혼여성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두 명의 간호사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봤답니다.
한 명은 24세이고 그 병원에 근무한 지 반년 밖에 안 되었고, 또 한명은 30세이며 5년이나 넘게 근무한 바로 김신애였습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김신애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죠. 왜냐하면 그녀는 소문난 악필인 데다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없었거던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 사실이 범행 당일 그 시간에 정효진과 김신애가 모두 쉬고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좀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아, 그 뒤의 일들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강형사는 담배갑에서 피우다 남은 꽁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끝으로 그 화이트펜으로 지운 김신애의 이름과 전화번호 말씀인데요.]
그는 싱긋 웃고나서 말했다.
[김신애한테는 대학조교로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화이트펜으로 지워진 부분을 복원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답니다. XX대학에 그런 친구 따윈 없거던요. 그것은 제가 면도칼로 화이트를 덧칠한 부분을 긁어내고 그 자리에 윤지석의 필체를 흉내내어 김신애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쓴 뒤, 물을 약간 떨어뜨려 손으로 문질렀던 것이지요. 사실 결정적인 증거라곤 하나도 없었단 말씀입니다.
인간이란 쫓기는 입장에서는 냉정을 잃게 마련이지요. 저는 그런 인간심리를 김신애에게 이용해 본 것 뿐이구요. 그리고 윤지석의 핸드폰에는 효진씨의 번호가 한 번도 찍혀있지 않았죠. 신애와 정효진씨의 핸드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윤지석의 번호가 없었구요. 신애는 보나마나 윤지석과는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통화를 했을 테죠. 같이 자살까지 할 정도로 깊은 사이였는데. 윤지석과 정효진 사이에 통화가 한 건도 없었다는 것도 수상쩍었었구요.]
그는 갑자기 반장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런데 참, 살해동기는 뭐라고 하던가요? 다른 것은 알 수가 있어도 정작 살해동기를 모르겠거던요.........](끝)
첫댓글잘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신애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꾸민 살인시나리오는 소설을 읽는 도중 고개를 꺄우뚱하게 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효진과 기석 두사람이 동반자살한것처럼 몰고가기 위해 고심하고 고심한 것이 편지라는 대목에서는 신애가 키만 작은 것이 아니라 지적능력도 조금 떨어지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타살을 자살로 꾸밀때 범인들이 가장 흔하게 생각해내는 것이 바로 (가짜)유서니까요. 유서말고는 현장의 어떤 상황도 동반자살로 꾸며놓은것처럼 보여지지 않습니다. 같이 한곳에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것은 동반자살의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신애가 기석에게 편지를 쓰게해서 그 편지를 집에 가져가
불태워 버렸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전혀 설명이 나와있지않습니다. 처음에는 기석의 유서를 만들 생각인가 했지만 그냥 태워버렸다니, 신애는 왜 이런 헛수고를 한것일까요? 신애가 효진과 기석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는 심리도 수긍이 안가는 부분입니다. 그냥 열등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것은 ' 열등감을 느꼈다'라고 설명하기 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묘사를 해주어야 좀 더 실감이 날수가 있겠죠. 설명은 일방적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이해시키려고 만든 문장일뿐이고 묘사는 에피소드나 상황등을 통해 독자를 설득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신애의 심리나 열등감, 살인의 결심을 하게되는 이유등을 설명이 아닌, 묘사로 표현해주어야 독자들이 좀 더 공감하지 않을가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 설득당하기보다 공감할수 있는 에피소트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고자 하는 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인물의 감정에 몰입되면 그가 어떤 짓을 하든 소설속의 인물과 함께 느끼고 움직이게 되겠죠. 소설을 쓸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해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신애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꾸민 살인시나리오는 소설을 읽는 도중 고개를 꺄우뚱하게 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효진과 기석 두사람이 동반자살한것처럼 몰고가기 위해 고심하고 고심한 것이 편지라는 대목에서는 신애가 키만 작은 것이 아니라 지적능력도 조금 떨어지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타살을 자살로 꾸밀때 범인들이 가장 흔하게 생각해내는 것이 바로 (가짜)유서니까요. 유서말고는 현장의 어떤 상황도 동반자살로 꾸며놓은것처럼 보여지지 않습니다. 같이 한곳에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것은 동반자살의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신애가 기석에게 편지를 쓰게해서 그 편지를 집에 가져가
불태워 버렸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전혀 설명이 나와있지않습니다. 처음에는 기석의 유서를 만들 생각인가 했지만 그냥 태워버렸다니, 신애는 왜 이런 헛수고를 한것일까요? 신애가 효진과 기석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는 심리도 수긍이 안가는 부분입니다. 그냥 열등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것은 ' 열등감을 느꼈다'라고 설명하기 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묘사를 해주어야 좀 더 실감이 날수가 있겠죠. 설명은 일방적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이해시키려고 만든 문장일뿐이고 묘사는 에피소드나 상황등을 통해 독자를 설득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적절한 시점에서 신애의 심리나 열등감, 살인의 결심을 하게되는 이유등을 설명이 아닌, 묘사로 표현해주어야 독자들이 좀 더 공감하지 않을가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 설득당하기보다 공감할수 있는 에피소트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고자 하는 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인물의 감정에 몰입되면 그가 어떤 짓을 하든 소설속의 인물과 함께 느끼고 움직이게 되겠죠. 소설을 쓸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해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헤헤, 조언 고맙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생각해도 엉성한 데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을 때를 되살려 소설화시켜 본 건대, 미흡한 점이 많이 있죠.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