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의미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해 왔다.
이런 시도는 현실에서 반드시 ‘흑 아니면 백’이 되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숙련된 기술과 참을성과 충분한 시간(뭐니뭐니 해도)만 있다면 양
자를 다 포용할 수 있는 길을 언제든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갖고 싶은 것을 철저하고 단호하게 거부할 필요 없이
그저 악을 약간만 발전시키고 조정하고 다듬기만 하면 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어떤 여행이든 여행을 떠날 때 짐을 다 싸들고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짐만 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른 눈과 오른 손까지 놓고 가야 하는 여행이 있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삶은 강보다 나무에 가깝다.
삶은 통합을 향해 흘러가는 대신 서로 갈라져 뻗어 나가며,
피조물들은 원숙해질수록 서로 달라진다.
선은 농익을수록 악과 구별될 뿐 아니라 다른 선과도 구별된다.
나는 잘못된 길을 택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멸망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단지 잘못된 길을 택했을 때에는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산수 문제를 잘못 풀었을 때에도 답을 바로잡을 수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계산한 과정을 되짚어서 실수한 지점을 찾아낸 다음
새로이 계산을 시작해야지, 무조건 계산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악을 무위로 돌릴 수는 있어도, ‘발전시켜’ 선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역시 ‘흑 아니면 백’의 문제인 것이다.
지옥을 붙들고 있는 한(지상earth을 붙들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볼 수 없다.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고 소중한 기념품까지 미련 없이 내버려야 한다.
천국대신 지상을 선택한 사람은 지상이 처음부터 지옥의 한 구역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C. S. 루이스, 천국과 지옥의 이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