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싫어하는 재미없는 이야기 하나. 자연과학의 목표 중 하나는 우리 주위의 자연현상을 수학 공식으로 정리하는데 있다. 고전물리학의 예를 들면 공기의 저항을 감안하지 않고 중력가속도를 g라고 할 때, 최초속도 v0가 일정한 시간 t가 지난 후의 속도 v=v0 + gt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물리도록 적어 보았을 자연현상에 대한 방정식을 구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다.
수많은 실험과 과학적 영감을 거쳐 얻어낸 자연과학 방정식에 관해 프랑스 수학자 아다마르는 세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아다마르가 제시한 해의 존재성, 유일성, 안정성을 충족하는 방정식 만이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글이 과학사에 대한 소개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두절미한다면 이렇다. 아다마르의 조건은 현대 과학에서 이미 폐기처분 되었는데, 존재성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유일성은 양자역학에 의해 거짓이 되었다. 마지막 안정성을 폐기처분 시킨 현대 과학은? 바로 <나비효과>를 필두로 하는 혼돈이론(카오스이론)이다. | 나비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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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1961년 대기의 순환을 예측하기 위해 기온과 기압 및 기압과 풍속에 관한 12개의 기상학 방정식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대기의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했다. 대기의 순환이라는 거대한 자연현상을 컴퓨터로 모의실험하는 과정이다보니 컴퓨터를 며칠씩 사용하며 계산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러운 정전, 그 순간까지 컴퓨터가 계산한 값은 0.375485. 전력문제를 해결하고 동작을 다시 시작한 컴퓨터에 로렌츠는 소수 6째 자리를 생략한 0.37548을 입력한다. 문제는 1/10000정도의 미세한 입력값의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 근소한 차이가 갈수록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것이다. 미세한 차이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즉, '북경에서 나비가 펄럭인 날개짓이 뉴욕에 허리케인으로 나타나는' <나비효과>는 불규칙한 자연현상에서 규칙성과 원리를 탐구하는 혼돈이론의 핵심 모티브가 되었다. 과거를 바꾸기 위한 다양한 시도, 성공과 실패의 기록 | 타임머신The Time Machine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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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SF작가에게 시간여행은 매력적인 소재였다. 그만큼 수없이 반복 사용되어 새로움이 바랜 감이 없지 않은 소재다. 그런 뻔한 소재를 다시 끌어온 <나비효과>는, 제목 그대로 '작은 차이가 걷잡을 수 없이 변하는' 나비효과를 시간여행에 접목하며 이야기에 새로움을 덧댄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시간여행 방법을 알아낸 주인공 이반(애쉬턴 커쳐)이 과거에서 조그만 사건을 바꾸면 현실에서 너무나 다른 결과로 나타나는 식이다. 이를테면 과거에 잊고 싶었던 기억을 바꾸면 현실의 여자친구가 마약중독자로 변해있다던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바꾸면 현실에서 가족이 완전히 파괴되어있다는 방향으로 과거의 선택은 예측불가능한 현재를 만든다. 영화의 결론을 떠나서 <나비효과>를 시간여행과 연결시킨 착상은 무척 그럴 듯하다.
과거가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시간여행이 어디서 본 듯 하다면 꽤 오래전 작품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된 허버트 웰즈의 고전 SF소설 <타임머신>은 과거를 바꾸어 놓으려던 발명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장 최근에 영화화된 2002년도 버젼을 기준으로 하면 타임머신을 개발한 알렉산더 하데건(가이 피어스)이 강도에게 약혼녀 엠마(시에나 길로이)를 잃고나서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어 놓으려고 하지만, 강도가 아니라도 어떤 방식으로건 엠마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현재를 바꾸지 못함에 좌절한 알렉산더는 결국 먼 미래로 향하게 된다는 이야기. 실제 <타임머신>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수만년 후로 시간여행한 다음부터지만 과거의 영향력에 대해 주목하는 이 시점에서 <타임머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 정도로 족하리라.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 출판된 것이 1895년이다. 벌써 100년도 전에 허버트 웰즈는 과거를 바꾸어 놓는 행동이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선보인다. 자그마치 두 세기가 흘러 시간여행을 한 <나비효과>의 청년도 운명을 뒤집을 힘은 없었던 셈이다. | 백투더퓨쳐Back to the Future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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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거니즘과 함께 호황을 누리며 승승장구하던 1980년대의 미국은 무척 희망적이었다. 새로운 세기에도 <나비효과>때문에 쉽게 성공하지 못하고 한세기 전에는 운명때문에 바꾸지 못하던 현재를 80년대의 헐리웃은 손쉽게 과거로 가서 바꾸어 버린다. 스필버그 사단의 기념비적인 시간여행 코미디 <백투더퓨쳐>시리즈가 바로 그 것. 스포츠카를 개조한 드로이언을 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간 마티(마이클 제이 폭스)는 몇 가지 위기를 겪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서로 사랑에 빠지게 하고 실제 과거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일으켜 현재의 아버지를 매우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티가 돌아온 현재에는 시간여행 자동차를 개발한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도 총 맞아 죽지 않고 아버지는 매우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며 가정은 화목한 행복, 그 자체다. 희망적인 마티의 의지가 현재를 이상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 운명을 바꾸는 멀티버스Multiverse 우주관 | 타임캅Timecop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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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명료한 근육과 발차기로 90년대를 주름 잡았던 장 끌로드 반 담이 주연한 영화 <타임캅>에 이르면, 주연배우처럼 시간여행도 단순명쾌해 진다.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내를 희생당한 특수요원 워커(장 끌로드 반 담)는 시간여행 감시자로 일하고 있다. 시간여행이 가능한 미래,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흐트러트리는 범죄자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것.
사건을 추적하는 와중에 과거 자신의 아내를 해쳤던 범인과 마주친 워커는 색다른 방법으로 악당을 물리친다. 과거의 악당과 현재의 악당이 악수하는 순간, 이공간이 열리고 형체가 찌그러지며 악당은 시간의 전후에 없었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다른 시간대의 같은 존재가 만나면 완전히 소멸된다는 설정은 훌륭하지만, 현재로 돌아온 워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명쾌하게 행복해진 워커의 가정과 살아있는 그의 아내다. 하긴, 나비효과는 악당의 소멸로 충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를 알고, 바꾸기 위해 과거에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한 영화는 <레트로액티브>만한 것이 없다. 이 부류 영화 중에서라면 단연 B급에 속할 이 영화는 알게 모르게 본 사람도 많아 입소문이 퍼져 있는데,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을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수록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이야기가 압권이다. 사막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국방부 산하 연구소가 단 한명에 의해 시간여행을 연구하고 있다는 설정은 엉뚱하지만, 영화의 차임새 있고 오밀조밀한 시나리오는 모두가 이 어설픈 설정에서 시작한다. | 레트로액티브Retroactive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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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일리 트레비스)은 자신이 관여한 사건에서 인질을 죽게한 것을 자책하던 중 운전실수로 표지판을 들이받는다. 시카고 멀찍한 길 한복판에서 어쩔 줄 모르던 카렌을 태운 것은 아내와 함께 장물을 팔러가던 허풍쟁이 시카고 마초 프랭크(제임스 벨루시). 운전 중에 프랭크는 아내의 외도를 알게되고 극렬한 분노를 못 이겨 아내를 쏘아 죽이고 만다. 자신마저도 쏘려는 프랭크를 피해 우연히 시간여행 연구소 안으로 들어간 카렌은 20분 전으로 돌아가 살인을 멈추려고 하지만, 사건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커져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다.
과거를 알고 있다는 작은 사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사건 전개는 <나비효과>를 시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과거를 바꾸는 SF적 상상력은 모두 한가지 전제를 바탕에 품고있다. 과거에서 택한 새로운 결심이 <나비효과>나 <레트로액티브>처럼 엉뚱하게 전개되는 영화나 <백투더퓨쳐>처럼 주인공의 의지대로 바뀌는 영화나 마찬가지다. 단 한 영화의 예외도 없이 <나비효과>부터 <레트로액티브>까지 모든 SF적 상상력의 바탕은 '평행세계(Parallel Worlds)'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술이 있어, 과거의 행동을 다시 선택했다고 하자.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재가 이미 알고있던 것과 달라졌다고 하자. 달라진 현재가 <나비효과>나 <레트로액티브>처럼 통제불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달라졌다는 것 자체는 똑같은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지만 벌어지는 사건이 전혀 다른 '평행세계'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누군가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는 안중근 의사의 시도를 막았다면 실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결과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같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같은 시간을 차지하는 다른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여기서 컴퓨터를 껐을 때와 끄지 않았을 때의 선택의 순간, 이미 세계는 두 가지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평행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SF적 세계관, 바로 멀티버스multi-verse다. (멀티multi- : '많은, 여럿'의 뜻을 가진 접두어) 유일한 우주,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 트웰브 몽키즈Twelve Monkeys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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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은 학창시절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우며 '우주'나 '세계'라는 뜻으로 '유니버스universe'라는 단어를 암기했을 법하다. 유일하다는 뜻의 접두어 "유니uni-"를 사용하는 '유니버스uni-verse'라는 단어는 '멀티버스'와는 반대로 평행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시간이 한가지 흐름 안에 갇힌 유일한 세계를 가정한다. 시간여행을 가정하는 SF가 '유니버스'를 만나면 과거를 고치는 행동이 바뀐 미래로 이어지지 않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세계가 유일하므로 누군가 과거에 한 행동은 이미 현재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로 황폐해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지하세계에서 살아간다. 갑갑하고 통제된 지하세계의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란,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스리는 것과 가끔 지상으로 사람을 올려보내 오염 정도를 알아보는 일 뿐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듣기에 지상을 오염시킨 사이코 집단의 이름은 <트웰브 몽키즈>란다. 공항마다 바이러스를 뿌려놓고 전 인류를 멸망으로 끌고간 정체불명의 집단.
엉뚱하고 의심스런 행동을 일삼는 미치광이 제프리(브래드 피트)가 바이러스를 퍼트린 자라고 확신한 제임스(브루스 윌리스)는 과거로 돌아가 그를 추적해서 바이러스 사건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어쩌나, 과거는 바꿀 수가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는 과거였다면 오염된 현재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을. 제임스는 마지막에서야 바이러스가 처음 퍼지던 순간, 어린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막기 위해 과거에 도착한 미래의 자신과 함께. |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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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을 하지 않아도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지금은 과거가 된다. 미래의 범죄를 정확히 예언하는 프리크라임이 존재하는 세상,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워싱턴DC에서 프리크라임의 기동반장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을 사살하는 예언을 만난다. 예언이 조작이라고 생각하고 누명을 벗기 위해 도망을 다니던 존 앤더튼은 결국 예언 그대로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창 밖으로 떨어지는 현장에 있게 된다.
예언을 미리 알고 도망을 다닌 존 앤더튼의 행동이 결국 실제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아, 유니버스의 운명이여. 원작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크라임은 예언과 실현의 딜레마에 고민하는 소설이지만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크라임은 완벽한 유니버스 그 자체다. |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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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각효과로 빛나는 <터미네이터2>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SF팬들이 속편을 우려했던 이유는 전편인 <터미네이터>가 그 자체로 완결되는 닫힌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는 유니버스 세계관의 SF였기 때문에 <터미네이터>는 그 자체로 완벽했다. 속편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기계들이 지배한 세상, 인간 반란군을 이끄는 존 코너를 제거하기 위해 기계를 지배하는 컴퓨터 사이버다인은 1980년대의 과거로 암살자 로봇,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츠네거)를 보낸다.
터미네이터의 임무는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린다 해밀튼)를 암살하는 것. 그러나 유니버스 세계관에서라면 암살시도 자체가 미래에 이미 반영되어있다. 아니나 다를까 터미네이터의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존 코너가 어머니의 보디가드로 보낸 카일(마이클 빈)은 결국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된다. 암살 시도와 암살 저지가 결국 존 코너를 낳은 것.
그래도 <터미네이터2>가 빼어난 속편인 이유는 훌륭한 완성도의 전편과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도입하고도 더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완결되는 전편에 이은 속편이 멀티버스 세계관으로 무장한 하이테크놀로지 영화라니. 존 코너가 태어난 후 존 코너를 노리고 다시 돌아온 신형 터미네이터는 존 코너 암살 저지의 임무를 맡고 나타난 구형 터미네이터와 싸우게 되고, 그 와중에 존 코너와 구형 터미네이터는 사라 코너를 구출해 역사를 바꾸게 된다.
기계들의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 구형 터미네이터를 이용해 원흉을 없애는데 성공한 것. 완전한 유니버스 SF는 후편에 이르러 완전한 멀티버스 SF로 이어졌다. 많은 물량을 투입하고도 <터미네이터3>가 팬픽 수준에 머무른 것은 단순히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놀라운 시리즈의 사이에 SF적인 빈틈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사실 미래의 정적에게 암살 당할 뻔 했다. 영문을 모르고도 당신이 살아있는 것은 미래에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당신을 도울 보디가드를 몰래 보내 쥐도새도 모르게 암살자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면, 다른 평행세계의 당신은 죽어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시간여행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