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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교사
세상의 소리
세상 모든 것은 소리와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추를 맞아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밤하늘에 반짝이는 억조의 별빛을 봅니다. 형형색색 모양과 빛깔을 변하며 떠다니는 구름과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자세로 살아가는 나무와 풀, 산과 바다, 돌과 바위, 새와 벌레, 사람과 짐승 등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마다의 소리와 색으로 합창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이지만 이들 하나하나의 소리와 색을 듣고 배우며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무엇 하나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이렇게 흔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효용의 기준으로 해충을 박멸하고 잡초를 제거하려고만 합니다. 석유 등 유용한 자원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쓰려 합니다. 유전자 변형으로 자연을 함부로 변형시키고, 화학물질 살포로 자연을 마구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반면 자연은 얼마나 고요하고 힘차고 또 아름답습니까? 풀벌레의 눈빛과 나비며 잠자리의 날개 무늬와 계곡의 바위들을 다양하게 울리며 떨어지는 물소리와 거미들, 개미들, 작은 쥐, 땅 밑의 두더지, 지렁이, 버섯, 플라나리아와 달팽이…. 저는 자연으로부터 보고 배우며 자연 안에서 터득한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의 교사를 말하고 싶습니다.
자연의 합주
그 동안 아이들을 만나온 경험으로 볼 때 사람도 자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처럼 우리도 저마다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멋진 몸을 가진 사람, 솜씨를 가진 사람, 음식을 잘 하는 사람, 남을 잘 배려하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 통찰하는 사람, 남이 도울 수 있도록 초대하는 사람 등 저마다 다른 개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함이 어우러져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합주를 이룰 수 있겠지요. 저마다의 사회는 저마다의 합주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아름다운 합주도 있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의 집합도 있겠지요.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런 합주를 하고 있을까요?
당신은 하모니(조화)를 이루는 합주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직감적으로 아실 겁니다. 조율과 조절이겠지요. 연주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듣는 귀가 있어야 할 겁니다. 합주는 들어가며 순간순간 조화를 만들어가는 집단예술이니까요. 듣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들음과 동시에 반응하는 공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합주일 겁니다. 각 개인들에게 필요한 조율과 조절은 사실 상호조율이고 상호조절입니다. 사회의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 교사는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악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겁니다. 자신이 어떤 소리를 가졌을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소리를 찾고 찾은 소리를 내어 사회의 하모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겠지요. 훌륭한 지휘자는 먼저 연주자와 악기를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교사가 먼저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을 권유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가까운 산을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자연의 주인공들이 쉼 없이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다가 햇볕과 바람이 불어 따뜻해지고, 어느새 풀이며 나무에 싹이 돋고 벌레들이 나오고, 숲속을 찾아온 새들이 보이고 다람쥐들이 보이고, 나비들도 몇 주 사이에 다른 종들로 계속 바뀝니다. 구름은 계절마다 높이를 달리하고 계곡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도 위치에 따라 쉼 없이 바뀝니다. 자연 전체가 끊임없이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시간을 자연에 내어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합주를 보고 듣고 느끼겠지요. 물론 그들이 경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도 자리를 잡으면 모두들 자기로서 최선을 다해 제 노래를 부르며 합주에 참여합니다. 자연의 참된 지휘자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연이야말로 교사들이 닮아야 할 교사들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를 발견하는 사람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진 장점을, 아름다움을. 발견된 사람과 발견한 사람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정의 바탕인 신뢰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형성되어집니다. 이것이 지음(知音)이겠지요. 저는 세상의 소리를 얼마나 알아들을까 자문해봅니다. 세상의 노래를 소음으로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음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진짜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교사는 소리를 사랑하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소리는 처음에 소음과 뒤섞여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리가 발견되는 순간 소리는 고유의 음색을 보여줍니다. 소리의 진실을 발견하며 우리는 안도와 편안함을 느낍니다. 편안함 속에서 소리는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안도를 느끼며 자신감을 되찾고 저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귀 기울여주는 사람 앞에서 소리는 숨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사회에 한 명 한 명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우정 안에서.
그러려면 발견하는 연습을 해야겠지요.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가 가르치려하기 보다 먼저 자연에 귀를 기울이며 배우기를 바랍니다.
정체성의 회복
발견은 발견되는 대상에게도 중요하지만, 발견하는 사람 자신에게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정체성의 확장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이기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개인주의 사회입니다. 시장경쟁의 치열함 속에 타인을 이겨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이 고립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빈곤한 개인의 정체성을 채우기 위해 소유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곧 내가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소유라는 말이 메아리칩니다. 무엇이든 ‘나의’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능력도 소유물처럼 스펙 쌓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심리는 빈곤하고 불안한 심리의 도피 현상입니다. 물신숭배이자 페티시즘입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이 몸 안에 갇혀 더욱 불안하고 고립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코 건강한 정체성이 아닙니다. 자연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위에서 발견은 공감과 우정관계를 맺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발견자는 바로 발견에 의해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들과의 관계로 다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정체성의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라는 말은 나와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은 1인칭 대명사입니다. 자연 또한 ‘나’이자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천성산에서 3년을 보내며 느낀 것은 제가 발견한 무수한 자연물들과 제가 걸었던 길들이 경험을 통해 저와 하나가 되어갔다는 것입니다. 발견을 통해 자연의 공간과 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정체성과 천성산 자연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몹시 안타깝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자연훼손이 남의 일이 아닌 저의 일로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충만한 생명을 사람들이 너무나 함부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의 발견을 통해 점차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발견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강가의 자갈밭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만약 당신이 이른 아침 촉촉한 강변을 산책하며 돌멩이들을 본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돌멩이들을 주워본 적이 있겠지요? 모양이 곱거나 혹은 이상하거나 무늬가 특별하거나 색이 다른 것들을 주워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저마다 다른 돌들이 어느 계곡에서 어떻게 흘러와 이렇게 이슬에 젖어 있을까 생각을 해보셨나요? 흰 돌 검은 돌 붉은 돌 푸른 돌 저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섞이게 되었겠지요. 처음엔 예쁘고 특이한 돌을 찾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많은 돌들을 모아 결국 가득 쥔 돌을 다시 내려놓기도 했을 겁니다. 수십만의 돌들 중 같은 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까요? 돌들이 겪었을 세월과 마모의 시간들, 그리고 침묵. 돌 밑에 사는 벌레와 돌에 누고 간 새똥들. 그런 돌밭은 돌들의 서식지가 아닐까요? 장소의 고유성을 느낄 겁니다. 어쨌든 당신은 돌밭에서 돌들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고 느끼고 깨달아갈 것입니다. 어떤 돌은 선물로 사용되고, 어떤 돌은 무엇인가를 기념하거나 기억하기 위해 책상 위에 두기도 할 겁니다.
좀 더 상상해볼까요? 당신이 유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 음미하며 느끼는 사람일 겁니다. 당신 나름대로 상상하며 느끼며 돌들을 바라봤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당신은 강변의 돌밭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눈치 챘을 겁니다. 저는 위에서 서식지라는 말을 썼지만, 존재가 가진 고유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러 차례 시간과 계절을 달리해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돌밭이 가진 고유성을 더 깊이 풍부하게 느낄 것입니다. 물새도 보고, 풀꽃도 보고 땡볕에 달구어진 돌밭도 보고, 눈밭으로 변한 돌밭도 볼 것입니다. 주먹도끼나 그릇 파편을 줍기도 하겠군요. 바로 그런 경험의 과정 안에서 서서히 여러분은 자연의 장소와 연결되고 정체성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치 했나요? 그러는 과정 속에 이미 배움이 일어나고 정체성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을. 당신은 돌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저마다 다른 빛깔과 모양으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돌들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둥글어지기 위해 보낸 시간의 여행을 배우기도 하고, 뜨거운 햇볕과 차가운 얼음을 견디는 단단한 침묵을 배울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어떤 것을 여러분이 발견하고 느꼈다면 그것은 돌이 가진 소리일 것이고, 동시에 여러분 자신이 가진 소리이기도 할 겁니다.
돌밭에서의 경험처럼 여러분이 자주 숲길 산책을 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분명 길을 걸으며 길과 대화하고 길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양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하나 둘 배워나갈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여러분을 소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여러분도 길을 통과하며 길을 소화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연 안의 걷기 경험은 소화처럼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무엇이든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의 생명들은 적응하여 왔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숲을 귀를 기울이며 걸으셨던 분이라면 여러분은 이미 수많은 나무 선생, 풀 선생, 바위 선생, 거미 선생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셨을 겁니다. 그러며 여러분은 거미이며 새이며 풀꽃이며 나무이며 구름이며 산이고 하늘인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자연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을 겁니다.
어느 해 여름 티베트의 수미산 코라를 하며 만난 순례자와 15세 정도의 아기 엄마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깊고 맑은 그들의 눈은 너무나 아름다워 울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수많은 날들을 들판의 평원을 바라보고 하늘을 보며 배우고 또 배웠겠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눈에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느꼈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감동받아 울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발견
저는 아이들과 국어 과목을 매개로 만났습니다. 교과서는 제게도 어렵습니다.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저도 딱 질색입니다. 그보다는 우선 아이들이 세상의 보물을 발견하고 감동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교과서에서 보물을 발견하라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쓴 글을 교과서 대신 수업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사실 국어교사의 기쁨은 아이들의 글을 읽는 것이니까요. 아이들의 글은 진솔하고 개성이 넘칩니다. 일단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자신의 글을 읽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의 글은 더 파닥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습니다.
시 수업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시를 쓰도록 해 아이들 시를 같이 읽고 시에게 좋은 구절과 표현, 생각 등을 발견하곤 합니다. 장난으로 써낸 시도 있고 추상적인 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시든 웬만하면 빛나는 한 구절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의미 있는 단어 한 둘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만 좋은 시라고 생각하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평범한 글들에서도 감동적이고 멋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 때문에 칭찬을 받으면 불의의 일격에 충격을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마치 돌밭의 돌멩이처럼 아무도 보아주지 않던 그래서 기대하지 않던 말과 글의 소리를 누군가 읽으려고 노력하고 또 읽으니 소리가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겁니다. 김춘수의 ‘꽃’처럼 무의미에서 의미의 세계로 실존이 이동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입니다. 무엇이든 유심히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보면 보일 것이 보이고 들릴 것이 들립니다. 그렇게 많은 보물들을 발견한 사람이 가난할 수 있을까요? 세상 자체가 보물로 가득한데요. 발견의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교육의 결정적 순간이 언제나 일대일의 만남으로 이뤄져 있음을 직감하실 겁니다. 제게 교육의 시간은 이렇게 일대일의 발견이 이뤄지는 시간입니다.
예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의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발견하면 좋지만 당장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도 살아있는 생명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소음으로 들릴지라도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습니다. 아이들도 어렵고 힘들었던 아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은 더 멋진 음색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제가 뛰어난 교사라면 그 소리를 발견하고 소리의 자리를 마련해주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못 했더라도 세상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반항했던 많은 아이들이 제게는 그 누구보다 멋진 음색으로 크게 쓰일 소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귀가 작고, 제 그릇이 작았을 뿐입니다.
자연의 아이들
저는 자연의 발견이나 사람의 발견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시화 속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사람끼리의 발견은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자연의 발견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아이들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발견하면 그가 바로 선생입니다.
이제까지 저는 발견하는 사람이 선생이라고 했습니다만, 이제 말을 바꾸려 합니다. 발견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발견해야 할 대상이 바로 선생입니다. 나의 정체성은 바로 그 선생으로부터의 배움으로 이뤄집니다. 아이가 선생이고 자연이 선생입니다. 제가 국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말과 글을 배웠던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진실의 목소리를 배웠습니다. 제가 자연을 보호했던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