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낭시,
베트남 이야기, 소운/박목철
먼 나라 베트남,
우리 민족은 지리적으로 폐쇄된 환경에서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삶을 살아왔다.
북으로는 중국에 막히고 남으로는 일본에 막혀 다른 나라와 접할 일이 거의 없이 살아 온 셈이다.
일본은 인접한 대마도 외에는 바다 건너의 일이라 여겨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나라이기도 했고,
대신 국경을 접한 대륙은 주인이 바뀌거나 할 때마다 영향을 받아 왔지만, 그나마 통치자 외의 일반
백성은 다른 나라 사람과 접할 기회도 없고 교류할 일도 없어 외국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었다.
중국이나 일본 외에는 유구 왕국이 선물을 보내왔다거나, 안남(安南) 왕국의 왕자가 피신해 왔다는
정도가 일반인이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 일 정도이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대만미(臺灣米)나 안남미(安南米)라는 쌀을 접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쌀이 모자라 굶주리던 시절 외국에서 수입한 쌀이 대만에서 수입한 대만미와 베트남에서 수입한 안남
미이다. 그때 먹어본 대만미나 안남미가 하도 맛이 없고 냄새도 심하고 푸석거려 가난한 사람도 기피
하던 쌀이 대만미나 안남미이다. 쌀의 종자가 우리와 다른 남방계 벼의 일종인 인디카 종이라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종처럼 찰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난히 푸석거리고 냄새가 나던 것은 묵은 쌀을
수입한 탓일 것이라는 것을 동남아 여행 중 먹어본 밥(인디카종)이 맛있다는 사실에서 알게 되었다.
배고프던 시절 수입한 쌀을 통해 베트남을 알게 되긴 했지만 베트남은 관심 밖의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 베트남이 우리와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이니 만남이 좋은 인연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한국의 인권 운동가들이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이
어떻고 하려 하자 베트남 당국에서 지난 일을 꺼내지 말라고 강력히 제지했다고 한다.
지난 과거를 문제로 다툼을 만들지 않겠다는 베트남 당국의 방침은 결국 한국의 베트남 투자로 이어져
삼성을 비롯해 많은 기업이 베트남을 경제적 파트너로 여겨 상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인이 현지에서 낳아 버리고 온 아이(라이따이한)들이 수만 명에 달하고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다 성장하여 성공한 이들도 많다고는 해도 돌봐야 할 빚이라 생각한다)
* 관광지마다 한국인이 넘쳐나고 있었다. 버스는 한국의 중고차를 들여온 것이라 한다.
새로운 친구 베트남,
일본과 다툼으로 인해 일본 여행이 껄끄러워지자 대신 베트남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
소운도 일본을 몇 차례 더 갈 계획이었지만, 굳이 다툼의 와중에 눈치 보며 일본행을 하기가 꺼려져
대신 베트남을 찾았는데, 베트남의 관광지는 한국인 여행객으로 온통 북적거렸다.
일본의 돈키호테 몰에 물건 보따리를 들고 몰려다니던 한국인 인파가 다 베트남으로 옮겨 온 듯
한국인 관광객을 태우려고 줄을 선 버스도 현대의 마크를 달고 있어 여기가 베트남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베트남은 한국인의 열기로 가득했다.
베트남은 한번 찾고 싶은 나라였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에 역사적 유적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인접한 나라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고 있기에 베트남의 역사 유적지에서 그 흔적들을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베트남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국가를 세우고 단군 신화 비슷한 민족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애매한 역사는 미뤄두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 4군을 설치한 시기가 기원전 108년
인데, 베트남도 비슷한 시기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의 침공을 받아 복속됐으니 중국의 침공 시기도
우리와 몇 년의 차이가 있을 뿐 시기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베트남은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례로 나라를 세워 중국의 직접적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데, 그런 탓인지 베트남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중국풍이 강하게
느껴져 흡사 중국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관광을 가는 보통 사람들은 유적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번 베트남 관광 일정에는 왕궁 한 곳과 왕릉 두 곳을 돌아보았는데, 일행 중 여러분이 차라리
입장료 할 돈으로 과일이나 사 주면 좋을 텐데, 돈이 아깝다고 하는 불만을 하기도 했다.
* 민망 왕릉은 베트남 전통 양식에 따른 왕릉이라고 한다. 규모도 크고 제실도 화려했다.
* 카이딘 왕릉은 시멘트로 축조된 왕릉이다. 당시에는 시멘트를 프랑스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 내부 벽이나 기둥 등을 타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돌아본 베트남 유적지의 조성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영조나 정조 시대와 엇비슷한 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조선의 유적지를 들라 하면 수원 화성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옛 베트남이 나름 융성했다는 느낌을 돌아본 왕궁이나 왕릉의 규모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옛 궁궐은 웅장한 느낌보다는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가 건물의 기단을 높이지
않는 점과 담을 높게 둘러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금성이나 베트남의 후에(hue) 왕궁은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축조해 상대적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궁궐 안에 쌓는 담장도 그리 위압적이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게 쌓는 것도 자연을 크게 거슬리지 않으려는 우리 조상들의 선택이었다.
* 후에 왕궁은 해자에 둘러싸여 요새와 흡사했다. 규모도 상당해 왕국의 위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 우리나라의 종묘와 비슷한 것이다.
*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우리의 종묘와는 달리 화려하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베트남도 중국의 위압에 눌린 제후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왕을 상징하는 용의 모습에서 발톱은 5개가 아닌 4개로 조각되었지만, 왕릉의 부속 건물은 제후의
정자각이 아니라 황제의 일 자각으로 조성되어 있고 그 규모도 상당하다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
중국의 영향으로 강녕전이니 태화전이니 하는 궁궐 내 전각의 명칭도 유사했으며, 신하들이 도열
하던 품계석도 우리와 같았다. 우리의 경우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커 건축자재가 목재와 흙
인데 비해 베트남은 깨어진 자기 파편을 벽에 붙이는 등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이는 자연환경의
제한에 따른 자연적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 등을 붙이면 온도 차가 커 다 떨어지게 돼 있다)
* 조선조의 왕들도 고종 순종을 제외한 왕들은 용의 발톱이 4개였다. 베트남도 그랬다. 중국의 횡포가 엿보인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군사력이 월등한 남베트남이 월맹군에 패해 옛 사이공도 호찌민시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듯, 많은 관광객이 찾는 바나 산 테마파크에 자리한 절에는 호찌민을 주존
불의 위치에 모신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고 많은 참배객이 참배를 드리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한국 관광객 중 불교 신자는 영문도 모른 채 호지명에게 참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산채로 분신(焚身)해 반정부 시위에 불을 댕긴 틱광득 스님을 모신
사원(티엔무사원)에는 심장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일화와 기념관이 있어 옛 이차돈의 순교를
떠 올려 보았다. 목을 자르니 흰 피가 솟구쳤다는, 아무튼 절의 분위기는 아주 밝았고 스님들의 모습도
밝고 건강했다.
* 바나 산 테마파크는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단지 내 사찰에는 호지명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개인소득 3천 불 남짓의 갈 길이 아직 먼 공산당 일당 지배하의 베트남,
그들은 지금 번영된 조국을 만들고자 열심히 뛰고 있다는 인상이 여러 곳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곳곳에 나부끼는 붉은 바탕에 별이 그려진 국기, 총부리를 겨누던 한국인을 사랑한다는 티셔츠를
입고 한국 가요를 능숙하게 부르며 춤을 추는 젊은이들, 곳곳에 붙어 있는 마사지 숍의 광고지 들,
봉사료 몇 불을 벌자고 비위를 맞추는 베트남 소녀들, 많지 않은 입국자 임에도 상당한 시간을 소요
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일 처리 등이 어우러져 혼란스러움 속에 베트남은 지금 바쁘게 변혁하고 있었다.
문득 라이 따이한(한국인 혼혈)을 떠 올렸다. 베트남에 버리고 온 한국인 2세들이 온갖 어려움에
시달린다는 가슴 시린 이야기, 이제 그들도 중년을 훌쩍 넘는 나이가 됐으리라,
넘쳐나는 관광객과 잘 사는 나라, 그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베트남의 단편을 나름의 생각으로 풀었습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세세한 소개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눈으로 보려 했으나, 유구한 역사를 감히, 하는 심정입니다.
사진 몇 장을 같이 소개합니다.
*호이안 에코투어, 대나무로 엮은 배를 호수에 띄워 관광객을 모아보자는 생각은 한국인 가이드의 발상이라고 합니다.
* 바쁘게 몰아치는 와중에도 한편에서는 오수를 즐기는 모습이 보입니다. 따뜻한 나라답습니다.
* 관광객을 태운 배들을 모아놓고 묘기를 보이거나 한국 가요를 신나게 부르고 팁을 주면 받습니다.
* 한국 노래에 맞춰 신나게 노래와 춤을 춥니다. 티셔츠에 i love korea 돋보입니다.
* 고대 항구 도시 호이안은 풍광이 좋기로 소문 난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집들이 여럿입니다.
* 내원교는 일본인이 중국인 마을과 연결하고자 만든 다리라고 합니다. 호이안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 호이안은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가게마다 등을 내걸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첫댓글 歷史的으로 볼때, 元나라 의 侵攻을 막아낸 나라는 두 곳(일본 , 베트남-안남국)이다. 프랑스 식민지를 거쳐 전쟁을 통하여 몰아내고, 南(민주정) & 北(사회주의 정치)으로 갈라져 있었다. 美國과의 전쟁으로 미국이 退却함으로써 사회주의 國家가 되었다. 또한 鄧小平 때 잠시 침입을 받았으나, 충분히 防禦해 나갔다 ..............................................................
結論的으로 주변강대국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自國의 國民群으로 해 나갈 수 있다는 底力이 있다는 事實이다.
베트남 인들은 왜소하고 약해 보였지만,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베트남 정도의 국력으로도 중국에 맞서 전쟁을 서슴치 않았는데,
우리는 ?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국에 대해 말 한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는
못난 지도자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베트남의 고궁 규모가 생각 외로 크네요. 늘 새롭고 흥미로운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와 같이 중국의 제후국이 었던 베트남의 유적이 저도 늘 궁굼했답니다.
예상 보다는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품계석도 우리와 비슷하고, 강녕전이니 태화전이니 하는 명칭도 같아서 놀랐습니다.
좋은 시간되시고 행복하세요, 푸른꿈 님,
상기 상세하고 상식과 정보가 풍부한 형님의 글과
잘찍은 사진들을 대하니 마치 베트남 백과사전의
한 부분을 보는 듯 합니다. 제가 승무원으로서
베트남에 가서 느낀 첫인상은 우선 젊은이들이 많고,
과거의 전쟁 때문에 일부 시민의 눈에서는 살기가 느껴지며
두뇌와 손재주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베트남 경제와 주민의 편익을 위해
노력한 적이 많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과격한
우리 군인들은 베트콩 소속으로 간주되었던 주민들과
여자들에게 상처를 준 아픈 역사가 있기에
베트남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노이 대우호텔 쌀국수와
호치민 포2000 식당의 쌀국수도 생각나네요.
맨 밑에서 여섯 번째 사진 속 모자와 배낭을 맨
남자관광객의 모습이 과거 야구모자를 쓴 채
카메라와 배낭을 매고 해외 명소를 찾아 다니던
피터의 인상착의와 흡사하여 놀랐습니다.
확대하여 보니까 피터의 얼굴모습과도 닮았네요.
리피터님 반갑습니다.
한번 둘러 본 베트남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유적지가 없는 관광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탓에 필리핀은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 먹고 노는 관광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베트남이 예상외로 중국풍이 강하게 느껴져서 놀랐습니다.
우리는 중국 보다는 몽고의 영향을 더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한무제의 침략이후 우리는 독립왕국을 빨리 세운것에 비해 베트남은 통치를
오래 받은 탓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항공사에 계셨으니 세상을 보는 눈이 저보다야
한수 위인 리피터 님이시라 제가 많이 배워야지요, 좋은 계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하면 베트콩을 연상하리만큼 베트콩은 유명했지요 얼마나 끈질기고 집념이강했으면 미국도 포기하고 전쟁을 접었을까요 ,,<이런말이있지요 베트콩은 아무대도없다 그러나 아무대나 있다>
미국이 프랑스나 미국과 전쟁을 해서
이겼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란 생각입니다. 전투에서 이겼고 골치아프니 손 뗀다
차원이지요, 국가간 전쟁이면 살아남기
어려웠겠지요, 끈질긴 건 맞는 것 같아요,
우리도 본 받을 점은 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4합니다~
좋은 정보라시니 감사합니다.
남하하는 중공을 막기 위해 미국에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호치민과 손을 잡아 남하하던 짱꼴라가 월맹에게 대패한 사례는 남에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주적은 이북이 아닙니다. 중공이지지요.이곳에서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중국이 주적이란 말씀에 공감합니다.
중국이 너무 일찍 나대다 정통으로 미국
견제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밀착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노선이란 생각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베트남의 새로운 모습 역사적 약자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모습
우리도 생각할부분입니다.
내일의 강자로 거듭날 베트남 기대됩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의 미래가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필리핀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잘살던 시대가 그리 오래 전이 아니지요,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교훈입니다.
베트남의 앞날을 축복하시는 님의 댓글에 저도 한표를 더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