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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인생론
제1장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1.
장 파울의 [셀리나]를 읽으면 극히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조차 어떤 그릇된 개념과 맞붙어 싸우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릇된 개념에 집착하면서, 이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항시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의 의식 전체가 죽은 후에도 개체에 의해 존속한다는 개념이다. (...) 영혼과 육체를 잘못 대립시키고, 전체 인격을 영원히 존속해야 하는 어떤 사물 자체로 끌어 올려 참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의 본래적 본질은 시간, 인과율 및 변화와는 무관한 소멸하지 않는 것이라는,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대립에 기인하는 참된 인식이 불가능해진다. (267쪽)
2.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이 무엇이 되든, 설사 무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당신의 개체적 유기체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적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68쪽)
3.
영원한 존속에 적합한 개체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 개체는 죽으면 소멸한다. 그렇더라도 이때 우리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체적 생존의 토대에는 그것이 발현되는 현상과 전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존속도 소멸도 알지 못한다. (269쪽)
현 순간의 시간적이고 개인적인 우리의 생존을 넘어서는 존속과 종료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 두 가지는 구별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우리의 본래적이고 참된 본질이나 우리의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물자체에는 소멸의 개념도 존속의 개념도 적용할 수 없다. (270쪽)
우리 현상의 핵심이 되는 것의 불멸성을 그 핵심의 존속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 속에서 형태가 아무리 변화해도 자신을 고수하는 질료의 모형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모형에 대해 이러한 존속이 인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적 종말을 형태의 모형에 따라 하나의 소멸로 간주하는데, 형태는 그것을 담당하는 질료를 잃을 때 소멸한다. 그렇지만 두 가지는 다른 속(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천체에 관하여] 제1권 1장). 다시 말해 현상의 형태가 물자체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속하지 않는 불멸성에 대해서는 어떤 추상적 개념도 세울 수 없다. 그것은 그 개념을 증명할 직관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270쪽)
4.
인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여기서 어떤 물자체가 무가 되리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모든 인간은 시간 속의 어떤 현상, 즉 모든 현상의 이 같은 형태 속의 어떤 현상만이 종말을 맞을 뿐이며, 물자체는 어떤 현상이 종말을 맞아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직접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극히 다양한 형태와 표현으로 그런 사실을 말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표현은 현상에서 빌려 온 것으로, 그 본래의 의미는 이러한 현상과만 관련될 뿐이다. (271-272쪽)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가장 깊은 근저까지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인식했다고 한다면, 개체의 불멸을 갈망하는 것을 우스운 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을 갈망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 자체를 포기하고 자신의 수많은 발현들, 즉 섬광 중 어느 하나만 갖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72쪽)
5.
어떤 사람이 모든 사물의 덧없음, 허망한, 꿈 같은 속성을 분명히 의식할수록 자신의 내적 본질의 영원함을 분명히 의식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같은 내적 본질은 인식되지 않고 단지 사물의 속성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 자체의 내분은 들여다보지 못해도 해안을 바라본 후 자신이 탄 배가 신속히 나아가는 것만 감지하는 것과 같다. (272쪽)
6.
현재는 객관적 현재와 주관적 현재라는 두 개의 절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관적 현재만이 시간이라는 직관을 형식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굴러간다. 주관적 현재는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가 진작 지나간 과거를 생생히 기억하는 것, 그리고 존재의 덧없음을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불멸을 의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72쪽)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나의 시작 명제에 이어 "먼저 내가 있고 그다음에 세계가 있다"는 명제가 뒤따른다. 죽음을 소멸과 혼동하지 않게 일깨워 주는 해독제로 이 말을 명심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가장 내면적 핵심은 현재를 포함하고 또한 함께 지니고 다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시간의 종점이 아닌 중심점을 의식하며 생활한다. (273쪽)
오래전에 지나간 일을 매우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자는 모든 시간에서 현재의 동일성을 다른 누구보다 더욱 분명히 의식할 것이다. (...) 가장 좁은 의미에서 모든 실재의 유일한 형식인 현재가 우리 내부에 원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직관적인 방식으로 깨닫는 자는 자신의 본질의 불멸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273쪽)
인생은 물론 일장춘몽으로, 죽음은 잠에서 깨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격, 개체는 꿈꾸는 의식에 속하지, 깨어 있는 의식에 속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런 깨어 있는 의식에게 죽음은 소멸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아무튼 이런한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낯선 상태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 우리에게 고유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원래적 상태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274쪽)
죽음으로 의식은 소멸하지만 그때까지 그 의식을 만들어 낸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무엇보다 지성에 기인하지만, 이 지성은 생리학적인 과정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명백히 뇌의 기능이고, 신경계와 혈관계의 작용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 생리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두뇌의 정교하고 비밀스러운 구조를 통해 객관적 세계의 현상과 우리의 활발한 사고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개체적 의식, 즉 일반적으로 의식은 형체를 지니지 않는 존재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의식의 조건인 인식은 필연적으로 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원래 지성은 객관적으로는 뇌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성은 생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따라서 경험적 현실, 즉 현상 속에서는 생명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2차적인 것이듯, 심리적으로도 의지와 달리 2차적인 것이다. 의지는 홀로 1차적인 것이고 어디서나 본래적인 것이다. (...) 의식은 직접 의지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제약을 받고, 이 지성은 유기체의 제약을 받으므로 죽음에 의해 의식이 소멸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잠과 온갖 기절에 의해서도 의식이 소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75쪽)
죽음으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는 상태는 존재의 원래적 상태, 즉 자기 자신의 상태이며, 그것의 근원적 힘은 지금 종료되는 생명의 창조와 유지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물자체의 상태는 현상과 반대다. (...) 우리에게 인식의 중지와 현상계의 종료는 한 가지다. 인식은 현상계를 매개하는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그 이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단순히 현상에 따르고 현상적 능력만 있는 이러한 뇌수의 의식 상실이 임박했다고 탄식하는 자는 천국에 물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천국에 가지 않겠다는 그린란드의 개종자에 비유할 수 있다. (...) 의식이 없어졌다고 할 수 없는 상태란 인식하는 상태이므로, 모든 인식 작용의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인식하는 것과 인식된 것의 분리를 자체적으로 지닌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276-277쪽)
우리가 존재의 내부를 추적할 수 있는 한 그 근원적 상태는 우리 자신의 현재 존재이고, 단순한 의지이지만, 이 의지는 그 자체로 이미 인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에 의해 지성을 잃는다면, 단지 인식이 없는 근원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근원적 상태란 완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기본 형식을 넘어서는 고상한 상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종료되는 상태일 것이다. (...)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절대적 일치인 신의 마음은 그 자체로 인식하는 존재이자 인식되는 존재이기도 하다"라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발언은 나의 주저나 여기서 말한 것과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277쪽)
7.
이 순간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존재의 본래적 핵심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미래의 존재가 어느 정도는 지금 벌써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분명해진다. (...) 우리는 윤회와 환생을 잘 구별할 수 있다. 윤회는 이른바 영혼 전체가 다른 육체로 옮겨 가는 현상이지만, 환생은 개체의 해체이자 새로운 형성이다. 이 경우 의지만이 계속 지속돼 새로운 존재의 형태를 띠고 새로운 지성을 얻는다. (...) 불교에는 사후의 존재와 관련해 공교적(公敎的) 교리와 비교적(秘敎的) 교리가 있다. 공교적 교리는 브라만교에서와 같은 윤회지만, 비교적 교리는 훨씬 난해한 환생이다. 이 환생은 내 교설과 상당히 흡사하다. 즉 지성은 단순히 물리적 속성을 지니고 이것에 상응하게 무상한 것에 비해, 의지는 형이상학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이다. 거듭남은 이미 신약성경에도 등장한다. (279-280쪽)
* 거듭남은 [마태복음] 28:7의 죽은 자의 부활, [디도서] 3:5의 옛 사람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 등임. (280쪽 주)
출산과 죽음을 통해, 즉 모든 개체가 의지와 지성으로 합성되어 있다가 나중에 해체되는 것을 통해, 형이하학적 요소가 아무리 놀랍고도 우려스러운 힘을 행사한다 해도, 그 밑바닥에 있는 형이상학적 요소는 이질적인 본체여서 출산이나 죽음에 끄떡하지 않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좋다. (281쪽)
8.
선험적 인식이란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애쓰는 인식이지. 반면에 내재적 인식이란 경험의 가능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현상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인식이야. 개체로서의 너는 죽음과 함께 끝나는 거지. (...) 개체란 물자체가 아니라, 시간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그에 따라 시작과 끝이 있는 물자체의 현상일 뿐이지. 반면에 자네의 본질 그 자체는 시간도, 시작이며 끝도 주어진 개성의 한계도 알지 못해. 그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개성으로부터도 배제되지 않고 각각의 모든 것 속에 들어 있지. 그러므로 전자의 의미에서 자네는 죽음에 의해 무가 되는 거지. 후자의 의미에서 자네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으로 남아 있어. 그 때문에 나는 자네가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 거야. (283-284쪽)
사실 직접적으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삶에의 의지 일반이야. 그것은 모두의 내부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야. 그런데 존재 자체가 의지의 임의의 작품이고, 아니 그것의 단순한 반사광에 불과하므로, 개체는 이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의지는 존재 일반에 의해 일시적으로 충족될 수 있어. 다시 말해 의지, 즉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그 의지가 충족될 수 있는 만큼만 말이야. (...) 개성은 완전성이 아니라 제한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제한에서 벗어나는 일은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획득이지. (286-287쪽)
제2장 생존의 허망함에 대하여
1.
허망함은 생존의 모든 형식에, 즉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데 개체는 어느 면에서는 유한하다는 사실에 표현되어 있다. 허망함은 현실의 유일한 생존방식인 현재가 지속적이지 않은 점, 모든 사물의 의존성과 상대성, 존재가 없는 끊임없는 생성, 만족을 모르는 끊임없는 소망, 끊임없는 죽음의 억제에 표현되어 있다. (288쪽)
삶은 이러한 죽음의 억제에 의해 존속하다가 결국 언젠가는 그 억제가 극복되고 만다. 시간과 모든 사물의 덧없음은 억제 속에서, 억제에 의해, 물자체로서 불멸인 삶에의 의지에게 그 노력의 허망함을 명백히 드러내는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시시각각 모든 것을 우리의 수중에서 무(無)로 변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은 참된 가치를 잃는다. (288쪽)
2.
한 번 존재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음 순간 벌써 존재했던 것이 된다. 그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현재라도 현실이라는 면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과거보다 우월하고, 현재의 과거에 대한 관계는 유의 무에 대한 관계와 같다. 인간은 수많은 시간에 걸쳐 존재하지 않은 후 여기에 존재하며, 잠시 후에 똑같이 오랫동안 다시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돌연 놀랍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288-289쪽)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은 단 한 순간만 '존재한다'일 뿐이고, 그다음에는 영원히 '존재했다'가 된다. 우리는 저녁마다 하루 정도 더 빈곤해진다. 생명의 샘을 끊임없이 쇄신할 수 있도록 결코 마르지 않는 영원의 샘이 우리에게 속한다는 은밀한 의식이 우리 존재의 깊디깊은 근저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처럼 짧은 일생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어쩌면 미칠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라는 이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현실만이 실재하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사고의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89쪽)
3.
우리의 생존은 차츰 사라져 가는 현재 말고는 발을 디딜 토대가 없다. 그 때문에 생존에는 형식을 향한 끊임없는 운동만 있을 뿐, 우리가 항시 추구하는 안정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 (...) 생존의 전형적인 모습은 불안이다. (...) 행복이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플라톤이 말하는 '부단히 생성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행복이 깃들 수 없다. (290쪽)
4.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끝 무렵에 이르러 한평생 임시로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다지 존중하지도 즐기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보낸 것이 바로 기대에 차서 살아온 그들의 인생임을 깨닫고 놀라워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행로는 대체로 희망에 우롱당하며 죽음을 껴안고 춤추게 되어 있다. (291쪽)
기본적으로 의지란 그 자체로 볼 때 모든 것을 예속시키는 세계의 주인이라서 부분이 아니라 무한한 전체의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반면 세계의 주인인 이 의지도 개체의 현상 속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대부분 개체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새삼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개체는 심한 비탄에 빠진다. (292쪽)
5.
온갖 종류의 열등한 것을 숭배하는 데 열을 올리는 정신적으로 무력한 현재의 시대는 자신이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주제넘고 듣기에도 거북한 '현대'라는 용어로 자신을 꽤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 범신론자도 삶이란 그들이 흔히 그렇게 부르듯 '자기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생존이 세계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 자신이 그렇게 정했든 남이 그렇게 정했든 그것은 지금까지 정해진 가장 어리석은 목적일지도 모른다. (292쪽)
인간계의 전체 모습을 하나의 시선에 모아 보면 매 순간 위협하며 들이닥치는 온갖 종류의 위험과 재해에 맞서 어디서나 쉼 없는 투쟁이, 생명과 생존을 둘러싸고 체력과 정신력을 다 소모하는 엄청난 분투가 보인다.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얻는 대가, 즉 생존과 목숨 자체를 살펴보면 그 사이사이에 고통이 없는 생존의 순간이 몇 번 발견되지만, 그것은 즉각 무료함의 공격을 받아 새로운 곤경을 당하며 금방 끝나고 만다. (292-293쪽)
곤경의 배후에 좀 더 영리한 동물마저 곧장 사로잡히는 무료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삶에 참되고 진정한 내용이 없으며, 그 삶이 단순히 욕구와 착각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멈추자마자 생존의 전체적인 삭막함과 공허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 욕구를 충족하기란 어렵지만 그것이 충족되어야 고통 없는 상태가 주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무료함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렇게 되면 무료함은 생존 자체에 아무 가치 없음을 증명한다. 무료함이란 실은 그 생존이 공허하다는 느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93쪽)
6.
죽음의 필연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단순한 현상이지 물자체, 즉 참된 존재자는 아니라는 사실에서 도출할 수 있다. 인간이 물자체라면 소멸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상들의 토대가 되는 물자체가 이러한 종류의 현상들 속에서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물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된 결과다. (295쪽)
인간의 생존이란 하나의 오류이며, 그 결과가 점차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인생을 환멸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295쪽)
7.
시간이란 그것의 지속에 의해 사물과 우리 자신의 극히 허망한 존재가 실재한다는 허상을 주기 위한 우리의 머릿속에 든 하나의 장치다. (...) 시간의 형식 자체란 바로 지상의 모든 향락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수단이다. 우리 인간이나 모든 동물의 생존은 확고한 상태에 있거나 적어도 시간적으로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유동적인 단순한 실재에 불과하다. (295-296쪽)
삶에의 의지란 전적으로 무로 돌아가는 현상 속에서만 나타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상들과 함께 이러한 무도 삶에의 의지에 포함되며, 삶에의 의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어두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296쪽)
제3장 세상의 고뇌에 대하여
1.
만일 고뇌가 우리 삶의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생존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삶의 본질적인 곤경에서 생기는 끝없는 고통, 세상 어디서나 가득 찬 고통을 아무 목적 없이 순전히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은 무한한 반면, 즐거움을 느끼는 감각은 좁은 한계에 갇혀 있다. 모든 개체적 불행은 예외로 생각되지만 일반적 불행은 규칙이다. (298쪽)
2.
시냇물은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한 소용돌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처럼 인간이나 동물의 본성도 우리의 의지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제대로 눈치채거나 깨닫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의지에 따라 진행되었을 때가 아니라 어떤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 (298쪽)
모든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우리는 금방 느낀다. 하지만 몸 전체의 건강은 느끼지 못하고 신발이 작아서 꼭 끼는 것 같은 작은 부위의 고통만 느낀다. 그처럼 우리는 모든 일이 무척 잘되어 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하찮고 자질구레한 일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자주 지적하듯이 고통이 적극적인 성질을 띠는 것과 달리 쾌감과 행복은 소극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289-299쪽)
3.
우리는 도살업자가 자기들을 하나하나 고르는 줄도 모르고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양과 같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에는 운명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액운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질병, 박해, 빈곤, 불구, 실명, 광기, 죽음 등과 같은 액운을. (299-300쪽)
개개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곤궁이나 무료함과의 투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적대자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다가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300쪽)
4.
항시 시간이 우리를 몰아 대며 숨 돌릴 틈 없게 만들고, 우리 뒤에서 교도관처럼 채찍을 들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적지 않은 고통을 겪는다. 시간은 무료함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만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다. (300쪽)
5.
대기의 압력이 없으면 우리의 신체가 파열해 버리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 고난, 곤궁, 고약한 일, 실패가 없다면 자꾸 오만방자해져서 제어할 수 없는 바보 짓거리, 다시 말해 광포한 행위를 하기에 이를 것이다. 심지어 배가 안전하게 똑바로 나아가기 위해 싣는 배의 바닥짐처럼 누구나 항시 어느 정도의 걱정이나 고통, 고난이 필요하다. 일, 고역, 노고, 고난은 거의 모든 인간이 평생에 걸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소망이 생기자마자 성취된다면 인생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무엇으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 (300쪽)
6.
어떤 사람의 생애가 행복했는지는 그가 얼마나 즐거움과 향락을 누렸는지 여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 성질을 띤 고통이 얼마나 없었는가 여부로 평가해야 한다. (301쪽)
이 모든 사실로 인해 인간에게는 고통의 양이 쾌락의 양보다 훨씬 늘어나고, 인간은 실제로 죽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의 양이 특별히 더 증가한다. (304쪽)
* '이 모든 사실로 인해'는 쇼펜하우어가 개진한 인간의 기억력과 예견, 반성과 거기에 따르는 심리작용, 성찰, 사고력 등을 말함. (박희택)
우리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즐거움과 쾌락의 원천은 그러한 환영이다. (...) 희망과 기대를 통해 미리 만족을 누려 실제적인 즐거움을 맛보면 그만큼 나중에 얻는 즐거움이 줄어든다. (304-205쪽)
7.
인식 자체에는 언제나 고통이 없다. 고통은 의지만 겨냥하는데, 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고 차단될 때 고통이 생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억제에 인식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 고통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는 온갖 고통과 무관한 인식에 의해 의지의 억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 "의지는 악기의 줄이고, 그것의 차단이나 방해는 줄의 진동이고, 인식은 공명판이며, 고통은 음이다." (306-307쪽)
8.
우리가 어릴 적에 닥쳐올 인생행로를 앞두고 있는 모습은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즐겁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는 모습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실제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아는 자가 볼 때 아이들은 때때로 아무 죄가 없는 피고 같을 것이다. (...) 누구나 장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불과하다. "오늘은 고약한 날이다. 그런데 날마다 더 고약해지다가 결국 최악의 상황이 올 것이다." (308쪽)
9.
우리는 우리의 삶을 무(無)라는 축복받은 안정된 상태를 쓸데없이 방해하는 조그만 일화로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인생을 그럭저럭 감내하며 살아가는 자조차 오래 살수록 전체적으로 인생이란 환멸이자 속임수임을, 또는 사기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커다란 기만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308-309쪽)
곤궁과 비탄의 무대이며, 적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견본에 의해 판단하건대 가장 행복한 경우라 해도 무료함을 던져 줄 뿐인 세상을 비추는 일밖에 하지 않는 별들, 즉 방대한 우주, 무한한 공간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세상에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 매우 슬퍼해야 할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 (309쪽)
* 堪忍土(사바세계), 堪忍待(동산스님 좌우명), 久住(법화경 묘음보살품) 등을 생각나게 하는 문장임. (박희택)
세상이란 실로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이러다가 내 철학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들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지 세상 사람들은 "주 하느님이 만물을 잘 만들었다"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데 나는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더라도 철학자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적어도 철학자들이 그들의 학설을 여러분이 시키는 대로 조정하기를 요구하지 마라. 다시 말해 그러한 요구에 응하는 자는 사기꾼이거나 사이비 철학자다. (310쪽)
길을 잃지 않고 인생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속죄의 장소로, 말하자면 감옥으로, 작업장으로 보도록 습관을 들이는 것이 가장 유용할 것이다. 이미 아주 먼 옛날의 철학자들도 세계를 그렇게 불러왔다(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의 [스트로마타], 그리고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 중에서 오리게네스는 칭찬할 만한 정도로 그 문제를 대담하게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나와 있다). 나의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지혜, 다시 말해 브라만교나 불교, 엠페도클레스나 피타고라스의 주장을 보더라도 그런 견해가 이론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3쪽)
* 인생을 견뎌 내고 재해나 인간을 의연히 참아 내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불교적 회상이 가장 유용할 수 있다. "이것이 윤회, 즉 욕정과 욕구의 세계, 그 때문에 생로병사의 세계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다. 그리고 이 경우 모두 윤회의 주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나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든 매일 네 번 되풀이해서 이런 점을 명심하라고 지시하고 싶다. (313쪽 주6)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벌을 받고 있다. (...) 모든 인간을 평가하기 위한 올바른 척도는 그가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 되고, 다양한 고통과 죽음에 의해 자신의 생존을 속죄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한 존재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아닌가? 우리는 1차로 우리의 출생에 의해, 2차로 죽음에 의해 속죄한다. 원죄도 이것을 알레고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14쪽)
10.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성격은 내가 종종 말했다시피 불완전하다기보다는 도덕적인 면이나 지적인 면 또는 물리적인 면에서 모두 왜곡되어 있다. (...)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곤궁하고 때로는 비참한 상태임을 잘 고려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싸우므로, 언제나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315-316쪽)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세익스피어, [심벨린]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말)!" 우리는 눈앞에 보고 있는 현상이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결점, 악덕임을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온갖 어리석음, 모든 결점, 악덕에 관대해야 한다. 그것들은 바로 우리도 그 일원인 인류의 결점이고, 우리 자신도 죄다 지니고 있는 결점이기 때문이다. (...) 그런 결점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속에 깊숙이 들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기만 하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316-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