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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十六回 吳起殺妻求將 騶忌鼓琴取相
제86회 : 오기는 아내를 죽여 장수가 되고, 추기는 거문고를 타서 재상이 되다.
話說,吳起衛國人,少居里中,以擊劍無賴,為母所責。起自嚙其臂出血,與母誓曰:「起今辭母,遊學他方,不為卿相,擁節旄,乘高車,不入衛城,與母相見!」母泣而留之,起竟出北門不顧。往魯國,受業於孔門高弟曾參,晝研夜誦,不辭辛苦。有齊國大夫田居至魯,嘉其好學,與之談論,淵淵不竭,乃以女妻之。起在曾參之門,歲餘,參知其家中尚有老母,一日,問曰:「子遊學六載,不歸省覲,人子之心安乎?」起對曰:「起曾有誓詞在前:『不為卿相,不入衛城。』」參曰:「他人可誓,母安可誓也!」由是心惡其人。
한편,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마을에서 무뢰한을 칼로 쳤다가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오기가 스스로 팔을 물어뜯어 피를 내고는 어머니에게 맹세하기를, “오기는 지금 어머니를 떠나서 다른 지방에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경이나 재상이 되어 깃발을 앞세우고 높은 수레를 타지 못하면, 위나라에 돌아와 어머니를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오기는 끝내 북문을 나가며 돌아보지 않았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수제자인 증삼(曾參)에게 배우며 밤낮으로 노력하여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나라의 대부 전거(田居)가 노나라에 왔다가 오기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그와 담론했는데 생각이 깊고 말이 다할 줄 몰랐다. 이에 전거가 자기의 딸을 오기의 아내로 삼게 했다. 오기가 증삼의 문하에 여러 해 있었는데 증삼이 그의 고향 집에 노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증삼이 오기에게 묻기를, “너는 이곳에서 6년을 배웠는데 어머니를 뵈러 가지 않으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음이 편안하느냐?” 했다. 오기가 대답하기를, “저는 일찍이 집을 떠날 때 어머님 앞에서 맹세하기를, ‘경이나 재상이 되지 않고는 결코 위(衛)나라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했다. 증삼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과 맹세할 수야 있겠지만, 어찌 어머니 앞에서 한 말을 맹세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이때부터 증삼은 마음속으로 그 사람됨을 싫어했다.
未幾,衛國有信至,言起母已死﹔起仰天三號,旋即收淚,誦讀如故。參怒曰:「吳起不奔母喪,忘本之人!夫水無本則竭,木無本則折,人而無本,能令終乎?起非吾徒矣。」命弟子絕之,不許相見。起遂棄儒學兵法,三年學成,求仕於魯。魯相公儀休,常與論兵,知其才能,言於穆公,任為大夫。起祿入既豐,遂多買妾婢,以自娛樂。時齊相國田和謀篡其國,恐魯與齊世姻,或討其罪,乃修艾陵之怨,興師伐魯,欲以威力脅而服之。魯相國公儀休進曰:「欲卻齊兵,非吳起不可。」穆公口雖答應,終不肯用。
오래지 않아 위(衛)나라에서 편지가 와서 오기의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고 했다. 오기가 하늘을 우러러 세 번을 부르짖고, 돌아서 곧 눈물을 거두더니 여전히 글을 읽고 외웠다. 증삼이 노하여 말하기를, “오기는 모친이 돌아갔는데도 달려가 초상을 치르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의 근본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무릇 물이 근원이 없으면 마르고, 나무가 근본이 없으면 시드는데, 사람이 근본이 없다면 능히 그 일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겠는가? 오기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절교하고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기가 마침내 유학(儒學)을 버리고 병법을 배워서 3년 만에 학문을 완성하고, 노나라에서 벼슬을 구했다. 노나라의 상국 공의휴(公義休)가 오기와 함께 군사의 일을 논하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노목공(魯穆公)에게 천거하여 대부로 임명했다. 오기가 녹봉을 받아 이미 풍족하게 되자 곧 많은 첩과 시녀들을 사들여 스스로 쾌락을 즐겼다. 그때 제나라의 상국 전화(田和)는 그 나라를 찬탈하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노나라와 제나라가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혹 자기의 죄를 토벌할까 걱정되어, 이에 옛날 애릉(艾陵)에서 오나라를 도운 노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공격하고 노나라를 위협하여 복종시키려고 했다. 노나라 상국 공의휴가 나아가 아뢰기를 “제나라 군사를 물리치려면 오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니, 노목공이 입으로는 비록 응답했지만 끝내 오기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及聞齊師已拔成邑,休復請曰:「臣言吳起可用,君何不行?」穆公曰:「吾固知起有將才,然其所娶乃田宗之女,夫至愛莫如夫妻,能保無觀望之意乎?吾是以躊躇而不決也。」公儀休出朝,吳起已先在相府候見,問曰:「齊寇已深,主公已得良將否?今日不是某誇口自薦,若用某為將,必使齊兵隻輪不返。」公儀休曰:「吾言之再三,主公以子婚於田宗,以此持疑未決。」吳起曰:「欲釋主公之疑,此特易耳。」乃歸家問其妻田氏曰:「人之所貴有妻者,何也?」田氏曰:「有外有內,家道始立。所貴有妻,以成家耳。」
제나라 군사들이 이미 성읍(成邑)을 함락시켰다는 급보가 이르자, 공의휴가 다시 노목공에게 청하기를, “신이 오기를 써야 한다고 했는데,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행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노목공이 말하기를, “나도 참으로 오기에게 장군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가 장가든 부인은 제나라 전씨 종족의 딸이오. 대개 지극한 사랑은 부부만 한 게 없다고 하는데, (만일 오기가 대장이 되면 그 부인 때문에) 관망만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겠소? 나는 그래서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했다. 공의휴가 조정에서 나가니, 오기가 이미 먼저 승상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묻기를, “제나라의 침략군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주공께서는 이미 훌륭한 장수를 얻었습니까? 오늘 제가 허풍을 떨어 스스로 천거한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만약 저를 장수로 써주신다면, 반드시 제나라 군사들의 전차를 단 한 대도 돌려보내지 않겠습니다.” 했다. 공의휴가 말하기를, “내가 두 번 세 번 말했으나 주공께서는 그대가 제나라의 전씨의 딸과 혼인했다고 의심하여 결정을 못하고 있소.” 하니, 오기가 말하기를, “주공의 의심을 푸는 일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했다. 오기가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처 전씨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귀하게 되는 바는 그 처에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이오?” 하니, 전씨가 말하기를, “바깥일은 남편이 하고, 집안일은 부인이 해야 집안의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귀하게 되는 바가 처에게 있다는 것은 이렇게 가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했다.
吳起曰:「夫位為卿相,食祿萬鐘,功垂於竹帛,名留於千古,其成家也大矣,豈非婦之所望於夫者乎?」田氏曰:「然。」起曰:「吾有求於子,子當為我成之。」田氏曰:「妾婦人,安得助君成其功名?」起曰:「今齊師伐魯,魯侯欲用我為將,以我娶於田宗,疑而不用。誠得子之頭,以謁見魯侯,剛魯侯之疑釋,而吾之功名可就矣。」田氏大驚,方欲開口答話。起拔劍一揮,田氏頭已落地。史臣有詩云:「一夜夫妻百夜恩,無辜忍使作冤魂?母喪不顧人倫絕,妻子區區何足論。」
오기가 말하기를, “남편의 벼슬이 경상(卿相)에 이르고 녹봉은 만종(萬鍾)에 달하며, 공로는 역사에 기록되어 이름이 천고에 남으면 그 가정을 크게 일으키는 것이오. 어찌 그것은 부인이 남편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겠소?” 하니, 전씨가 말하기를, “그렇지요.” 했다. 오기가 말하기를, “내가 부인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부인은 마땅히 나를 위해 들어주어야 하겠소.” 하니, 전씨가 말하기를, “저는 당신의 아내인데 어찌 남편이 공명을 이루려는 것을 돕지 않겠습니까?” 했다. 오기가 말하기를, “지금 제나라 군사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노후가 나를 장수로 삼고자 하나, 내가 제나라 전씨 종족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의심하여 장수로 쓰지 않고 있소. 참으로 그대의 머리를 얻어서 노후를 알현하여 바야흐로 노후의 의심을 풀어야 되겠소. 그리하면 나의 공명이 이루어질 것이오.” 하니, 전씨가 크게 놀라서,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했다. 오기가 칼을 뽑아 한번 휘두르자 전씨의 목이 이미 땅에 떨어졌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부부란 하룻밤을 지내도 백날의 은혜가 있는데, 무고한 부인을 잔인하게 죽여 원혼을 만들었나? 모친상도 돌아보지 않아 인륜도 끊었으니, 하찮은 부인과 자식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했다.
於是以帛裹田氏頭,往見穆公,奏曰:「臣報國有志,而君以妻故見疑,臣今斬妻之頭,以明臣之為魯不為齊也。」穆公慘然不樂,曰:「將軍休矣!」少頃,公儀休入見,穆公謂曰:「吳起殺妻以求將,此殘忍之極,其心不可測也。」公儀休曰:「起不愛其妻,而愛功名,君若棄之不用,必反而為齊矣。」穆公乃從休言,即拜吳起為大將,使泄柳申詳副之,率兵二萬,以拒齊師。起受命之後,在軍中與士卒同衣食,臥不設席,行不騎乘,見士卒裹糧負重,分而荷之,有卒病疽,起親為調藥,以口吮其膿血,士卒感起之恩,如同父子,咸摩拳擦掌,願為一戰。
이에 오기가 비단 보자기로 전씨의 머리를 싸서 노목공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이 있으나 주공께서 제 처로 인하여 의심하시므로, 지금 저의 처를 참하여 신은 노나라를 위하지, 제나라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힙니다.” 했다. 노목공이 참혹하여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장군은 잠시 쉬시오.” 했다. 잠시 후에 공의휴가 들어와 뵈니 목공이 말하기를, “오기가 그의 처를 죽여서 장수가 되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잔인하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하니, 공의휴가 말하기를, “오기가 그의 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명(功名)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 만약 그를 버리고 장수로 쓰지 않으면 반드시 제나라를 위할 것입니다.” 했다. 노목공은 이에 공의휴의 말에 따라 즉시 오기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설유(泄柳)와 신상(申詳)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제나라 군사들을 막도록 했다. 오기가 대장으로 임명된 후로 군중에서 사졸들과 먹고 입는 것을 같이하며, 누워 잘 때도 자리를 깔지 않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으며, 양식을 짊어진 사졸들이 무거워하면 그 짐을 나누어서 짊어졌다. 군졸이 병이 나면 오기가 친히 약을 지어서 먹이고 그 고름과 피를 입으로 빨았다. 사졸들이 오기의 은혜에 감격하여 마치 부자와 같이 되었다. 노나라 군사들은 모두 주먹을 문지르고 손바닥을 비비며 제나라 군사와 한바탕 싸우기를 바랐다.
卻說,田和引大將田忌段朋,長驅而入,直犯南鄙,聞吳起為魯將,笑曰:「此田氏之婿,好色之徒,安知軍旅事耶?魯國合敗,故用此人也。」及兩軍對壘,不見吳起挑戰,陰使人覘其作為。見起方與軍士中之最賤者,席地而坐,分羹同食。使者還報,田和笑曰:「將尊則士畏,士畏則戰力。起舉動如此,安能用眾?吾無慮矣。」再遣愛將張丑,假稱願與講和,特至魯軍,探起戰守之意。起將精銳之士,藏於後軍,悉以老弱見客﹔謬為恭謹,延入禮待。丑曰:「軍中傳聞將軍殺妻求將,果有之乎?」
한편, 전화(田和)가 대장 전기(田忌)와 단붕(段朋)을 이끌고 거침없이 진격하여 곧바로 노나라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고, 오기가 노나라 군사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화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전씨의 사위인데 여자를 밝히는 무리라. 어찌 군사의 일을 알겠는가? 노나라가 싸워서 패배하려고 그런 자를 대장으로 임명했구나.” 했다. 제나라와 노나라 군사가 서로 대치하니, 오기가 싸움을 걸어오지 않아서, 전화는 몰래 사람을 시켜 그 하는 짓을 엿보게 했다. 오기가 바야흐로 군사 중 가장 낮은 자들과 땅바닥에 앉아서 국물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정탐꾼이 돌아와 보고하니, 전화가 웃으며 말하기를, “장군이 존엄을 갖추어야 사졸들이 두려워하고, 사졸들이 두려워해야 힘을 다해 싸우게 된다. 오기는 거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 능히 군사들을 지휘하겠는가?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했다. 전화가 다시 사랑하는 장수 장축(張丑)을 보내어 거짓으로 강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특별히 노나라 진영으로 가서 오기가 싸울 의사가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오기는 정예 군사들을 모두 후군에다 숨겨 놓고, 모두 노약한 군사들로 제나라의 사자를 맞이하고, 거짓 공손한 태도로 맞아들여 예절로 대접했다. 장축이 말하기를, “제가 군중에서 들으니 장군께서는 부인을 죽이고 노나라의 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습니까?” 했다.
起觳觫而對曰:「某雖不肖,曾受學於聖門,安敢為此不情之事?吾妻自因病亡,與軍旅之命適會其時,君之所聞,殆非其實。」丑曰:「將軍若不棄田宗之好,願與將軍結盟通和。」起曰:「某書生,豈敢與田氏戰乎?若獲結成,此乃某之至願也。」起留張丑於軍中,歡飲三日,方纔遣歸,絕不談及兵事。臨行,再三致意,求其申好。丑辭去,起即暗調兵將,分作三路,尾其後而行。田和得張丑回報,以起兵既弱,又無戰志,全不掛意。忽然轅門外鼓聲大振,魯兵突然殺至,田和大驚。馬不及甲,車不及駕,軍中大亂。
오기가 두려워하여 떨면서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불초하나 일찍이 성인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어찌 감히 그런 무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저의 처는 병이 들어 죽었는데, 제가 대장으로 임명된 것과, 마침 때가 맞아서 장군이 그런 소문을 들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했다. 장축이 말하기를, “장군이 만약 전씨 종족들의 우호를 버리지 않는다면 원컨대 장군과 결맹하여 강화를 맺고 싶습니다.” 하니, 오기가 말하기를, “저는 서생입니다. 어찌 감히 전씨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제나라와 강화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지극히 바라던 일입니다.” 했다. 오기가 장축을 군중에 머무르게 하고 사흘 동안 즐겁게 술을 마시게 하고, 이윽고 장축이 제나라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까지 군사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장축이 돌아갈 때 감사를 표하고 수호를 맺기를 청했다. 장축이 작별하고 가자, 오기는 즉시 병사들과 장수들을 몰래 조정하여 세 갈래로 나눈 후에 장축의 뒤를 미행하게 했다. 전화는 장축이 돌아와서 오기의 군사들은 노약하고 또한 싸울 뜻을 없다는 보고를 받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갑자기 진영의 문밖에서 북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노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전화가 크게 놀라, 말에 갑옷을 입히지도 못하고 전차에 말을 맬 틈도 없어 군중이 큰 혼란에 빠졌다.
田忌引步軍出迎,段朋急令軍士整頓車乘接應。不提防泄柳申詳二軍,分為左右,一齊殺入,乘亂夾攻。齊軍大敗,殺得僵屍滿野,直追過平陸方回。魯穆公大悅,進起上卿。田和責張丑誤事之罪,丑曰:「某所見如此,豈知起之詐謀哉。」田和乃嘆曰:「起之用兵,孫武穰苴之流也。若終為魯用,齊必不安。吾欲遣一人至魯,暗與通和,各無相犯,子能去否?」丑曰:「願捨命一行,將功折罪。」田和乃購求美女二人,加以黃金千鎰,令張丑詐為賈客,攜至魯,私餽吳起。起貪財好色,見即受之,謂丑曰:「致意齊相國,使齊不侵魯,魯何敢加齊哉?」張丑既出魯城,故意洩其事於行人。
전기가 보군을 이끌고 달려오고, 단붕은 급히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차를 정돈한 후에 노나라 군사들을 막게 했다. 그러나 설유와 신상이 좌우로 나누어 일제히 쳐들어와 혼란을 틈타 협공하는 것을, 제나라 군사들이 막지 못했다. 제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한데 곧바로 평륙(平陸)을 지나 제나라로 돌아갔다. 노목공이 크게 기뻐하여 오기를 상경으로 진급시켰다. 전화가 장축에게 일을 그르친 죄를 물었다. 장축이 말하기를, “제가 본 것이 그러했는데, 어찌 오기의 속임수인 줄 알았겠습니까?” 했다. 전화가 이에 탄식하기를, “오기의 용병은 손무나 사마양저가 행한 병법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만약에 오기가 끝까지 노나라에 쓰인다면 제나라는 반드시 불안해질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비밀리에 강화를 청하고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범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대가 노나라에 가서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장축이 말하기를, “원컨대 목숨을 걸고 노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죄를 씻겠습니다.” 했다. 전화가 즉시 미녀 두 사람을 사서 황금 천일과 함께 장축에게 주어, 장사꾼으로 꾸미고 노나라에 가서 은밀히 오기에게 뇌물로 바치라고 했다. 오기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밝히므로 장축이 바친 뇌물을 보고 즉시 받았다. 그리고 장축에게 말하기를, “제나라 상국에게 감사하다고 전하시오. 만약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노나라가 어찌 감히 제나라를 침범하겠습니까?” 했다. 장축이 이미 노나라 도성을 나오자, 일부러 행인에게 그 일을 누설했다.
遂沸沸揚揚,傳說吳起受賄通齊之事。穆公曰:「吾固知起心不可測也。」欲削起爵究罪。起聞而懼,棄家逃奔魏國,主於翟璜之家。適文侯與璜謀及守西河之人,璜遂薦吳起可用。文侯召起見之,謂起曰:「聞將軍為魯將有功,何以見辱敝邑?」起對曰:「魯侯聽信讒言,信任不終,故臣逃死於此。慕君侯折節下士,豪傑歸心,願執鞭馬前。倘蒙驅使,雖肝腦塗地,亦無所恨。」文侯乃拜起為西河守。起至西河,修城治池,練兵訓武,其愛恤士卒,一如為魯將之時。築城以拒秦,名曰吳城。
마침내 의론이 물 끓듯이 분분하더니 오기가 뇌물을 받고 제나라와 내통한 일이 소문으로 전해졌다. 노목공이 말하기를, “내가 원래 오기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고, 오기의 벼슬을 깎고 죄를 추궁하려고 했다. 오기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가족을 버리고 위나라로 도망쳐서 적황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때 마침 위문후와 적황이 서하를 지킬 장수를 찾던 중에, 적황이 오기를 쓰라고 문후에게 추천하였다. 위문후가 오기를 불러보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장군은 노나라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소?” 하니, 오기가 대답하기를, “노후가 참소하는 말을 듣고 끝까지 저를 믿지 않아서 신이 죽음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습니다. 군후께서 자기를 굽혀 선비에게 겸손히 대하여 호걸들이 모여드는 것을 사모하여, 말 앞에서 채찍이라도 잡기를 원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만약에 은혜를 입어 쓰인다면 비록 간과 뇌를 땅에 바르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했다. 위문후가 즉시 오기를 서하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오기가 서하에 부임하여 성을 새로 수축하고 해자를 다시 파며 군사들을 훈련하여 무예를 단련시켰다. 그가 사졸들을 사랑하기를 노나라의 장수 때와 같이했다. 서하에 성을 쌓아 진(秦)나라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이름을 오성(吳城)이라 했다.
時秦惠公薨,太子名出子嗣位。惠公乃簡公之子,簡公乃靈公之季父。方靈公之薨,其子師隰年幼,群臣乃奉簡公而立之。至是三傳,及於出子,而師隰年長,謂大臣曰:「國,吾父之國也。吾何罪而見廢?」大臣無辭以對,乃相與殺出子而立師隰,是為獻公。吳起乘秦國多事之日,興兵襲秦,取河西五城,韓趙皆來稱賀。文侯以翟璜薦賢有功,欲拜為相國,訪於李克。克曰:「不如魏成。」文侯點頭。克出朝,翟璜迎而問曰:「聞主公欲卜相,取決於子,今已定乎?何人也?」克曰:「已定魏成。」翟璜忿然曰:「君欲伐中山,吾進樂羊,君憂鄴,吾進西門豹,君憂西河,吾進吳起。吾何以不若魏成哉?」
그때 진(秦)나라 혜공(惠公)이 죽고 태자 출자(出子)가 그 뒤를 이었다. 혜공은 간공(簡公)의 아들이고 간공은 영공(靈公)의 막내 작은 아버지였다. 영공이 죽자 그 아들 사습(師隰)이 나이 어려서 여러 신하가 간공(簡公)을 받들어 세웠다, 여기에서 세 번 전하여 출자(出子)에 이르렀다. 사습의 나이가 장년이 되어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는 나의 부친의 나라인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세자의 자리에서 폐한 것이오?” 했다. 대신들은 대꾸할 말이 없자 이윽고 서로 상의하여 출자를 죽이고 사습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진헌공(秦獻公)이다. 오기(吳起)가 진(秦)나라의 군위 다툼으로 어지러울 때, 그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습격하여 하서의 다섯 성을 취했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모두 와서 축하했다. 위문후(魏文侯)가 적황이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여 공이 있다고 하여 상국으로 임명하려고 하여 이극에게 상의했다. 이극이 말하기를, “위성(魏成)이 낫습니다.” 하니, 위문후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극이 조정에서 나가니, 적황이 맞아 묻기를 “들으니 주공께서 상국을 고르려 하다가 그대에게 결정하게 했다는데, 지금 이미 정해졌습니까? 누구인가요?” 하니, 이극이 말하기를, “이미 위성으로 정했습니다.” 했다. 적황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주군이 중산을 정벌하고자 하여 내가 악양을 추천했고, 주군이 업(鄴)을 걱정하여 내가 서문표를 추천했으며, 주군이 서하를 근심하기에 내가 오기를 추천하였는데, 내가 어찌하여 위성(魏成)보다 못하다는 말이요?” 했다.
李克曰:「成所舉卜子夏、田子方、段干木,非師即友。子所進者,君皆臣之。成食祿千鍾,什九在外,以待賢士。子祿食皆以自贍。子安得比於魏成哉?」璜再拜曰:「鄙人失言,請侍門下為弟子。」自此魏國將相得人,邊鄙安集,三晉之中,惟魏最強。齊相國田和見魏之強,又文侯賢名重於天下,乃深結魏好。遂遷其君康公貸於海上,以一城給其食,餘皆自取。使人於魏文侯處,求其轉請於周,欲援三晉之例,列於諸侯。周威烈王已崩,子安王名驕立,勢愈微弱。時乃安王之十三年,遂從文侯之請,賜田和為齊侯,是為田太公。自陳公子完奔齊,事齊桓公為大夫,凡傳十世,至和而代齊有國。姜氏之祀遂絕。不在話下。
이극이 말하기를, “위성이 천거한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은 주군의 스승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그대가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주군이 신하로 삼았습니다. 위성은 녹봉이 천 종인데 열에 아홉은 밖에서 어진 선비를 대접하는 데 씁니다. 그대는 봉록을 모두 그대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대가 어찌 위성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했다. 적황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비루한 사람이 실언을 했습니다. 문하에서 모시고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했다. 이로부터 위나라에는 장수와 재상의 자리에 맞는 사람을 얻었고 변방이 안정되었다. 삼진(三晉) 중에서 오직 위(魏)나라가 가장 강성하게 되었다. 제나라의 상국 전화(田和)는 위나라가 강성하게 되고 또 위문후의 어진 이름이 천하에 떨치자 위나라와 깊은 우호를 맺었다. 마침내 그 군주인 제강공(齊康公)을 동해의 바닷가로 옮겨 살게 하고, 한 개의 성만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한 후에,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취하였다. 또 사람을 위문후에게 보내어 주왕에게 청하여 삼진의 예에 따라, 제후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부탁했다. 주위열왕(周威烈王)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주안왕(周安王) 교(驕)가 뒤를 이었는데 세력이 더욱 미약했다. 이윽고 주안왕 13년에 주안왕은 마침내 위문후의 청을 받아들여 전화를 제후(齊侯)로 봉했다. 이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진(陳)나라의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제환공을 섬겨 대부가 된 이래, 무릇 13대를 전하여 전화에 이르러 제나라를 대신하여 나라를 차지했다. 강씨의 제사가 마침내 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時三晉皆以擇相得人為尚,於是相國之權最重。趙相公仲連,韓相俠累。就中單說俠累,微時,與濮陽人嚴仲子名遂,為八拜之交。累貧而遂富,資其日用,復以千金助其遊費,俠累因此得達於韓,位至相國。俠累既執政,頗著威重,門絕私謁。嚴遂至韓,謁累冀其引進,候月餘不得見。遂自以家財賂君左右,得見烈侯,烈侯大喜,欲貴重之。俠累復於烈侯前言嚴遂之短,阻其進用。嚴遂聞之大恨,遂去韓,遍遊列國,欲求勇士刺殺俠累,以雪其恨。行至齊國,見屠牛肆中,一人舉巨斧砍牛,斧下之處,筋骨立解,而全不費力。視其斧,可重三十餘斤。
그때 삼진(三晋)은 모두 재상을 고르는 데 훌륭한 사람을 숭상했으므로 이에 상국의 권한이 가장 중했다. 조나라 상공은 공중련(公仲連)이고, 한나라 상공은 협루(俠累 ; 韓傀)였다. 그중에서 협루를 말하자면, 그가 빈한하게 살고 있을 때 복양(濮陽) 사람 엄중자(嚴仲子)가 이름이 수(遂)인데 그와 결의형제를 맺었다. 협루는 가난했고 엄수는 부유했기 때문에 엄수가 협루에게 일용품을 대주고 또 천금을 내어 다른 나라에 가서 유세할 비용을 도와주었다. 협루는 이로 인하여 한나라에 임용되어 그 지위가 상국에 이르렀다. 협루가 이미 한나라의 정사를 장악하여 자못 위엄을 부려 사사로이 만나려는 사람을 문전에서 막았다. 엄수가 한나라에 이르러 협루의 집을 찾아가 접견을 청하고 한 달을 기다렸으나 협루를 만나지 못했다. 엄수가 자기의 집안 재산을 털어 한나라 군주의 좌우에게 뇌물을 바치고 한열후(韓烈侯)를 배알했다. 한열후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높은 자리에 중용하려고 했다. 협루가 알고 뒤집어 엄수의 단점을 한열후에게 말하여 엄수가 중용되지 못하게 막았다. 엄수가 그것을 알고 큰 원한을 품고 한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용사를 구해 협루를 찔러 죽여서 그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엄수가 제나라에 이르러 푸줏간에서 한 사람이 커다란 도끼로 소를 잡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도끼로 내리친 곳에 뼈와 살이 해체되는데, 전혀 힘을 쓰지도 않았다. 그 도끼를 보니 가히 무게가 30여 근이 되어 보였다.
嚴遂異之。細看其人,身長八尺,環眼虯鬚,顴骨特聳,聲音不似齊人。遂邀與相見,問其姓名來歷。答曰:「某姓聶名政,魏人也,家在軹之深井里。因賤性粗直,得罪鄉里,移老母及姊,避居此地,屠牛以供朝夕。」亦詢嚴遂姓字。遂告之,匆匆別去。次早,嚴遂具衣冠往拜,邀至酒肆,具賓主之禮。酒至三酌,遂出黃金百鎰為贈。政怪其厚。遂曰:「聞子有老母在堂,故私進不腆,代吾子為一日之養耳。」聶政曰:「仲子為老母謀養,必有用政之處,若不明言,決不敢受!」嚴遂將俠累負恩之事,備細說知,今欲如此凭般。
엄수가 그를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키가 팔 척이고 고리눈에 곱슬 수염인데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오고 말투가 제나라 사람과 같지 않았다. 엄수가 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만나서 그 사람의 성명과 내력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 성은 섭(聶)이고 이름은 정(政)이며, 위(魏)나라 사람입니다. 집은 지읍(軹邑)의 심정리(深井里)에 있는데, 태생이 천하고 성격이 거칠고 강직해서 고향에서 죄를 얻어 노모와 누나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해와서 소를 잡아 조석 끼니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했다. 섭정이 또한 엄수의 성명을 물으니, 엄수가 자기의 성과 이름을 말해주고 갑자기 이별하고 갔다. 다음 날 아침에, 엄수가 의관을 갖추고 섭정을 찾아가 절하고 주막집으로 그를 초대하여 주인과 손님의 예를 행했다. 술잔이 세 번에 이르자 엄수가 황금 백일을 꺼내어 섭정에게 주었다. 섭정이 많은 황금을 주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엄수가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변변치 않은 것을 사사롭게 드리니 그대의 하루 봉양 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니, 섭정이 말하기를, “형이 나의 노모를 위해 봉양을 꾀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쓸 곳이 있는 것이니, 만약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했다. 엄수는 협루가 은혜를 배신한 일을 자세하게 말하고 지금 이러저러하게 하려는 것을 알려주었다.
聶政曰:「昔專諸有言:『老母在,此身未敢許人。』仲子別求勇士,某不敢虛尊賜。」遂曰:「某慕君之高義,願結兄弟之好,豈敢奪若養母之孝,而求遂其私哉?」聶政被強不過,只得受之。以其半嫁其姊罃,餘金日具肥甘奉母。歲餘,老母病卒,嚴遂復往哭弔,代為治喪。喪葬既畢,聶政曰:「今日之身,乃足下之身也。惟所用之,不復自惜!」仲子乃問報仇之策,欲為具車騎壯士。政曰:「相國至貴,出入兵衛,眾盛無比,當以奇取,不可以力勝也。願得利匕首懷之,伺隙圖事。今日別仲子前行,更不相見,仲子亦勿問吾事。」
섭정이 말하기를, “옛날 전제가 말하기를, ‘노모가 계시니 이 몸을 감히 남에게 허락할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 형께서는 따로 용사를 구하시고, 저는 감히 헛되이 귀한 황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했다. 엄수가 말하기를, “제가 그대의 높은 의리를 사모하여 원컨대 결의형제를 맺으려고 하는데, 어찌 감히 그대가 노모를 봉양하는 효도를 뺐고 나의 사사로운 사정만 봐달라고 요구하겠소?” 했다. 섭정은 어쩔 수 없이 황금을 받아 그 반은 누나인 섭앵(聶罃)이 시집가는 데 쓰고, 남은 황금은 매일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노모를 봉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섭정의 노모는 병이 들어 죽었다. 엄수가 다시 가서 조문하고 통곡하면서 대신하여 상을 치렀다. 장례가 끝나자 섭정이 말하기를, “오늘부터 나의 몸은 형의 것입니다. 오로지 소용되는 곳에 쓰면, 다시 스스로 애석해하지 않겠습니다.” 했다. 엄중자(엄수)가 섭정에게 원수를 갚을 계책을 묻고 수레와 장사들을 갖추어 주겠다고 했다. 섭정이 말하기를, “상국은 지극히 귀한 사람이라 출입에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무리가 비할 수 없이 많습니다. 마땅히 기습해야지,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원컨대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다가 틈을 엿보다가 일을 도모할까 합니다. 오늘 제가 엄중자와 이별하여 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니 엄중자 역시 나의 일을 묻지 마십시오.” 했다.
政至韓,宿於郊外,靜息三日。早起入城,值俠累自朝中出,高車駟馬,甲士執戈,前後擁衛,其行如飛。政尾至相府,累下車,復坐府決事。自大門至於堂階,皆有兵仗。政遙望堂上,累重席憑案而坐,左右持牒稟決者甚眾。俄頃,事畢將退,政乘其懈,口稱:「有急事告相國。」從門外攘臂直趨,甲士擋之者,皆縱橫顛躓。政搶至公座,抽匕首以刺俠累。累驚起,未及離席,中心而死。堂上大亂,共呼「有賊!」閉門來擒聶政。政擊殺數人,度不能自脫,恐人識之,急以匕首自削其面,抉出雙眼,還自刺其喉而死。
섭정이 한나라에 이르러 교외에서 자고 사흘 동안 휴식을 취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도성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 마침 협루가 조당에서 물러 나와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수레를 타고 앞뒤에서 과를 든 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는 듯이 달려갔다. 섭정이 협루의 행차를 미행하여 상국부에 이르렀고, 협루가 수레에서 내려 상국부에 들어가 일을 처결했다. 한참 지나서 일이 끝나 장차 물러 나오려는데, 섭정이 그 느슨해진 틈을 타서 입으로 일컫기를, “급한 일이 있어 상국에게 고하려 한다.” 하고, 문밖으로부터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로 뛰어드니, 그를 막는 무장병들이 모두 이리저리 넘어졌다. 섭정이 상국의 자리로 뛰어올라 비수를 꺼내어 협루를 찔렀다. 협루가 놀라 일어났으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슴에 칼을 맞고 죽었다. 상국부 중에 큰 혼란이 일어나 모두 외치기를, “도적이 나타났다.” 하고, 대문을 닫고 섭정을 잡으려고 달려왔다. 섭정이 몇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으나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까 걱정하여 급히 비수로 자기의 얼굴을 깎고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다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早有人報知韓烈侯。烈侯問:「賊何人?」眾莫能識。乃暴其屍於市中,懸千金之賞,購人告首,欲得賊人姓名來歷,為相國報仇。如此七日,行人往來如蟻,絕無識者。此事直傳至魏國軹邑,聶姊罃聞之,即痛哭曰:「必吾弟也!」便以素帛裹頭,竟至韓國,見政橫屍市上,撫而哭之,甚哀。市吏拘而問曰:「汝於死者何人也?」婦人曰:「死者為吾弟聶政,妾乃其姊罃也。聶政居軹之深井里,以勇聞。彼知刺相國罪重,恐累及賤妾,故抉目破面以自晦其名。妾奈何恤一身之死,忍使吾弟終泯沒於人世乎?」
어느새 어떤 사람이 한열후에게 알렸다. 한열후가 묻기를, “도적은 누구인가?” 하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섭정의 시체를 저잣거리에 내어놓고 천금의 상금을 걸어 고하는 자를 찾아 그 도적의 이름과 내력을 알아내어 상국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이렇게 칠 일이 되도록 성안에 왕래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이 곧바로 위나라의 지읍에 전해졌다. 섭정의 누나 섭앵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틀림없이 내 동생이다.” 하고, 즉시 하얀 비단 천으로 머리를 싸매고 마침내 한나라에 이르러 저잣거리에 버려진 섭정의 시신을 보자 어루만지며 매우 애통하게 울었다. 시정의 관리들이 섭앵을 붙잡아 묻기를, “너는 죽은 사람과 어떤 관계인가?”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죽은 사람은 바로 내 아우 섭정입니다. 나는 곧 그의 누나 섭앵입니다. 섭정은 지읍 심정리의 소문난 용사였습니다. 그가 상국을 죽인 죄가 커서 그 피해가 나에게 미칠 것을 걱정하여, 자기의 눈을 도려내고 얼굴을 헐어서 자기의 이름을 숨겼습니다. 내가 어찌 일신의 죽음에 연연하여 차마 내 동생의 이름이 끝내 세상에서 없어지게 하겠습니까?” 했다.
市吏曰:「死者既是汝弟,必知作賊之故。何人主使?汝若明言,吾請於主上,貸汝一死。」罃曰:「妾如愛死,不至此矣。吾弟不惜身軀,誅千乘之國相,代人報仇,妾不言其名,是沒吾弟之名也﹔妾復洩其故,是又沒吾弟之義也。」遂觸市中井亭石柱而死。市吏報知韓烈侯,烈侯嘆息,令收葬之。以韓山堅為相國,代俠累之任。烈侯傳子文侯,文侯傳哀侯。韓山堅素與哀侯不睦,乘間弒哀侯。諸大臣共誅殺山堅,而立哀侯子若山,是為懿侯。懿侯子昭侯,用申不害為相。不害精於刑名之學,國以大治。此是後話。
시정의 관리가 말하기를, “죽은 자가 네 동생이라면 반드시 자객이 된 까닭을 알 터인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일을 시켰는가? 네가 만약 밝게 말한다면 내가 주상에게 청하여 너의 죽음을 면해 주겠다.” 하니, 섭앵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죽음을 아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 동생이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천승지국의 재상을 죽여 다른 사람의 원수를 갚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내 동생의 이름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까닭을 누설하는 것은 제 동생의 의로운 일을 없애는 것입니다.” 했다. 마침내 섭앵이 말을 마치자 시중의 우물가 정자의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시정의 관리가 한열후에게 보고하니, 한열후가 탄식하며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도록 했다. 그리고 한산견(韓山堅)을 상국으로 삼아 협루의 직임을 대신하게 했다. 한열후가 왕위를 한문후(韓文侯)에게 전하고, 한문후가 왕위를 아들 한애후(韓哀侯)에게 전했다. 한산견이 평소에 한애후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한산견이 기회를 노리다가 한애후를 시해했다. 여러 대신이 함께 한산견을 죽이고 애후의 아들 약산(若山)을 세웠다. 이가 한의후(韓懿侯)이다. 한의후의 아들 한소후(韓昭侯)가 신불해(申不害)를 상국으로 삼으니, 신불해가 형명학(形名學 ; 법률과 형벌에 관한 학문)에 정통하여 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다.
再說,周安王十五年,魏文侯斯病篤,召太子擊於中山。趙聞魏太子離了中山,乃引兵襲而取之。自此魏與趙有隙。太子擊歸,魏文侯已薨,乃主喪嗣位,是為武侯。拜田文為相國。吳起自西河入朝,自以功大,滿望拜相,及聞已相田文,忿然不悅。朝退,遇田文於門,迎而謂曰:「子知起之功乎?今日請與子論之。」田文拱手曰:「願聞。」起曰:「將三軍之眾,使士卒聞鼓而忘死,為國立功,子孰與起?」文曰:「不如。」起曰:「治百官,親萬民,使府庫充實,子孰與起?」文曰:「不如。」
한편, 주안왕 15년에 위문후 사(斯)의 병이 위독하자, 중산에 가 있던 태자 격을 불렀다. 조나라는 위나라의 태자가 중산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기습하여 중산을 빼앗았다. 이 일로 해서 위나라와 조나라는 틈이 벌어졌다. 태자 격이 돌아오니 위문후는 이미 죽었다. 이에 장례를 주관하고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위무후(魏武侯)다. 위무후는 전문(田文)을 상국으로 삼았다. 오기가 서하의 태수로 입조한 뒤로부터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상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이미 전문이 제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내어 기뻐하지 않았다. 오기가 조정에서 물러 나오다가 조당 문에서 전문을 만나 말하기를, “그대는 저 오기의 공을 아십니까? 오늘 그대와 그것을 논해 보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문이 손을 모으며 말하기를, “좋습니다.” 했다. 오기가 말하기를, “삼군을 거느리고 그 사졸로 하여금 북소리를 듣고 죽음을 생각지 않고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은 그대와 저 중에 누가 낫습니까?” 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제가 그대보다 못하지요,” 했다. 오기가 말하기를,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과 친근하게 지내며, 나라의 부고를 가득 채우는 일은 그대와 저 중에 누가 낫습니까?” 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제가 그대보다 못하지요.” 했다.
起又曰:「守西河而秦兵不敢東犯,韓趙賓服,子孰與起?」文又曰:「不如。」起曰:「此三者,子皆出我之下,而位加吾上,何也?」文曰:「某叨竊上位,誠然可愧。然今日新君嗣統,主少國疑,百姓不親,大臣未附,某特以先世勳舊,承乏肺腑,或者非論功之日也。」吳起俯首沉思,良久曰:「子言亦是。然此位終當屬我。」有內侍聞二人論功之語,傳報武侯。武侯疑吳起有怨望之心,遂留起不遣,欲另擇人為西河守。吳起懼見誅於武侯,出奔楚國。
오기가 다시 말하기를, “서하의 땅을 지켜 진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가 사신을 우리나라에 보내 복종을 하게 하는 일은 그대와 나 둘 중에서 누가 낫겠소?” 하니, 전문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그대보다 못하오.” 했다. 오기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중에서 그대는 모두 나보다 못하면서 지위는 나보다 윗자리에 있으니 어찌 된 것이오?” 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제가 분에 넘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오. 그러나 지금 새 주군은 자리를 이어 주공은 나이가 어리고 나라 사람들은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백성은 친하지 않고 대신도 잘 따르지 않고 있소. 제가 특별히 선대의 훈구세력으로서 모자라지만 요긴한 자리를 맡게 하였소, 어떤 이가 지금은 논공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했다. 오기가 머리를 숙여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후에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나 이 자리는 마침내 내 것이 될 것이오.” 했다. 어떤 내시가 두 사람이 공을 따지는 것을 듣고 위무후에게 보고했다. 위무후는 오기가 원망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마침내 오기를 위나라 도읍인 안읍에 머물러 두고 서하로 보내지 않았다. 따로 사람을 골라 서하 태수를 삼으려고 했다. 오기가 위무후에게 주살될까 두려워서 초나라로 달아났다.
楚悼王熊疑,素聞吳起之才,一見即以相印授之。起感恩無已,慨然以富國強兵自任。乃請於悼王曰:「楚國地方數千里,帶甲百餘萬,固宜雄壓諸侯,世為盟主﹔所以不能加於列國者,養兵之道失也。夫養兵之道,先阜其財,後用其力。今不急之官,布滿朝署,疏遠之族,糜費公廩﹔而戰士僅食升斗之餘,欲使捐軀殉國,不亦難乎?大王誠聽臣計,汰冗官,斥疏族,盡儲廩祿,以待敢戰之士,如是而國威不振,則臣請伏妄言之誅!」悼王從其計。群臣多謂起言不可用,悼王不聽。於是使吳起詳定官制,凡削去冗官數百員,大臣子弟,不得夤緣竅祿。
초나라 도왕(悼王) 웅의(熊疑)는 평소에 오기의 재주를 알았으므로 오기를 한번 보자 즉시 초나라의 재상의 인장을 주었다. 오기는 그 은혜에 더없이 감격하여 결연하게 부국강병을 자임했다. 이에 초도왕에게 청하기를, “초나라의 영토는 수천 리가 되며 그 군사들은 백여 만입니다. 이만하면 진실로 제후들을 내리눌러 대대로 맹주가 될 수 있지만, 열국을 군사로 침범할 수 없기 때문에 군사를 양성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군사를 양성하는 방법은 먼저 재정을 튼튼히 만든 후에 그 힘을 쓰는 것입니다. 지금 긴급하지 않은 벼슬이 조정에 가득하고 먼 공족들이 공실 창고의 곡식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전사들은 되나 말의 곡식을 겨우 먹고 삽니다. 그러니 몸을 던져 순국하고 싶어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진실로 신의 계책을 들으신다면 우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먼 공족의 봉록을 몰수하여 그 재물들을 저축하여 용감한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나라의 위엄이 떨치지 않는다면 신은 망언의 죄를 받겠습니다.” 했다. 초도왕이 그 계책을 따랐다. 여러 신하가 오기의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초도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오기를 시켜 관제를 자세히 정하여 불필요한 관직 수백 명을 없애고 대신의 자제도 연줄이나 뇌물을 써서 관직을 얻지 못하게 했다.
又公族五世以上者,令自食其力,比於編氓,五世以下,酌其遠近,以次裁之,所省國賦數萬。選國中精銳之士,朝夕訓練,閱其材器,以上下其廩食,有加厚至數倍者,士卒莫不競勸,楚遂以兵強,雄視天下。三晉、齊、秦咸畏之,終悼王之世,不敢加兵。及悼王薨,未及殯歛,楚貴戚大臣子弟失祿者,乘喪作亂,欲殺吳起。起奔入宮寢,眾持弓矢追之。起知力不能敵,抱王屍而伏。眾攢箭射起,連王屍也中了數箭。起大叫曰:「某死不足惜,諸臣銜恨於王,僇及其屍,大逆不道,豈能逃楚國之法哉!」言畢而絕。眾聞吳起之言,懼而散走。太子熊臧嗣位,是為肅王。
또 공족 중에 5대 이상의 먼 친척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게 하고 평민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5대 이내의 공족들은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순서를 정해 식록을 주었다. 그 결과 절약한 수만 종(種)의 양식으로 나라 안에서 정예의 군사들을 아침저녁으로 훈련하여 그 재주와 기량을 사열했다. 장수와 사병의 봉급이 몇 배나 후해졌기 때문에 사졸들은 모두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훈련에 열중했다. 초나라는 마침내 강한 군사를 갖게 되어 천하에 위세를 보였다. 삼진(三晉 ; 趙魏韓)과 제(齊)나라, 진(秦)나라 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결국 초도왕의 치세에서는 감히 군사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초도왕이 죽게 되자, 도왕의 시신을 관에 안치하기도 전에, 초나라의 귀척 대신들과 자제로 녹봉을 잃은 자들이 도왕이 죽은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켜 오기를 죽이려고 하였다. 오기가 궁궐 안 왕의 침실로 달아났으나 군중들이 활과 화살을 들고 추격했다. 오기가 힘으로는 그들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초도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엎드렸다. 군중이 모여서 화살을 쏘니 왕의 시체에도 몇 발의 화살이 맞았다. 오기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저의 죽음은 아깝지 않지만 여러 신하가 선왕에게 원한을 품어 왕의 시신을 욕보이니 이것은 대역부도입니다. 어찌 초나라의 국법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이 끝나자 오기는 절명했다. 여러 사람이 오기가 한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태자 웅장(熊臧)이 뒤를 이으니, 이가 초숙왕(楚肅王)이다.
月餘,追理射屍之罪,使其弟熊良夫率兵,收為亂者,次第誅之,凡滅七十餘家。髯翁有詩嘆云:「滿望終身作大臣,殺妻叛母絕人倫﹔誰知魯魏成流水,到底身軀喪楚人。」又有一詩,說吳起伏王屍以求報其仇,死尚有餘智也。詩云:「為國忘身死不辭,巧將賊矢集王屍﹔雖然王法應誅滅,不報公仇卻報私。」話分兩頭。卻說,田和自為齊侯,凡二年而薨。和傳子午,午傳子因齊。當因齊之立,乃周安王之二十三年也。因齊自恃國富兵強,見吳越俱稱王,使命往來,俱用王號,不甘為下,僭稱齊王,是為齊威王。魏侯罃聞齊稱王,曰:「魏何以不如齊?」於是亦稱魏王,即孟子所見梁惠王也。
(초도왕의 장례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자 초숙왕은 도왕의 시신에 활을 쏜 죄를 다스리려고 그의 동생 웅량부(熊良夫)를 시켜 군사를 끌고 가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잡아들여 차례로 죽이니 무릇 70여 집안을 멸족시켰다. 염옹이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평생의 소원이던 대신이 되었으나, 처를 죽이고 모친을 버려 인륜을 끊었구나.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이룬 공은 모두 흘러가 버렸지만, 마침내 초나라 사람에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했다. 또 다른 시가 있는데, 오기가 왕의 시신을 안고 죽어 그 원수를 갚은 일은 죽으면서도 오히려 지혜가 있었다고 했다. 시에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몸을 버려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교묘하게 적도들의 화살을 왕의 시신으로 모이게 하여, 비록 왕법으로 적도들을 멸족시켰지만, 왕의 원수가 아니라 자기의 원수를 갚았도다!” 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전화(田和)가 제나라 군주가 된 지 2년 후에 죽었다. 전화는 그 아들 전오(田午)에게 자리를 전했고 전오가 아들 인제(因齊)에게 자리를 전했다. 인제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해는 주안왕(周安王) 23년(기원전 379년)이다. 인제(因齊)는 제나라의 국력과 군사력이 강성함을 믿고, 오나라와 월나라가 모두 왕이라고 칭하며 사신이 왕래할 때 모두 왕호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굳이 그들의 아래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왕(齊王)이라고 참칭하니, 이가 제위왕(齊威王)이다. 위나라 군주 앵(罃)이 제나라가 왕호를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위나라가 어찌하여 제나라보다 못하단 말인가? ” 하고, 이에 역시 위왕이라고 칭했다. 이가 곧 맹자가 만났던 양혜왕(梁惠王)이다.
再說,齊威王既立,日事酒色,聽音樂,不修國政。九年之間,韓、魏、魯、趙悉起兵來伐,邊將屢敗。忽一日,有一士人,叩閽求見,自稱「姓騶名忌,本國人,知琴。聞王好音,特來求見。」威王召而見之,賜之坐,使左右置几,進琴於前。忌撫弦而不彈。威王問曰:「聞先生善琴,寡人願聞至音。今撫弦而不彈,豈琴不佳乎?抑有不足於寡人耶?」騶忌舍琴,正容而對曰:「臣所知者,琴理也。若夫絲桐之聲,樂工之事,臣雖知之,不足以辱王之聽也。」威王曰:「琴理如何,可得聞乎?」
한편, 제위왕이 이미 왕위에 올라 매일 주색과 풍악을 일삼고 국정은 돌보지 않았다. 제위왕이 재위한 9년 동안에 한(韓)나라, 위(魏)나라, 노(魯)나라, 조(趙)나라가 모두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와서 제나라의 변경 장수가 여러 번 패했다. 갑자기 어느 날 어떤 선비 한 사람이 대궐 문을 두드리며 뵙기를 청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성은 추(騶)이고 이름은 기(忌)라 하며, 본국 사람으로 거문고를 탈 줄 압니다. 제가 들으니 대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하여, 특별히 찾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했다. 위왕이 불러서 보고 자리를 주어, 좌우에게 궤를 놓게 하여 그 앞에 거문고를 들이게 했다. 추기가 거문고의 줄을 어루만질 뿐 타지 않았다. 위왕이 묻기를, “선생이 거문고를 잘 탄다고 해서 과인이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보기를 원하오. 지금 거문고 줄만 어루만지고 타지 않으니, 거문고가 좋지 않습니까? 아니면 과인에게서 잘못이 있어서입니까?” 하니, 추기가 이윽고 거문고를 내려놓더니, 얼굴을 가다듬고 대답하기를, “신이 아는 것은 거문고의 이치입니다. 만약 오동나무와 실이 내는 소리에 관해서라면 악공의 일입니다. 신이 비록 거문고를 탈 줄 알지만, 대왕께 들려드리기엔 부족합니다.” 하니, 제위왕이 말하기를, “거문고의 이치가 어떠한지, 나에게 들려줄 수 있겠소?” 했다.
騶忌對曰:「琴者,禁也。所以禁止淫邪,使歸於正。昔伏羲作琴,長三尺六寸六分,象三百六十六日也﹔廣六寸,象六合也﹔前廣後狹,象尊卑也﹔上圓下方,法天地也﹔五弦,象五行也。大弦為君,小弦為臣。其音以緩急為清濁,濁者寬而不弛,君道也﹔清者廉而不亂,臣道也。一弦為宮,次弦為商,次為角,次為徵,次為羽。文王武王各加一弦,文弦為少宮,武弦為少商,以合君臣之恩也。君臣相得,政令和諧,治國之道,不過如此。」威王曰:「善哉。先生既知琴理,必審琴音,願先生試一彈之!」
추기가 대답하기를, “거문고의 금(琴)이라는 글자는 금(禁) 자와 통합니다. 그래서 음탕하고 사악한 행위를 금지하여 올바르게 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옛날 복희씨(伏羲氏)가 거문고를 만들 때 길이가 세 자 여섯 치 여섯 푼으로 하여 일 년 366일을 본땄으며, 그 넓이는 여섯 치로 하여 육합(六合 ; 동서남북과 상하)을 상징했습니다. 앞은 넓고 뒤는 좁은 것은 존귀하고 비천함을 상징한 것이며, 위는 둥글고 밑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섯 줄은 오행(五行 ; 金木水火土)을 상징하는데, 큰 줄은 군주이고 작은 줄은 신하를 말합니다. 소리에 완급이 있음은 청탁을 표현하고자 함이니, 탁한 소리는 너그럽지만 이완되지 않아서 임금의 도를 말하고, 맑은 소리는 깨끗하나 어지럽지 않으니 이것은 신하의 도리를 뜻합니다. 첫 번째 줄은 궁(宮)이고, 두 번째 줄은 상(商), 세 번째 줄은 각(角), 네 번째 줄은 치(徵), 그리고 다섯 번째 줄은 우(羽)라 합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께서 각기 한 줄씩을 더했으니, 문왕께서 더한 줄은 소궁(小宮)이고, 무왕께서 더한 줄은 소상(小商)이라 하여 이로써 군주와 신하의 은혜를 서로 합쳤음을 의미합니다. 군신 간에 서로 믿게 되면 정령이 화합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했다. 제위왕이 말하기를, “훌륭하오. 선생께서 이미 거문고의 이치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거문고 소리도 잘 알 것이오. 원컨대 선생이 시험 삼아 한번 타보시오,” 했다.
騶忌對曰:「臣以琴為事,則審於為琴﹔大王以國為事,豈不審於為國哉?今大王撫國而不治,何異臣之撫琴而不彈乎?臣撫琴而不彈,無以暢大王之意﹔大王撫國而不治,恐無以暢萬民之意也。」威王愕然曰:「先生以琴諫寡人,寡人聞命矣!」遂留之右室。明日,沐浴而召之,與之談論國事。騶忌勸威王節飲遠色,核名實,別忠佞,息民教戰,經營霸王之業。威王大悅,即拜騶忌為相國。時有辯士淳于髡,見騶忌唾手取相印,心中不服,率其徒往見騶忌。忌接之甚恭。髡有傲色,直入踞上坐,謂忌曰:「髡有愚志,願陳於相國之前,不識可否?」
추기가 대답하기를, “신은 거문고를 일삼았으니, 거문고를 잘 살폈습니다. 대왕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일인데, 어찌하여 나라를 잘 살피지 않으십니까?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어루만지기만 할 뿐 다스리지 않으니, 어찌 신의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타지 않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신이 거문고를 어루만지기만 하고 타지 않으면 대왕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도 나라를 어루만지기만 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했다. 위왕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선생이 거문고로 과인에게 간하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하고, 마침내 추기를 오른쪽 방에 머물도록 했다. 다음날, 제위왕이 목욕을 하고, 추기를 불러 그와 함께 나라의 일을 담론했다. 추기가 위왕에게 권하여, 술을 절제하고 여인을 멀리할 것, 나라의 일은 실리와 명분을 위주로 운영할 것, 신하들은 충신과 아첨꾼을 구분할 것,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서 싸우는 기술을 가르칠 것, 패왕이 되고자 도모할 것을 말했다. 위왕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추기를 제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그때 말 잘하는 순우곤(淳于髡)이 있었는데 추기가 손에 침을 뱉듯이 거문고로 재상의 인을 얻은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복하여 그의 제자들을 이끌고 추기를 찾아가 만났다. 추기가 순우곤을 매우 공손하게 대접하니, 순우곤이 오만한 기색이 있었다. 순우곤이 곧바로 들어가 윗자리에 걸터앉아 추기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어리석은 생각이 있는데, 원컨대 상국 앞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忌曰:「願聞。」淳于髡曰:「子不離母,婦不離夫。」忌曰:「謹受教,不敢遠於君側。」髡又曰:「棘木為輪,塗以豬脂,至滑也,投於方孔則不能運轉。」忌曰:「謹受教,不敢不順人情。」髡又曰:「弓幹雖膠,有時而解﹔眾流赴海,自然而合。」忌曰:「謹受教,不敢不親附於萬民。」髡又曰:「狐裘雖敝,不可補以黃狗之皮。」忌曰:「謹受教,請選擇賢者,毋雜不肖於其間。」髡又曰:「輻轂不較分寸,不能成車﹔琴瑟不較緩急,不能成律。」忌曰:「謹受教,請修法令而督奸吏。」淳于髡默然,再拜而退。
추기가 말하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니, 순우곤이 말하기를, “아들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오.” 했다. 추기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감히 군주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대추나무로 수레바퀴를 만들어 돼지기름을 바르는 것은 수레가 잘 구르도록 하기 위함인데, 네모난 구멍에 굴대를 넣으면 수레가 굴러갈 수 없소.” 하니, 추기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감히 인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했다. 순우곤이 또 말하기를, “활에 비록 아교를 칠해도 때로는 해체되기도 하지만, 수많은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 자연히 합쳐지오.” 하니, 추기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만백성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이 비록 해졌다고 해서 개가죽을 대서 기울 수는 없소.” 하니, 추기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현인들을 골라서 쓰고, 그 사이에 못난 사람이 섞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수레바퀴와 바퀴살이 한 치라도 차이가 나면 수레를 만들 수 없고, 금슬(琴瑟)이 서로 완급을 맞추지 못한다면 음률을 이룰 수 없소.” 하니, 추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법령을 정비하고 간사한 관리들을 감독하겠습니다.” 했다. 순우곤이 말없이 있다가 추기에게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既出門,其徒曰:「夫子始見相國,何其倨,今再拜而退,又何屈也?」淳于髡曰:「吾示以微言凡五,相國隨口而應,悉解吾意。此誠大才,吾所不及!」於是遊說之士,聞騶忌之名,無敢入齊者。騶忌亦用淳于髡之言,盡心圖治。常訪問:「邑守中誰賢誰不肖?」同朝之人,無不極口稱阿大夫之賢,而貶即墨大夫者。忌述於威王。威王於不意中,時時問及左右,所對大略相同。乃陰使人往察二邑治狀,從實回報,因降旨召阿即墨二守入朝。即墨大夫先到,見朝威王,並無一言發放。左右皆驚訝,不解其故。
순우곤 일행이 이미 문을 나서자 그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처음 상국을 만날 때는 매우 오만하시더니, 지금 두 번 절하고 나오시니 또 어찌 비굴해지셨습니까?” 하니, 순우곤이 말하기를, “내가 비유하는 말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으나, 상국은 내가 묻는 말에 각기 적절하게 대응하여 나의 뜻하는 바를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인물이라! 내가 따를 수 없었다!” 했다. 이에 유세하는 선비가 추기의 이름을 듣고 감히 제나라로 들어가는 자가 없었다. 추기도 또한 순우곤의 말을 써서 진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항상 묻기를, “고을 태수 중에서 누가 어질고 누가 불초한가?” 하니, 조정의 사람들이 아읍(阿邑)대부가 어질다고 극구 칭찬하고, 즉묵(卽墨)대부를 폄하했다. 추기가 제위왕에게 전하니, 제위왕이 미심쩍어하면서 시간이 있는 대로 좌우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좌우의 대답도 추기가 하는 말과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몰래 사람을 보내 두 고을의 다스려지는 상태를 살펴보게 했다. 사실대로 회보하니 제위왕이 교지를 내려 아읍과 즉묵의 두 태수를 소환했다. 즉묵대부가 먼저 도착하여 제위왕을 뵙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했으나 그 까닭을 몰랐다.
未幾,阿邑大夫亦到。威王大集群臣,欲行賞罰。左右私心揣度,都道:「阿大夫今番必有重賞,即墨大夫禍事到矣。」眾文武朝見事畢,威王召即墨大夫至前,謂曰:「自子之官即墨也,毀言日至,吾使人視即墨,田野開闢,人民富饒,官無留事,東方以寧,繇子專意治邑,不肯媚吾左右,故蒙毀耳。子誠賢令!」乃加封萬家之邑。又召阿大夫謂曰:「自子守阿,譽言日至,吾使人視阿,田野荒蕪,人民凍餒。昔日趙兵近境,子不往救,但以厚幣精金,賄吾左右,以求美譽。守之不肖,無過於汝!」
오래지 않아 아읍대부가 도착했다. 제위왕이 여러 신하를 모두 모이게 하고 상벌을 내리려고 했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마음속으로 짐작하여, ‘아읍대부는 이번에 큰 상을 받고, 즉묵대부는 큰 화를 당하겠구나!’ 했다. 여러 문무 대신의 조회를 마치자 제위왕은 즉묵대부를 앞으로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즉묵의 수령이 된 이래 그대를 비난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살펴보니 황무지를 개발하여 전답으로 바꾸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로웠으며 관아에는 송사가 없이 잘 다스려 동쪽의 변경지방을 평안하게 하였다. 그대는 즉묵을 다스리는 데 전념하고, 나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비방을 받게 되었다. 그대야말로 진실로 어진 관리다.” 하고, 즉시 만 호의 읍을 더해 주었다. 이어서 아읍대부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아읍대부가 된 이래 그대를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다. 내가 사람을 보내 아읍을 살펴보니, 논과 밭은 황무지가 되고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고 했다. 옛날 조나라 군사들이 변경에 가까이 쳐들어왔지만, 그대는 달려가 구하지도 않았다. 그대는 단지 많은 폐백과 황금으로 나의 좌우에 뇌물을 주어 환심을 사서 그대를 칭송하게 만들었다. 태수의 불초함이 너보다 지나친 자가 있겠는가?” 했다.
阿大夫頓首謝罪,願改過。威王不聽,呼力士使具鼎鑊。須臾,火猛湯沸,縛阿大夫投鼎中。復召左右平昔常譽阿大夫毀即墨者,凡數十人,責之曰:「汝在寡人左右,寡人以耳目寄汝,乃私受賄路,顛倒是非,以欺寡人。有臣如此,要他何用?可俱就烹!」眾皆泣拜哀求。威王怒猶未息,擇其平日尤所親信者十餘人,次第烹之。眾皆股慄。有詩為證:「權歸左右主人依,毀譽繇來倒是非﹔誰似烹阿封即墨,竟將公道頌齊威。」於是選賢才改易郡守,使檀子守南城以拒楚,田肹守高唐以拒趙,黔夫守徐州以拒燕,種首為司寇,田忌為司馬,國內大治,諸侯畏服。
아읍대부가 머리를 숙이고 죄를 용서하여 주면 잘못을 고치겠다고 했다. 제위왕은 듣지 않고 장사를 불러 솥을 준비하라고 했다. 잠시 후 맹렬한 불에 솥 안의 물이 펄펄 끓자 아읍대부를 묶어 솥 안에 던졌다. 다시 평소에 좌우에서 아읍대부를 칭찬하고 즉묵대부를 폄훼했던 수십 명을 불러내어 꾸짖기를, “너희들은 나의 좌우에서 과인의 입과 귀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옳고 그름을 뒤집어서 과인을 속였다. 신하가 이 같으면 어디에 쓰겠느냐? 모두 삶아서 죽여라.” 했다. 무리가 모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위왕은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다른 날을 택하여 특히 아읍대부와 친했던 십여 인을 가려내어 차례로 가마솥에 삶아 죽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다리를 떨었다. 시가 있어 증험하기를, “권력이란 군주의 측근에게서 나오는 법이라. 시비가 전도되어 폄하와 칭송이 뒤바뀌게 된다. 아읍대부를 삶아 죽이고 즉묵대부를 포상한 자가 누구인가?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제위왕의 공명한 도를 칭송했다.” 라고 했다. 이에 어진 인재를 골라 각 고을의 태수를 바꾸었다. 단자(檀子)를 시켜 남성(南城)을 지켜서 초나라를 막게 했으며, 전힐(田肹)을 시켜 고당(高唐)을 지켜 조나라를 막게 했다. 검부(黔夫)를 시켜 서주(徐州)를 지켜 연나라를 막게 하였고, 종수(種首)를 사구(司寇)로 삼았으며, 전기(田忌)를 사마로 삼아 제나라는 크게 다스려져서 제후들이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복종했다.
威王以下邳封騶忌,曰:「成寡人之志者,吾子也。」號曰成侯。騶忌謝恩畢,復奏曰:「昔齊桓晉文,五霸中為最盛,所以然者,以尊周為名也。今周室雖衰,九鼎猶在,大王何不如周,行朝覲之禮,因假王寵,以臨諸侯,桓文之業,不足道矣。」威王曰:「寡人已僭號為王,今以王朝王可乎?」騶忌對曰:「夫稱王者,所以雄長乎諸侯,非所以壓天子也。若朝王之際,暫稱齊侯,天子必喜大王之謙德,而寵命有加矣。」威王大悅。即命駕往成周,朝見天子。時周烈王之六年。王室微弱,諸侯久不行朝禮,獨有齊侯來朝,上下皆鼓舞相慶。烈王大搜寶藏為贈。威王自周返齊,一路頌聲載道,皆稱其賢。
제위왕이 추기(騶忌)를 하비(下邳)에 봉하면서 말하기를, “과인이 뜻을 이룬 사람은 바로 그대요.” 하고, 성후(成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추기가 감사의 말을 올린 후에 다시 아뢰기를, “옛날 제환공과 진문공이 오패 중에서 가장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나라를 받드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나라 왕실이 비록 쇠약해졌지만 구정(九鼎)이 아직 있습니다. 대왕은 어찌하여 주나라에 가셔서 조현의 예를 행하시고, 주왕의 총애를 받아 제후들에게 군림하여 제환공과 진문공이 이룩한 패업을 이어받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제위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이미 왕이라고 참칭하고 있는데 지금 왕이 왕에게 조현할 수 있겠소?” 했다. 추기가 대답하기를, “무릇 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제후들의 패권을 잡으려는 것이지 천자를 누르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번에 조현의 예를 행하면서 잠시 제후(齊侯)라 칭하시면 천자는 반드시 대왕의 겸손한 덕을 기뻐하여 더욱 총애하는 명을 내릴 것입니다.” 하니, 제위왕이 크게 기뻐했다. 즉시 어가를 명하여 성주(成周 ; 낙양)로 가서 천자를 조현했다. 그때가 주열왕 6년(기원전 370년)이었다. 주나라 왕실은 미약하여 제후들은 오랫동안 조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그때 제위후가 홀로 조회하러 오니, 주나라의 상하가 모두 고무되아 서로 기뻐했다. 주나라 열왕이 참고의 보물들을 찾아 제위왕에게 하사했다. 제위왕이 주나라에서 제나라로 귀국하자 연도의 백성들이 제위왕의 어진 덕을 칭송했다.
且說,當時天下,大國凡七:齊、楚、魏、趙、韓、燕、秦。那七國地廣兵強,大略相等。餘國如越,雖則稱王,日就衰弱,至於宋、魯、衛、鄭,益不足道矣。自齊威王稱霸,楚、魏、韓、趙、燕五國,皆為齊下,會聚之間,推為盟主。惟秦僻在西戎,中國擯棄,不與通好。秦獻公之世,上天雨金三日,周太史儋私嘆曰:「秦之地,周所分也,分五百餘歲當復合,有霸王之君出焉,以金德王天下。今雨金於秦,殆其瑞乎?」及獻公薨,子孝公代立,以不得列於中國為恥。於是下令招賢,令曰:「賓客群臣,有能出奇計彊秦者,授以尊官,封之大邑。」
한편, 당시 천하에는 큰 나라가 일곱으로 제나라, 초나라, 위(魏)나라, 조나라, 한나라, 연나라, 진(秦)나라가 있었는데, 이 일곱 나라는 땅이 넓고, 병력이 강성해서 대략 서로 비등했다. 나머지 월나라 같은 나라는 비록 왕이라고 칭했지만 날로 쇠약해졌고, 송나라, 노나라, 위(衛)나라, 정나라 등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나라 위왕이 패자(霸者)를 칭하면서부터 초나라, 위(魏)나라.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등 다섯 나라는 모두 제나라 아래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대회를 열 때면 제나라를 맹주로 추대했다. 오직 진(秦)나라는 서융에 치우쳐 있어서 중원의 나라들이 물리쳐서 통호하지 않았다. 진헌공(秦獻公) 때에 사흘 동안 하늘에서 금빛 비가 내렸다. 주나라 태사 담(儋)이 가만히 탄식해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땅은 주나라가 나누어준 땅이다. 나누어진 지 오백여 년이 지나면 마땅히 다시 합쳐질 것인데. 패왕이 나타나면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왕 노릇을 할 것이다. 지금 진(秦)나라에 금빛 비가 내렸다고 하니, 틀림없이 그 길조인가?” 했다. 곧 진헌공이 죽고 그 아들 진효공(秦孝公)이 대를 이었으며, 그는 진나라가 중국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이에 어진 이를 초빙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를, “빈객이나 여러 신하 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진나라를 강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관직을 주고 큰 고을을 봉하겠다.” 했다.
不知有甚賢臣應募而來,且聽下回分解。
어떤 현신이 응모하여 올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들으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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