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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말씀 / 마가복음 8 : 27~38
요절 / 마가복음 8 :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계획도시가 어디냐? 이런 이슈가 있다면 그 답은 천안입니다. 천안은 자연스럽게 생성된 곳이 아니라 태조 왕건에 의하여 군사적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계획을 가지고 세운 동네입니다. 늘 말씀에도 계획도시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1. 주는 그리스도(27-29)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없는 곳에서 제자들과 시간을 가지십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로마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세운 계획도시 였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 헬몬산 가까이 위치했기 때문에 쾌적한 날씨와 좋은 환경을 갖추었습니다. 기분 좋은 때, 좋은 장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예수님께서 오늘은 무엇을 하셨는가? 관심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면 찾아가서 ‘내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알아내어 예수님께 관심을 얻어 자기만을 위한 선물을 받아 볼 기회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도움 받을 생각, 예수님을 통하여 얻을 이익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생각 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혹시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본질을 놓치고 있다면 예수님께 대하여 자기 생각을 세우도록, 그에 먼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기 알고 있는 인식의 범위에서 보았습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였으며 피상적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구약 성경말씀을 풀어 주시고 은혜로운 말씀을 해주시니까 선지자중의 하나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자기 지식을 기반으로 부분적인 유사성으로 전체를 단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부분적인 것으로 잘 모르는 나머지 부분까지 판단합니다. 사람들은 전체를 단정 내리기 좋아합니다. 그럴 때 올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섣부른 판단을 하여 자신도 손해보고 타인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사람의 가치관이 영적이지 않고 편협하며 생각이 얕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너희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 있어서 중요한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각별히 배워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키우시는 새로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인간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말하는 것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 란 말은 헬라어인데, 히브리 말로는 ‘메시야’란 말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자,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0 장 9,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대답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분명하게 대답하는 것은 영생이냐 영벌이냐 가름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올바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 메시야의 길(30-38)
30절을 보십시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이 분은 메시야이시다’라고 공공연히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초림의 예수님과 재림의 예수님을 구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한 아이의 모습으로 오실 것과 나사렛사람이라 칭함 받을 것과 십자가에 죽는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 모두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무조건 이방인들을 심판하고 유대인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알리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메시야 사역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은 고난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일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와 사망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고는 세상의 죄와 사망을 해결할 길은 없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고난 받고 버림받고 죽임 당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강하게 그럴 수 없다고 대들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다면 죄 문제 해결도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온 세상은 죄로 인하여 심판 받고 멸망하여야 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지금 베드로는 십자가 고난을 왜 받으시냐고 하며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보다는 베드로의 소원, 인류의 구원보다 자기의 소원 성취를 강렬히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원을 앞세울 때 사단에게 이용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일을 열망하는 베드로를 그냥 두면 사단의 역사에 이용당하는 것이기에 단호히 책망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성품이 있으며, 교육의 결과로 얻은 지식과 살아가며 얻은 경험과 판단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열망이 있으며 생각과 언어와 행동에서 드러나는 습관과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 듣기 좋아하고 조용히 책 읽는 것이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이나믹하게 운동하고 뛰어야 후련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매주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지 않으면 답답함과 갈증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줄기차게 성취와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을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 같다고도 하고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각 사람들, 각자의 인생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며, 좋아하는 것,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마다하고 고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고자 애쓰기도 합니다. 새로운 언어 배우는 것에 관심 많고 역사와 지리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수학과 물리를 이용하여 회로 문제 해결하는 전자공학으로 들어와서 여기서 뭔가 해보겠다고 사는 것이 실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 저마다 자신의 추구하는 것을 따라 삽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오늘 요절의 전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전제를 말씀하신 후 행할 바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첫째, 자기부인입니다. 무엇을 부인하여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형성된 가치, 자기의 추구하던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던 것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기 전, 내면에 굳게 자리 잡은 관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기 전에 형성되어 생활과 습관으로 굳어진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분명하게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과 맞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많이 베풀고 살아야 할 나이’라고 말하는 어느 노교수는 밥값 내지 않고, 학생들 일 시키고 아르바이트비 주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행동이 뒷받침되든가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분도 욕심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본인 욕심은 안 버립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가장 중요하고 귀한 보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을 체험하는 기쁨을 얻고,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런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고 성령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은혜를 맛보지 못하며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도 없고 변화된 그리스도의 향기도 없으며, 제자다운 영향력이 없습니다.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없으므로 신앙생활이 점차 확신을 잃을 수 있으며, 신앙이 관념화 되어 제자의 삶이 무색해 집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없으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내적 체험이 없으니, 결국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사람에게 자기를 알아 달라, 사람들에게 나를 좀 봐 달라, 사람들에게 나를 좀 생각해 달라, 나에게 관심을 나에게 존중을 나에게 인간적인 인정, 칭찬, 사랑을 좀 해 달라 바라고 매달리고 인정과 칭찬을 구걸하는 생활을 합니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의 뜻과 다른 나의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나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영접하는데 거스리는 것이 있으면 내려놓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의 뜻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없이 영광 얻고자 하는 열망을 부인하여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진리 즉, 낮아짐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높아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간적으로 영광 얻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부인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고난을 통한 영광을 거부하는 욕망과 열망과 집착이 있다면 모두 부인하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반역자’와 ‘도망친 노예’에게만 적용하는 가장 극한 고통의 사형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완전히 죽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은 부인을 두 명 두었습니다. 젊을 때 결혼하여, 고향에 계속 두는 향부인, 출세한 다음 얻어서 개경에서 사는 경부인입니다. 이 제도 때문에 폐단이 있어서 조선은 부인을 한 명만 두도록 했습니다.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은 부인은 한 명이지만 첩을 두었습니다.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도 첩이 있었습니다. 청주의 자랑인 유명한 S장군도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죽을 때, 첩과 함께 죽었습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선교사님들은 조선에 와서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면 첩을 두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양반댁 첩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남편에게 본부인에게 돌아가라 하고 자신은 평생 혼자 기도하며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이념에 입각하여 기독교 정신으로 각종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법으로 중혼을 금하고 있고, 몰래 부인 두 명 이상 두었거나, 음으로 양으로 첩을 둔 사람은 모든 공직을 박탈하였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무당 찾는 것을 완전히 끊게 하였으며, 만연한 노름을 끊게 하였습니다. 술마시며 나태하게 지내는 게으름을 청산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끊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 지속적으로 수고와 고통을 감내하여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주님께 드리는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우선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을 앞세우다 보면 주변 사람을 서운하게 하는 일이 생기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해 받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을 참고 감당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고 가까운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보아야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감내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느라 무시당하는 일도 있고 모욕이 느껴지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생기는 물질적 손해와, 예수님을 따르느라 더 수고해야 하고 더 번거로운 일들이 생기는데 이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많이 수고하고 많이 고생하고 많이 참아야 합니다.
셋째, 계속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은 이벤트 형식으로 하지 말고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한 때 잠깐 반짝 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인내를 오래 하고, 겸손을 지속하고, 헌신을 계속하여야 하며 희생을 거듭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평생 계속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계속하여 감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다만, 타락한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살리실 수 있으며 복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참 생명과 참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살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육적인 것을 자기가 계획하여 얻어내고자 합니다. 자기의 계획을 버리고 주와 복음을 위하고자 하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참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 말하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인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고자 하고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자 나섭니다. 결정적인 때만 되면 항상 자기가 발동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구원도 알기만 하고 들은 것만 많을 뿐 개인적으로 영적 깊이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 다른 사람의 희생, 다른 사람의 헌신, 다른 사람의 인내의 덕을 보았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라고 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님과 복음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참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영광, 부함과 풍요로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영생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학계의 연구주제 라는 말을 들었는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천안의 이봉주 선수는 건강할 줄 알았습니다. 원인 모르는 희귀질환에 걸려 휠체어 타고 지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육긴장이상증’이라고 합니다. 불치병 치료 신약개발 하는 과정에서 개발자들이 일찍 죽는 사례가 나타납니다. 수십만가지 신약 모델을 만들고 검증하는 길고 힘든 과정에서 그 과로를 몸이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은 병들지 않고 약해지지 않고 오래 건강하게 풍요로움과 안정을 누리고자 하지만, 인생의 영광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이 해가 뜨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같이 허무합니다. 무엇이든 철저하게 계획하고 의도하고 추진하며 사셨던 강인하였던 저의 아버지는 중년의 때를 지나면서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야’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나의 영혼, 나의 생명은 단 하나 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는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돈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자기 영광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인간적인 정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일족들의 영역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땅 가나안에서 장막 치고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주고 베풀고 나누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 나라의 큰 성을 얻었으며 믿음의 조상으로 세상에 보내시는 메시야의 조상이자 그리스도의 복을 얻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나의 행복을 내가 얻겠다고 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빈 그물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인생의 그물을 가득 채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를 말세지말, 말세의 끝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끝에 육체의 죽음이 있고 세상의 끝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날은 더 이상 기회가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갑자기 옵니다. 그날은 뜻밖에 임하여 사람들은 너무 두렵고 놀라 기절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의 날, 만왕의 왕으로 세상의 심판자로 오십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는 예수님 앞에 모두 심판받습니다. 우리는 심판 받을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함께 심판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세상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느라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 받고 십자가 진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느라 수고하는 것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대가 받는 심판에 동참하지 말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예수님 따르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단, 예수님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잘 감당하면 열매가 있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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