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85)
부검
언니가 운다 오빠가 운다
순서대로 가야 하는데 왜 네가 먼저 가니?
네 방에는 소주 2병 수면제 1통
목구멍이 아파서 수면제를 삼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잠을 못 자요
술만 먹으며 엄말 때려요 언니를 때려요 오빠를 때려요
수면제를 먹어도
아파 아파 아파
복수 복수 복수
잠속에서도 눈알이 돌아가요
이불 속에는 푸른 옷을 입고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의 행렬
음부 속에는 핏발 선 눈알들이 굴러다니고
부러진 팔의 깁스 속에는 군인의 고함들이 살아요
그렇게 때렸는데
그렇게 찔렀는데
저들이 우네요 엄마가 우네요 언니가 우네요 동생이 우네요 자식이 우네요
꿈을 깨서 침대를 나섰는데
갑자기 안방에서 들려오는 엄마 언니 동생의 통곡 소리
죽었다네요, 내가
- 김혜순(1955- ), 시집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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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얘기하자면, 좀비는 살아납니다. 좀비에 물린 사람은 잠시 죽었다가 좀비가 되어 살아납니다. 살아나 다른 사람을 물면 물린 사람은 역시 좀비가 됩니다. 이 공식은 반복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악순환은 돌고 돌아서 어느 순간이 되면 기어이 좀비와 사람의 구분은 모호해집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 역시 모호해집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가 또 가해자가 되고…… 좀비가 늘어나는 과정은 전염병의 전파 과정과 흡사합니다. 마침내 혼란이 도래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혼란을 풀어야 할 숙제가 주어집니다. 평화적으로? 아님 전투적으로? 아님 결과적으로? 좀비는 떼로 몰려옵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는 끝까지 홀로 존재합니다. 배회하기는 하나 홀로 배회하는 모습이 IMF 때 실직한 가장 같습니다. 그러니 이 존재는 무리 지어 다니는 좀비는 아닌 듯 보입니다. 차라리 “죽었다네요, 내가” 죽었음을 뒤늦게 자각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와 뒤늦게 “죽었다”는 자각을 한 존재의 죽음은 어쩌면 같은 죽음의 다른 버전일 수도 있습니다. 장이나 막을 달리했다고나 할까요. 어떤 죽음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돌연사나 급사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 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잠자리에 들 듯 스르르 쓰러져 누워 바로 이생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어린 저는 입관 전까지 아버지와 한 이불을 덮고 잤습니다. 어쩌면 다시 깨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실감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제 아버지도 어쩌면 이렇게 한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며 떠돌다가 무덤이 아닌 집으로 돌아오곤 또 돌아오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사람이었을까요, 유령이었을까요. “제가 다니던 출판사에는 가끔 오는 형사가 있었는데 (…) 제가 교정보던 책의 번역자 전화번호를 아는지, 그의 거주지를 아는지, 어디서 만나는지를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은 모르고, 다만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뿐이라고 했지요. 당시엔 상대방이 어디서 어떤 번호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형사가 저에게 마포경찰서로 몇 시까지 오라 하고 사라졌습니다. 찾아가자마자 그는 “이게 까불어?” 하면서 제게 쌍욕을 하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일곱 대를 맞았는데 (…)”(대담집 『김혜순의 말』에서, 마음산책, 2023, 138쪽) 시인의 이 체험이 한강 작가의 소설로 이어지는 건 최근에 알았습니다. 두 책을 다 읽었으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그녀는 일곱대의 뺨을 맞았다. 수요일 오후 네시경이었다. 같은 자리를 연달아 세게 맞았기 때문에, 몇번째 따귀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오른쪽 광대뼈 위로 실핏줄이 터졌다.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으며 그녀는 거리로 걸어나왔다. 십일월 하순의 공기가 맑고 찼다.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그녀는 잠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빠른 속도로 뺨이 부푸는 게 느껴졌다. 귓속이 먹먹했다. 더 맞았다면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이뿌리에 고여 있던 비릿한 피를 삼키며, 집으로 가기 위해 그녀는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한강(1970- ), 『소년이 온다』, 「3장 일곱개의 뺨」에서, 창비, 2014, 65쪽) 그 시절 이 정도의 체험은 가벼운 것이었을까요. 공포는 경중을 가리지 않습니다만. 이 체험 후에 시인은 뺨 한 대에 한 편씩 7편의 시를 썼다는데 그 시가 지난번 소개한 시집에 수록된 6편의 연작시 「그곳」입니다. 마지막 7번째의 시는 사라졌다고 했는데 사라짐이 반드시 소멸은 아닐 거라고 저는 지레짐작합니다. 소설 속에서의 진술이 시인의 체험과 전부 일치한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많은 폭력 장면은 대담 속에서 드문드문 시인이 진술한 체험과 흡사합니다. 한때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의 모습이어서일까요. 지난주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가 누구였는지 물었던 물음에 오늘은 이어서 묻습니다.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는” 존재와 “죽었다네요, 내가” 죽었음을 뒤늦게 자각하는 존재는 어떻게 죽었을까요? 왜 죽었을까요? 이쯤에서 지난해 8월에 읽은 이성복의 시를 다시 불러냅니다. “갑자기 구둣발 같은 것이 그의 목을 밟아 누른다 그는 소리를 질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윽고 그는 비틀어진 닭 모가지처럼 축 늘어진다” ““병신 하나 줄었군……” 나란히 서서 그들은 오줌을 누고 몸을 부르르 떤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생일」 부분, 이성복(1952- ), 『어둠 속의 시: 1976-1985』, 열화당, 2014). (20250226)
첫댓글 이번 주 <보광의 수요 시 산책>의 김혜순 시인의 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아프게 묘사된 부분(3장)과 연결된 것이네요. 야만의 시대에는 왜 그렇게 뺨을 내리 일곱 대씩이나 때리고 그랬을까요? 하기사 문명의 시대에도 야만성이 자주 보이긴 합니다만.
소개해 주신 이성복 시인의 시도 그런 야만성을 잘 보여 주네요. 무거운, 그러나 평화의 문명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작품들 잘 읽었습니다. 의미 깊은 시평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