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0:49 역주 장릉지속편 220~221쪽 기록에서의 엄충신 후손의 이름
<엄호장에 대한 대강을 기록하다>[병술1766, 영조14] 황윤석
경자년(更子年 1720, 숙종46) 영월부사 임순원(任舜元 1653~1723)이 선조宣祖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24)에 작성된 호적을 찾아냈다. 그 호적에는 전력부위展力副尉 엄한려嚴漢呂 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부친은 계공랑啓功郞 희령希齡 이고 조부는 장사랑將士郞 화和 이며 증조부는 장사랑 호현好賢 이었다. 또한 엄승진嚴承軫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 처부는 화和이고 처조부는 호현好賢이며 처증조부는 興道였다.
두 개의 호적을 나란히 살펴보건데 한려漢呂는 분명히 엄흥도의 4대손이다.
한려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바로 응원應垣 과 응평應平, 응일應一 이다.
~~*한례韓禮는 ‘한려漢呂’라는 음音이 전성된 것이다.
~~*기생起生의 부친은 응원應垣으로 응탄應坦. 혹은 응원應元이라고도 한다.
*윤양래 영월부사의 엄흥도묘갈명은 1726년에 세웠고,<엄호장에 대한 대강을 기록하다>는 1766년 이다
嚴忠臣墓碣銘 엄충신묘갈명
■ 贈佐郞嚴興道墓碑 <原文> :
■ 증좌랑엄흥도묘비 <원문> :
昔我端廟遜于越, 丁丑之事語卽咽,
석아단묘손우월, 정축지사어즉연,
有嚴興道哭抆血, 椑而藏之山之突,
유엄흥도곡문혈, 비이장지산지돌,
衆謂無妄禍至掇, 曰吾甘心匪所怵,
중위무망화지철, 왈오감심비소출,
世臣華胄恬莫怛, 鴈鶩之微義最烈,
세신화주념막달, 안목지미의최렬,
歷二百禩人嘖舌, 尤翁告后亟稱說,
력이백사인책설, 우옹고후극칭설,
洪伯刱祠腏六節, 恭惟肅廟脩廢闕,
홍백창사철륙절, 공유숙묘수폐궐,
莊陵位復神人悅, 王曰興道事卓絶,
장릉위부신인열, 왕왈흥도사탁절,
日星昭明山岳崒, 贈以員外承訓秩,
일성소명산악줄, 증이원외승훈질,
褒踰華袞我后哲, 盖君越人林義出,
포유화곤아후철, 개군월인림의출,
遙遙系序譜籍逸, 而其後承猶可閱,
요요계서보적일, 이기후승유가열,
好賢生和綿若絶, 希齡漢呂曾玄列,
호현생화면약절, 희령한려증현렬,
五世應坦平曁一, 坦一徙死今無孑,
오세응탄평기일, 탄일사사금무혈,
承軫姓同派則別, 和也有女授以室,
승진성동파칙별, 화야유녀수이실,
有孫悌漢若顚蘖, 替奉香火尙不缺,
유손제한약전얼, 체봉향화상부결,
八溪遺塋坐酉穴, 始晦末顯髥目蕝,
팔계유영좌유혈, 시회말현염목절,
嗟君行蹟昧莫述, 想其忠義餘可絜,
차군행적매막술, 상기충의여가혈,
太華山夷錦水渴, 員外之名長不滅,
태화산이금수갈, 원외지명장불멸,
我撮其槩揭墓碣, 有人心者勿踐伐.
아촬기개게묘갈, 유인심자물천벌.
崇禎99年 丙午 10月 日 立
숭정99년 병오 10월 일 립
嘉義大夫行 寧越府使 尹陽來 撰幷書
가의대부행 영월부사 윤양래 찬병서
[해역]엄충신묘갈명
“옛날 조선조(朝鮮朝)의 六代(육대) 임금인 단종(端宗)께서 숙부(叔父)인 세조(世祖)의 강압에 못 견디어 급기야는 보위(寶位)를 내놓으시고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 땅으로 귀양살이를 오시게 되니, 아! 정축년(丁丑年, 단종이 승하한 해)의 일을 회고하면 오직 목이 메일 뿐이다.
그러나 엄흥도(嚴興道)가 있어서 피를 토하며 통곡해 마지않았도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함에 공(公)은 마음을 굳게 먹고 棺(관)을 준비하여 양지바른 산언덕에 수장(壽藏, 장사 葬事)하려 할 때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연(空然)히 망령되어 나서지 말라. 당장 나라에서 앙화(殃禍)가 내릴 것이라고 만류하는데도 공(公)은 흔연(欣然)이 나는 의(義)로운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은 두려워하는바 아니다. 누대(累代)의 명신(名臣)들과 귀족들은 모두 안일(安逸)에 젖어 일신의 평안에만 급급 하는데 엄흥도는 하급직(下級職)의 미미(微微)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의(義)로움은 당세(當世)에 가장 뛰어 났도다.
그 후 二百年(이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경악(驚愕, 놀라는 것)하여 마지않았도다. 우암(尤菴) 송시열옹(宋時烈翁)이 나라에 고(告)하니 칭송(稱頌)하는 소리가 빨리 퍼져나갔고 강원감사 홍만종(江原監司 洪萬鍾)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제향(祭享)을 누리게 되니 경건(敬虔)히 머리 숙여 생각하는바 숙종(肅宗)께서 폐허(廢墟)된 궐사(闕祠)를 보수(補修)하게 하시고 장릉(莊陵)의 위(位)를 회복케 되므로 사람들은 물론 신(神)까지도 기꺼워하였다.
숙종(肅宗)께서 흥도(興道)의 사적(事蹟)은 실로 높고 높으며 해와 달같이 조명(照明)하고 태산같이 높으니 이에 작록(爵祿)은 없으나 빛나는 용포(龍袍)를 포상(褒賞)함에 우리의 후(后)가 밝았으니 대저 그대는 영월(寧越) 사람으로 임의(林義)의 자손이니 오랜 세월 그 계서(系序)는 족보(族譜)에서 빠졌지만 그 후손들은 오히려 가(可)히 견디어 오도다.
충의공(忠毅公)의 子(자) 호현(好賢)이 화(和)를 낳아 근근이 이어 오는 것 같더니 희령(希齡)과 한려(漢呂)가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으로 점점 벌어져 나갔으며 오세손(五世孫) 응탄(應坦)과 응평(應平), 그리고 응일(應一)에 미치니, 응탄(應坦)과 응평(應平)이 비록 죽어 후손(後孫)이 없으나(당시 삼족을 멸함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됨) 多幸(다행)히 성(姓)은 같으나 派(파)가 다른 承軫(승진)에게 마침 和(화)에 딸이 있어 아내로 주었고, 外孫(외손)인 悌漢(제한)이 이미 없으나 그 後(후)에도 계속(繼續) 대신 향화(香火, 제례)를 받들어 오히려 결례(缺禮)하는 일이 없었다.
팔계(八溪, 영월읍 소재 寧越邑 所在)에 있는 公(공)의 묘소(墓所)는 유좌혈(酉坐穴)인데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으나(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묘소관리가 안된 탓) 지금은 잘 손질되어 완연(宛然)히 면목(面目)을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슬프다! 그대여, 그대의 행적(行蹟)이 알 길 없어 유감(遺憾)없이 기술(記述)치 못함이 한이 되는구나. 그 충의(忠義)를 생각건대 여타(餘他)의 일들도 가(可)히 헤아리고 남음이 있도다.
태화산(太華山)이 무너지고 금수(錦水, 영월 동강 東江)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길이 後世(후세)에 남아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멸(滅)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의 의기(意氣)와 절의(節義)를 모아서 묘비(墓碑)에 적어 높이 들어 世上(세상)에 보이노니 마음과 뜻이 있는 者(자)는 이를 짓밟고 없애지 말지어다.
숭정(崇禎) 九十九年(구십구년) 丙午(병오) (英祖 二年, 1726년) 十月(시월) 日(일) 立(립)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영월부사(寧越府使) 윤양래(尹陽來)는 아울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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