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거짓 가르침과 영적 미혹에 대한 경고
25)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 - 예수의 성육신과 진리를 부인하는 세력
성경본문 : 요이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여러분, 혹시 옛날 시골 마을에 살아보신 분 계십니까.
저는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 그런 광경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해 질 무렵, 낯선 사람이 사립문 앞에 서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온 가족이 잠깐 마당에 나가 그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봅니다.
말투는 어디 사람 같은지, 손은 거칠어 있는지 매끈한지, 눈빛은 어떤지.
그렇게 살펴본 다음에야 방 하나를 내어주었습니다.
그 시절 어른들은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을까요.
나그네를 홀대해서가 아닙니다.
그 집 안에 누구를 들이느냐가, 그 밤 온 가족의 안전과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꼭 이렇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었고,
성도들은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관행을 이용해서, 겉으로는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이서 1장 7절은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첫째, 그들은 무엇을 부인했는가
여기 "미혹하는 자"라는 단어, 헬라어로 플라노스(πλάνος)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뭔가를 착각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남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방향을 트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붙는 단어, 안티크리스토스(ἀντίχριστος). 우리가 아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단어 안에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놓고 반대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 척하며 그 자리를 슬쩍 대신 차지하는 것.
이 두 번째 뜻이 사실 더 무섭습니다.
정면으로 싸우러 오는 적이 아니라, 문 앞에서 인사하며 들어오는 적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부인했습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
여기 "오심"이라는 표현, 원어로는 에르코메논(ἐρχόμενον)이라는 현재분사가 쓰였습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오셨다"고 옮기지만, 사실은 "지금도 오고 계시는 상태"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옛날에 예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를 인정하느냐"를 묻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그 그리스도를 믿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강조점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적어도 이 표현이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실재를 가리킨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영이신 분이고, 예수라는 인간의 몸은 잠깐 빌려 쓴 옷 같은 것이다.
세례 받을 때 그 영이 예수 위에 임했다가, 십자가 고난이 다가오자 그 영은 슬쩍 빠져나갔다."
이런 흐름을 크게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란 물질과 육체는 본질적으로 열등하거나 악하고, 오직 영적인 것, 특별한 비밀 지식만이 참되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이 틀 안에서는 하나님이 냄새나고 피 흘리고 배고픈 인간의 몸을 실제로 입으셨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슬쩍 흐릿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게 왜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참 인간이 아니셨다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을 지키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짊어지실 수도 없습니다.
몸이 없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몸도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 죽음은 그냥 한 선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일 뿐,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짧은 절 하나가 부정되는 순간, 복음 전체가 힘을 잃습니다.
이건 신학자들 사이의 사소한 논쟁거리가 아니라, 우리 구원이 서 있는 바로 그 기둥입니다.
둘째, 오늘 우리 안의 미혹은
자, 여기서 우리가 조심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육신 부인하는 이단 조심하자"로 끝내면, 이 본문을 옛날 옛적 이야기로만 두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문제에서 자유롭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때로는 예수님을 두 조각으로 나눠서 대합니다.
하나는 "주일에 예배드리는 영적인 예수님", 또 하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내 실제 삶과는 상관없는 예수님."
우리가 입으로는 "예수님이 나의 몸과 삶 전체의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우리 삶의 아주 좁은 방 한 칸,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그 칸에만 모셔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도 형태만 다를 뿐 똑같은 미혹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되심, 곧 그분이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 전체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삶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빼내는 것이니까요.
저도 이 부분에서 자주 걸려 넘어집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성육신의 신비를 그렇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제 삶의 어려운 결정 앞에서는 "이건 신앙 문제가 아니라 그냥 현실 문제니까"라며 예수님을 슬쩍 다른 방으로 보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일 뿐 이 시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 미혹이 "세상에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건 완전히 낯선 데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원래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처음엔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언어를 쓸 줄 알고, 성경 구절도 인용할 줄 알고, 심지어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할 줄 압니다.
그러다 교회를 이탈하여 세상으로 나가서는, 다시 순회하며 여러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니 미혹은 언제나 낯선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익숙한 말투로, 심지어 신앙의 언어로 문을 두드립니다.
우리 마음의 사립문 앞에서, 오늘도 그렇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그분은 정말 오셨습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그저 "조심하라, 문단속 잘하라"는 경계 태세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진짜 힘은 경고에 있지 않습니다.
이 짧은 절이 지켜내려는 그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그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굳이 몸을 입고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영으로, 멀리서 우리를 도우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셨고, 우리와 똑같이 배고프셨고, 우리와 똑같이 피곤해서 배 안에서 주무셨고, 우리와 똑같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를 대신할 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질 어깨, 우리 형벌을 받을 등, 우리 대신 찢어질 살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우편에는 여전히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위해 오셨던 그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그 자리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분, 배고픔을 아시는 분, 눈물을 아시는 분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이 진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미혹을 조심하는 이유는, 잃을 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오신 그분, 지금도 우리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그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교리적 정확함이 아니라, 그 정확함 뒤에 서 계신 한 분, 우리를 위해 몸을 입으신 그분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부터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늘은, 이 한 문장을 입으로 고백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지금도 나를 위해 계십니다."
원어의 호몰로게오, 곧 "시인한다"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잠들기 전 이 한 문장을 소리 내어 고백해보십시오.
이번 주에는, 내가 무엇을 내 마음 안으로 들이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예전 시골집 어른들이 낯선 사람을 마당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보는 영상, 듣는 말, 읽는 글 중에 예수님을 그저 좋은 인생 교훈 정도로 축소시키는 것들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나쁜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신앙의 언어로, 그럴듯한 은혜의 말로 오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여린 누군가에게 이 한 가지만이라도 분명히 전해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냥 좋은 선생님이 아니시다. 우리를 위해 진짜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 한 문장이 흔들리면 그 사람의 신앙 전체가 흔들립니다.
이 한 문장을 붙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가장 중요한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키는 것은 교리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해 정말로 걸어오신 그분, 지금도 우리 자리까지 걸어오고 계신 그 한 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문 앞의 규칙이 아니라, 그 문을 두드리며 정말로 찾아오신 그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