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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에서 북쪽에 위치한 문경시 산양면 현리마을은 인천 채씨의 집성촌으로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100여 호가
모여 살던 큰 동네였다. 이 마을은 동남쪽의 예천과 인접하고 있으며 산양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현리마을로 진입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마을의 남쪽인 들녘으로 들어오는 길과 북쪽인 마을 뒤편의 현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길이 있다. 산양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금천강변길을 따라 걸으면 오리 길 남짓한 길가에 ‘현리’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만난다.
논농사에 의존하는 이 마을은 비조산(308m)을 중심으로 서북의 뒷들과 동남으로 펼쳐진 앞들이 제법 넓은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마르지 않는 개울과 비옥한 들녘을 안고 비조산에 기대어 있는 이 마을은 더없이 포근하고 편안해 보인다.
멀리 태백과 소백의 지맥에 뿌리를 둔 비조산은 비록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주 높고 깊은
신령한 산이다. 산은 다시 마을 쪽으로 자산이라 할 근품산을 품어 안고 있으며 두 개의 산 사이에 이 마을의 신령스러운
신당인 서낭당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뿌리인 신상을 모신 곳이다. 개개인의 소원도 마을의 희망도 서낭당에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믿음은 여전하다고 한다.
이 동네에는 타 성씨인 하배라는 머슴이 주인을 위하여 힘들고 궂은일을 마다 않고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충직
한지 조금의 불평도 없이 정성으로 주인을 모셨다.
“그 시절은 하배가 다 했지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하배가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쌀을 거두어서 떡을 찌고
밥을 짓지요. 그리고 열나흗날 밤을 기다렸다가 그 제물을 등짐으로 지고 근품산을 오릅니다. 서낭당 신주님을 모시려 한
것이지요. 소원을 담은 종이 심지를 하나하나 서낭당님께 빌면서 태웁니다. 집안의 평안과 건강과 농사가 잘되도록 해 달
라고 한 것이지요. 자식이 없어 애태우는 집을 위해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하고요. 우리들을 대신하여 하배가 그
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우리가 직접 합니다. 마을의 바깥양반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제로 하기도 하고 개인별로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현재 마흔네 가호 정도 남은 이 마을에는 하배도 없거니와 채씨 이외의 다른 성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 마을이 전통을
놓치지 않고 이렇게 끌어안고 이어온 것을 보면 문경시에서 단일 마을을 대상으로 만든 민속지‘반속과 민속이 함께 하는
현리마을’을 낼 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하배를 대신하여 하배를 부리던 마을 사람이 제사를 주관하고 있을 뿐이다.
100년은 족히 넘은 종가의 사랑채 마루에는 찻상 외에도 가을이 물씬 익어 밴 밤과 대추를 담아 말리는 대바구니와 옥수
수자루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종부는 많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와 서낭당에 관심을 갖는다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면서 슬며시 유
감의 말도 감추지 않는다.
“우리 마을에는 지정문화재가 없어요. 오래전 모범적인 새마을 동네가 되면서 집과 담장이 모두 정리되어 버린 까닭도
있지요.”
“….” 이런 귀한 전통을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데 종가는 물론 사당을 비롯한 고택들이 새로 개축했거나
아주 허물어져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 서낭당에는 아직도 서낭신이 산다
마을 뒷산, 근품산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서낭당은 일종의 동제신이다. 그러나 서낭당에 대한 이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훨씬 적극적이다. 지금까지도 이 마을에서는 서낭당이 있어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안녕을 얻고 농사가 잘될 뿐만 아니라
건강과 다산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서낭신은 참으로 영험합니다.” 6.25참전 유공자이기도 한 채군식 어른은 영천 전투와 평안도 덕천 전투의 무용담을 한
차례 마치자 서낭당 이야기로 이어나간다.
당시 스무 살이던 그는 음력 유월 초나흗날 강제 징집되어 1주일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영천전투(국군 8사단)
에 투입될 때 입대 전날 밤, 몰래 서낭당을 찾았단다.
서낭당의 영험으로 결국 살아서 귀향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채씨 노인의 사례뿐만 아니라 ‘반속과 민속이 함께 가는
현리마을’에는 서낭신을 믿고 기도하여 득남했다는 이야기, 대학에 합격한 이야기, 노처녀가 시집가게 된 이야기 등 많은
사례를 밝히고 있다. 불과 몇 해 전의 이야기도 있다.
봉대댁은 아들이 연거푸 대학시험에 낙방하자 지성으로 서낭님께 매달린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낭당에 올라 주변을
깨끗이 쓸어내고 청소를 한 뒤, 고개 너머 바위틈에 흐르는 청정한 생수를 길어 제사를 드렸다. 몇 차례 능선으로 오르
내리는 사이에 온몸이 비지땀으로 범벅되었지만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풀지 않는다.
지난해 우물물을 길어 제사를 올려 아들이 불합격했다고 믿는 봉대댁은 반드시 청정수로 제사를 올리려 한 것이다. 그
렇게 땀 흘리며 치성을 드린 결과 아들은 마침내 합격의 영광을 안게 되자 더욱 서낭신의 영험함에 감복하였다는 것이다.
“서낭당은 원래 마을 앞 동쪽에 있었는데 마을의 어떤 노인이 현몽을 받아서 비조산으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처
음에는 당 안에 기마무사와 같은 신상이 있었는데 언젠가 도난을 맞고 지금은 빈집만 있지요.”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 제사를 단순한 풍습 치레로 넘기지 않고 굳건한 신앙으로 여기며 그것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소원하는 바가 달
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마을에는 서낭당과 더불어 구봉당이 있다. 마을의 윗 지역이자 중심인 웃마 사람들이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은 남자를 상
징한다. 서낭당은 1칸짜리 맞배집이며 기와를 올렸다. 당을 둘러싼 돌담은 1m 가까운 높이에 대문이 없으며 그 길이는
25m 정도이다. 여기에 비하여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경계 지점에 있는 구봉당은 아랫마을인 창마 사람들의 몫으로 여자
를 상징한다.
구봉당은 서낭당에 비하여 집 모양이 인위적이다. 당 내의 마루 위에 선반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철제 말상을 두고 있다.
아주 자그마한 공예품 같은 두 마리의 철마상 주변의 벽면에는 단청을 입힌 용 모양의 나무 조각이 부조물처럼 걸려 있다.
구봉당은 원래 구빈당(救貧堂)이라 하여 왔으나 광복 이후 전염병이 돌자 그 액운을 물리칠 비방으로 당집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 신당의 연장선과 같은 토담
마을 앞뒤로 산과 개울이 시각적인 외곽을 형성하고 있고 서낭당과 구봉당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담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속의 토담들은 집과 집을 지켜주고 골목과 마을을 지켜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전’(田)자 형태로 골목길이 나눠
지는데 왼쪽 중심지역에 영모재가 있다. 16세기 말 처음 이 마을을 찾아든 양애공 채득호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그 남쪽 앞으로 종가가 위치한다. 마을 안의 널찍한 골목길을 낸 토담은 새마을 사업으로 새로 축조된 것이긴 하나 크고
작은 담장들은 두꺼운 나이테를 지닌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어 담 속에 내비치는 고색을 탐미하는 즐거움이 있다.
여든에 가까운 채씨 집안의 15대 종부를 비롯하여 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토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마치 옷을 입듯이
해마다 한 겹 담 옷(담 덮개)을 입히는데 담장은 곧 집의 모양이고 지킴이라는 생각을 하는지 고된 작업일 터인데 해마다
담을 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와가 아닌 짚 이엉을 엮어 토담을 덮어야 하는 덮개는 정갈한 마음의 공덕
이라 한다.
담이 무너지지 말라는 방비책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인 단순 작업이 아니라 말쑥한 옷으로 집의 외양을 돋보이게 하는 담
옷을 입힌다는 것이다. 자연신앙의 믿음이 적극적인 그들에게 집의 경계요 관문인 담에 대한 생각도 마을의 수호자로 생
각하는 것일까.
담장의 덮개는 세월의 흔적인지 켜켜이 층을 이루고 있어 특별하다. 집 밖의 길가로 경계를 이루는 외담이나 집 안의 가옥
과 혹은 이웃집과의 경계를 구분한 내담, 어느 할 것 없이 토담들이 비교적 낮다. 집채가 낮으니 담은 덩달아 낮을 수밖에
없다.
유연한 곡선을 이루는 담장 위로 짚 이엉을 만들어 올린 토담 덮개가 썩고 허접한 채로 남아있다. 덧입힌 결과다. 그러니까
아랫부분은 썩지만 윗부분은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 층층을 두껍게 만들어 나갔다고 하니 토담의 높이만큼이나 높게 쌓여진
덮개를 지고 있게 된 것이다.
종가의 대문 좌우 담 위에 수십 년이 된 두꺼운 담 덮개를 보노라니 그것은 낡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삶이 묵어 밴 이야기로
덮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의 덮개요 토담의 나이테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토담이지만 시루떡 첩 같은 그 담
덮개는 내가 만난 특별한 풍경이다. 옛것 위에 새것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가을볕인가 했는데 마을을 찾은 날의 햇살은 여름을 방불케 한 땡 볕살이다. 그렇지만 마을의 풍광을 살피고 살아온 내력을
듣는 쏠쏠한 재미가 그것을 넘어서게 한다.
여든 중반의 채씨 노인이 아슴푸레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시공을 뛰어넘는다. 낮은 뒷산, 낮은 가옥과 담장 그
리고 낮은 지대에 올려선 마을, 거기에 더하여 현재까지도 자연신에 기대면서 자기를 낮추고 살아가는 현리사람들은 참으
로 천천히 이동하는, 정태적인 가치를 앞세우는 것 같다. 현대의 시계바늘이 빠르고도 바쁘게 돌아가지만 그들의 시간관은
느림이다. 느림의 미가 있는 현리 마을에서 힐링을 체험하게 된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