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담은 율격미의 서정
서태수
수필은 종합문학이며 수필가는 융합디자이너다. 시, 시조, 소설, 희곡, 평론의 고유한 미학이 수필 작법에 총동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법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무한한 기능성技能性을 포용하고 있는 형식적 특징으로 집약된다.
원고 청탁이 ‘수필 미학의 서정성’인 점은 수필 속의 시적 요소를 추출하라는 의도일 것이다. 서정양식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교술양식인 수필이 주관성이 강하고 압축적이며 운율적인 언어의 특징을 갖는 서정양식으로 변주되기 위해서는 작법상 절대적 전환이 필요하다. ‘자아의 세계화’ 과정에서 ‘세계의 자아화’ 과정을 융합해서 서정적 자아로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양식상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해야 시적 경지의 수필을 창작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 서정성은 ‘정감과 리듬의 조화 및 자연과 토속 세계에 대한 관심’이었으나 60년대 이후 김종해의 ‘신서정’ 개념 등의 논의를 거치면서 매우 다채로워졌다. 본질적으로 시의 형식은 운율이며 시의 내용은 정서와 사상이다. 리듬과 이미지가 현대시의 2대 구성원이라고도 한다. 이는 곧 서정성은 주로 리듬과 정서에 의해서 발현된다는 점이다.
한국어 리듬은 주로 음절과 음보의 율격미로 구현되고 정서는 회화성으로 나타난다. 시적 서정성은 이 외에도 문체, 어조, 문장 구조, 어구, 어휘, 조사, 어미, 문장부호 등이 다양하게 기능한다. 그중 율격미는 모든 문장을 통어統御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율격미는 서정성 형성의 최첨단적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필자가 구사하는 주요 수필 작법 중 율격미 활용을 중심으로 톺아보고자 한다.
율격은 존재의 약동하는 생명성이다. 율감律感은 장단, 고저, 강약, 문체의 강건, 우유, 화려, 건조, 만연, 간결을 유인하고 대조, 대구의 흥청거림, 공격과 애상적 비애까지도 통제한다. 고전문학 사설시조에서 보듯 표창으로 던진 풍자도 율격을 실으면 원반으로 날아간다. 율격은 대구를 생성하고 대구의 출렁거림은 독자 감정을 몰입시킨다.
필자는 주제와 제재의 성격에 따라 구성미, 표현미, 문체미를 다양하게 구사하고 특히 비유적 형상화에 주력한다. 그중 특히 율격미는 정격률, 변격률, 대구율對句的, 산문율 등을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복합적으로 구사하며 율감의 위치나 범위도 어구, 문장, 문단으로 확장하면서 서정성을 창출한다. 그 구체적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겠다.
아래 「강시僵屍 경력經歷」은 문단 세계에도 팽배한 선배의식 풍자, 특히 경력 단절 후 복귀자들의 선배연하는 행태를 풍자한 사설시조풍의 작품이다. 제시된 문단 ①은 부정형의 산문율 속에 4음보 율격을 부분적으로 가미하다가 6음보와 5음보로 다양한 변주를 유도하였다(밑줄 부분). 문장 ②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조의 종장 형태로 독립했다(사선 /, //는 음보율의 구분. 이하 같음).
① 때는 바야흐로 경력자 우대 시절이라.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들이 쏟아진다. 일주일을 울기 위해 몇 년을 웅크려 쌓은 굼벵이 경력에서부터, // 자글자글 / 땡볕 아래 / 땀방울로 쌓은 / 알뜰경력, // 북풍한설 / 강추위에 / 길눈 다지듯 쌓은 / 살뜰경력을 / 어느 누가 /뭐라 하리. // 애시당초 / 허장성세 / 무적無籍의 / 허공 경력, // 허풍쟁이 / 장삿속의 / 과대포장 / 튀밥 경력, // 교활한 / 사기꾼의 / 애매모호 / 카멜레온 / 경력이라.
② 한 세상 / 원로 고물古物로 / 부귀영화 / 누리소서.
‘원로 고물’은 고문顧問의 언어유희다. 아래의 「강생이 어르기」는 해학미를 구현하기 위한 율격미 변주다. ①~③은 문장 구조가 대구율을 이루는 부정형의 산문율이다. ④ 문장 이하는 조기교육을 해학적으로 그린 4음보 정격률에 부분적 변주(밑줄 부분)를 가미했다. 전체적으로 문장의 유려流麗한 호흡과 경쾌한 리듬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강아지와 손주를 오버랩시켜 두 제재 사이를 자유로운 연상수법으로 시선을 왕복시키면서 식상한 손주 이야기를 벗어나 대상을 강아지로 대체함으로써 중의적 재미를 유도하였다. 어조는 내용에 호응시켜 문장의 장단을 대립시킨 긴장과 이완을 유지하면서 손주를 보는 즐거움이 담긴 유희적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① 문득, 자던 놈이 벌떡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고 ‘옹옹’ 짖는다. ② 누워 있던 놈들도 덩달아 ‘공공!’ 짖어댄다. ③ 아이고, 내 강생이! 하마 밥값들 하는구나. ④ // 동네방네 / 벗님네들, / 내 강생이 / 한번 보소. // 두 달도 / 안 된 것이 / 하마 벌써 / 짖는다오. // 아무렴 뉘 새끼라고. 우리 강생이들이 타고난 천재로고. // 이곳저곳 / 수소문해 / 영재교육 / 시켜야겠다. // 고양이 / 모셔 와서 / 외국어도 / 배우고, // 얼룩소 / 외양간에 / 그림도 / 그려보고, // 종달새 / 선생 만나 / 노래도 / 배운 뒤에, // 딱따구리 / 둥지 찾아 / 피아노도 / 등록하자.
산문 중심으로 쓴 「노인 예찬」은 문장 구조와 의미망을 결합한 대구적對句的 문장의 율격미를 구사했다(/ 부분). 동시에 제재를 꽃 이미지로 변주한 시적 서정의 글로서 청춘과 노인 특성을 시정詩情의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다. 전반적으로 만연체를 기반으로 하고, 노인 예찬이라는 주제에 맞게 애잔하면서도 우아한 어조를 이어갔다. 첫머리 부분이다.
봄은 꽃으로 아름답고 / 가을은 잎으로 아름답다. //
봄과 가을은 모두 붉게 번지는 꽃불의 계절이다. // 봄꽃은 낱낱의 송이마다 꽃으로 피어나고, / 가을잎은 삼삼오오 벗을 모아 단풍으로 번져난다. // 청춘靑春의 피부처럼 싱그러운 꽃은 혼자서도 꽃이지만, / 노년老年의 피부처럼 까칠한 낙엽은 어울려서 꽃이 된다. // 청춘은 화병에 꽂아놓고 감상하는 꽃이고, / 노년은 책갈피에 끼워두고 사색하는 단풍이다. // 화사한 꽃같이 아름다운 청춘은 꽃봄[花春]의 계절이고, / 메마른 단풍같이 아름다운 노년은 잎봄[葉春]의 계절이다.
이상 제시한 음보율의 미시적 율감과 달리 「밥상과 식탁」은 의미망도 결합한 대구를 문단으로까지 확장시켰다. ①은 문장 내의 대구율이고 ②, ③은 각각 어머니와 아내를 내용으로 대응한 문단 간의 대구율 구조다. 지면관계상 문단의 일부만 제시한다.
① 밥상은 어머니의 손맛으로 차려내고, / 식탁은 아내의 정성으로 마련한다. // 과거완료형인 어머니의 밥상에서는 언제나 그리움이 묻어나고 / 현재진행형인 아내의 식탁에서는 오늘도 행복이 번져난다.
② 어머니의 부엌에는 시시때때로 불청객들이 기웃거린다. 마당을 뛰놀던 조무래기들이 누룽지 조각을 찾아 문턱을 들락거린다. 복슬강아지도 코를 킁킁거리며 부지깽이 끝에 얼쩡거리고, 닭들도 덩달아 문턱을 넘어들다 신발에 얻어맞기도 했다.
③ 주방은 아내의 전용공간이다. 아내의 주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긴 하여도 역시 만원이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작은 온갖 전자기기들이 하루 종일 눈을 뜬 채 반짝거린다.
수필은 산문문학이므로 율격미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한 글에서도 의도적으로 부분적 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비유적 형상화로 창작한 아래 작품 「수필」에서 ①, ②는 문장 구조와 의미망의 대구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음보율을 적용시켰다. ①은 4음보, ②는 6음보 변주이다.
① 인생이 / 강물이라면 / 수필은 / 물결이다. // ② 강물은 / 순리로 / 흐르고 / 물결은 / 윤슬로 / 반짝인다. // 순리로 흐르는 물줄기에는 역동逆動의 힘이 가미되어야 물결이 일어난다. 이 역동의 힘이 미학적 변주의 원동력이다. 이 변주는 작게는 반짝이는 잔물결에서부터 영롱한 물방울을 거쳐 찬란한 물보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형성된다.
이외에도 율격미는 공간적 시선 이동, 상하 원근법, 시간적 추이 등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같은 교술양식인 관동별곡의 ‘千尋絶壁을 半空애 셰여 두고, // 銀河水 한 구 촌촌이 버혀 내여, // 실티 플텨이셔 뵈티 거러시니, // 圖經 열두 구, 내 보매 여러히라’의 원근법 시선을 원용한 작법이다.
현대는 리듬 상실의 시대다.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는 리듬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삶의 양식도 리듬을 잃게 되어 생활만 삭막한 것이 아니라 문학마저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다. 김준오 교수는 그의 시론에서 “현대시가 리듬을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율격미의 현대적 의의는 자유시마저 잃어버린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의 시조 창작도 같은 이유다. 대중의 운율적 향수를 자극하는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율격미를 담은 ‘전통수필’을 즐겨 창작한다.
나는 한국 현대수필의 정체성은 ‘현대문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적 내용 가치나 형식 기교가 접맥된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율격미 외에도 전통적 형식기교는 구성, 문체, 어조 등 다양하다. 작법상의 전통 요소 계승은 전통의 부활이 아니라 한 집단의 잃어버린 성정의 회복을 유도하면서 독서의 격조 높은 재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현할 것이다. 이는 오롯이 수필가의 몫이다. ‘융합디자이너’들의 노력에 힘입어 ‘종합문학’으로서의 고품격 수필 시대를 기대한다.
(2018, 『한국동서문학』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