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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4
창세기 30:25-43
야곱의 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많은 재물을 얻게 된 것은 흔히들 하는 말로 “바라봄의 법칙”이나 “끌림의 법칙”으로 신앙을 미신적으로 유도하는 말씀이 아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결혼으로 아들들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없는 이 땅에 오셔서 신부, 곧 교회를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얻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을 하란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야곱이 하란을 떠나는 과정은 철저히 출애굽과 비견되어 말씀한다.
“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25-26절).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라는 표현은 단순히 요셉을 낳고 나니 고향 집이 생각나서 가고 싶어 라반에게 요청한 때라는 뜻이 아니다. 31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 31:11-13)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24절)라고 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계시를 주셔서 언약의 말씀대로 이끌고 계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야곱이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말씀을 이루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이때는 야곱이 하란에 온 지 14년 후의 일이었고 91세 때였다. 그가 일한 것은 두 아내를 위하여 일한 것뿐이었고 그저 라반의 종으로 살았던 삶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야곱이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25절)라고 라반에게 말한 대목이다. “보내어”라는 말의 ‘샬라흐’는 ‘내보다, 풀어주다, 갈라서다, 파송하다, 해방하다’라는 뜻으로 억압되어 있는 자나 종살이 하는 자를 해방시켜 보낸다는 의미의 표현이다(출 5:1).
그렇다면 야곱은 라반의 사위로서 지금까지 처가살이하고 있었다는 개념보다는 그의 아내들을 위한 신부 값(남자의 결혼 지참금)을 치르기 위해서 머슴살이를 하는 종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야곱은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율법에 의하면 주인에게서 아내를 얻은 종이 안식년에 해방되어 나간다면 처와 자식은 주인의 것이기에 단신으로 나가야 하나 처자식을 사랑하여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귀를 뚫어 평생을 주인을 섬겨야 한다(출 21:4-6). 그래서 라반은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31:43)라고 말한다. 마귀가 천하만국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눅 4:5-8).
그러나 자유하게 할 때는 빈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되고 후히 주어서 내보내야 했다(신 15:13-14). 성경은 야곱이 종살이하는 곳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이 “내 고향 나의 땅”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전에 이삭과 함께 살던 곳을 의미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율법에 매여 자기 의를 이루는 하란 땅과 반대 개념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야곱이 하란을 떠나는 것을 출애굽에 대한 개념과 같은 것으로 말씀한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27절). “깨달았노니”라는 말의 히브리어 ‘나하쉬’는 ‘경험으로 알다, 점치다, 점이나 징조로 알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라는 표현은 라반의 입장에서 복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로가 이스라엘을 애굽에 붙잡아 두려고 한 것처럼(출 5:2) 라반 역시 야곱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28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29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28-30절). 야곱이 라반을 섬겼다는 것은 종으로 살았다는 뜻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라고 하였을 때 “번성”은 ‘파라츠’(산산조각나다, 깨뜨리다, 번성하다)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언약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28:14)라고 하였을 때 “퍼져나갈지며”와 같은 단어이다. 즉 번성한 상태가 되었지만 그것은 육체의 상태를 깨뜨려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으로 채우셔야 한다. 그러므로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이루시는 것으로 라반의 소유를 야곱에게 넘겨줌으로 언약의 복으로 채우신다.
“내 집”이란 야곱이 집을 떠나 하란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확인하면서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7)라고 한 그 집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라반의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고 야곱의 아내들은 아브라함이 그러하였고 리브가가 그러하였듯이 고향 친척 집을 떠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애굽의 것을 얻어 성막, 곧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출 25:1-9).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 참고 출 3:20-22)
“31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33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34 라반이 이르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32-34절).
야곱이 라반의 양 떼에게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은 단순히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라반이 주는 품삯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품삯인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33절)라고 하였다. “의”는 ‘체다카’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의를 가리킨다. “대답”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나’는 ‘응답하다, 증거하다’라는 뜻이다. 즉 야곱이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품삯이고 그것으로 ‘야곱의 의’가 증거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아들로서 야곱이 진리가 없는 하란 땅에 와서 신부를 얻고 또한 양 떼를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불리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최종적인 언약의 아들이 진리가 없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얻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아들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얻은 품삯이란 하나님의 자기 백성으로 곧 교회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난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에 라반은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34절)라고 하였는데 우리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헨’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헨’은 감탄사로 ‘자!, 보라!’라는 뜻인데 라반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한 제안이 너무 어리석게 보였으므로 감탄하면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언약을 위해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드신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35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36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5-36절). 여기서 “사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는 삼일 길이다.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이 죽고 살리심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사흘 길이다(출 3:18, 5:3, 8:27, 15:22). 다시 말해서 야곱이 언약 안에서 죽임을 당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이다.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37-42절).
“버드나무”의 ‘아르몬’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플라타너스나무’이고, “살구나무”라고 번역된 ‘루즈’는 ‘아몬드나무’이며, “신풍나무”의 ‘리브네’는 ‘포플러(백양나무)’이다(호세아 4:13에서는 ‘버드나무’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아는 것보다 그것을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38절)라고 말씀한 것이다. “가지”(39절)란 ‘막켈’로 ‘막대기, 지팡이’라는 뜻이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32:10, 출 4:17, 20, 7:19 등).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로만 나타났다.
야곱이 유언을 하였을 때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47:31)라고 한 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지팡이 머리”(히 11;21)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었다. 결국 단순한 나뭇가지가 아니라 나무의 껍질을 벗겨 세운 지팡이 앞에서 새끼를 배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 곧 교회를 얻는 것을 말씀한다.
“튼튼한 양”(41절)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카샤르’는 ‘함께 묶다, 매다, 연합하다’라는 뜻이고, “약한 양”(42절)은 ‘아타프’로 ‘고개를 돌리다, 연약하다, 기력이 없다’라는 뜻이다. 즉 언약의 아들 야곱에게 속하여 연합된 존재만 구원을 얻고 외면하는 자에게는 저주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에게 주어진 품삯은 야곱의 의로 지불되었다. 곧 양과 염소로 비유된 언약의 아들을 통해 얻은 자기 백성들이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절)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하란 땅을 향할 때 하신 ‘야곱의 언약’(28:13-15)을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온전한 사람이다(25:27)(202408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