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노년, 수양하는 사회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말이 없는 스승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말이 없고자 한다(予欲無言).” 이에 놀란 수제자 자공이 반문한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후대에) 무엇을 전술합니까[述]?” 그러자 공자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논어「양화」)
이 대화는 내용상 공자의 노년의 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이란 젊었을 때는 혈기왕성하여 자기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도 나이를 먹고 인생을 알아갈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사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나를 키워주신 노년의 고모님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공자는 하늘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의 대화는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년상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이 만물을 운행하고 생성하는 작용은 동아시아의 사상언어로 말하면 ‘덕’에 해당한다. ‘덕’이란 기본적으로 ‘힘’ 또는 ‘작용’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도 “자연의 가장 큰 덕은 생성하는 작용이다”(天地之大德曰生)고 하였다. 그런데 공자가 보기에 자연은 인간처럼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유덕무언(有德無言)의 존재이다. 공자는 이런 하늘의 덕, 자연의 덕을 닮고 싶다고 어느 날 제자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자가 선생이라는 점이다. 후학을 가르치고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이 어떻게 말이 없을 수 있는가! 노자식으로 말하면 “말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인 셈인데, 이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자공의 반응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영성과 성학(聖學)
대개 ‘말’(言)이란 남에게 자기를 표현하거나 지식을 전달할 때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말을 하는 유언(有言)은 이성과 감성의 차원을 말한다. 흔히 철학이란 이성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고(서양철학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문학이란 감성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공자와 같이 정치나 교육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철학과 문학에 탁월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논리적이고 감동적이어야 듣는 이들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무언’(無言)은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생성작용으로서의 ‘덕’이 말이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이성이나 감성과는 다른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으로 어떤 세계에 해당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영성은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힘을 말한다. 가령 만물을 생성하는 하늘의 덕은 가장 큰 영성의 힘을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고전어로 바꿔 말하면 덕 또는 덕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르는 학문은 성학(聖學)에 해당한다.
물론 고전어의 덕(성)이 단지 영성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덕목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성학 또한 철학과 문학까지를 포함하는 폭넓은 학문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학은 “이성과 감성과 영성을 포괄하는 덕성을 기르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만 문학(文學)이나 리학(理學)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성학(聖學)이라고 할 때의 ‘성(聖)’에는 영성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면 ‘성학’은 ‘영성학’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의 가장 큰 차원이 하늘의 생성의 덕이라고 한다면, 성학=영성학은 하늘의 영성을 닮고자 하는 ‘하늘학’ 또는 ‘천학(天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사람들은 대개 젊어서는 이성과 감성이 발달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영성이 발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영성의 힘은 마치 하늘처럼 말이 없어도 조직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길러준다.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 하늘을 닮아가는 사람,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생각한 바람직한 노년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년에) 전술하고[述] 싶었던 것은 이성이나 감성이 아닌 영성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노년의 공자의 학문세계는 이성교육이나 이성철학 또는 이성정치에서 영성교육과 영성철학, 영성정치로 중심이 이동한 것이 아닐까?
없는 듯 있는 존재
공자의 “말이 없는 하늘”에서 ‘없음’(無)이 단지 언어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면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 될 것이다. 유영모가 보기에 하늘은 “없는 듯 있는” 존재이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애태타가 아무런 존재감이 없지만, 그를 한번 보는 사람은 평생 그를 잊지 못하듯이, 하늘 또한 가시적인 존재감은 없어 보이지만 만물은 그 하늘 아래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일종의 ‘없음’(無)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없는 듯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나 다석이 하늘을 닮고자 했다면 이런 ‘없음’의 존재방식을 닮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없음’의 존재방식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없음’(無)의 존재방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인들은 그것을 ‘비움’(虛)이라고 보았다. 즉 자기를 비우고 비워서 자기가 없는 영역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애태타가 사람들에게 주는 편암함은 여기에 있다. 자기를 비우니까 그 자리에 상대가 들어오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나는 나를 상실했다”(吾喪我)거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없다”(至人無己)고 하였다. 공자식으로 말하면 ‘자기’의 자리에 텅 빈 ‘하늘’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는 “나는 하늘처럼 텅 비어 있고자 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생각
하늘이 만물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텅 빈 그릇이나 거울과 같다. 그릇은 자기를 비워서 상대를 포용하고, 거울은 텅 빈 상태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비추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릇에 자기가 들어 있다면 배제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거울에 자기가 묻어 있다면 자기 의도대로 상대가 비춰질 것이다.
그래서 영성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는 수양이 요구된다. 자기 고집과 자기 주장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자기 부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수양이 쌓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이성의 힘은 약해질지 몰라도 영성의 힘은 강해진다. 즉 덕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덕은 쌓는다/길러준다”(德畜之)고 하였다.
이 축적된 덕의 힘은 지금 세대뿐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까지 미친다. 공자가 “과거 세대를 잇고 미래 세대를 열었다”(繼往開來)고 평가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영성은 “미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이 미래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지옥이 된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한국의 기성세대의 영성의 약화를 꼬집는 젊은이들의 비판이다.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를 세종은 “시후지도”(示後之道)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시후지도”는 “후세에게 보여주는 도”라는 뜻으로, 세종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정치를 했는지를 말해준다. 즉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단지 지금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는 일종의 영성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종의 성학(聖學)이자 영성의 정치였다.
영성없는 근대
한국말의 ‘생각’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에 대한 배려나 관심을 의미한다. 가령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라고 할 때에는 전자에 가깝고, “너 평소에 그 사람 생각하니?”라고 할 때에는 후자를 말한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아우르면 “생각은 배려가 동반된 사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가령 “생각 좀 하고 살아라!”고 할 때의 ‘생각’은 “자기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고려가 동반된 사유”를 말하듯이 -.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을 때의 ‘생각’은 상식적으로는 철학적인 사유를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전자를 이성적 차원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영성적 차원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생각하는 정치”는 이 두 차원이 결합된 정치이다.
흔히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한국의 근대화는 영성보다는 이성이 강조되는 시기였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배를 채워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구적 이성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장년층들은 이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이다. 즉 한 방향의 ‘생각’만 사용한 셈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영성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원불교처럼 “이성이 발휘되었으니 영성을 추구하자”는 운동이 사회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원불교의 슬로건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이다)
문제는 그 영향이 다음 세대에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시후지도”라고는 이성적 생각이 고작이다. 그래서 그 차원에서만 사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헬조선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 우리는 이 곤경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 이 생각의 불균형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노년세대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상적으로는 사회가 영성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생각의 균형이 잡히는 것을 말한다. 젊은이들의 이성 중심의 생각을 노인들의 영성 중심의 생각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인들만이 만들 수 있는 공공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이 ‘공공’(公共=함께 한다)의 범위에는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가 모두 들어 있다. 영성의 힘을 가진 자라야 이 보이지 않는 세대까지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는 도덕
영성으로 충만한 이들은 설교하기보다는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설교하기 좋아하는 어른들을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비판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신호를 보내 왔다. 다만 어른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교실이데아’라는 노래는 “됐어, 이젠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학생들의 ‘생각’은 들으려 하지 않고 선생들의 ‘가르침’만 주입하려는 답답한 교실의 풍경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뒤, 방탄소년단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 전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왜 해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쩔어’) 이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교실이기 때문이다. 오구라 기조 교수식으로 말하면,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도덕지향적” 교실이기 때문이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그 교실에는 창조적인 생각은 없고 도덕적인 가르침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러나 ‘생각’이 동반되지 않은 도덕은 위험하다. 인간을 배려하지 않은 도덕은 독선이고, 독선이 권력화되면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대진(戴震)이라는 유학자가 “리로 사람을 죽인다”(以理殺人)고 성리학을 비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리는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는 도덕을 말한다.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데, 그런 욕구에 대한 생각 없이 이성적으로만 도덕을 생각하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에는 영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딜레마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실심(實心)’을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참마음’은 “세상에 대한 진정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들의 학문은 단순히 “잘 살아보세!”만을 추구한 실용실학이 아니라 “실심실학”이었다(오가와 하루히사, 정인재). 실심실학은 영성실학의 다른 말이다. 거기에는 영성(실심)과 이성(실학)이 조화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실학론은 영성실학이 아닌 이성실학, 즉 실용실학으로 일관되어 왔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이 이론에 기반하여 실용적 근대화가 진행된 역사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패러다임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물질적 근대화, 원불교로 말하면 “물질개벽”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영성실학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영성없는 근대화를 추진한 세대가 영성으로 젊은이들을 인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성과 감성에 충만한 젊은 세대에게 무리하게 영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금 한국이 당면한 딜레마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사회의 인문학 열풍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방향성이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인문학의 핵심은 수양학이었다. 그리고 그 수양을 특히 강조한 것은 조선유학이었다. 근대 일본의 유학연구자인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퇴계학을 “철학적 수양학”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퇴계와 일본유학). 그리고 최근의 한형조에 의하면, 퇴계의 수양학은 일종의 ‘자기 치유’ 기능을 가지고 있다(성학십도: 자기 구원의 가이드맵). 수양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치유하는 것이다
지금의 노인세대는 서구적 근대화의 모든 상처를 한 몸에 안고 있는 세대이다.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인간소외 등등, 20세기의 모든 불행을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자기 수양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명상이나 참선이 유행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 중의 하나는 ‘현대적인 수양학’을 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인문학으로 병든 근대를 치유하는 것이다. 한형조가 퇴계학을 “자기 구원의 도”로 해석한 것도 이러한 기획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을 생각하는 사람들
고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문화를 기록한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는 매년 10월경이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國中大會) 일주일간 음주가무를 즐기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축제와 같은 ‘제천행사’이다. 그 뒤 이 풍습은 형태를 달리하며 줄곧 이어지다가,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으로 중단되고, 동학을 비롯한 개벽종교에 이르면 다시 부활되게 된다
제천행사의 전통은 한국인들이 평소에 어떤 태도로 삶을 살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세종이 후대를 생각하면 정치를 했듯이, 유영모가 평생을 하늘을 명상하며 살았듯이, 하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사는 삶이다. 단지 물질적인 풍작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일종의 수양적 삶이다.
단군신화에서는 이것을 동굴 속에서의 곰의 수양으로 묘사했고(〈다른 하늘을 연 사람들〉, 《개벽신문》 77호), 다산은 이것을 “실심사천”(實心事天), 즉 “영성으로 하늘을 섬긴다”고 하였으며(중용강의보), 손기원은 이러한 성향을 한국인의 “하늘지향성”이라고 하였다(「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 연구
이 하늘이 동학(東學)으로 오면 만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나를 모셔야 하고(侍天主), 타인과 만물까지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事人如天).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함으로써 자기를 치유하고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노비로 천시받던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양반으로 대우받던 이들이 농민과 맞절을 한다. 모든 이가 평등하고 존엄한 ‘하늘’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늘로 하늘을 치유하고 하늘로 하늘을 구원하는 세상이 열린 셈이다.
그래서 문제는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하늘은, 일찍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한 무언(無言)의 하늘이자,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제사지낸 축제의 하늘로, 만물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우주적 영성의 작용이다. 이 우주적 힘[大德]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모심으로써 자기를 치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다음 세대(=다른 하늘)를 길러주는 삶, 이러한 영성적 삶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의 노년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보여줘야 할 “시후지도”가 아닐까?
출처: <동양일보> 2018.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