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공간에서 우스갯소리로 돌아다니는 말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거면 돈이라도 주던가.’ 명절,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이 잔소리, 심지어 마음에 상처가 되는 소리를 들을 때, 내게 실제적인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차라리 괜찮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위와 같이 이야기는 ‘겸애교리’를 주장한 묵자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묵자는 사랑이란 반드시 서로 간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즉, 묵자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타인과 더불어 이익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묵자는 어떤 행위 혹은 정치 제도는 백성의 이익을 실제로 증가시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더불어, 어진 이(仁人)는 반드시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를 물리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묵자가 과거 지적하였듯, 오늘날에도 현대 문제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협박하고, 다수가 소수를 괴롭히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묵자』, 「겸애 하」편 1-2장) 묵자는 이처럼 천하의 큰 해가 생기는 까닭을 ‘분별(別)’ 탓이라고 보았습니다.
많은 유교 철학자가 강조하듯 저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별애라고 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까운 사람을 먼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판 모르는 남보다도 내 친구, 가족이 소중한 것은 몹시 당연하여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별애는 결국 이기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따라서 별애는 현실적으로 도덕적 행위 원리이자 근거가 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는 도덕적 당위 차원에서 겸애를 주장합니다. 만일 별애를 따른다면, 누구도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여 도덕적 행동을 하는 이는 없을지 모릅니다. 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선한 행동을 하는 소방관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직업윤리에 걸맞으며 도덕적 행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별애를 따른다면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주변 내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을 슬프고 아프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하여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이름도 얼굴도 모를 이에게 책임감과 연대 의식을 가지고자 할까요? 유교의 입장에 따르면 이는 필시 별애가 확장된 결과일 터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가까운 데서부터 사랑을 확장하지 않아도 사랑을 실천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별애의 확장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20세기 정치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존 롤스라는 사람을 꼽습니다. 그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이 될 때만 허용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강조하였던 롤스의 입장을, 우리는 오래전 묵가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묵자가 강조하였던 차별 없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의 대상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도덕적 행동은 언제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듯, 묵자의 겸애는 오늘날 현실, 도덕적 차원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물질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려나 인권 보장을 단지 언어로서만 이야기하고, 이를 현실 사회의 제도 등으로 실현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사회적 약자가 경시되는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우선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의로운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위로서의 겸애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