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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52. 자해공갈
독일에서 온 통밀제빵책을 펼치면 ‘밀가루를 대량생산하면서 성인병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서두가 시작된다.
빨리 부패해 버리기 때문에 뺄 수밖에 없는 배아 속에 가장 중요한 고급영양소가 다 들어있으니 밀을 통째로 갈아 만든 통밀빵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호밀의 향이 참 좋았고, 통밀빵은 묵직하게 무게가 나가면서 배가 든든해지는 맛이 있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실습하는 방법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반죽하고 발효시켜 구워내는 기술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제 본격적으로 판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강매하는 방법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통밀 호밀 옥수수 보리 등 4 가지 곡식으로 만든 통밀식빵으로 건강을 챙기시라는 식의 안내문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발송했다.
이현주목사님이 고정으로 주문해 주셨고, 홍선생님 주변의 지인들 중 꽤 여러 사람이 밥 대신 빵을 먹어야하는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우체국소포로 배달되다 보니 가끔 늦게 배달되어 파랗게 곰팡이로 뒤덮여 있는 식빵을 식탁에서 펼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항의성 문의전화가 오면 배짱 좋게 ‘곰팡이는 칼로 긁어내고 솥에 쪄서 드시면 맛이 더 좋다’고 큰 소리를 쳤다.
독일식 통밀빵이란 광고를 알음알음으로 전해 듣고 독일에서 유학하셨던 교수님들이 여러분 신청을 해주셨다.
그러나 초창기 주 고객은 풀무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었다.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로 30개 씩 학교의 무인판매대에 갖다 놓으면 학생들이 사 먹는 식이었고 항상 다 팔렸다.
빵을 핑계대고 학교를 드나들며 선생님들도 사귀게 되고 학교사정도 귀동냥으로 얼추 듣게 되었다.
한번은 여선생님 중 한 분이 결혼식 날짜가 코앞에 닥쳤는데 코끝에 뾰루지가 나서 노랗게 곪는 통에 큰 고민에 빠져있었다.
교무실에 둘러앉은 동료선생님들이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내가 선생님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선생님! 상태를 보니 코끝의 화농이 심해서 팽팽하게 피부를 당기고 있고, 얼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급소부위라 통증도 심하겠네요. 수술을 하면 칼자국이 남아서 얼굴 이미지가 달라지니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요. 또 고약을 붙이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러면 종기의 뿌리가 빠지면서 코끝에 구멍이 뚫려 보기가 흉합니다. 코는 얼굴의 중심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코끝이 너무 아파서 신경이 거기로 집중돼 잠도 잘 수 없고요. 결혼식은 곧 다가오는데. 큰일이네요.”
“형편은 알겠는데 너무 당황하지 마시구요.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몸이 과로로 피로가 너무 쌓여서 그런 것이니까요. 오늘 당장 현미식초를 사서 맥주컵에 4분의 1정도 채우고 물을 한잔 가득 부어 마시면 산성화된 몸이 중화가 되면서 곪아서 성난 것이 많이 완화가 될 겁니다.
또 저에게 식용숯가루가 좀 있는데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넉넉히 해서 일종의 숯가루팩을 만들어, 코와 코 주변부에 넓고 두껍게 바르세요. 발라놓으면 코끝이 곪으면서 생기는 열을 숯이 다 빨아들여 한결 시원해질 겁니다.
열 때문에 밀가루가 말라붙으면 살을 물어 당기면서 아프니까 떼어버리세요.
그리고 반죽 남은 것을 똑 같은 방법으로 다시 붙이면 됩니다.
숯가루반죽은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두고두고 쓰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당장 통증도 가라앉고, 화농한 부분도 고대로 가라앉으면서 흉터 없이 깨끗이 나을 겁니다.”
“정말요? 그렇게만 되면 정말 아무 걱정도 없겠는데.”
“오늘밤부터 매일 그렇게 하시면 잠도 잘 주무실 것이고. 결혼식은 무사통과입니다.”
날짜가 지나 효과를 본 여선생님의 광고로 여기저기서 건강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시골동네의 돌팔이가 되어있었다.
덕동에서 원식이형에게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것을 관련서적들을 사서 읽어가며 논리를 보강했다.
주로 감자생강찜질, 부항, 지압, 수지침이 돌팔이의 처방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녔다.
드디어 아내의 화가 폭발했다. 내가 부항가방 들고 뛰어다니며 너무 바빠지자 빵공장일이 아내에게로 비중이 넘어간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가외의 일에 더 열성을 쏟는다는 아내의 불만이 담을 넘어가자 금방 동네 아주머니들의 충고와 질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홍동은 여성들의 연대와 파워가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곳이었다.
홍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을공동체였다.
그러고 보니 마을농부들의 아내 중에 대학출신들이 많았다.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마오쩌뚱의 문화혁명 당시의 하방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이 누구인가? 풀무학교 출신들이다.
풀무학교출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교양국어’이다.
‘교양국어’는 풀무학교에서 자체제작해서 쓰는 국어교과서인데 책의 목차를 메우고 있는 저자가 풀무학교설립자인 이찬갑 주옥로선생을 비롯해 한용운 함석헌 톨스토이 페스탈롯지 불트만 토인비 우찌무라 간조 칼릴 지브란 말틴 루터 파스칼 올리버 크롬웰 에릭 프롬 칼 바르트 아인슈타인 비노바 바베 자크 마리땡 김구 조만식 안창호 시몬느 베이유 마틴 부버 거기다 성서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나도 모르는 각계각층의 위인들의 글들이 고등학생들의 사상적 기초를 놓아주고 있었다.
대학교를 다녔다 할지라도 이런 위인들의 글들을 다 섭렵한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의 후신이라는 기개와 자부심이 학교 내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실 홍동의 거리를 창문 밖으로 내다보고 있으면 세권으로 묶어진 ‘교양국어’들이 각자의 표정을 지닌 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는 학교분위기가 평소와 달라서 이상하다 했더니 학교에서 서무과장을 맡고 계신 함석조선생님(함석헌 선생의 육촌동생)이 무인가게의 빵 판매 착오로 며칠째 단식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사고를 친 학생이 나타날 때까지 며칠째 계속 단식을 하신다니 70 가까운 노구에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어 학교분위기가 무거웠던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들의 동조단식으로 파장이 커지니, 장난으로라도 빵을 몰래 먹은 학생으로서는 참 기가 막히는 노릇이고, 도덕적 압박에 이실직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함석조선생님의 단식은 주제가 다양했다.
때로는 흡연학생 때문에 때로는 해이해진 학교분위기 쇄신을 위해 단식은 계속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반성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학교를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법대에 적을 두고 2학점짜리 교육학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집안의 외할머니가 강화도에서 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는 교사자격증을 위한 교육학이수를 반드시 하라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사나이로 태어나서 오죽 할 일이 없으면 학교선생을 하냐고 깨끗이 무시했던 것인데, 풀무학교를 접하고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풀무학교에서 만난 이런 선생님들 밑에서 이런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사춘기를 보냈더라면 그 시기를 그렇게 암울하게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나와는 확연히 다른 인격이 형성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풀무학교는 엄연히 농업기술고등학교이기도 하므로 경운기를 몰고, 논에 들어가 삽질을 하는 학생들이 언제든 눈에 띄었다.
노동과 학문이 함께 하는 풀무학교의 이상주의가 학교 입구에만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풀무학교에는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라는 재미있는 경구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풀무학교에 대한 얘기를 어디를 가든 입에 달고 다녔다.
결국 막내여동생이 결심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홍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린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도 또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합당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매제도 사업이 정리되는 대로 합류하기로 하고. 교사자격증이 있고, 경력도 있는 막내가 풀무학교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갓골어린이집에 교사로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의사인 장인어른도 풀무학교에 와서 학생들의 건강검진도 해 주며, 장모와 함께 우리 집 문 앞의 꽤 큰 채소밭을 일구는 등 시골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풀무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이면서, 오랜만에 사는 것처럼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과는 매일 통밀 호밀 보리 옥수수를 씻어서 건조대에 말리고, 다 말린 곡식은 포대자루에 담아 동네방앗간에 자전거로 싣고 가서 가루로 빻아오는 일인데, 방앗간 아주머니가 무슨 이유인지 말을 함부로 하면서 자꾸 모욕을 주니 사람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내가 가면 그렇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빨리 제분기를 사든가 분쇄기를 사자고 해도 더 이상 빚을 낼 수는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분쇄기 살 돈을 벌 때까지 참고 기다리자니 그 안에 방앗간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내와 분쇄기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한 후에 입이 댓발 튀어나온 상태로 빵반죽을 했다.
발효가 끝나 빵을 구우려고 조리실에 가보니,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와 있어야 할 반죽의 허리부분이 몽땅 푹 꺼져있어 다시 반죽을 해야 했다.
반죽이 꼭 살아있는 생물처럼 매번 예민하게 사람의 감정을 타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살아있는 생이스트를 쓰기 때문에 이놈이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평안한 마음으로 반죽을 해야 제대로 부풀어 오르니 부부싸움도 함부로 못 할 판이다.
아내와 나는 빵을 구우면서도 서로 의견이 달라 계속 부딪쳤다. 아내는 몸에 더 유익한 좋은 빵을 만든다며 극단적 이상주의로 가다가 우유도 줄이고 설탕도 줄임으로서 정말 맛이 없는 쓴 빵을 만들어냈다.
처음 빵맛을 보는 사람은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얼른 뱉어버릴 정도였다.
워낙 고정고객임에도 불구하고 빵매출은 점점 줄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딴전을 피우는 척 하면서 아내의 눈치를 보아가며 슬쩍 설탕을 좀 더 넣고 우유도 더 많이 부어 반죽을 했다.
건강에 유익하다 해도 먹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아무리 설득을 해보아도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 아내에게는 당할 재주가 없었다.
아내의 고집이 신념과 만나면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채플린의 코메디영화를 찍는 것처럼 아내와 내가 숨바꼭질 하듯이 빵을 만들어야 했다.
이상주의와 신념도 좋지만 먹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어느 정도는 타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스트의 쓴 맛을 보여주기 위해 빵을 만드는 것은 아니므로.
좀 넓은 부엌에 비닐만 친 꼴인 빵공장에 네 살배기 윤경이가 나타났다.
이런저런 제빵기계나 조리도구를 만지며 손장난을 하며 노는 게 일인데, 주로 작업대에서 빵반죽을 주무르고 있을 녀석이 오늘 따라 표정이 어째 이상하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얼른 요 녀석의 꼭 다문 입을 쳐다보니 무언가 감춘 것 같아 순간적으로 뺨을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놀라 울고, 억지로 벌린 입안을 들여다보니 파리를 죽이려고 작업대 한 구석에 종이를 깔고 쏟아 놓은 파란 살충제 가루가 혀 위에서 녹고 있었다.
설탕인 줄 알고 입 안에 슬쩍 털어 넣은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살충제 가루를 급히 긁어내고는 우유를 먹이고 등을 두드려 토하게 하는 등 난리를 쳤다.
윤경이는 그 뒤 손님만 오면 자기 손으로 자기 뺨을 힘껏 때리며, 살충제를 먹었다가 혼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많이 아프기도 했겠지만 애비에게 느낀 배신감이 꽤 큰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뺨을 맞은 경험이 충격이었든지 한동안 자기 뺨을 때리고 다녔다.
아이가 네 살이 넘도록 말을 잘 못해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말을 배워야할 시기에 또래들이 없는 산골짜기를 전전하며 살다보니 말 배울 기회가 없어 그런가보다 해서 일부러 여기저기를 마실 다닐 때 마다 데리고 다녔다.
잔치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윤경이녀석이 어른들 흉내를 내며 술을 따르더니 홀짝거리며 마신다.
분명히 입에 쓸 것 같은데 꽤 잘 마신다.
골탕 좀 먹어보라고 쓴 소주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잔을 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아빠는 나 같은 꼬마에게 술을 먹이는 아빠래요. 우리 아빠 혼내주세요.”
“거 왜 어린 아이에게 술을 마시게 해? 장난도 할 게 따로 있지.”
“그게 아니고. 골탕 좀 먹이려고.”
“병아리만한 놈에게 술을 먹여? 에끼 이 사람! 남의 자식이라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동네친구들은 배꼽 잡고 웃느라 뒤집어지는데 그 날은 동네어른들에게 욕을 됫박으로 얻어먹은 날이었다.
여하튼 윤경이놈이 말을 안 하고 있을 뿐이지 아주 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풀무학교에서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풀무학교 내부에 당시 정권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지목되어있는 전교조에 소속된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김현자선생님이었다.
원래는 두 분이었는데 학교에 미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 분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다는 말이 들렸다.
부부교사인 그 분의 남편도 전교조선생님이라 여지없이 학교에서 쫓겨나왔는데, 풀무학교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위처럼 무겁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일체 관의 지원을 받지 않는 풀무학교인지라 제재를 가할 길이 없다는 것이 당국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학교가 정권의 입장을 거스르며 독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학교는 늘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가끔 남편인 민병성선생님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홍성시내로 나갈 때가 있어서 당시의 전교조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남은 선생님들이 박봉을 쪼개어 거리로 내몰린 전교조선생님들의 생계를 도우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홍동에서 가끔 한번 씩 뜻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만들어 놀자고 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각자 따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온 식구가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모두들 바쁘게 잘 준비를 하는데 밤중에 윤경이가 불자동차 장남감을 사달라고 해서 지금은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더니 어느 새 몸을 날려 벽에 머리를 부딪쳐 버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아들놈의 자해공갈에 혼비백산 비명소리가 온 집을 뒤덮는다.
너무 빨라 제지할 틈도 주지 않는다.
가미가제특공대가 소형비행기로 항공모함을 들이박는 식이다.
머리통을 만져보니 큰 혹이 이마에서 계속 튀어나오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누굴 닮아 아이가 이러냐고 양가 집안의 면면을 훑으며 책임공방이 벌어진다.
아이의 성질을 바로잡지 않으면 큰 일 나겠다고 하나마나한 처방과 대책이 난무한다.
8대 독자인 윤경이가 후손을 볼 때까지는 무사히 키워야한다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나의 목청을 더욱 높이게 한다.
소동이 잠잠해지고 생각해보면 결국은 부모 탓이다.
마음에 무언가 한이 맺혀 끊임없이 누군가를 성토하며 살아가는 아비와 남편 잘못 만나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아내의 원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아이로 하여금 이런 극단적인 소통방법을 선택하게 하는 것일 게다.
부모가 둘 다 고집불통이라 변하지 않으니 아이의 자해공갈극은 계속 될 판이고 아들놈의 머리통은 우환으로 성할 날이 없는 것이다.
저러다 무슨 큰 일이 터질 거라고 다들 불안해하던 중에 결국 또 사고를 쳤다.
윤경이가 디즈니그림책을 사달라고 해서 요즘 빵이 잘 안 팔려 돈이 떨어졌다며 좀 기다리라고 했더니 어느새 몸을 날린다.
이번에는 이불을 깔아놓은 방바닥이다.
그런데 재수가 없었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더니 숨도 못 쉬고 맴맴이를 돌길래 얼굴을 들쳐보니 한 쪽 눈에서 핏물이 쏟아진다.
이불 속에 있던 불자동차 장난감의 차지붕 위 빨간 경보등에 정확히 눈을 갖다 댄 것이었다.
눈알이 빠졌다고 울부짖으며 아이를 업고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뛰었더니 다행히 눈꺼풀 속이 찢어진 정도란다.
고마운 것은 그 사건 뒤로는 그래도 들이박을 장소를 보고나서 나른다는 것이었다.
디즈니그림책 전집은 누가 동네쓰레기장에 낡아서 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잘 씻어서 말려 아들의 소원을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