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현 옥
천직이라 여기고 모든 정열과 젊음을 불태웠던 교직을 떠난 지도 14년이 흘렀다. 그 무렵 새로 들어선 정부는 매스컴을 통해 노령교사 한 명을 퇴직시키면 젊은 유능교사 2~3명을 채용할 수 있으며, 대학진학도 성적보다는 특기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등 웃기는 소리만 연발하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이 진퇴를 결정할 때라 여기고 명퇴 신청서를 내고 말았다. 송별연에 참석하여 정들었던 여러 동료들과 함께 소줏잔을 기울리며 석별의 아쉬움을 나누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차창으로 온갖 상념들이 뇌리를 스쳤다.
다른 친구들은 교감, 교장 승진이라고 한참 인생의 불씨를 지피고 의욕과 희망에 넘쳐 삶의 보람과 결실을 향유할 즈음, 나는 직장에서 밀려나 내일부터 백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퇴직한 게 후회스럽기도 하고 앞날이 불안하기도 했다. 기원과 방콕(?) 대학에서 몇 개월 지내면서 뭘 좀 해 볼까 하고 여러 궁리를 해 봤지만 뾰쪽한 묘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월도 보낼 겸 놀기 삼아 시작한 게 결혼 중매업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 업계에 들어와 보니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큰 애로는 처녀는 제법 많이 가입이 되는데 총각이 귀하다는 것이다. 7,80년대만 하여도 부산에도 대기업들이 많았다. 국제그룹, 김지태 계열사, D목재, 한진중공업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체가 즐비했고 학교에도 남교사가 많았지만, 지금은 100대 기업에 들어가는 회사가 하나도 없다.
더욱이 학교에는 여교사가 남교사의 2~3배에 이르고 있으니 총각 기근 현상이 아주 심각하다. 이러한 지역의 현 실정을 모르는 아가씨들은 사춘기 때의 환상에 젖어 언젠가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에 취해 있다. 게다가 요즈음 처녀들은 우리 세대와는 달리 고생을 모르는 온실 속에서 자란 탓으로 자기 feel에 안 맞으면 아무리 다른 조건이 좋아도 퇴짜를 놓곤 한다. 한마디로 결혼은 인생의 필수 코스가 아니라 선택사항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많은 총각들이 국내에서 짝을 찾지 못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어 해마다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간 5,60쌍의 짝을 찾아주어 보람과 흐뭇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가슴 아프고 배신당한 추억들도 많은데 그중 k양과 J양의 결혼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K양!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초승달같이 예쁜 눈매, 외모로는 특급 신부감이다. 그녀의 엄마 얘기로는 ○○미인대회에서 ‘선’으로 뽑혔다고 한다. 그러나 총각이 귀하다 보니 성혼은 잘되지 않았고 가입한 지 3년 만에 결혼이 성사되었다. 상견례를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양쪽에 확인을 하니 1주일 전에 상견례를 했다고 한다. 상견례가 끝나면 성사료를 곧 지불하는 게 이 업계의 관행이다.
그러나 상견례를 치르고 2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어 전화로 결혼 성사료를 요구했더니 결혼식 끝나고 보자는 것이다. 성사료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3~4차례 전화로 성사료 지불을 요구했지만 반응이 없어 소액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내용증명서를 발송했다. 우편물을 보낸 지 며칠 후에 신부 아버지가 사무실로 찾아 와서 성사료를 깎아 달라는 것이었다. 안 주고 떼먹으려다 내용증명 받고 소액재판에 회부되기 싫으니 할 수 없이 온 게 분명했다. 교장까지 한 자가 참 어이없다. 얄미웠지만 조금 양보해서 해결은 지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어느 날 오후 K양의 어머니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나는 내심으로 K양의 남동생 결혼을 부탁하러 온 줄 알고 반가이 맞았으나 그녀의 안색이 차가와 보였다. 소파에 앉아마자 K양 시갓집 욕부터 쏟아내기 시작했다. 임신한 내 딸에게 태아에 좋다는 한약을 달여 먹여 체질에 변화를 가져 왔고 그로 인해 내 딸이 난소암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말은 소장이 중매를 잘못해서 내 딸이 죽었으니 중매료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억누르고 위로의 말을 드린 뒤에 난소암이라는 것이 한약 먹였다고 걸릴 병이 아니며 남자 측에서 보면 신부 잘못만나 신세 망친 셈이 되었으니 그쪽 사정도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녀는 온갖 욕설과 행패를 부리며 나의 멱살을 잡으려는 태도였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피해 버렸다.
그 뒤로도 그녀는 죽은 딸 생각이 나면 사무실로 찾아와서 나를 괴롭혔다. 경찰에 연락해서 일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딸 잃은 엄마의 심정이 어떠하랴 싶어 꾹 참고 버티어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안타깝고 쓰디쓴 추억이다.
J양(故 鄭龍鎭 副敎育監의 장녀)의 결혼은 성사시킨 결혼 중에서 가장 보람있고 흐뭇한 일이었다. 鄭 副監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J양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예쁘고 여성다운 현모양처감이었지만 총각이 귀하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5년 동안 애쓴 뒤에 겨우 성사시켰더니 곧 공주를 얻었다.
鄭 副監은 그 외손녀가 얼마나 귀여웠던지 휴대폰에 사진을 입력해서 나에게 몇 번이고 자랑하곤 했다. “현옥이 니 덕이라고……”
그 외손녀가 막 돌을 지내고 무럭무럭 자라면서 재롱을 한창 피울 때 그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주사 쇼크로 갑자기 타계하고 말았다. 정말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장례식 날에 나는 친구들과 같이 실로암 납골당에 갔다. 며칠 전까지 다정하게 웃고 자상스럽던 그 친구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납골당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너무 충격 이상이었다. 그 후 고인의 1주기에 친구 몇 명과 같이 납골당을 찾았다. 유골단지 앞에는 당신이 딸처럼 귀여워 사랑했던 외손녀 유진이의 사진이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 유골을 지키면서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돌아오는 차창으로 鄭 副監과의 40여년 우정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교대 1학년 때 태종대로 소풍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副監과 함께 남포동 바에 들렸다가 돈이 없어 낭패당한 일이며 대연동 내 하숙집에서 휴대 전축을 켜 놓고 밤새도록 맘보춤을 췄던 친구. 결혼식 때에는 모임에서 옷장을 맞춰 리어카에 싣고 가 신방을 차렸던 일. 나의 선친 회갑연이라고 이해웅 친구와 같이 이십리 산길을 달려와선 막걸리 잔을 들고 허허 웃던 용진 친구. D대학 야간부 시절 담치기 하여 영어시험 커닝했던 너와 나. 돌이켜 볼수록 정겹고 아름다웠던 추억이다.
친구야! 그토록 사랑하고 귀여워 했던 외손녀가 곁에서 지켜주니 잘 있겠지. 이젠 나도 바에서 술 한 잔 살 정도는 되니 내가 그곳에 갈 때 신나게 놀 수 있게 예쁜 영계들 많은 술집 하나 정해 두라고 알았지. 그때 남포동 술집에서처럼 돈 없어 혼나지는 않을 테니까.
먹세 그려 먹세 그려
또 한 번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주리어 메어가나
유소 보장에 만인이 우려예나……
친구야! 문득 송강의 장진주사가 생각키네. 문디 친구야, 좋아했는데 보고 싶다. 용진아!
-정용진 부교육감의 명복을 빌며…
2013년 10월 나 홀로 사무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