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홉 짐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오면 옛날 얘기 듣습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울 엄마는 해마다 정월 열 사흗날엔, 밥상머리에서 작은설 대보름 얘길 꿈처럼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열 나흗날이 되면 오곡밥을 아홉 그릇 먹고(옆집 부엌 솥단지 속에 숨겨놓은 밥을 훔쳐 먹으면 더 좋고), 땔나무를
아홉 짐 하고, 마당을 아홉 번 쓸라 하였습니다.
어린시절
‘아홉’이란 숫자가 하도 신기해,
“엄마,
왜 아홉이야?”
“응,
잘 먹고, 일 잘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지.”라며 머리를 아홉 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월 한 달 몸을 깨끗이 하고
조신(操身)하라 하였습니다.
“조신?”
“행동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라.”며 이번엔 등을 아홉 번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 손길이 얼마나 따스하고 정겨웠던지 아직도 머리맡에선 서늘한 바람이 일어납니다.
“오늘은
묵은 김치 먹으면 안 되여.”
“....?”
묵은
김치를 먹으면 일년 내내 살 쐐기(가려워 따끔거리는 여름 철 피부병)가 돋아 큰일 난다 하셨습니다.
뿐이겠습니까.
개나 소와 같은 길짐승에게는 목에다 복숭아 나뭇가지를 꺾어 목사리를 매줘야 무병장수 한다하고, 뜰 안에 있는 나무마다 잘 생긴 돌을 얹어놔야
열매가 많이 달려 풍년이 든다 하셨습니다. 외양간 소에게는 키에다 밥과 나물을 퍼서 주고 뭘 먼저 먹나 잘 살펴보라 하였지요.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하여 제발 밥을 먼저 먹게 해달라고 어린가슴에 손을 얹고 얼마나 빌었던가.
- 복숭아 목사리를 한 1개월짜리 '아롱이' /장국광 회장님 축하드려요. 인사 받으세요.
어린
나이에 말이 나무 아홉 짐이지, 그게 어디 쉬웠던가 싶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조선낫과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한
짐부터
여덟
짐까지는 참나무 두개피를 지고 올 때도 있고, 썩은 나무 세 등걸을 달랑 저 나르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홉 짐 째는 온 정성을 다해
꼿꼿하게 쪽 뻗은 싸리가지나 아장구(삭정이의 강원도 사투리)를 차곡차곡 묶어지고 오면, 어머닌 오곡밥을 고봉으로 담아주며 많이 먹고 어서어서
키가 쑥쑥 자라 큰 인물 되라 하셨습니다. 어머닌 첫 짐부터 여덟 짐까진 아껴서 조금씩 때었으나, 아홉 짐 것은 아깝다 일년 내내 아궁이에 넣지
못하고 부엌 이 구석 저 구석에 굴려내다 삭아내려 결국 밭 거름으로 버리곤 하였습니다. 더위 팔며 땔나무 아홉 짐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 데,
나도 어느새 어머니 나이 되어 서러운 옛이야기 듣습니다.
- 아이고 허리야, 나무 아홉 짐
정월
열나흘 작은설명절, 어머니가 들려주던 그 옛날의 신토불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오늘도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땅콩
알갱이들을 다시 입에 넣고 더위 파는 연습을 해 봅니다. ‘내 더위 사거라.’ ‘내 더위 판다.’ 해보지만, 성큼 내 더위를 사주겠다던 엄마
목소리 대신 나무 숲속을 스쳐가는 겨울바람만 윙윙 산등성을 넘어갑니다.
조선낫과
톱을 들고 바싹 마른 삭정이와 관솔들을 찍어내 그들먹하게 지게에 담아지고 산비탈을 내려오려니 다리가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이제 겨우 한 짐 째인 데 벌써 허리가 저리고 다리가 휘청거리니 언제 아홉 짐을 채울까 싶습니다.
개울가에서
잘 생긴 돌들을 주어다가 대추나무에 올려놓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진 방아다리 사이에 돌을 얹어 놓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대추나무도 합방이
싫지 않은 듯 나무 우듬지를 살살 흔들어 보입니다. 올해에도 미친 싸리비병에 걸리지 말고 작년처럼 대추가 주렁주렁 달리고, 나도 대추처럼
단단하고 올곧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벼봅니다.
- 대추나무 시집 장가 보내기
병술
년 개띠를 맞이하여 한 달 전에 우리 집 아롱이가 하얗고 예쁜 강아지를 일곱 마리나 낳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지금 수놈 무녀리
한 마리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새 젖을 떼었는데 징징대지도 않고 우유면 우유, 밥이면 밥, 잘도 먹어대며 조금씩 재롱을 떨기 시작합니다.
아기아롱이가 건강하게 잘 크도록 개 복숭아 나무줄기를 하나 잘라 목사리를 매달아 봅니다. 어린것은 멋도 모르고 귀찮다 뱅뱅 굴러댑니다.
- 딱! 부럼 하나 물고 깨물어 보시지요
부럼거리로
밤, 잣, 호두, 땅콩을 구해다 모둠 접시에 담아봅니다. 어느새 해맑은 봄볕이 그득하게 고여 따사하게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보름날 아침, 부럼을
깨며 어머님 목소리도 듣고 그리운 것들을 떠올릴 생각을 하노라니 날마다 노루꼬리만큼씩 키가 자라나는 겨울 해가 화악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엔 점점 배가 불러오는 열나흘 저녁달을 기다리며 눈썹이 세지 않도록 밤을 꼴딱 새워야 할까봅니다.
첫댓글 이 글을 새로운 짐을 지고 가는 장국광 회장님께 바칩니다. '나무 아홉 짐'의 깊은 뜻을 혜량하셨으면 합니다.
아주 먼 옛날의 전설이 되버린 줄 알았던 정월 대보름 무렵의 세시풍속이 솔바우골 와우님네 집에 온전히 보전된 것을 보고 감개무량입니다. 정이 넘쳐나던 시골집, 쥐불놀이로 들뜨던 보름밤....님이 거기 있음에 행복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건승, 건필하시길....
역시 솔바우 형님 글입니다. 왜인지는 말로 할 수 없지만 우리 풍속에서 우러나는 구수한 맛, 잘 보고 갑니다.
솔바우 선생님,그림처럼 지나가는 옛 장면들이 그립습니다. 아롱이가 참으로 귀엽군요.
잘 읽었습니다. 장국광님은 행복하시겠습니다. 막역지우시지요? ㅎ 솔바우님께서 카페를 인수하셨으면-.
솔바우님, 정월대보름 얘기 새삼스럽게 잘 읽고갑니다. 그보다 저를위해 좋은글 지어 주시어 몸둘바 모르겠나이다. 너무 늦은 인사라 미안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여생 마무리해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