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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제(聖諦)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온갖 것을 그 과보의 형태를 따라서 고락의 원인과 결과를 잘 구분하여 놓은 진리를 말한다.
1. 고성제(苦聖諦) : 고통에 대한 말씀
2. 집성제(集聖諦) : 번뇌에 대한 말씀
3. 멸성제(滅聖諦) : 평화에 대한 말씀
4. 도성제(道聖諦) : 수도에 대한 말씀
(1)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
어떤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어, 죽고, 미운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라고 取着취착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가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 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 등의 집기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 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 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四聖諦는 녹야원에서 교진여등의 다섯 수행자를 위해 부처님께서 설파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가르침이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緣起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인데 어떻게 해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로 진리의 바퀴를 굴리신 내용이 사성제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緣起法은 순수원리라면 四聖諦을 비롯하여 中道, 五蘊, 無常, 無我, 空등등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을 응용하여 만든 實踐體系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초의 설법에 四聖諦를 설하신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이는 사성제가 아닌 다른 가르침도 가능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성제의 가르침이 최초로 설해졌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中阿含 象跡喩經>에 보면 비유를 들어서 설하기를,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이 四聖諦에 다 포함된다고 설하고 있다.
우리는 <象跡喩經>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부처님께서 최초의 설법을 사성제로 하신 것을 충분히 납득이 간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사성제에 포섭 되는지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곧 최초의 가르침을 편 부처님의 의도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부처님의 의도는 중생들이 겪고 있는 온갖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한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노라”(중부경 22)라고 역설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명쾌하게 일러주신 말씀을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이 한 가지 원리의 적용일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이든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사성제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성제야말로 어떤 시대의 부처님이라해도 한결같이 가르치셨을 핵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성제야말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다 주는 최상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신 자신이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성제의 가르침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와 하는 중생에서 괴로움을 해탈한 부처라고 불리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리우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바로 네가지 진리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붇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곧 중생이 부처되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가령 어떤 장소를 목적지로 정했다면 그 목표가 과연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구경의 곳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지의 성격에 따라서 나아갈 출발점과 방향, 수행방법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목적에는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것과 인생고를 해결하는 것의 두가지를 설정할 수 이다.
그러나 불교수행의 목적은 인생고의 해결를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만일 단지 존재의 실상만을 밝히는 것에만 주력한다면, 그것은 철학등의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생고의 해결과은 무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존재의 참모습을 찾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존재의 비밀을 알아서 그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생고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면, 존재의 본질를 추구한 그 진리은 마치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불교는 진리가 우리들의 여러가지 괴로움을 해결해 줄때에만 그것을 진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치 못할 경우는 그 진리는 현실에서 증명 불가능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 無記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箭喩經(中阿含卷第60)이라는 경전에서 형이상학자가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으면서도 치료를 받기 전에, 어떤 종류의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으며, 누가 쏘았는지를 알고싶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이 경전의 교훈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며, 정신생활에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라는 것은 “自我와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라는 등의 열가지 내지 열네가지 문제를 말한다.
그러나 이 경전의 말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부정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利益이 없고, 梵行에 나아갈 수 없고, 出離,無欲,寂滅,止息,智,覺,涅槃에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상응부경전에는) 설하고 있고, 같은 漢譯경전에는 “법에 상응하지 않는다(非法相應).”라고 덧붙여 설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긍정할 수 있은 것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단정하여 설하는가! ‘이것은 고다.’ ‘이것은 고가 일어나는 원인이다.’ ‘이것은 고의 소멸이다’ ‘이것은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을 나는 단정하여 설한다.
‘무엇 때문에 나는 이것을 단정하여 설하는가’ 이것은 目的에 맞고, 청정한 수행의 기초가 되고, 세속적인 것을 厭離하는 것, 欲情에서 떠나는 것, 煩惱를 制滅하는 것, 마음의 平安,智,正覺,涅槃에 安住하는 까닭에 나는 이것을 단정하여 설한다.”라고 하고 있다.
결국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인생의 고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말하자면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왜 괴로운가가 문제의 초점이 있다고 본다.
불교는 존재의 참다운 모습에 대하여 물론 도외시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의 비밀이 진리라면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본다.
그러므로 아함부의 여러 경전에는 이 진리(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 조건을 설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隔하지 않고 결과가 있은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 하는 것,
지혜 있는 자가 각기 스스로 알 수 있은것,”이라고 하여 이와 같은 다섯가지 조건에 맞지 않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라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이 우리의 人生苦를 해결해 줄 때만이 그것은 진리로서 인정이 된다.
존재의 실상을 구명하는 것은 고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다.
또한 존재의 문제가 바로 苦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있어서 하나의 열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전유경에서도 이러한 진리(법)에 맞는(是法相應) 가르침이 四聖諦의 가르침이고, 사성제야말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부처님은 설하고 계신다.
사실 사성제의 목적은 고가 소멸된 열반에 있기 때문이다.
중부경전에 “나는 오직 한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노라” 라고 명쾌하게 일러주시고 있다.
起信論에는 造論의 이유를 “衆生으로 하여금 一切의 괴로움를 여의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목적지는 고가 소멸된 그곳에 있다.
이것을 옛부터 禪家에서는 “見性成佛”이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글쓴이 송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