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의 두뇌 게임 [나대일]
천동설과 지동설의 백년전쟁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지 2세기가 지난 후,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기하학을 가미한 최초의 기하학적 우주론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태어났다. 이의 제창자는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미(Claudius Ptolemy)라는 인물이었다. 흔히 프톨레미의 이론은 천동설(The Geocentric Theory)라는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천동설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별과 행성은 원궤도를 따라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흡사하나 이를 한발 더 진전시킨 형태를 취한다. 우선 프톨레미는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딱딱한 수정구 표면에 좀 더 작은 여러 개의 곡률 면을 가정, 행성의 운행을 좀 더 복잡하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천구의 표면에 존재하는 작은 곡률면들은 에피사이클(epicycle) 또는 에센트릭(eccentric)이라 불린다.
놀랍게도 천동설은 바빌론 시대에 이후 누적된 단대의 거의 보든 행성 운행을 자료를 성공적으로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오는 일식과 월식의 날짜까지 거의 정확히 예측해 주는 당시로서는 매우 경이적인 이론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천동설은 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지동설(The Helicoentric Theory)이라는 혁명적인 이론을 발표할 때까지, 1953년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쫓아낸 혁명적인 이론 지동설을 제창한 코페르니쿠스 그에 의해 참다운 물리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프톨레미의 천동설은 모든 학자들에게 거의 신성시된 이론이었다. 프톨레미의 천동설이 제창된다. 1450년이 지난, 1543년, 현대 과학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당에서 잠을 지는지, 아니면 묘지에서 자는지 토론을 하던 시기였다. 유럽도 이에 못지않아 바늘 끝에 과연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심각한 신학적 토론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해, 코페르니쿠스는 "혁명(De Revolutionibus)"이라는 책을 통해 지동설을 제창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따르면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나 다른 행성들은 그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던 천동설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말하자면 만물의 신인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영광스런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결국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쫓아낸 이론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이 이론이 기독교적 바탕이 뿌리 깊은 당시 유럽 사회에 끼친 여파가 어떠했던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구약성서를 보면 원래는 천구를 움직이던 태양이 선지자 여호수아의 명령에 의해 정지되었다고 적혀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공공연히 신봉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친구, 브루노가 이단자로 몰려 사형 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믿는 사람은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출간되자 오히려 이를 비판하는 다른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 100년이 지난 후에도 지동설은 여전히 위험한 종교 논쟁이 대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성공한 갈릴레이조차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서 결국 참다운 물리학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우선 지동설은 프톨레미 이론이 가졌던 지난 1400년간의 누적된 오류를 아주 명쾌히 설명해 주었다. 그히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게 했던 아주 복잡한 에피사이클이나 에센트릭이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 없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이론이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역시 완벽한 이론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지동설이 갖는 행성의 궤도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프톨레미식 원궤도 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원궤도를 고집하게 된 이유는 그 역시 원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도형체이며 따라서 자연이 완벽한 형체를 취하지 않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스리스토텔레스의 설에 따른 프톨레미 이론 속에 존재하는 하늘의 별은 1027개 였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이러한 주장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이러한 전통의 올가미는 코페르니쿠스의 일을 이어받은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노력에 의해 결국 하나하나 제거된다.
1500년대 말기는 아직도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매우 정밀한 천체 관측 시설을 만들었다. 당시는 프콜레미의 천동설이 맞느냐, 아니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맞느냐 하는 문제로 격론을 계속하던 시기였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는 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느냐고 격론하던 종전에 비한다면 그래도 아주 발전된 단브라헤는 평생을 천체 운행 관측에 보냈다. 이로 인해 그는 월등하게 우수하고 방해한 행성 관측 자료를 가질 수 있었다. 브라헤는 공공연한 프톨레미 이론을 개량한 티코 브라헤식 천동설을 제창했다.
브라헤가 죽은 후 그가 남긴 관측 자료, 특히 화성의 운행에 관한 면밀한 자료는 탁월한 수학자였던 브라헤의 조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에 의해 분석된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결국 유명한 케플러의 행성 운행 법칙을 발견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천동설의 신봉자인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고 케플러의 면밀한 자료 분석을 통해 참된 근대 이론으로 정착하게 된다.
케플러가 발견한 행성의 운행 법칙, 즉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1) 타원의 법칙: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촛점으로 한 차원 궤도를 갖는다.
(2) 동일 면적의 법칙: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이 단위 시간에 주파하는 면적의 크기는 항상 같다. 그 결과로 행성이 대양에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 그 공전 속도는 행성이 태양에 멀리 떨어져 있을 때보다 더 크다.
(3) 조화의 법칙: 행성의 공전 주기를 제곱한 값은 행성과 태양의 거리(평균값)를 세제곱한 수에 비례한다.
돌이켜보면 고대 수메르 시절에서 케플러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우리의 자연현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란 엄청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편견과 독선의 제물이 되어 파문되고 화형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플러 시대까지 이루어진 우리의 자연 탐구는 단지 주어진 자연현상에 대한 막연한 관측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즉 자연현상의 인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태도는 탈피했지만 아직도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도록 자연현상을 관찰할 때 오직 선험적인 자연현상의 형태(appearance)만 찾아내려 애썼던 것이다. 2000년간 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같이 그저 직관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공리를 써서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다. 케플러 그 자신을 예로 들자면, 그도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형임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면 무엇이 행성의 궤도를 타원으로 만드는지 그 원인을 추구해 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현상론(phenomenalism)적인 태도라 부른다. 이 경우 자연 관찰의 목적은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 데에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한발 너나 아가 '무엇이' 그런 현상을 벌어지게 하느냐를 추구해 묻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묻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 다른 모든 분야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 탐구의 태도에 있어서 현상론적 입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던가, 이는 아직도 역사상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마도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고대 그리스의 사회구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