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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가? ○○
성경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가? 사회주의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통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보상을 받게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성경은 오히려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한다.
○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성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오히려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 즉 자유선택권을 주셨다.
예수를 믿는 여부도 사람의 자유의지에 맡기셨다. 복음을 통해 설득을 받아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자는 지옥에 간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원의 선택 여부, 삶의 방식 여부를 사람의 자유의지에 맡기셨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하향 평준화를 시도하는 제도이다.
사도행전에서 신자들이 재산을 기부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아 자발적으로 한 것이지 강제적이고 인위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없다(행 2:44-45 참조). 그러므로 이것을 원시 공산주의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로렌스 리드는『예수님은 사회주의였나?』에서,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사회주의는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성경적 가르침에 가장 위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하나님은 천국이나 지옥 가는 것도 사람의 자유의지에 맡기셨는데 사회주의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사회주의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성경은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한다.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토지를 지파별, 가족별로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었다. 이것은 사유재산 제도의 시작이다.
그러나 시작은 공평하고 과정도 공정했지만 결과는 정의롭지 못하여 가난한 자가 생겼다. 능력 차이, 또는 불의와 강압으로 토지를 빼앗긴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십계명은 사유재산 침범을 금지한다.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를 판 사람도 많아서 토지를 물리는 희년 제도도 도입되었지만 제대로 시행된 적은 드문 것 같다(레 25:10-12).
아나니와와 삽비라의 토지는 팔기 전이나 판 후에도 그들의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한다(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이는 부동산의 소유권, 사용권과 처분권 개인에게 있음을 증거한다. 요즈음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재산을 바치고 소득의 10의9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성경은 사회주의가 부인하는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한다.
셋째, '공평한 만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가?
광야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순종훈련을 위한 것이다(신 8:2-3).
그러나 출애굽 40년 후 이스라엘이 정복을 위해 가나안 땅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만나는 끊어지고 사람이 경작한 소산을 먹게하셨다(수 5:12).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사회주의 삶을 살다가 거꾸로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선 것인가.
넷째,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 사회주의자들은 이 비유는 많이 일한 자나 적게 일한 자 모두 동일한 임금을 받았으므로 사회주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동일한 시간 동안 일한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임금을 동일하게 하자는 것이지 노동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먼저 부름 받은 유대인이나 나중에 부름 받은 이방인의 차이 없이 누구나 예수를 믿는 자는 동일하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비유다.
그런데 나중에 부름받은 이방인이 더 예수를 잘 믿었으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구절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20:16)고 말씀하셨다.
다섯째, 달란트 비유(마 25:14-30). 여기서 말하는 달란트는 '돈'(자본)또는 '재능'을 말한다.
예수님은 많은 달란트를 받아 많은 이익을 남긴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시고 적게 받았다고 게으름 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셨다.
일각에서는 재능과 물려받은 재산은 '우연과 운'에 의한 것이므로 소수가 '능력주의'에 근거하여 좋은 것을 독식하는 것을 비판한다.
물론 능력주의에 의해 열매를 독식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배려하고 돌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런데 사회주의는 가진 자의 모든 것을 '자발적 헌납'이 아니라 '강제로 몰수'한다.
여섯째, 선한 사마리리아인 비유(눅 10:30-37).
개인이 자발적으로 불운에 빠진 형제 자매를 도와준 대표적 사례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는 자발적 기부와 봉사가 넘쳐난다.
그런데 국내 좌파들 중에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봉사한 사례가 전무하다. 가진 자 것을 빼앗아서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자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들이 가진 것을 못 가진 자에게 개인적으로 나누어 가진 사례는 거의 없다.
일곱째, 이삭 줍기(레 19:9-10).
성경은 추수할 때 모두 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해 곡식을 남겨두라고 한다.
만일 사회주의식이라면 부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가난한 자에게 재분배할 텐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가난한 자가 주어가도록 곡식을 조금 남겨두라고 한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모든 신자나 부자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다(막 10:17-20).
다른 부자들에게는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눅 10:1-9: 딤전 6:17-19).
여덟째, 하나님은 지혜와 창조의 영을 통해 개인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물 얻는 능력을 주셨고 사람 마다 차등의 능력을 주셨다(신 8:18; 마 25:14-30). 대표적 사례는 야곱의 목축술과 요셉의 애굽 경영술이다.
개인의 지혜와 창의력은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다. 영국 산업 혁명의 기폭제가 된 증기기관 발명, 발명왕 에디슨의 전기와 전구 발명,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 발명, 포드의 자동차 발명, 빌 게이츠의 윈도우 OS(운영시스템) 발명,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발명. 테슬라의 전기 자동차 등이 산업을 견인하면서 부를 창출하고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삶의 질을 높여왔다.
이상적(?)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공동으로 토론하여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 사회주의의 획일적 통제경제는 창의력이나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미소 냉전시대에 소련은 한정된 자원으로 군비경쟁에 지나치게 예산을 남용하여 생필품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각자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발휘하게 한 미국은 생필품을 풍요롭게 공급하여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동시에 소련과의 군비경쟁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소련이 경제적으로 파탄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국가의 통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최대한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부를 창출하도록, 정부는 창의력의 물길을 바로 잡아주고, 막힌 곳은 뚫어주고, 좁은 것은 확장해주고, 너무 넓은 곳은 좁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핵심은 '기업가 정신'이며, 이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국가가 어버이가 어린 아이에게 시혜를 베풀 듯 가부장적으로 기업 활동에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거나, 기득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신규 산업을 규제하면 기업 활동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초기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면서 정부 주도의 일자리 창출을 자신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자리 상황판은 없어졌다. 임기 마지막에 가서야 일자리는 민간기업이 창출하는 것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규제공화국 한국은 이제 '이런 것은 해도 된다'는 포지티브 방식이 아니라, '이런 것은 하면 안 된다'는 네가티브 방식을 통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규사업의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은 더 이상 빠른 추적자(fast followers)가 아니라 선도 주자(first movers)가 되어 21세기 경제의 주체가 될 수 있다.
○ '기독교 사회주의'가 성립되는가? ○
교계 일부에서는 성경이 부와 가난에 대해서 말하고, 칼뱅도 부와 가난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성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란 용어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해서 생긴 오류라고 볼 수 있다.
필자 또한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사회주의란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사유재산 제도 인정, 개인의 자유로운 이윤 추구 활동, 재화와 서비스가 자유로운 시장에 의해 수급되는 등으로 요약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사회주의'란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이나 자료를 읽고 난 후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에 오는 제도로서,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며-실제로는 국가가 소유-상품과 서비스는 중앙정부의 계획에 의해 수급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보수를 받는 제도다.
그런데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정도를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한국의 어떤 칼뱅주의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칼뱅의 가르침에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하고, 상공업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시장 경제 체제와 사업상의 이윤을 인정하고, 사업 자금에 대한 이자를 인정함으로써 금융업을 인정하는 등 자본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금을 늘려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면서,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공립학교를 세워 가난한 가정의 아동들을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사회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 칼뱅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었고 '기독교 사회주의'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이 둘을 포괄하고 극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 둘 중 어느 편도 아니며, 칼뱅주의는 자본주의도 기독교 사회주의도 아니라 그 나름의 독자적 경제 윤리를 가진 독자적 사상체계이며 그 둘에 대한 이상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복지형 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칼뱅이 말하는 두 가지 기능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나라들을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국가' 또는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기에는 '사회주의적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북유럽 국가들처럼 미국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스웨덴은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라고 강력하게 항변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대한 샌더스의 시각은 이들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만드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고정돼 있다.
1960년부터 1980년에 이르는 20년 동안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지출은 3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두 배 늘었다.
그러나 샌더스 스타일의 민주사회주의 실험은 스웨덴 경제를 무너뜨렸다. 1970년부터 1995년 사이 스웨덴은 민간 분야에서 순일자리를 단 하나도 추가하지 못했다.
1991년 자유시장 추종자인 칼 빌트 스웨덴 총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스웨덴은 정부 지출 규모를 3분의1로 축소해 오랜 경제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를 잘한다고 해서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사회주의' 또는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표현하면 주.사파들이 활개치는 한국적 상황에서 많은 오해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용어 사용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자유우파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 개정안에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자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도 민주주의 원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독재왕조체제인 북한에서도 국호에 '인민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돌보는 현대의 자본주의를 간단하게 '복지형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도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장려하면서도 빈부격차로 인한 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 '기독교 사회주의'란 단어를 사용하면 안되는 이유
기독교학술원이 주최한 ‘교회와 국가’ 주제 영성포럼(2019.11.15)에서 이상화 교수는 '기독교 사회주의'란 단어를 사용하면 안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주의는 ‘폭력혁명을 통해 부르조아의 자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배급제도를 실시하는 것’과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라는 두 전략을 따르고 있다.
전자는 강력한 독재 권력이 불가피하고 후자는 인간이 이타적 존재여야만 가능한데 이는 현실 속에 거의 없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사회주의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 사회주의는 '이상사회' 건설을 절대적 목표로 설정했지만,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절대화해서 구현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곧 피조물을 신적 자리로 승격시키는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절대적으로 추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도덕성이 무시되고 집단적 정신분열증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이처럼 사회주의는 전무후무한 독재권력, 인간관의 오류, 유토피아의 우상화, 과정의 도덕성 파괴, 집단적 정신분열증을 피해갈 수 없는 파괴적이고 유물론적이며 하나님을 향해 닫힌 구조로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
한국의 자유우파와 보수교회는 이런 문제에 무관심했던 과오를 철저히 회개하면서, 동시에 종/북/주.사.파의 적그리스도적이고 반도덕적 행태에 대해 비판과 교정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