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 최명길> <뚝심의 리더십>
그 동안 글을 쓰는데 참고했던 책 중 하나인 ‘조선의 킹메이커‘ 저자, 박기현 님은 인조 때 후금 (이후 청나라로 표기)의 침략으로 한양이 함락 당하고 인조가 강화로 피난길에 오르다 남한산성에서 은신하고 항전할 때 화친을 주장했던 신하 최명길을 ‘뚝심의 리더십‘으로 포장했다. 그 이유는 전부터 일관되게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병자호란 시에도 주전론을 배척하고, 항복을 종용하여 왕실의 종묘사직은 물론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청은 명나라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시점에 조선을 침공하여 우리와 ‘형제관계‘를 맺고 철수 한 후, 후에 명을 멸망시킨 뒤 새로이 ‘군신관계‘를 요구하다 이를 묵살당하자 청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다.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1주일 만에 한양인근까지 함락 되고, 1달 반 후에 항복을 받아 냈다. 첫 번째 침공을 정묘호란이라 하고, 10년 도 채 안 돼서 다시 겪어야 했던 두 번째 침략을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우선 조선시대 최악의 수난시기였던 당시 상황을 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청의 침략은 임진왜란이란 큰 전쟁을 겪은 지 불과30년 후에 발발했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폐위된 지 5년도 안 된 상태에서 이뤄 졌다. 광해군이 폐위 된 이유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와의 의리를 져 버리고 오랑캐 후손인 청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점, 둘째,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재건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한 점, 셋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그 아들 영창대군을 사사한 점 등이다.
이로 인해 인조가 새로운 왕이 되었고,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은 애초부터 인조가 취할 정책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명운은 점점 더 암담해 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친명배금 (親明俳金) 입장을 돌이킬 상황은 못 됐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할 것으로 생각 한 최명길은 청과의 화친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종묘사직의 보존을 명분 삼아 항복할 것을 주장한다. 과정은 어떻든 그의 주장은 받아 들여 졌고, 결국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세번에 걸쳐 1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행하는 항복예식을 오늘 날 석촌동 부근의 삼전도에서 거행했다. 머리를 조아릴 때 소리가 청태종의 귀에까지 들려야 했었기에 모두 9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이마는 물론 어깨까지 피로 흥건했다고 전해 진다. 이 치욕적인 사건을 ‘삼전도굴욕‘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인조에겐 결코 잊지 못할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필자는 인조를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을 어려서나마 몸소 체험한 왕으로서 이후 국방체계를 재정비하는 일에 소홀했고, 국력이 약했다면 처음부터 실리적인 외교를 취했어야 했으며,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까지는10년이란 준비기간이 있었음에도 안일한 생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왕을 폐하고 즉위한 생태적 한계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왕권에만 집착했던 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왕세자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가 8년 동안 살다가 귀국하게 되는데, 여러 선진 문물을 접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교분을 쌓고 돌아 온 큰 아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신을 내 칠 것이란 망상을 하게 된다. 결국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 되고, 새로운 시대의 여성상이자 청에 인질로 끌려 간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며느리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세 명의 손자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병으로 죽거나 어려운 삶이 이어 졌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더라면 틀림 없이 더 나은 조선이 되었을 것이란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결국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를 계승하여 효종이 되는데, 효종은 아버지의 구미에 맞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즉 청과는 원수지간이고, 북벌을 통해 복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기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이에 맞설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가 승하한 후, 어질 인 (仁), 시조 조 (祖)를 사용하여 仁祖라는 묘호를 부여한다. 원래 매운 열 (烈)에 종(宗)을 붙여 烈宗이었는데, 그의 아들 효종이 선왕은 병자호란을 극복한 위대한 왕이기에 달리 밀어 부쳤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과거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기도 했고, 조선의 종묘사직을 보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최명길은 후에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이내 병사했다.
그가 청나라 감옥에서 척화파 김상헌과 해후하여 화해를 했다는 이야기, 귀국 후, 와병 중에 인조가 직접 집에 찾아 와 문병을 했다는 이야기. 의리를 존중하고, 예(禮)를 중시하는 관료들로부터 후에 모진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킹메이커‘ 저자가 최명길을 <뚝심의 리더십>을 갖춘 대표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청나라와의 화친을 도모 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폐위시키는데 1등공신이 된 자가 그 이후에는 청나라와 화친을 추구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혼동의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로 여겨진다. 결국 실리를 취하고,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힘을 추구했던 2중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이 관철되어 종묘사직이 보존되고, 수 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보존되었다지만 그 이후 조선의 모습은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로 이어졌고, 노예로 끌려간 숫자는 5~6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결국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목숨과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궁극적으로 청나라에게만 도움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질이나 노예로 끌려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간혹 탈출하여 돌아 오거나, 부모들이 돈을 지불하고 다시 올 수 있는 경우도 드믈게 있었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이 때 돌아 온 여자들을 환향녀 (還鄕女)라 칭 했는데,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온 이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었고 결국 화냥년과 같이 천한 계집으로 불리게 된다. 매우 슬픈 우리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명분만을 내세우며 준비가 전혀 없었던 군주, 다툼으로 일관하며 입으로만 충성했던 관료, 의무를 이행치 않고 특권에만 집착하는 양반계층. 이 모두가 병자호란과 같은 치욕적인 결과를 초래한 주된 원인들이다. 과연 오늘 날 하나라도 자유스러운 것이 있을까?
<다음은 마지막으로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와 그의 참모 채제공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댓글 금수강산님이 지난 번에 올린 인 조-최명길에 관한 글이 없어 졌습니다. 미안합니다.그리고 오늘 몇개 글이 다른 메뉴판으로 옮겨져 있어 제가 바로 잡았습니다. 이는 운영자하거나 해킹당해야 일어날 일인데... 내일 낮에 다른 운영자에게 물어 원인을 찾아 볼께요. 제가 으너니에게 카페 글관리를 부탁하기는 했었는데...
지난번에 올린 글은 찾았네요. 자유게시판에 있어요. 왜 그렇게 됬는지 알아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