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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알지 못하는 길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2012년09월23일(일)
(요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지난 번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도 유명한 말씀이라 따로 떼서 말씀드리려고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가룟 유다는 자기 계산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고 싶었으나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
가룟 유다는 자기 계산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자기대로 계산을 해서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고 싶었지만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 줄 몰라서 방황하고 못 따라갔다. 이 두 사람은 다 따라가지 못했지만 차이가 굉장히 크다. 한 사람은 자기 계산으로 못 따라간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몰라서 못 따라간 것이고 그렇다.
오늘날도 그렇다. 똑 같다. 자기 계산 때문에 못 따라간 사람도 있고, 몰라서 못 따라간 사람도 있고 그렇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몰라서 못 따라간 사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또 말씀을 전할 때도 몰라서 못 가는 사람 때문에 말씀을 전한다. 자기 계산을 해 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 받으러 가시는 길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길이다.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 역시 이 길을 알지 못해서 바벨로 갔기 때문에, 그 길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다.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 받으러 가시는 그런 길이다. ‘내가 영광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진짜로 영광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예를 들면 합격 통지가 왔는데, 통지서는 받았지만, 시상식에 통지를 받았지만 막상 상은 현장에 가야 받을 게 아니겠는가? 그런 식이다.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영광 통지서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받으러 갈 것이다.
영광 받으러 가시는 그 길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저래서 영광을 받는구나!’ 잘 안다. 무슨 일을 잘해서, 공로를 세워서, 그래서 영광을 받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러 가신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사실은 영광을 받으시러 가시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는 영광을 받았다. 지금 영광을 받으러 간다. 이러니까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지금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있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사실 다 어둡다. 다 예수를 잘 믿고 있지만 그때 당시에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다. 이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아담 역시 이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지만 자기는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족했으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들었겠는가? 만족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했다. 이것은 아담이 우리를 대표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영광을 알 수가 없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바벨로 갔다. 알지 못했으니까 선악과를 먹고 자기계산대로 간 것이 바벨로 간 것이다. 이렇게 바벨로 간 사람은 아무도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러 가신 그 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른다.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다른 점은 유다는 단지 자기 계산으로 그 길로 가시는 예수를 버렸고,
다른 제자들은 주를 따르겠다는 결심은 굳게 섰으나 그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은 유다는 단지 자기 계산대로 그 길로 가시는 예수를 버렸고,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했다. ‘내가 죽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가 아닌가? 그것은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한 말이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내가 목숨을 버릴 텐데 왜 못 따라가겠습니까?’ 한다. 그러니까 길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광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사랑함으로 한 공동체 안에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영광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사랑함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 당부한 것이다. 지금 못 보니까 지금 본다면 이런 말씀을 안 했을 것이다. 못 보니까 볼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이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으라. 이것이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내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기다릴 수 없다. 공동체 안에 있어야 기다릴 수 있지 개인적으로는 기다릴 수 없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나는 의심이 되고 그래도 옆에 사람이 격려를 하니까 같이 어울려 간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서 가는 것을 보면 중간에 있는 것은 잔다고 한다. 자는 데도 물길이 확 몰려가니까 같이 간다고 한다. 다른 고기가 가는 물길에 딸려서 가다가 자기가 깬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먼저 가고 다른 놈이 자면서 가고 이렇게 간다고 한다. 지구를 몇 바퀴씩 도는 것이 그렇게 돈다고 한다. 혼자는 그렇게 못한다. 혼자 가다가 잠들어 버리면 죽을 게 아닌가? 행군을 할 때도 그렇다는 말이 있는데 잠이 오면 졸리면서도 간다고 한다. 혼자 가면 쓰러져 버리지만 옆에서 막 가니까 으쌰~으쌰~하면서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박애주의를 이야기한 줄로 알지만 그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머물기 위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공동체 안에 머물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교회 안의 사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일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너희롤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가룟 유다처럼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데 문제는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에 혼자서는 못 기다린다. “그의 일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가롯 유다처럼 자기 혼자 계산해서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혹시 자기 생각을 내놨다면 옆의 사람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네 이 놈 그럴 수가 있느냐’ 하다보면 공동체 안에 머물렀을지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 속에다 품고 있다가 갔으니까 아무도 모를 것 아니겠는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그다” 라고 암시적인 말을 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혹시 명절이 가까워오니까 물건을 사러가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가롯 유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탈될 수 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인생은 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광야에 이끌려 왔던 이스라엘은 날마다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길이 어디입니까, 내일은 또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영화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아주 유명한 말이다. 이것이 사실은 우리 인생의 말이고 인생은 늘 이렇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나님 어디로 가십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광야에 이끌려 나왔던 이스라엘을 보면 날마다 ‘길이 어디입니까? 내일은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매일 같이 물었을 것이다. 아마 아담도 동산에서 이것을 매일 묻다가 대답이 없으니까 결국은 지식을 취한 것 같다. 우리도 이것을 매일 묻다가 안되면 교리나 여러 가지 종교에 빠지기도 하는 일이 생긴다. 알면 그렇게 안할 것인데 모르니까 이것인가 저것인가 찾아다니다가 이런 데도 가고 저런 데도 가고 그런 것이다.
요즘 이상한 소식이 들리는데 ‘동방번개(東方閃電)’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중국사람이고 재림했다고도 하는데 내가 자세히 몰라서 책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다니면서 선전하고 다닌다고 한다. 뭔가를 찾다가 그런 것을 찾았을 것이다. 안 찾는 사람은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없는데 찾다보니 그런 곳에 걸려들게 된다.
우리는 항상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에 점쟁이가 먹고 사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난 국회위원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라도 거기를 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장 안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면 다 간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표라는 것은 개표를 해봐야 아는 것이니까 답답해서 찾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모른다. 사실 우리는 모르는 인생을 사는데 점쟁이까지 찾아가는 사람이 있고 안 찾아가는 사람이 있고 알고보면 이런 차이이다. 자기 운명이나 내일을 자기대로 연구하고 계산하고 알아 보려고 자기대로 해석을 해보는 것이다. 자기대로 해봤자 좋은 대답이 안 나오니까 위로를 받으려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대로 해석해서 거기에 빠져서 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지더라.
나도 옛날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점쟁이를 찾아갈 생각은 안 했지만 산에라도 찾아가서 기도라서 해서 무슨 응답이라도 받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마음과 똑같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럼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런 것을 하나님에게 물어봐서 어떤 응답을 받고 싶었는데 알고보면 이것은 점쟁이를 찾아가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다. 산 기도도 가보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소리를 들었다고도 하고 뭔가를 봤다고도 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해서 나는 버려진 사람으로 생각했다. ‘아~ 나는 버려졌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라고 해서 갔는데 달은 휘엉청 밝은데 산속에 혼자 앉아있으니까 정신이 말짱말짱해지는데 어디서 푸시럭 거리는 소리만 나도 오싹오싹해서 기도가 안되더라. 산속 밤에 담력을 내서 으쌰으쌰하고 마귀 물러가라고 소리치며 기도해야 하는데 마귀 물러가라도 소리치다가 자기가 마귀 된다. 옛날 동산병원 정신과에서는 교회가면 다 정신병 걸리는 줄 알았다. 교회나 기도원 갔다가 잘못되어서 정신과에 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예수 믿는 사람만 그랬겠는가 만은 그런 환경에 집어넣어 놓으니까 발병이 되어서 그렇다. 담력 없는 여자들 그런 곳에 집어넣어 놓으면 귀신 들린다는 말이 나온다. 나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저건 돌이 굴러오는 소리야, 저건 벌레 우는 소리야’생각한다고 했는데 소용없고 오싹 오싹했다. 그런데 간덩이 약한 여자들 갖다 놓으면 확 돌아간다.
사람은 궁금하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같은 말이다. 이걸 알고 싶다. 그걸 자기대로 캐고 싶고 해석하고 싶다. 종교적으로든지 과학적으로든지 뭐로든지 그걸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아~ 인생은 모르는 것이구나! 피조물이니까 당연히 모르지 않냐?’이걸 알고 나니까 해방됐다. 모르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데 모르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응답 받았다고 하면 ‘나는 왜 응답받지 못하나’ 어디서 뭘 봤다고 하면 ‘나는 왜 못 보나’이런 생각을 항상 했는데 ‘아! 인생은 모르는 것이 인생이구나!’이걸 알고 나니까 잠잠해지고, 그러니까 기다려야 되고, 그러니까 따라가야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 너무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전까지는 항상 미련이 있었는데 그 후로부터 싹 사라졌다.
충주에 있을 때 두 여학생이 와서 물었다. 어느 예언하는 권사님들이 있는데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거기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때 생각 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내일도 주님 안에 있고, 모레도 주님 안에 있는 것 아니냐! 그 때 나는 이미 그걸 벗어났다. 전까지는 나도 그랬는데 그래서 학생들에게 그렇게 대답해준 적이 있다. 나는 미래를 알 필요가 없고 내 미래는 예수 안에 있으니까 내가 더 알 수가 없다. ‘내 미래는 예수 안에 있다’고 대답했다.
‘천당이 있냐 없냐’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가 있다고 가겠는가 없다고 못 가겠는가! 갈 사람은 가고 못 갈 사람은 못 간다. 안다고 가고 모른다고 못 가는 게 아니라 갈 사람이 가고 못 갈 사람은 못 가는 것인데 있니 없니 한다.
사람이라는 게 항상 자기 분수를 벗어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서 불안한 것이다. 내게 어떤 일이 닥치면 ‘내게 왜 이런 일이 닥쳤나’이렇게 또 생각한다. 사람은 닥칠 수도 있는 일이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온 것은 없다. 다 뭔가 있을 수 있는 일이 온 것이다. 내게 어떤 일이 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꼭 나에게만 오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나한테만 꼭 이런 일이 왔나’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아주 답답해진다. 그것은 누구한테도 올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어떤 기회가 없다 뿐이지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일이다.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내 존재에 대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게 닥쳐오는 일도 내게만 특별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병도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것이고, 죽음도 누구에게도 올 수 있는 것이고 다 올 수 있는 일이니까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인데 앉아서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주신대로 사는 게 나은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그나마 날마다 아는 길이 정해져 있었다. 먹고 일하고 자고 일어나고....그러므로 날마다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아담의 길은 이렇게 정해져 있다. 창세기 5장에 있는 장수족들은 인생의 길이 어떠한지를 지도처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길을 알려면 그 사람들을 보면 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서 헤맨다. 애굽에 살 때는 그나마 자기들이 아는 세계에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일터에 나가서 벽돌 찍고, 저녁에 와서 자고, 이것은 아는 일이다. 노예니까 그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내일 뭘 할 것인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매일 일어나면 일하러 가야 되니까 먹고 일하고 자고, 날마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아담의 길은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 무엇을 해도 다 똑같은 일이다. 옛날 사람 하던 일을 다 그대로 반복하는 일이다. 나만 새로운 일을 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창세기 5장에 오래 산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열 명의 장수족 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인생의 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거기 보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똑같다. 누구에게서 태어나고 몇 세를 향수하고, 자식을 낳고, 죽었다 이것이다. 900년 산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하니 대단한 말이다. 800년 살 동안 900년 살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몇 살 먹고 자식을 낳고 죽었다. 이것뿐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것밖에 없다. 인생이 뭔지 지도를 알고 싶으면 창세기 5장을 읽어 보면 내 지도가 딱 있다. 열 명이라는 말은 완전 숫자다. 하나도 예외 없이 완전하게 그렇다는 말이다. 인생의 길이 어떤지를 지도처럼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길이 어떠한지 알려면 점쟁이 찾아갈 필요 없이 창세기 5장을 보면 자기 길이 딱 있으니까 절대로 의문을 더 이상 갖지 말고 의문이 생기거든 창세기 5장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담의 길은 인간의 방법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인간의 계산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계산하여 예수를 넘겨 준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예측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실패했던 것이다.
아담의 길은 인간의 방법으로 계산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알 수가 없다. 아담의 길은 정해져서 그 이상의 길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인간이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니까 모른다. 정해진 대로 사는 동물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이것만 문제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를 알려면 ‘하나님 어디로 갑니까?’ 만날 물어보면 되겠는가. 그냥 따라가야 한다. 오라는 데로 오고 가라는 데로 가야 하는 것이지 따라가면서 만날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내가 누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데 뒤따라오면서 계속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면 신경질이 날 것이다. 소대장이 가면 뒤따라 가야 하는데 ‘소대장님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되겠나.
그런데 유다는 인간의 계산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계산했다. 자기 계산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계산했다. 그래서 예수를 넘겨주고 만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계산법으로 만약에 하나님의 일을 계산을 하면 우리도 똑같이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길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자기 계산법으로 주님의 길을 예측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을 것이라고 상식적인 계산을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이렇게 아직 살아 있다. 이 길은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내 얘기인데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을 것이라고 계산을 했다. 상식적인 계산으로는 나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의사들이 나의 폐 사진을 보면 이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몰랐는가? 그 사람들이 무엇을 몰랐냐 하면 다른 것은 다 아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의 계산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알겠는가. 이 길은 누구도 알지 못했던 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만 해도 사람이 모르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가 알겠는가. 바벨로 가는 사람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의 길을 알겠는가. 모른다. 거역으로 가는 사람이 순종으로 가는 사람을 모른다. 서로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지금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올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찌하여 지금은 따를 수 없습니까? 목숨이라도 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는 주님을 따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따를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의 가는 길을 지금은 너희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다.” 지금은 왜 못 따라 가는가? 몰라서 못 따라 가는 것이다. 후에는 왜 따라 가는가? 그때는 알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답답해졌다. “어째서 지금은 따를 수 없습니까? 목숨이라도 내가 버리겠습니다.” 이 말은 어려워서 못 따라 간다는 말이냐는 뜻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못 따라 간다는 말입니까 하는 뜻이다. 베드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예수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 너희들이 못 따라 온다고 하시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따를 결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일, 즉 그리스도의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의 길은 아담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주님의 길은 계산과 의지적 결심만으로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무엇을 몰랐는가? 그리스도의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와는 질이 달랐다. 요즘 말로 하면 질이 다른 사람이다. 주님의 길은 아담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길은 계산과 의지적 결심만으로는 따를 수가 없다. 그것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계산과 의지적인 결심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그렇지 않는 길이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따라가는 길 아담에게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길은 계산을 하고 결심을 하면 (가다가 죽으면 죽었지) 갈 수는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내가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인도를 하셔야 갈 수 있고 구름기둥이 떠야 따라 갈 수 있다. 구름기둥이 안 뜨니까 못 가는 것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구나! 하나님의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옥에도 함께, 죽는 데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을 알지 못해서 부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주님)를 위해서라면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데도 함께 가겠다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결국 주님을 알지 못해서 부인하고 말았다.
여호와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라고 말씀하셨다.
생명나무를 먹은 사람하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같겠는가! 길이 서로 틀리니까 모른다.
주인의 생각과 종의 생각도 같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창조자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담에게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게 하려고 생명나무 열매를 주셨으나 아담이 이를 무시하고 지식으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주인의 생각과 종의 생각도 같기 어려운데 아주 똑같은 사람이라도 입장이 달라지면 서로의 생각을 모른다. 하물며 창조자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 사실 알고 보면 선악과를 안 먹었다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담에게 같은 마음이 되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한 것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생각이 다르니까,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 동산에 살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하려고 생명나무열매를 줬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지식으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에게 있어서 한 갈망일 수 있다. 제자들 역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어디에나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끝내 따라가지 못하고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려는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를 표현하기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니까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에서 말하면 갈망이다. 하나님 같아지고 싶은 갈망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디에나 함께 가고 싶었다.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같이 가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주님이 가시던 길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끝내 따라가지 못하고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성의가 없어서 못 따라간 것도 아니고 열심이 없어서 못 따라 간 것도 아니고 결심을 안 해서 못 따라 간 것도 아니고 농땡이 쳐서 못 따라 간 것도 어니다. 그들은 정말로 진심이었지만 모르는 길이었기에 못 따라갔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준 길을 모른다.
“하나님이 인생에 정해준 길을 모른다.” 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는 생명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다람쥐가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새처럼 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그러므로 생명이 변화할 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3장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참조)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지만 이 후에는 따라 올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는 그 생명의 변화가 필요했다. 사람의 의지가 놀라운 것인데도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다람쥐가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새처럼 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청설모(Eurasian Red Squirrel)가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뛸 때는 꼭 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나는 것이 아니고 뛰는 것이다. 나는 것은 날개를 지치고 날아서 돌아갈 수도 있고 밑으로 갈 수도 있어야 날아가는 것이다. 청설모는 한 방향으로 뛸 수 밖에는 없으니까 그것은 나는 것이 아니고 뛰는 것이다. 뛰는 것하고 나는 것은 아주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다. 지금 아담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은 아주 다르니까 모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생명의 문제다.
“생명이 변화할 때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에게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같은 말이다.
요한복음은 지금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가 더 아냐, 내가 더 아냐, 너가 더 결심을 굳게 하냐, 내가 더 결심을 굳게 하냐’ 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는 문제인데 이것은 생명으로 아는 문제이지 지식으로 알 수는 없다.
사람마다 결심에는 차이가 참 많다. 같은 사람이라도 의지력이 참 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 의지력이 약한 사람도 있다. 작심삼일(作心三日)하는 사람도 있고 작심일생(作心一生)하는 사람도 있어서 일생동안 꾸준히 그것을 하는 사람도 있다. 생기기를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냉수마찰을 하면 평생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옛날에 해보려고 몇 번했는데 냉수마찰하려면 여름부터 해야 하는데 겨울에 시작하면 못하니까 그래서 하는데 한 2~3일하다 보면 무슨 일인가가 생겨서 못하게 된다. 못하는 사람 보면 항상 무슨 일인가 생겨서 핑계를 댈 수가 있다. ‘아~ 이것 때문에 못했구나!’ 근데 하루 못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안하게 된다. 하루 그것을 기어코 해야 끝까지 할 수 있는데 평생 그것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그런 사람은 오래 산다. 내 생각에는 의지력이 강한 사람 어떤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하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 같다. 나는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못한다. 하다가보면 무슨 일이 생겨서 딴 데로 간다든지 하여간 무슨 일이 생긴다. 끝까지 하는 사람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는 우열(優劣)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의지력이 강한 사람과 작심삼일인 사람은 성공률이 다르다. 무엇을 하던지 끝까지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데 이것도 하다 못하고 저것도 하다 못하고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공부도 끝까지 하는 사람은 성공한다. 하루 이틀이야 누구든지 하지 누가 못하겠는가! 다 할 수 있지만 끝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세계 안에서는 의지력이 투절해야 성공할 수 있지 하다가 안 되는 사람은 성공을 못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 생명의 변화가 올 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명으로 변화된다. 여기서는 의지력이 강한 사람, 약한 사람 이런 것이 없어진다.
종교 안에서도 보면 차이가 굉장히 많다. 토론토에 갔을 때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세 번째 40일 금식기도를 들어갔다고 했다. 그것은 사선을 넘는 일이고, 죽음을 넘는 길 아닌가! 그래서 가족들이 잘 못하면 죽는다고 다 반대 했는데도 끝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의지력이 강하면 그렇게 해도 될 수가 있는 건지 상상이 안 된다.
마라톤 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힘든 것을 해 내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중독이 돼서 그러는 것인지 의지력이 좋아 되는 것인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차이가 많다. 공부를 잘 한사람과 못한 사람도 엄청나게 차이가 많고, 머리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차이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변화된 생명 안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처럼 생명 이전에 계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다 예수를 만난다면 바로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나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 아닌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고, 유다는 자기 지식으로 계산하다가 스승을 팔아넘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처럼 생명 이전에 계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변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산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무슨 수로 계산 할 수 있겠는가? 다람쥐가 무슨 수로 새를 계산하겠는가! 날아가는 것을 기껏 계산해 봤자 뛰는 것 밖에 안 된다. 나는 것이 안 된다. 그러므로 생명 이전에 계산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생명으로 안 되는 것을 계략으로 하면 안 된다.
누구나 다 예수를 만난다면 바로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진짜로 예수를 만나면 바로 따라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나 길이 다르기 때문에 바로 따라 갈 수 없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 아닌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하나님 같이 되는 길은 예를 들어 개구리 같이 되는 길처럼 개구리 생명 안에 있는 것 밖에는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런데 개구리 같이 되는 길을 지식으로 한다면 그 지식이 개구리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생명은 생명으로 밖에 유전이 안 된다. 생명으로 밖에 안 되는 것을 지식으로 만들어 낼 수 없지 않겠는가? 요즘 유전자 조작 이런 말들이 나오는 데 그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조작하는 것이지 생명 없는 것을 유전자로 만들어내겠는가! 그러므로 아담은 결국 생명이 아닌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세상에 모든 제도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왜 실패하는가? 그것은 생명은 그것이 아닌데 목표는 생명의 목표로 새워놨다는 것이다. 지식으로 생명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가장 좋은 사회를 목표로 했다. 인류 사회를 완전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구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 안에서만 가능하지 지식 안에서는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식으로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제시한 세계는 어떤 생명이 누릴 수 있는 세계다. 마찬가지로 천국도 어떤 생명이 누릴 수 있는 세계다. 그런데 그 천국을 지식으로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어거지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잣나무가 소나무가 되려하고 소나무가 잣나무가 되려고 목표를 세워 놓고 노력을 한다면 잣나무는 잎이 다섯 개고 소나무는 두갠데 잣나무가 생각하기를 ‘나도 다섯 개 중에서 세 개를 뽑아버리면 소나무 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겠지만 다음에 가지에서 나올 때는 도로 다섯 개가 나온다.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식으로는 절대로 잣나무가 소나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목표를 세워 놔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천국(천당)이라는 목표를 아무리 잘 세워 놨다 하더라도 그곳엔 내 지식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리를 배운다고 되겠는가? 지식을 가진다고 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고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이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식은 계략밖에 일으킬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갈망은 그의 형상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지식으로 그 갈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 계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식으로 갈망을 이루려고 생각 하는데 지식은 계략밖에 일으킬 수가 없다. 지식으로는 계략과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갈망은 그의 형상으로써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지식으로 갈망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갈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갈망을 이루려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사단은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계략으로 하나님을 앞지르려고 한다. 지식은 부리는 영인 천사들에게는 적합한 것이지만 어느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그 지식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계략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탄은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계략으로 하나님을 항상 앞질러 갈려고 한다. 창세기 1장에서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는데 다음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탄이 계략을 했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앞지르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식은 부리는 영인 천사들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생명의 세계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지식으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계략이 되는 것이다. 개가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계략을 써야한다. 기술을 계발하고 계략을 계발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계략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교리나 신학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면서 나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 줄로 알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것은 교리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막상 권위 앞에 서 보면 아담의 본성이 조금도 변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확신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과 계략으로 주님을 따를 수는 없다. 교리나 신학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면서 나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 줄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니까 모르던 것이 많이 알아지고 확신도 생기고 기독교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다. 비교 종교학 등을 배우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배우는데 당연히 기독교 신학교 안에서 비교 종교학을 배우니까 당연히 기독교의 우월한 점을 이야기 할 것인데 이런 것을 들으면서 내가 기독교인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자부심이 생겼다. ‘그때 중이 안 되길 잘했지.’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함정인 것이 그렇게 되면 자기가 뭔가 사람이 바꿔진 줄 아는데, 사람이 바꿔진 것이 아니고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막상 권위 앞에 서 보면 아담의 본성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학으로 인해서 확신이 생기고 자신감도 생겨서 남 앞에서 설교도 할 수 있게 되니까 내가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지도자로써의 그것이 딱 생기는데 이것이 아주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 학문이 이상한 학문으로 신학을 조금만 해도 사람이 담대해진다. 경제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렇게 되겠는가? 다른 것을 공부해도 그렇게 안 되는데 이것은 하면 자기가 뭔가 된 것 같기에 목사들이 거만한 것이다. 참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을 권위 앞에 세워놓으면 다 반항한다. 조금도 안 변한 것이다. 나도 만일 그런 일을 안 당했으면 나는 그냥 완전하게 된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권위 앞에 서보니까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그냥 그대로였고 조금도 ··············
확신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권위 앞에 서 보면 아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은 권위 앞에 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권위 앞에 서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신학을 환하게 뚫었다 해도 굴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일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때 그런 일이 없었으면 내가 하나님을 최고로 잘 알고 하나님을 최고로 잘 섬기고 잘 따르는 사람으로 그렇게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교회는 작다고 할지라도 그런 자부심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주님이 찾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오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의 거처에서 접견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몸 된 교회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주님이 찾아오실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오시는 분이지 아무데로나 가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아무데나 오시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도 아무데로나 오지 않았다. 성막을 지어놓은 다음에는 성막으로 오셨지 다른데로 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막을 또하나 지었더니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은 자기가 정해놓은 성막으로 밖에는 오질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백성을 그의 거처에서 접견(接見)하시는 분이다. 자기가 정해놓은 자리에서 ‘여기서 내가 너와 만나자’ 그랬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만나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만날까? 아무데서나 만나면 어디서 계시는지 어떻게 알겠나? 이렇게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그 분이 계신 곳을 어떻게 찾아 다니겠느가? 하물며 형상이 없는 분을 우리가 아무데서나 만나면 편리하고 좋을 것같지만 언제든지 기도만 하면 딱 오신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 편리하기는 하겠지 자기맘대로 오라했다가 가라했다가 할 수 있지않나? 참 편리하고 좋은 것 같지만 못 찾아간다. 몸뚱이가 있어도 못찾는데 대구시내서 어디있어가지고 위치를 안 가르쳐주고 여러분들 보고 찾아 오라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 오겠나? ‘난 아무데서다 다 만나는 사람이다’고 하면서 날 찾아오라면 누가 찾아오겠나? 하나님이 사람이 만나는 자리를 정해놓고 그리 불렀다.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이리로 오너라’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신약시대에 만약 교회를 주지않고 하나님이 아무데서나 오라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건 하나님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안에 머물러 있어라 한다. 주님 자신의 몸이고 하나님집인 교회로 오시게끔 되어있다. 또 그렇게 해야 우리가 만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 ‘삼각산으로 가야 된다, 용문산으로 가야 된다, 어느 기도원이 용하더라’ 이런 식으러 해서는 안된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느 부처님이 용하더라, 갓바위 부처가 용하더라, 구인사 부처님이 용하더라’ 이런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꼭 정해놓은대로 오라고 부르시는 분이다. 그래야 우리가 찾아갈 수 있지 않겠나? 그 분은 자신의 공동체 안으로 오신다. 마태복음28장 20절 보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 ‘너와 항상’이 아니고 ‘너희와 항상’ 너희란 말이 곧 교회고 공동체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마지막에 보면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혼자 다니면서 그러는 말이 아니다. 제자들보고 말씀하고 난 다음에 온 천하에 다니면서 여기도 너희에게 온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떠나지)하라”. 그래서 늘 성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더라. 딱 정해놓고 기다려라. 우리는 정해놓은 자리에서 기다려야한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어야한다. 여기서 주님이 오시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니까 여기있어야 뭘 듣지 나혼자 기도원에서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도마다 다 찾아 다닐려면 어떻게 찾아 다니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되겠느가? 다 자기대로 기도하면서 오라고 하면 어디로 가나? 그건 월인청강곡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달은 아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이것이 개인 보고 한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있다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을 만났다. 함께 있다가 개인적으로 만난게 아니고 단체 안으로 오신 그 분을 만났는데 이것이 축복이다. 나 한 사람 안에 오면 좋겠다 그것이 아니다. 공동체안에 그 분은 오시는 분이다. 자기 나라 안에 영광을 받아도 자기 공동체 안에 받으시지 개인에게 영광을 받을 수 없다.
왜 지금 주님이 안 오고 계시는가?
지금 공동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다. 여기서 박수치고 아멘 할 사람이 있어야지 혼자 가서 아무리 소리 질러도 그 소리 하나가 한 사람이 주님을 환영한다고 해도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나? 그건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목사하고 자기 식구들 두사람하고 둘이 앉아서 하나님 찬양한다고 해봤자 영광이 얼마나 되겠나? 공동체 안에 있어야 그 분이 영광을 받으신다. 구름같이 모여든 허다한 증인들이 너희 앞에 있다.
14장으로 가기 전의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인데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러한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이 말은 개인적으로 한 말이 아니고, “너희는” 이 말이 항상 단체적인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이 떠나야 우리가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이것이 가장 건전하고 정통적인 길이다. 개인이 어느 산에 가서 혼자 만났다는 것은 (뭐 그럴 수는 있겠지만) 정통의 길은 아니다.
정통의 길이란 그가 교회를 통해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만나져야 진짜 정통의 길인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지 않는 곳에 가서 만난 것은 이단이다. 그렇지 않은가? 진짜 정통의 길이 이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사람들이 현혹이 많이 되는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자기들대로 막 계산 하곤 하는데 요한계시록은 어디로 보내진 것인가 하면 일곱 교회에 보내진 책이다. 교회에 보내진 것인데 어디 가서 혼자 봤다고 번개니 구름이니 하니까 문제가 된다. 일곱 교회에 보내진 책인데 일곱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가지고 자기가 사사로이 해석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다.
말세에 무슨 징조를 개인에게 알려 주려고 귀뜸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기가 귀뜸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된 사람을 보면 대부분이 다 자기가 어디가서 남모르는 귀뜸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니 동방번개, 서방번개가 나오는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어떻게 자기 혼자 받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첫 장은 빼버리고 그 뒤에 장(章)만 가지고 편지가 자기한테 왔다고 하며 무식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지만 주님은 이 사람들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고 알고 한 말이기 때문에 “지금은 네가 따라오지 못하지만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하셨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따라야 하고,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이 공동체를 주시고 당신이 임하실 곳을 정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함께 있어야 되고, 모르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고, 모르기 때문에 순종해야 되고, 이것이 인생의 정해진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당하고 당연한 말씀인지! 주님!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 앞서 행하셔서 우리가 뒤따르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