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여름집회
천국과 하나님 나라
7. 그물을 바다에 던져 좋은 것을 취함
<마태복음 13장 47절~50절>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속리산 집회에서 다 끝내지 못한 ‘천국의 비밀’을 조금 더 연장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그물을 바다에 던져서 좋은 것을 골라낸다는 말씀이다.
1. 바다는 세대를 상징함
바다는 성경에서는 세상을 상징한다. ①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땅을 덮은 물이 나오고, ② 출애굽기 1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로놓인 홍해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③ 소아시아 지방, 이스라엘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어서 거기에서 모든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④ 계시록 13장에는 짐승이 거하는 곳이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더라. 짐승은 제왕들을 말한다. 그리고 ⑤ 17장에는 큰 음녀가 물 위에 앉았더라 하는 것이 모두 바다를 이야기한다. 이 바다(세상)라고 말한 이 속에는 ⑥ 어떤 사상, 어떤 내용이 주도하는 한 세대를 가리켜 말한다. 막연한 전체적인 세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가 주도하는 한 세대이다. 지난 7~80년 동안을 모두는 아니지만 공산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던 시대가 있었다. 또 여러 가지 시대가 지나갔다. 그런 시대들은 모두 어떤 내용이 있어서 그 내용이 주도하고 있다. 세상하면 막연한 세상이 아니고, 무엇인가가 주도하고 있다. 자본주의 세상이라고 하면 돈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주도하고 있는 세상은 순수하지 못하다.
2.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음
그래서 거기에 고기들이 살고 있는데 고기들은 좋은 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안 좋은 고기들도 있다. 바다에 가보면, 그물에 올라오는 고기들을 보면 못 먹을 것도 많다. 못 먹을 것들은 다 버리고 먹을 것만 건져서 가는 것이다.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대 속에서 좋은 것을 골라내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천국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처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대 속에서 내가 무엇을 골라내느냐는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좋은 것을 골라내면 그것이 천국이다. 어디라도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골라내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나쁜 것을 골라내느냐, 좋은 것을 골라내느냐는 문제다. 늘 이야기하지만 똑같은 세계 속에서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있다.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골라낸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 골라낸다. 잘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긍정적인 편이 잘 된다. 부정적인 편은 항상 고생하고 잘 안 된다. 세상도 잘 살려면 긍정적이어야 한다.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바꾸어져야 그 다음에 자기 눈에 긍정적인 것이 보인다. 부정적이면 온갖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다 안 좋게 보인다. 그런 사람은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천국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악한 세대 속에서 그 안에 섞여 있는 많은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무엇을 골라내느냐는 문제이니까 좋은 것을 골라내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바다 밑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다 알고 그물을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기가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물을 쳐봤자 고기는 안 걸린다. 물이 탁하고 깊어서 고기가 안 보일 때 고기가 걸리는 것이지 맑아서 고기가 다니는 것이 보이는 곳에서는 고기가 안 잡힌다. 바다 밑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는 고기가 많이 들어있다. 익숙한 어부들은 어디에 그물을 쳐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고기만 걸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가 걸려 들어온다. 불가사리 같은 것들이 걸려 들어오면 아주 골치 아프다. 그런 것들은 다 골라내야 한다. 그런데 불가사리만 붙잡고 한탄하고 있으면 천국이 안 되고 지옥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제주 바다도 불가사리가 너무 많아져서 문제라고 한다. 생태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 생각하면 그물 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놈이 열 개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고기 한 두 마리가 있으면, 그것을 보고 그물을 치는 것이다. 거기서 고기를 건져내는 것은 천국이고, 불가사리나 거두어서 한탄하고 있는 것은 지옥이다. 오늘 우리 현실이다. 우리 현실은 불가사리가 몇 개인지 좋은 고기가 몇 개인지 알 수가 없다. 반반일 수도 있고 불가사리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내 인생, 내 팔자도 마찬가지다. 불가사리가 여덟 개고 두 개 밖에는 고기가 없는 경우도 있고 환경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다. 불가사리가 여덟 개고 고기는 두 마리 밖일지라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고, 고기가 여덟 마리인데 불가사리가 두 마리 때문에 불행한 사람도 있다. 우리 교회생활도 꼭 그렇다. 좋은 것이 많은데 안 좋은 것 한두 가지에 걸려서 끙끙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좋은 것이 있긴 있는데 좋은 것을 못 누리는 것이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들 좋은 것을 보고 왔을 것이다. 오긴 왔는데 그 한두 개 걸리는 것 때문에 인생을 종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인생은 지금 교회생활 뿐이다. 그런데 교회생활에 와서도 행복하지 못하면 종치는 것이다.
천국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다. 누가 불가사리를 먹으라고 했는가? 좋은 것만 먹으면 된다. 걸릴 것만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걸릴 것은 제쳐놓고 먹을 것을 찾으면 천국이다. 천국이 간단하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좋은 고기 따로 걸리고, 나쁜 고기 따로 걸리고 하는 것이 없다. 그물에 보면 서로 다 엉켜서 걸려있다. 그래서 게 같은 것이 한두 마리 걸리면 아주 골치 아픈 것이 그물을 다 뜯어버린다. 우리가 먹기는 좋지만, 게만 전문적으로 잡는 데서는 괜찮은데 고기 잡으려고 쳐 놓았는데 게가 올라오면 아주 골치 아프다.
그물에 걸리는 고기는 구별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거두어들이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무엇이 우리 앞에 있을지 모른다. 그 구별이 없는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속에서 나는 좋은 것을 골라서 사는 것이다.
세상 속은 밭과 마찬가지다. 밀과 가라지가 섞여있다. 그런데 밀을 보니까 농사를 짓지 가라지만 보면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 밀을 보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가라지가 아무리 많더라도 자기가 뿌렸으니까 밀만 보고 추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밀이 잘 되는 밭은 가라지도 잘 된다. 밀이 안 되는 밭은 가라지도 안 된다. 잔디를 키워보면, 흙이 좋으면 잔디가 무성하게 잘 자란다. 그런데 잡초도 아주 잘 자란다. 잔디를 키우려면 땅이 적당하게 나빠야 된다. 그래야 잔디만 살고 다른 것은 못 산다.
좋은 땅에는 좋은 곡식만 나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같이 난다.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다. 좋은 곳에는 나쁜 것도 같이 있다. 대구교회는 천하에 없는 교회지만 이 안에는 안 좋은 것도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같이 자란다.
3. 좋은 것을 골라내어 그릇에
좋은 것을 골라내서 그릇에 담는다.
a. 천국은 그 시대에서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
(그 인격, 그 영만이 기준이 되면 어떤 곳에서도 좋은 것을 골라낼 수 있음)
천국은 그 시대에서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좋은 것은 못 골라내고 매일 안 좋은 것만 보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데 갔다놓아도 지옥이다. 그런데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고를 것인가가 문제다. 무엇이 과연 좋은 것인가? 기준이 있어야 된다. 고기를 보면 먹을 고기와 못 먹을 고기가 있다.
그러면 인생 안에서 거둘 것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우선 보기 좋은 것도 있고 먹기 좋은 것도 있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도 있다. 아담이 동산에서 그 많은 것 중에 탐스러운 것을 골랐다. 다른 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인데, 선악과가 보기에도 좋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무엇이 그 아이에게 좋은가?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따라간다. 게임방이 좋다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게임방에 가려고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지옥이다. 게임방이 재밌는데 우리 엄마는 매일 공부만 하라고 한다가 될 것이다.
b. 천국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그릇에 담는 것
자기 눈에 무엇이 좋은가가 문제인데, 인생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선택을 하면,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그릇에 담으면 그것이 천국이다. 물고기는 내가 보고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야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대에서 내 인생을 위해서 거둘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골라야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도 먹을 수 있고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c.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만족이 되는 인격임(참된 기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 인격을 기준으로 한다는 말이다. 그 인격, 그 영만이 기준이 된다면 어떤 곳에서도 좋은 것을 골라낼 수가 있다. 어떤 기준이 있어야 고를 수 있다. 기준이 없으면 고를 수가 없다. 결혼한 사람들도 기준이 분명하게 있는 사람은 결혼하기 쉽다. 그런데 기준이 애매모호하면 결혼하기 어렵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에 목표가 정해지면 선택하기가 쉬워진다. 나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면 고르기가 쉬워진다. 그런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하려고 하면 고르기가 어렵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드물다. 어느 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다. 어느 한 가지와 내 한 가지가 맞으면 되는 것이다.
인격이 기준이 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격이 기준이 되면 어떤 것도 다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다. 우리가 왜 이것도 소화가 안 되고, 저것도 소화가 안 되었던가? 위장이 나빠서다. 위장이 좋은 사람은 같이 음식을 먹어도 한 사람은 배탈이 나는데, 한 사람은 안 난다. 같이 식중독 균이 있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배탈이 나는 사람만 나지 다 나는 것이 아니다. 식중독 균이 들어가도 단백질로 소화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들어가도 다 영양분이 되고 만다. 그런데 위장이 안 좋은 사람은 조금만 잘못 되어도 배탈이 나고 설사가 나온다.
우리 위장이 어떻게 완전하게 튼튼해지겠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기초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알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기준이 달라지게 될 것이고, 사물을 보는 기준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긍정적이 될 수 있는데, 남이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긍정적이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남이 긍정적인데도 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세상을 기준으로 하는가? 아담을 기준으로 하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기준으로 하는가? 이 문제다. 그 기준으로 하면 세상을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는가? 생명나무를 기준으로 하는가? 그 영을 기준으로 하는가? 이러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천국에 간다고 애를 쓰지만 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어떻게 골라야 천국이 되는지도 모른다. 매일 ‘주여! 주여!’만 하고 있다가 고기를 잡았는데, 무슨 고기인 줄을 모른다. 어느 고기가 하나님도 먹을 수 있고 나도 먹을 수 있는 고기인지 모른다. 고기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고를 수가 없다. 쥐치 같은 고기는 옛날에는 재수 없다고 버린 고기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을 개발해서 쥐포를 만들었다. 그래서 쥐치가 얼마나 인기가 좋아졌는지 모른다. 그 생김새가 눈이 한 가운데 붙어서 참 못 생겼다. 옛날에는 그물에 걸리면 재수 없다고 버린 물고기다. 버리는 것을 누가 이용을 했다. 쥐포를 만들어 놓으니까 먹지 안 그랬으면 먹겠는가? 쥐포를 만들다 보니까 지금은 회로도 먹는다. 먹어보니까 되는 것이다. 쥐치를 누가 살려주었는가? 쥐치의 가치를 안 사람이 살려주었다. 물론 쥐치의 세계에서는 많은 희생을 당하고 있지만 기준이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멍게 같은 것을 옛날에 누가 먹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누가 먹는다는 것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우리나라에는 못 먹을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대로 못 먹을 것이 없고, 바다에 가면 바다 속대로 못 먹을 것이 없다. 왜 그런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곳에 가면 고기도 먹을 것이 몇 개 안 된다. 연어와 같은 고급 어종만 먹지 우리처럼 다른 여러 잡어들은 안 먹는다. 그러니까 해안에 가면 고기가 우글우글하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가서 낚시질을 하면 금방 고기를 잡는다. 사람들이 몇 가지 고기 밖에 안 먹는다. 그것도 가운데 토막만 잘라서 머리와 꼬리는 다 버린다. 우리는 머리도 먹어야 되고 꼬리도 먹어야 되고 다 먹어야 된다.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해서다. 초근목피로 연명을 할 때 배가 고프니까 무엇이든지 먹어보았을 것 아닌가? 먹다가 독초면 죽는 것이고, 안 먹으면 사는 것이다. 봄나물을 보면 산에 가서 아무것이나 막 뜯어온다. 나무에 새싹 나는 것을 뜯어서 봄나물을 만든다. 아주머니들이 그냥 뜯어오는 것 같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런 것은 먹어도 안 죽더라 하는 것만 뜯어온다. 왜 그런 것을 뜯어올 수 있는 지혜가 생겼는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미국 사람들도 가난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풍부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소고기도 그 사람들은 먹는 곳만 먹지, 내장이나 뼈다귀들은 안 먹는다. 우리는 소 한 마리 잡으면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발톱밖에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소고기 문제 파동이 난 것이다. 우리가 뼈다귀를 안 먹으면 상관없다. 내장을 안 먹으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뼈다귀와 내장을 수입해 온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도 먹는데 소고기가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뼈다귀를 먹기 때문에 그 속에 무엇이 들었다는 것이다. 왜 뼈다귀를 먹게 되었는가? 역시 그것도 가난해서다. 소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똥은 거름에 쓰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우리만큼 소고기를 완전하게 100% 먹는 사람들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가난해서 그렇다.
우리 영이 가난하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못 먹는 것은 배불러서 못 먹는 것이다. 십자가에 있는 우리 영은 가난한 영이다. 거기서는 못 먹을 것이 없다. 다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고대 왕실에 앉아서 맛이 있겠는가? 도루묵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어느 임금이 파천을 가서 배고픈 판에 그 고기가 들어오니까 얼마나 맛있겠는가. 잘 먹었는데 환궁한 다음에 그 생각이 났다. 그때 고기가 하도 맛있어서 수어라고 했다. 그런데 환궁한 다음에 가져오라고 해서 먹었더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대궐에서는 좋은 것만 먹으니까 맛이 너무너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루묵이다. 배부르면 좋은 것도 맛이 없고, 배고프면 맛없는 것도 맛이 있다. 시장이 반찬이다. 아마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은 미국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배가 고파봤어야 그런 것을 안다. 우리는 배가 고파보았으니까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을 안다. 요즘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다 배부르게 사니까.
그리스도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영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감사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소화가 된다. 아주 배고플 때 먹으면 체하지도 않는다. 배부를 때 누워서 잘못 먹다보니까 걸리는 것이지 배고파서 먹는데, 생리적으로 욕구가 있는데 걸리겠는가? 안 걸린다.
그리스도의 인격!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나신 그 영만이 기준이 된다면 우리 인생은 살기가 너무나 편하고 모든 것이 풍부하다. 먹을 것이 많으니까 풍부하다. 많이 차려놓아도 반찬이 이렇게 없는가 하면 가난한 것이고, 김치만 있어도 이렇게 맛있는 김치가 있는가 하면 배부른 것이다. 인생은 별거 아니다. 불평과 불만 속에 있을 때는 내가 배불러서 그렇다. 혹시 이런 말을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하면 배불러서 그렇다. 아주 정말 배고프면 그런 생각이 안 난다.
우리 인생을 가장 배고프게 한 자리는 십자가다. 거기가면 우리는 다 배고픈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흙에 불과한 사람, 산 혼이니까 자기는 생명이 없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거기서는 더 이상 가난할 수가 없다. 흥부가 아무리 가난했어도 그보다 가난할 수는 없었다. 흥부는 그래도 밥풀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었지 십자가에 못 박힌 인생은 그것도 안 주면 못 먹는다.
어떤 것에서도 좋은 것을 골라낼 수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공히 함께 만족을 주는 양식이다. 우리는 그 양식을 먹으면 우리 인생이 충족되게 되고, 하나님도 그 양식을 먹으면 만족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먹고 산다. 인생을 먹고 사는데 배부른 돼지만을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배고픈 그리스도를 먹어야 산다. 그래서 순수 식품을 먹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순수 식품만 먹는다. 토종만 먹는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능금이라고 조그마한 것인데, 지금은 커졌다. 하나님은 커진 사과를 먹는 것이 아니고 능금을 먹는다는 말이다.
인생은 모두 이것을 키워서 먹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 종자를 아시니까 요만한 것을 먹는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전혀 부풀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양식을 찾고 있다. 그런 양식이 있어야 만족한다. 사람도 사실은 그 양식이 있어야 만족이 된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에게 함께 만족이 되는 양식이다. 소제(素祭)라는 것이 있는데, 밀가루로 만든 제사다. 그것은 하나님도 먹고 사람도 먹는 그런 양식이다. 소제의 素자는 소박하다는 素자다. 아주 소박한 제사라는 뜻이다. 고기로 드리는 것은 풍성하지만 이것은 소박하다. 가난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가난한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지금 너무 살찐 돼지를 먹고 산다. 그래서 병이 많다.
4. 한 시대는 좋은 것을 골라냄으로 종결됨
한 세대는 좋은 것을 골라냄으로써 종결된다. 언제 그 시대가 종결될 것인가? 성경에 보면 ‘말세, 세상 끝’ 이런 말이 많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주판으로 계산하려고, 컴퓨터로 계산해서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추수가 끝나야 된다. 추수는 하루 더 늦춰질 수도 있고, 하루 더 빨라질 수도 있다. 기후가 변동됨에 따라서 가을에 일찍 추수하는 경우도 있고, 늦게 추수하는 경우도 있다. 추수가 끝나야 모든 것이 끝난다.
a. 밀을 추수하면 가라지는 끝이 남
밀을 추수하고 나면 가라지가 끝난다. 가라지는 더 이상 소용이 없다. 방해하고 싶어도 방해할 것이 없다. 밀이 추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이 모아지고 나면 사탄은 할 일이 없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사탄은 우리에게서 끝난다. 이것은 세대가 끝나는 일이다.
b. 인격을 추수하면 다른 것들은 다 끝이 남
인격을 추수하고 나면 다른 것은 다 끝이 난다. 내가 참 인격을 보고 나면, 추수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다 끝이 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모든 것들이 끝이 나버린다. 완전한 추수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추수가 되는가? 그 인격을 추수할 때 비로소 추수가 된다. 이 인격을 추수할 때 비로소 만족이 된다. 참 만족이 되니까 다른 것들은 끝이 난다. 참 만족이 안 되면 계속 모든 것이 다 중요해진다. 그런데 한 가지로, 하나로 완전하게 만족하면 다른 것들은 다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가치가 가벼워진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신적인 모든 것, 문화적인 모든 것들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자기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듯이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리고 있어도 아담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의 세대는 언제 끝날 것인가? 이 인격을 추수할 때 끝이 난다. 아담의 두려움은 언제 끝나는가? 인생의 두려움은 언제 끝나는가? 그 깊은 심층심리 속에 들어있는 불안은 언제 끝날 것인가? 인격을 추수하면 끝난다. 불안이 하나의 세대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불변하는 모든 세대를 다 관통하고 있는 그런 인간 정신이다. 어느 시대라도 마찬가지로 있는 아담의 두려움의 세대가 나에게서 끝난다.
가인과 아벨의 종교가 있다. 종교는 최초로 가인과 아벨에게서 시작된다. 종교란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결국은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이것이 종교의 시작이고 종교의 정체다. 종교가 있는 곳에서는 모두 사람을 죽였다. 더욱 종교적일수록 더욱 많은 사람을 죽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도 종교라고 하고 불교도 종교라고 하는데, 사실은 유교도 종교가 아니고 불교도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철학이다. 유교는 도덕이다. 알고 보면 종교가 아니다. 거기서는 종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없다. 인도에서는 이단이라고 처형하는 법이 없다. 중국에서도 이단이라고 처형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같은 공자냐 맹자냐 하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틀리면 이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죽였다.
종교화 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예수님은 종교화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예수를 가지고 종교를 만들어버렸다. 사람을 원위치로 회복시키려고 왔는데,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려고 왔는데, 종교를 만들어버렸다. 기독교는 언제 종교로서 세상에 부각되었는가? 콘스탄틴 황제 때 완전한 종교가 되었다. 그 황제는 무력으로 세계를 통일하고 세상을 지배했지만, 종교지배가 안 되는 것이다. 각 민족마다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각기 자기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유일한 신이어야 되는데, 각 민족마다 자기 신이 따로 있으니까 황제가 절대적인 위치를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의 제국에 하나의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기독교다. 캐톨릭이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수없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거기에 따라오지 않는 사람, 이교도들, 거기에 따라오지 않는 이단들, 이런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어야 되었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의 종교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계속 그럴 수밖에 없다. 종교의 성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라멕의 폭력, 네피림의 자만, 이런 것이 전부 세대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폭력의 세대, 폭력이 지배하는 세대, 자만이 지배하는 세대, 인간의 영광이 지배하는 세대, 이런 것들이 모두 인간의 세대를 주도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런 세대들이 언제 끝날 것인가? 우리가 인격을 추수하면 끝이 난다.
c. 의인을 추수하면 악인은 끝남
의인들을 추수하면 악인들은 끝날 것이다. 성경은 세상 끝 날에는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을 추수하면 악인들을 불에 던질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결국 의인들은 누구인가? 인격이다. 이 인격을 추수하면 선악으로 만들어진 지식도 끝나고 문화도 끝나고, 아담의 두려움도 끝나고, 가인과 아벨의 종교도 끝나고, 라멕의 폭력시대도 끝나고, 네피림의 자만도 끝나고, 바벨의 영광도 끝난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이라고 해도 세상의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이 달라지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이 바꾸어진다고 하면 세상의 외형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내용이 바꾸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전부 세대를 주도하고 있다. 또 개인을 주고하고 있고, 우리 인생을 주도하고 있고, 심지어는 교회들도 여기 휘말려 들어가 있다.
언제 이런 것들이 끝이 날 것인가? 인격을 추수하면 끝난다. 어디에서 폭력이 일어났다. 정치적 폭력이 일어났다. 그것은 라멕의 폭력의 후손들이다. 어디서 자만이 일어났다. 그것은 네피림의 자만의 후손들이다. 처음 한 것이 아니다. 전부 해왔던 일들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세대를 주도하고 있다. 인간의 영광을 자랑한다. 그것은 바벨의 영광이다. 의인들을 추수하면 악인들이 끝날 것이다.
천국은 한 세대에서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다.
① 섞임에서 구별해 내는 것이다. 깊은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잡아낸 고기를 밖으로 나와서 구별해 내는 것이다. 빛이 있는 곳에 와서 구별하는 것이다. 캄캄한 밤에는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다. 밤에 장어 낚시를 한다. 그러면 아주 고약한 것이 있는데, 꼼장어가 걸리면 아주 골치 아프게 된다. 다른 고기들은 톡톡톡 무니까 고기가 문 것을 아는데, 이놈은 무는지 안 무는지 모르는데, 건져보면 똘똘 말아진 뱀 같은 것이 걸려 나온다. 보기에는 징그럽지만 이것은 낚시를 얼마나 깊게 삼켜버리는지 막창까지 다 들어가 버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뽑아낼 수가 없어 낚시를 자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가 몸에는 아주 끈적끈적한 풀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이 온 낚시를 다 버려버린다. 손으로 만지면 손을 다 버린다. 이러니까 밤에 이것이 걸려놓으면 완전히 기분을 잡치는 것이다. 깜깜한 밤에는 모른다. 이런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이 모두 고기다. 그것만 있다고 하면 누가 가겠는가? 다른 것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다. 요즘에는 꼼장어를 어떻게 잡는지 많이 잡아다가 선술집에서 판다. 굽는데 보면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면 얼마나 질긴지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 못 먹는다.
② 악에서 선을 골라내는 것이다.
③ 불의에서 의를 골라내는 것이다.
④ 지식에서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에서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다. 성경의 지식에서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다. 성경은 문서다. 기록되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다. 생명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천국이다. 그런데 생명을 못 찾아내고 교리를 찾아내면 사망이다. 그래서 교리를 찾아내는 사람들은 성경주의가 된다. 그러면 자기도 못살지만 남도 죽인다. 안식일에 왜 병을 고치느냐? 이것은 성경주의자들의 말이다. 성경에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미 그대로 왔을 때는 성경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병을 고치느냐는 것이다. 성경대로는 맞다. 교리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 교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못 된다. 옳기는 옳지만, 아무리 옳아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말이 많다. 하지만 그 삼위일체 교리가 완벽하다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없다. 그 교리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드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정확하게 알아도 완전하지가 않다. 그 결론은 결국 하나님의 비밀이니까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알 수가 없다. 믿음으로 보라고 해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할 것이 안 된다. 네가 맞느냐 내가 맞느냐 할 수가 없다. 그 자체가 완전한 이론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완전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데, 자체가 이미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고 선포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옳으니 그르니 한다. 다 알면 그런 소리 못한다.
지식에서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 천국이다. 똑같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내가 일한다. 그러면 교조주의 즉 교리적인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도 교리 안에 갇혀야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고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해놓은 성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만일 고쳤다고 하면 하나님을 죽여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쳤더니 너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면 죽어야 된다. 예수님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면 내 아버지도 안식일에 일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일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하지 않느냐? 할례는 꼭 낳은지 8일 만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해야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인가? 안식일에 할례 하면서도 안식일에 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다.
지식에서 생명을 골라내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지식은 쉽다. 지식은 배우면 된다.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교리는 배우면 되는 것이다. 배웠으니까 가르칠 수 있다. 선생님이 되는 것이 내가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내가 배운 대로 또 가르치는 것이 선생이다. 생명을 골라내는 것이 다르다. 생명을 골라내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⑤ 자기 의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의 밖에는 모른다. 그런데 자기 의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로마서에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 아들에게 주신 그 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그 의,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를 알면 불안해지게 된다. 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것은 자기 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자기 의를 기준으로 볼 때 나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불완전하니까 자기가 진짜로 불완전하다. 그러면 결국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의를 알면 천국에 들어갈 것인데.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다. 부모가 준비한 것 때문에 자녀가 공부를 했다. 사실은 자기가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의보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자기 의를 알면 지옥이고, 하나님의 의를 깨달으면 천국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준비하셔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죽어야 할 나를 예수의 십자가 안에 포함시켜서 나를 거기서 죽게 했구나. 끝나게 하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나를 부활시켰구나. 이 하나님의 의를 깨달으면 내가 천국이 된다. 이것을 못 깨달으면 천국이 안 된다. 자기의 의만 내세우고 사는 사람이 된다.
⑥ 자기 필요에서 하나님의 필요를 깨달으면 천국이 된다. 인간의 필요는 끝이 없다. 인간의 필요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끝이 안 난다. 인간의 필요를 찾다가 결국 사람은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필요가 딱 정해져 있으면 간단한데, 찾아가면서 계속 필요가 증가한다. 내가 초가집에 살 때의 필요가 있고, 아파트에 살 때의 필요가 있고, 필요가 따로 생긴다. 없던 것이 생긴다. 내가 더 나아지면 나아진 만큼 필요도 그만큼 증가한다. 살이 찌면 찐 것만큼 더 많이 먹어야 된다. 나는 옛날에 배가 많이 나오고 살찐 사람들은 굶어도 괜찮은 줄 알았다. 자기 몸에 저축된 것이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도 다 세포들인데 이놈들이 다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지방이 많아졌다는 말은 식구가 많아졌다는 말이다. 식구가 많으니까 양식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뚱뚱한 사람은 조금만 많이 먹어도 금방 어지럽다느니 쓰러진다느니 한다. 빼빼한 사람이 그럴 것 같은데, 반대로 뚱뚱한 사람이 더 못 견딘다. 식구가 많은 가장이 되다 보니까 그렇다. 다이어트 하는 것은 식구를 줄이는 것이다. 입을 줄이는 것이다.
자기 필요는 꼭 그와 같다. 계속 늘어날수록 그만큼 필요도 같이 늘어난다. 우리가 걸어 다녔을 때 휘발유 문제가 있었는가? 30리, 40리씩 보통 다 걸어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차로 다니니까 휘발유 값이 올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때 사람들은 휘발유 값이 문제가 안 된다. 만원이 가든지 10만원이 가든지 문제가 안 된다. 걸어 다니는데 휘발유가 필요하겠는가? 사람의 필요는 끝이 없다. 필요가 있으면 편리하게는 해준다. 차를 타면 편리하기는 편리하다. 걷기가 싫고 편리하기는 하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걸어 다닐 때와 차를 타고 다닐 때, 차를 타고 다닐 때가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가 더 편리하기는 하지만 더욱 행복하지는 않다.
필요는 아무리 채워도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필요를 깨달으면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필요는 그분의 목적과 계획과 갈망이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이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보다 복되게 하는 일은 없다. 그분의 계획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 짜여졌다.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짜여졌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짜 있다. 이렇게 신성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내 인생이 행복한 것이다. 남들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데 내 필요를 찾다가 죽을 사람인데, 신성한 목적이 있다, 신성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행복하다. 행복이 다른데 있지 않다. 대구 교회에 나와도 이 목적과 계획을 모르면 행복할 수가 없다. 대구교회에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필요를 깨달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필요 안에 내 인생은 이렇게 복된 인생이구나. 하나님의 갈망을 우리가 알면 복되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갈망하고 있구나.
나는 옛날에 물론 종교 생활을 해왔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이 참 문제였다. 항상 안정이 안 되고 불안한 것은 내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내면적인 갈등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채우려고 해도 안 채워진다. 하루 종일 하나님만 생각하려니까 그것도 안 된다. 그렇게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안 된다. 그렇다고 기도만 하고 앉아있을 수도 없고, 금식하면 영이 맑아진다고 금식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도저히 나로서는 안 된다. 그래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겠는가. 아 그렇구나. 바울도 이런 말을 했으니까 내가 이정도 온 것은 상당히 내가 수준이 높은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위했다. 이것도 모르는 기독교인도 많은데 이렇게까지 내가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아주 지성적인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항상 속에서 불안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불안전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갈망을 알고 나니까 이것이 싹 사라지는 것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흠과 주름잡힌 것이나 티가 없게 하려 하신다. 나는 내 기준으로 무엇인가 완전해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앞서서 자기의 기준을 놓고 나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고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내 인생의 문제가 싹 해결되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 때 흙탕칠을 하고 노는 것이 재미있다. 아이들은 제일 재밌는 것이 무엇인가? 흙탕칠하고 노는 것이 제일 재밌는 것이다. 옷이 젖든가 말든가 그것은 상관이 없다. 진흙탕에서 구르면 제일 재밌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걱정을 하는가? 어린아이가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걱정을 한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집에 들어오면 집안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안에 들어오기 전에 문 밖에서 씻어야 되는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문제를 갖고 있지 자식은 전혀 모른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선악과를 먹었다.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니까 놀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한다. 놀라고 하니 씻어야 되겠고, 씻으려고 하니 놀고 싶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한다. 그래서 갈등을 느끼는데,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 없게 하려 하신다. 왜 그런가? 그분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과 같이 살 사람은, 그분의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될 사람은 그분의 수준에 맞아야 되는 것이다. 길거리에 있는 거지를 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집으로 데려올 수는 있다. 구제할 수는 있다. 돈을 주고 갈 수는 있다. 그것은 자비심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마음으로 만원 한 장 주고 갈 수도 있고 더하면 10만원도 주고 갈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이 살려면 그 상태로는 못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이 거지생활을 하던 그 상태로는 살 수가 없다. 거지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이 살 수가 없다. 거지의 습성을 가진 사람은 발도 씻지 않고 손도 씻지 않는다. 세상에 편한 것이 거지라고 한다. 누가 발 씻으라고 할 사람이 있나, 손 씻으라고 할 사람이 있나, 세수하라고 할 사람이 있나, 옷 갈아입으라고 할 사람이 있나,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 완전 자유다. 고아원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길바닥에서 노숙을 한다고 하면 정부에서 데려다가 합숙소에 넣어놓는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노숙하는 것 보다 낫다. 그런데 며칠 못 있고 다시 나가버린다. 합숙소에 가니까 매일 이래라 저래라, 몇 시에 일어나라, 밥 먹어라, 발 닦아라, 매일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간섭이 싫어서 다시 나가단고 한다. 길바닥에 자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런 습성을 가진 여자를 데려다가 어떻게 살겠는가?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자기가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자기 앞에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자기가 살려니까. 그것이 사랑이다. 자비는 불쌍하니까 돈을 주고 가는 것이 자비고, 그것을 데려다가 씻기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을 내가 몰랐던 것이다. 내가 씻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씻지도 못하고 안 씻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씻는 것은 그분이 하시는 것이구나. 나는 그분의 집의 환경도 모르고 그분의 수준도 모르고 그분의 취미도 모르고 취향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어떻게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겠는가? 그러나 주인은 알기 때문에 주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가 알기 때문에 자기 좋아하는 대로 만들 것이다. 자기 취향에 맞는 대로 만들 것이다. 나는 항상 빨간색 옷 입기를 좋아하여 빨간색 옷이 왜 없는가 하고 한탄했는데, 그분은 빨간색을 싫어한다. 그분이 흰색을 좋아한다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내 문제가 없어져 버렸다. 빨간색에 대한 문제가 없어졌다. 그분이 흰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팔자가 확 바꿔진다. 모든 것이 주인에 따라서 바꿔진다. 그것을 내가 몰랐다. 모르니까 고민을 했다.
이 우주적인 문제를,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는 것은 우주적인 계획이다. 이 엄청난 계획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나의 좁은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했다. 그것을 알고 나니까 내가 손이 탁 놓여지면서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구나. 그분이 알아서 해야 그분의 마음에 맞지 내가 아무리 마음에 맞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분에게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른다. 내가 누구에게 선물을 할 때 나는 이것이 참 좋다고 생각하고 빨간 볼펜을 선물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빨간 볼펜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까만 볼펜이 필요한 사람이다. 똑같은 것을 주었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선물을 받으면서도 빨간 볼펜이 또 들어왔네 할 것이다. 기왕이면 검은 것을 가져오지 할 것이다. 누구에게 선물을 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물어보는 것이 실례되는 것 같아도 선물을 하려면 물어보는 것이 더 좋다. 빨간 것이 많이 있는 사람에게 빨간 것을 또 주면 안 된다. 검을 것을 주어야 감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것을 물어보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다 모른다. 성경에 쓰여있는 것은 교리적이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대할 때 다 개인적으로 대한다. 일률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 개인적이다. 우리가 사람을 대해도 다 개인적인 관계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는 흰 것을 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빨간 것을 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빨간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필요, 우리의 목적, 우리의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분의 목적, 그분의 계획, 그분의 갈망만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은 또 그렇게 맞추어져야 한다. 어떤 분인데 그분에게 안 맞추고 살겠는가? 그분 성질이 보통 성질이 아니지 않은가! 성질 안 맞추고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좋으나 싫으나 결국은 맞추어야 된다. 결국은 맞추어야 될 것이라면 우리가 그분에게 맡기고, 그분이 하는 것이 맞다. 그러면 같은 돈을 써도 훨씬 가치가 있게 쓸 수가 있다. 같은 인생을 내놓아도 훨씬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자기 필요를 찾다가 죽을 인생인데, 하나님의 필요를 깨닫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필요와 갈망에 맞는 사람이 된다면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 거기서 부활한 그 영이다.
⑦ 우리는 만유 속에서 인격을 찾는 것이다. 인격을 골라내면 바로 그것이 천국이다. 천국이 다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많은 교리가 있다. 성경에 많은 말이 있다. 많은 계명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계명을 다 알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속에서 인격을 찾아내면 행복하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자로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서 의를 찾는구나. 이 사람들은 결국 성경에서 그 인격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만 찾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 공부한다고 하는 곳에 가보면 얼마나 다른 것을 공부하고 있는지, 아무 소용없는 것만 공부하고 있다. 교리적인 지식만 가득 차 있다. 거기에 신학적인 지식마저 차 있으면 더 골치 아프게 된다.
인격을 골라내야 천국이다. 천국은 이 인격의 가치, 우리가 전에 보았던 대로 밭에 묻힌 보화, 세상에 숨겨져 있는 진주, 그리고 여기 그물에 걸려온 좋은 것, 이것이 바로 천국의 가치인데 이 가치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 인격에 있다. 그 인격은 밭에 묻힌 보화다. 세상에 숨겨진 진주이고, 그물에 걸려온 좋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격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인격으로 조성된다. 만유는 이 인격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인격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10장 17절에 보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들이 완고하기 때문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생각지를 못한다고 한다.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만 내가 말하는 것이다. ‘왜 비유를 말씀하십니까?’ 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다. ‘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했더니 하는 말이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만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데,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리라. 무릇 있는 자란 누구인가? 이 천국을 골라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있는 사람이다. 천국을 골라내기 시작하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있는 사람이다. 천국을 골라내지 못하면 배고프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리를 먹고 배가 부르겠는가? 신학을 먹고 배가 부르겠는가? 지식을 먹고 배가 부르겠는가? 그런 것들은 우리를 배부르게 할 수가 없다. 우리를 부유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가 추수하면 부유해진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더 넉넉하게 된다. 이 인격은 처음에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인격이지만 이것은 무한한 보화다.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겨자씨가 적지만 큰 나무가 되듯이, 조그마한 누룩이 온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이것이 적지만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모른다. 원자가 커서 폭발력이 큰 것이 아니다. 아주 적은 것인데, 지극히 적으니까 폭발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지극히 적은데 크게 폭발했다. 지금도 계속 폭발하고 있다. 활화산처럼 지금도 타고 있다. 인류는 이 인격이 필요하다. 있는 자는 받아서 넉넉하게 되고 점점 더 있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오면 점점 더 있게 된다. 점점 더 부유하게 된다. 세상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보면 껍데기뿐이다. 추수할 것이 없다. 알맹이가 전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인격 안에는 오는 것마다 다 양식이다. 왜? 그가 참된 기준이 되니까 참된 소화력이 되고 참된 생명이 되니까 무엇이든지 다 재물이 된다. 무엇이든지 다 보물이 되는 것이다. 밭에 묻힌 보화! 밭은 형편없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세상에 감추어진 진주!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진주가 감추어져 있다. 바다 속에는 껌껌하지만 그 안에는 좋은 것이 들어있다. 이것을 골라내는 것이 천국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천국의 비밀을 저희에게 열어서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게 하시고 세상에 숨겨진 진주를 구하게 하시며 바다에서 건져온 고기 중에 좋은 것을 골라낼 수 있는 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지극히 가난하심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너무 낮아짐으로 우리를 높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죽임 당함으로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기준이 된 모든 것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받으면 받을수록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합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의 기준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이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